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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예수, 우리의 신실하신 형제(질문, 대답, 설명) 01/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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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1-15 02:46 조회6,1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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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예수, 우리의 신실하신 형제

(1월 2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4분)

 

연구 범위: 레 25:25~27, 히 2:14~16, 히 11:24~26, 고전 15:50, 히 5:8, 9, 히 12:1~4

 

기억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히브리서 1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천사들을 다스리는 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으로 설명한다.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포함한 연약한 사람의 본성을 취하심으로 천사들보다 못하신 인자로 나타난다(히 2:7). 

 히브리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관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히 1:5)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자녀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히 2:12)이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장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신성한 통치권을 선언하신다(히 1:8~12). 히브리서 2장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충성을 확증하신다(히 2:13).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창조주, 붙드시는 분 그리고 통치자이시다.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은 자비롭고 신실하신 인간 대제사장이시다.

 요약하자면, 아들을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인 현현으로 묘사하는 대목에서 예수님은 신실하고 자비로운 형제로 제시되고 있다(히 1:1~4). 

 

*학습 목표

- 깨닫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희생과 온전한 순종의 모본을 이해한다. 

- 느끼기

우리의 형제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한다. 

- 행하기

우리의 형제요 모본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이어 간다.

 

TMI 위로

2.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히 2:14~18)

※ 우리를 붙들어 주고 사망에서 해방하시기 위한 것이다.

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선택이 모세가 했던 선택보다 더 큰 희생인 이유가 무엇입니까?(히 11:24~26)

※ 모세는 바로의 자리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4.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히 2:17, 4:15)

※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으나 죄가 없으셨다.

5.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히 5:8, 9)

※ 그의 구원사업을 온전히 이루시게 되었다는 뜻이다.

6. 하늘을 향한 믿음의 경주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히 12:1~4)

※ 증인들 앞에서 예수님만 보며 인내로 달려야 한다.

 

결론

예수님께서 아담이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로 오셔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심으로 우리의 구속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온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의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합니다.

 

 

1월 16일(일) 구속자로서의 형제

 

 레위기 25:25~27, 47~49을 읽어 보라. 가난으로 인해 자신의 소유나 자유를 잃은 사람을 누가 구해 줄 수 있었는가?

[레25:25~27, 47~49]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47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48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49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답: 종으로 팔린 형제를 가까운 형제가 속량할 수 있다. 그럴 수 없을 때는 희년에 속량되어 해방된다.

 

 모세의 법은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소유,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팔아야 했다면 그 소유나 자유를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돌려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희년은 빚이 탕감되고, 소유를 되찾으며, 포로들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큰’ 안식년이었다.

 하지만 50년은 기다리기에 긴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법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남아 있는 빚을 대신 갚고 빚진 친척을 더 일찍 구해 낼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은 살인 사건에서 정의가 구현되도록 보장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을 살해한 사람을 추적하고 처벌해, 흘린 피에 대해 원수를 갚아 주는 사람이었다(민 35:9~15).

 

 히브리서 2:14~16을 읽어 보라. 예수님 그리고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히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답: 예수님이 우리와 한 모양으로 형육에 속하여 죽음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놓아주시는 일을 하신다.

 

 이 본문은 우리를 마귀의 노예들로,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자로 묘사하고 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인류는 사탄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롬 7:14~24).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가 요구하는 죽음의 형벌이 있다는 사실이다(롬 6:23).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셔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히 2:11).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 보이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구속자, 그들의 가장 가까운 혈육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시 19:14, 사 41:14, 사 43:14, 사 44:22, 렘 31:11, 호 13:14).

