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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예수, 쉼을 주시는 분(질문, 대답, 설명) 01/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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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1-22 01:37 조회6,2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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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예수, 쉼을 주시는 분

(1월 2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52분)

 

연구 범위: 창 15:13~21, 히 3:12~19, 히 4:6~11, 히 4: 1, 3, 5, 10, 신 5:12~15, 히 4:8~11

기억절: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히브리서 1장과 2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통치자 그리고 해방자로 즉위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우리에게 쉼을 주실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 이런 전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다윗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왕과, 그들의 원수로부터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잘 이해할 수 있다(삼하 7:10, 1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쉼을 하나님께 속한 쉼과 안식일의 쉼, 이렇게 두 가지로 묘사한다(히 4:1~11).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했던 쉼을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셨다. 첫 번째 안식일은 완전을 가능케 하신 분과 함께 완전을 경험하는 날이었다. 참된 안식일 준수는 그 완전을 회복시켜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쉼을 약속하신다.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십자가에서 세상을 구속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완벽한 준비를 해 놓으셨음을 기억하게 된다. 참된 안식일 준수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처음 창조되던 때를 기억하게 할 뿐 아니라,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미리 맛보게 해 준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된 안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지 깨닫는다.

- 느끼기

나의 일을 그치고 예수님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 행하기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으로의 초청에 지체함 없이 반응하여 영원한 안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TMI 위로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출 8:1, 시 105:43~45)

※ 참된 쉼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또 그것을 만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쉼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히 3:12~19)

※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4.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갖는 중요성은 무엇입니까?(히 3:15, 4:7)

※ 사람들은 오늘만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 결단해야 한다.

5.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히 4:9~11)

※ 믿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6. 히브리서 4:8~11에 나타난 안식일의 쉼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 미래의 영원한 나라의 안식을 강조한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식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하나님의 초청에 지체함 없이 응답할 때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서 지키는 안식일을 통해 미래에 경험하게 될 안식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1월 23일(일) 쉼의 장소로서의 땅

 

 창세기 15:13~21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때, 그분의 계획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고 순종할 수 있는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출 8:1, 시 105:43~45). 그 계획에는 바로가 금지했던 안식일의 쉼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출 5:5).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산이었다(창 11:31~1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소유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셨던 것이었다(출 19: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누리면서, 온 세상에 참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를 알릴 수 있는 땅에서 살기를 원하셨다. 마치 창조 때의 안식일처럼,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구속자와 친밀한 관계를 나누며,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도록 허락된 공간이었다.

 신명기 12:1~14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단순히 그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쉼을 누리게 될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있는 우상들을 모두 몰아냈을 때 쉼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장소를 보여 주실 것이었다.

 

 출애굽기 20:8~11과 신명기 5:12~15을 읽어 보라. 안식일의 쉼은 어떤 두 가지를 기념하는 날이며, 그 둘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신5:12~15]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답: 창조하신 일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일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의 안식일을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에 연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창조의 기념일과 애굽으로부터의 구속의 기념일로서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창조와 구원 두 가지 모두가 안식일 계명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우리는 쉼을 통해 우리의 존재뿐만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안식일 준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강력한 표시이다.

 

<묵상>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존재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나요?

 

답: 안식일의 안식은 창조와 구원에 관하셔서는 우리가 스스로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쉼이다. 

 

<부가설명> 생명은 몸을 통하여 기능한다. 생명이 기운으로만 있으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그 생명의 기운에 의하여 하나님이 형상을 나타내는 생령이 되었다. 그처럼 사람이 활동하려면 땅이 필요하다. 일을 해도, 쉬어도 역시 장소라는 땅이 필요하다. 새들도 쉬려면 날면서 쉬지 못한다. 나무나 땅에 내려앉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방해 없이 쉴 곳을 마련하셨다. 그것이 가나안 땅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온 세상에 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생명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였다. 교과 저자는 일요일 설명어서 안식일의 쉼의 창조적 구원적 복음적 의미를 아주 밝이 설명했다. 창조와 구원은 사람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백하는 믿음이 쉬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에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복음적 의미를 바르게 깨닫는다면 안식일의 쉼을 즐겁고 기쁘게 찬양과 감사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 얼마난 감사한 일인가? 창조와 구원에 관하여서는 너희가 쉬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는 기별을 강하게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이니 너희는 받아누리기만 하면 된다(사45:8). 아멘.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누리며 온 세상에 참된 하나님을 알리도록 약속의 땅을 허락하셨다. 