 

<묵상>

빌립보서 2:5~8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셔야 했나요?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답: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이 되셔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려고 대신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부가설명> 대신 물어주는 제도는 예수께서 아담의 죄값을 대신 물어주시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구속하시는 사업을 표상하는 구속사업의 성질을 나타낸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룻기에는 ‘기업 물을 자’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기업 물어주는 행위를 ‘가알’이라고 한다. 이것은 동사이다.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말이다. 이 지구는 아담에게 준 기업인데 사탄이 빼앗아갔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이 기업을 다시 찾을 능력이 없다. 이미 사망의 권세를 잡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 무를 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 회복된다. 그래서 말씀 하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세상에 오셔서 아담의 기업을 물어주시는 일을 하셨다. 고엘 역할을 한 것이다. 고엘은 친족이어야 하고 자원해야 하며 물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 물어주는 행위는 기업을 물어주고, 친족이 받을 돈을 받아내고, 친족을 해롭게 한 사람에게 복수하고 형이 자식없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형의 생명 기업을 물어주는 일을 한다.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하여 이런 일을 다 수행하시는 고엘이시다. 레위기와 민수기의 내용 중에 이런 기별이 있고 룻기는 그런 사실을 해결한 사건을 기록하여 고엘의 역할을 확인시켜준다. 룻기는 재산 기업과 생명 기업을 함께 물어준 사건을 기록하였다. 생명 기업을 물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 일을 다 해주셨으니 감읍(感泣)할 뿐이다. 

 

<교훈>

죄에 빠져 죽게 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이 되심으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셔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1월 17일(월)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심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히 2:11).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셨다. 이와 같은 결속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경험했던 공개적인 수치와 대조를 이룬다(히 10:33).

 

 히브리서 11:24~26을 읽어 보라. 모세의 결정이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예증하는가?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답: 애굽 공주의 아들의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고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크게 여겼다. 우리 주님이 하늘 왕좌를 떠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세상에 오신 사실의 조그마한 예표가 된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불리는 것이 모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모세는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제국의 유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장 높은 수준의 교양과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가 주목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스데반은 모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하더라”(행 7:22)라고 설명했고, 엘렌 G. 화잇 역시 모세가 “애굽 군대의 총애를 받았으며” 바로가 “그의 양손(養孫)을 자기의 보좌의 후계자로 삼기로”했다고 이야기한다(부조, 245). 하지만 모세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무 힘도 없는 노예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기로 선택했을 때, 그는 이 모든 특권을 버린 것이었다.

 

 마태복음 10:32, 33, 디모데후서 1:8, 12, 히브리서 13:12~15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딤후1:8,12]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히13:12~15]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답: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과 치욕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라고 하신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겪고 있던 문제 중 하나였다. 핍박과 고난을 경험한 후에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히 6:6).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바울은 계속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굳게 잡으라”라고 권면한다(히 4:14, 10: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요 형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자로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빚을 대신 지불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로서 우리에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기 위해”(롬 8:29)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다.

 

<묵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제들’로 받아들이시기 위해 하셔야 했던 결정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모세가 했던 일보다 훨씬 더 자신을 낮추는 일이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이 사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답: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고 종과 같이 되셨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부가설명> 현재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그리 부끄러워해야 할 나라에 살고 있지 않다. 물론 지금도 어떤 나라들은 예수 믿는 것이 고통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렇지 않다. 누구의 표현대로 중세 후로 기독교 자체가 세상의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환영받게 되어 있지 않다. 환영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권력을 잡고 세상의 환영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4:5~7)라고 한 그 권세에게 절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모세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애굽 것은 다 해롭게 여기고 배설물로 버렸다. 우리가 이롭다고 생각하고 자랑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주님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 해로운 것들이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진정을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빌3:8) 최고의 보화라는 것을 깨닫고 바울처럼 모세처럼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은 이 천한 사망의 존재를 살려주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이 되시고 종의 형체를 취했다. 

 

<교훈>

거센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버릴 위기에 처해 있던 독자들에게 바울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의 형제가 되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한다. 

 

 

1월 18일(화) 우리와 같은 혈과 육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 돌아가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고 이야기한다(히 2:9, 14~16, 10:5~10). 바로 이곳에 구원의 계획을 위한 기초가 있으며 영생을 향한 유일한 희망이 있다.

 

 마태복음 16:17, 갈 1:16, 고린도전서 15:50, 에베소서 6:12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인성의 어떤 결점들을 “혈과 육”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갈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답: 하나님 나라와 복음 진리에 관하여서는 무력하고 무지하고 사망에 매인 상태이다. 