 

 

1월 24일(월) 믿지 아니하므로

 

 히브리서 3:12~19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이 약속된 쉼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히3:12~19]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답: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종하지도 않았다.

 

 슬프게도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쉼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경계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믿음이 부족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했다고(민 13:32) 기록한다. 그들은 그 땅이 분명 좋은 땅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 땅에 거하는 자들이 강하고 성들은 튼튼하여 그들이 결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호수아와 갈렙 또한 그 땅이 좋은 곳이라고 보고했으며 그곳에 거하는 자들과 성들이 강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했다(민 14:7~9). 그러나 재앙들을 내려 애굽을 무너뜨리셨고(출 7~12장),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전멸시키셨으며(출 14장), 하늘에서 내리는 음식으로 그들을 먹이시고(출 16장), 반석에서 물을 내셨을 뿐만 아니라(출 17장), 구름 기둥으로 그들과 항상 함께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목격한 백성들이(출 40:36~38) 그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그 세대가 믿음 없는 자들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아이러니인가!(느 9:15~17, 시 106:24~26, 고전 10:5~1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인간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선물들을 약속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4:2은 이스라엘이 받은 약속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라고 이야기한다.

 

<묵상>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하늘을 향해 전진하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답: 믿음으로 나타나는 순종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경계까지 한 백성으로 여행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그들의 기대와 상반되는 보고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믿음 없는 자들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 믿음을 갖는 것이나 갖지 않는 것 모두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독자들에게 “피차 권면하고”(히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히 12:15) 하라고 권면한다.

 

<부가설명>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뿐만 아니다. 사람 사이도 내가 믿고 싶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상대방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믿고 싶어도 상대가 믿도록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 문제는 상대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항상 제시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그들은 10재앙을 봤고 그것이 이스라엘이 사는 지역에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봤다. 유월절 행사를 시키는 대로 했을 때 그들 집에 장자는 아무도 죽지 않은 것도 체험했다. 애굽 군대가 따라왔을 때 홍해를 건느는 경험도 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증명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런데도 믿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으니 이런 상태로 믿는 것은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신자들의 몫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7~29).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16:10)라고 하셔서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 의와 관련되었다고 하셔서, 승천하신 후에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넌지시 가르쳐주셨다. 베드로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진정한 믿음으로 살자.

 

<교훈>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과 인도하심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믿지 않기로 선택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월 25일(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브리서 4:4~8을 읽어 보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연관하여 “오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히4:4~8]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답: 사람들에게 허락된 날이 ‘오늘’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오늘 경정해야 한다.

 

 광야 세대의 불신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안식에 들어가라고 권고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완고히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다”(히 4:1, 6, 9)고 이야기한다. 그는 헬라어 동사 카탈레이포(kataleipo)와 아폴레이포(apoleipo)를 사용면서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히 4:1)고 강조한다. 다윗의 때에도 이 안식에 들어가라는 초청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은(히 4:6, 7, 시 95편 인용함) 그 약속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유효함을 뜻한다. 바울은, 참된 안식일의 쉼이 창조 때부터 허락되었다고 이야기한다(히 4:3, 4).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안식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신다. “오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모세가 약속의 땅 경계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갱신하였을 때도 그는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신 5:3, 비교, 신 4:8, 6:6). 그 순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인정하며(신 11:2~7)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해야 하는 때였다(신 5:1~3). 마찬가지로, 여호수아 또한 그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라고 호소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그래왔듯이, “오늘”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결심의 때,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때이다(참조, 고후 6:2). “오늘”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다섯 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히 3:7, 15, 4: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은 불순종과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행동은 마치 광야 세대가 지상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지연시켰던 것처럼 우리가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을 지연시킬 수 있다.

 

<묵상>

고린도후서 6장 1~2절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후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답: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멸하시고(히 2:14~16) 새 언약을 허락하셨다(히 8~10장).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 4:14~16). “오늘”이라는 호소는 하나님께서 지금껏 우리에게 신실하셨으며 그분의 초청에 지체함 없이 즉시 응답해야 할 이유를 주셨음을 인정하도록 초청한다.

 

<부가설명> 히3:13은 사람은 오늘이라는 매일을 산다고 단정했다. 예수님도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하셨다. 또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다. 만나도 하루 치씩만 거두게 하셨다. 이런 모든 계시는 사람은 하루만 산다고 하신 것과 같다. 어제는 이미 지난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아니한 오늘이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오늘만 산다. 성경은 이것을 잘 가르쳐준다. 사람들은 미래를 위하여 계획한다. 그래야 하지만 그 미래는 계획하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 오늘일 수도 있다. 그것을 가르쳐준 이야기가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다. 그가 추수를 많이 해서 쌓을 곳이 없도록 거두게 되자 창고를 느리고 먹고 마시고 잘 지내자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오늘밤에 네 생명을 도로 찾으면 네 준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다(잠27:1). 야고보도 그렇게 권고했다(약4:13,14). 모세는 날 계수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기도했다(시90:12). 오늘, 바로 오늘 지금 우리는 구원을 확실하게 하자. 안식에 들어가도록 믿음을 굳게 하기를 간구하다. 믿음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의 안식으로의 초청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가기 전에 즉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해야 한다.

 

 

1월 26일(수) 그분의 안식에 들어감

 

 히브리서 3:11, 4:1, 3, 5, 10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안식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계시는가?

[히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히4:1,3,5,10]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답: 옛날 광야의 유대인은 들어오지 못한다 하셨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쉬심과 같이 쉰다.

 

 출애굽기 20:8~11에 있는 안식일 계명과 모세가 이를 다시 기록한 신명기 5:12~15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초청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돌비에 기록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기억하게 한다(출 31:18, 34:28).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기억한다는 관점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외치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실 죄로부터의 최종적인 구원을 가리켰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갑절이나 축복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히브리서 4:9~11, 16을 읽어 보라. 우리는 무엇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히4:9~11,16]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답: 제7일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 같이 자기의 일을 쉬고 악한 본에 빠지지 말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안식일의 쉼은 하나님께서 창조(창 2:1~3, 출 20:8~11)와 구속(신 5:12~15) 사역을 완성하신 사실을 기념한다. 마찬가지로, 하늘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즉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온전한 희생이 완성된 것을 기념한다(히 10:12~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리(福利)를 완성하신 후에야 비로소 안식하시는 분이심을 주목해 보라. 창조의 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신 후에 쉬셨다. 훗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승리를 통해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정복이 마무리되고 이스라엘이 “평안히 살”게 되었을 때 성전에서 쉬셨다(왕상 4:21~25, 비교, 출 15:18~21, 신 11:24, 삼하 8:1~14) . 이스라엘과 그 왕이 그들 자신을 위한 집을 마련한 후에 하나님 자신을 위한 집을 짓도록 하신 것이다.

 

<묵상>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 사람은 스스로 생명과 존재와 생활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런 것은 오직 창조주께서만 하신다는 것을 시인할 때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구원의 대장 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족함에 집중함으로 영적 불안감 속에 살아갑니다. 이런 불안감은 구원을 얻기 위해 나 스스로가 뭔가를 더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고 이는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쉼과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빌 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안 가운데 거하며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으켜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야 합니다.     

 

<부가설명> 창조주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계획한 일을 마 마쳤을 때이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의 창조를 마쳤을 때 창조의 마지막 부분을 마치셨다. 그리고 쉬셨다. 나는 사람이 사는 태양계의 창조를 끝내실 때마다 안식을 제정하시고 쉬셨다고 믿는다. 그 창조주 주기는 똑 같이 7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지구의 안식일은 다른 세계에도 안식일이라고 믿는다. 온 우주 사람이 사는 세계는 동일한 날에 창조주를 경배할 것이다. 아무리 외로운 섬이나 산골짝에 혼자 예수님을 믿고 안식일을 지켜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온 우주 거민의 예배에 동참하는 대단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예수님은 구속의 희생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숨을 거두시고 제7일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다. 구속의 희생을 다 하셨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 부활의 생명으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역시 창조의 첫째 날과 같은 날이었다. 그래서 창조와 구원의 기념으로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다. 창조와 구원에 관한 한 사람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뿐만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전적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생명을 이어가는 양식을 위하여서도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만나 내리시는 것으로 교육하셨다. 피조물인 사람은 오직 창조주를 힘입어 살며, 활동하며 존재한다는 것을(행17:28) 믿는 믿음이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고백하게 해 놓으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이루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  

 

 

1월 27일(목) 새로운 창조를 미리 맛봄

 

 출애굽기 20:8~11, 신명기 5:12~15, 그리고 히브리서 4:8~11을 비교해 보라. 안식일의 쉼에 관하여 어떤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되는가?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신5:12~15]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히4:8~11]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답: 출애굽기는 엿새 동안 창조를 기억하라 하셨고 신명기는 애굽에서 해방된 사실을 기억하라 하셨다. 히브리서는 가나안의 안식에 관한 것과 비교하여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된 위의 성경절들은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에 쉬라고 권면한다. 한편 히브리서 4:9~11은 미래를 바라보도록 초청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안식일의 쉼을 준비해 두셨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씀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안식일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승리를 기억하는 날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미래적 차원의 안식일 준수는 항상 존재해 왔지만 자주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인류의 타락 이후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창조 세계를 원래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회복하시리라는 약속을 기억나게 하는 날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당신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에서 안식일은 구속의 정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하늘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유대교 전통에서 언제나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BC100년과 AD200년 사이에 기록된 ‘아담과 하와의 생애’(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2, 18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곱 번째 날은 부활, 곧 다가오는 시대의 안식의 표징이다.” 훗날 아키바(Akiba)라는 랍비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분 앞에서 물었다. ‘세상의 주인이시여, 우리가 계명들을 지키면 어떤 상급을 받겠습니까?’ 거룩하신 분께서 답했다. ‘앞으로 오는 세상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물었다. ‘그 세상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십시오.’ 거룩하신 분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보여 주셨다”(Judaism: A Quarterly Journal, vol.16, 443, 444).  

 안식일은 기념하는 날 그리고 기쁨과 감사의 날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으며 그분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을 것임을 나타낸다. 안식일은 믿음이 살아 숨 쉬는 날이며 생기가 넘치는 날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우리의 확신에 대한 가장 온전한 표현이다.

 

<묵상>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은혜로 구원받는 것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될까요? 

 

답: 창조가 은혜인 것과 같이 구원도 은혜로 주신 것이다. 구원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와 구원에는 사람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오직 창조주께서 하시는 것을 받는 것 뿐이다(사45:8).

 

<부가설명> 사람들은 시간에 갇혀 있기에 무엇이든지 시간적이다. 시계를 차거나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시간을 확인한다. 내가 깨닫기로는 하나님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날과 해와 사시와 징조를 제정하셨다. 날은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것이고 해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바퀴 도는 것이다. 그 주기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딱 맞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회전하게 하신 그대로 회전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시간으로 계수하니 소수점이 생기고 윤달 윤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나 달이나 태양이나 이것들은 창조주께서 제정하신 규례대로(시119:89~91) 잘 운행되고 있을 뿐이다. 영원히 그렇다. 천체 운행은 창조주가 계시는 한 제정한 규례대로 운행될 것이다(전1:4 참고). 그래서 하늘에서도 안식일이 있고 월삭이 있다. 월삭은 달의 공전과 관련된 표현이다. 영원한 나라에서도 안식일과 월삭에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우주를 안전하게 운행하시며 존재하게 하시고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인자를 기념하며 감사하며 경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그 안식에 참여할 것이다. 제7일 안식일은 이것도 기념하게 하는 신앙의 핵심 사상이다. 

 

<교훈>

안식일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세상에 살면서 앞으로 다가올 하늘을 기대하는 날이다.

 

 

1월 2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혜를 통해 받는 구원의 상징으로 일요일이 아니라 안식일의 쉼을 사용한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안식일의 쉼을 그렇게 기록한 것은 신자들이 안식일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날을 지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는 2세기부터 교회 안에서 생겨난 매우 결정적인 변화에 대한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신 오히려 유대교와 옛 언약에 충성하는 것의 상징으로서 피해야 할 것으로 치부됐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교로 회귀하는 것인 양 여겨졌다. 예를 들어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Ignatius) 이렇게 말했다. “옛 질서 속에 살던 자들은 새로운 소망을 발견했다.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생명이 부활하게 된 주의 날을 지킨다”(Israel and the Church: Two Voices for the Same God, 42). 이와 마찬가지로 마르키온(Marcion)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유대인들과 그들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의 표징으로 안식일에 금식하라고 주문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의 상징이라는 이해가 훼손되자 기독교 안에서 안식일 준수가 사라지게 됐다. 

 

 “안식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성결하게 하시는 능력의 표징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안식일은 그들에게 구속하시기에 능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의 증거로 창조 사업을 가리킨다. 안식일은 사람의 마음에 잃어버린 에덴의 평화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구주로 말미암아 회복된 평화에 대하여 말해 준다. 그리고 천연계의 모든 사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그분의 초청을 반복하고 있다”(시대의 소망, 288, 28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안식일 준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 안식일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기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사로 쉼의 은혜를 누리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도 전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것을 우리가 받는 것 외에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쉬면서 감사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2. 참된 안식일 준수와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 차이점을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가?  

※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는 스스로 그날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정신이고 참된 안식일 준수는 감사와 감격으로 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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