 

 “혈과 육”이라는 표현은 인간 상태의 약점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연약함(엡 6:12), 이해의 부족(마 16:17, 갈 1:16), 그리고 죽음에 매인 상태(고전 15:50)가 바로 그것이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범사에”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이야기한다(히 2:17).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겉모습만 사람들과 같아 보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에 관해서는 우리와 다르셨다고 히브리서는 이야기한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으셨다(히 4:15). 둘째,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히 7:26)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죄에 얽매인 우리의 상태는 우리 본성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롬 7:14, 참조, 7:15~20) 자들이다. 자만심과 같은 죄 된 동기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들마저 더럽힌다. 하지만 예수님의 본성은 죄에 의해 손상되지 않으셨다. 그래야만 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리셨다면, 그분 또한 구원자를 필요로 하셨을 것이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로 오셨으며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드리셨다(히 7:26~28, 히 9:1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죄 없는 제물로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가능해졌다(히 2:14~17).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법을 기록하시겠다는 새 언약의 약속을 통해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셨다(히 8:1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심으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히 9:14) 있게 하셨다.

 

<묵상>

 예수님을 통한 승리가 약속되어 있음에도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여전히 죄로 인해 힘겨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높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답: 힘겨운 이유는 죄의 세상의 왕 사탄이 여러 형태로 집요하게 공격하기 때문이고 이 공격을 스스로 이기려는 자기 의의 욕심 때문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셨다는 표현에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이 100% 우리와 같은 상태라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재림교회 안에는 이렇게 성경과 다른 주장을 마치 성경과 예언의 신의 증언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고 그런 책들도 많다. 우리는 이것이 그런가 하여 성경과 일일이 대조해서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예언의 신의 증언도 성경과 대조해서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화잇 부인이 어떤 주장이라도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취하면 안 된다고 친히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를 탐지하는 놀라운 탐지기이다. 모든 진리는 그것으로부터 와야 한다. 성경은 모든 교리와 신앙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의 견해일지라도 성경과 비교해보지 않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신적 권위이다.” (EGW to Brethren, Aug. 5. 1888,)

  예수님은 출생의 근원이 다르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탄생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하셨다. 우리는 아담의 씨로 여전히 아담의 씨로 출생한 어머니에게서 아담의 씨로 출생한 아버지의 씨를 받아 낳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고 우리는 땅에서 났다. 예수님과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다르고 질이 다르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썩어질 씨로 태어난 자들이다(벧전1:23). 그러나 예수님은 썩지 않을 씨로 탄생하셨다(행2:27~31). 그분의 생명과 그분의 인성 자체는 이런 상태이기 때문이 우리와 꼭 같은 인성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을 그 자신이 취하셨는데(In taking upon Himself man's nature in its fallen condition), 그것은 연약하고 취약한(infirmities and weaknesses) 인성이다. 그러나 그 인성에는 완전히 죄성이 없었다(the perfect sinlessness of the human nature of Christ)”(The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31. <ST. 1898. 6.9>). 정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혈과 육을 취하셨지만 죄는 없으셨기 때문에 자

기 자신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흠 없는 제물로 드리실 수 있으셨다.

 

 

1월 19일(수)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됨

 

 히브리서 2:10, 17, 18과 히 5:8, 9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삶 가운데 고난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히2:10,17,18]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답: 인류를 도우시고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표현은 놀라운 것이다. 저자는 앞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히 1:3)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죄 없으시고 흠 없으시며 더러움이 없고 거룩하시다고 이야기했다(히 4:15, 히 7:26~28, 히 9:14, 히 10:5~10).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도덕적 또는 윤리적 결함도 극복할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완벽한 분이셨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자격을 갖추셨다고 이야기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셨다는 의미에서 온전하게 되신 것이다. 

 1.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히 2:10). 유일하고 온전한 희생 제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법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이신 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으시다.

 2.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순종은 두 가지를 위해 꼭 필요했다. 첫째, 순종은 그분의 희생을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했다(히 9:14, 10:5~10). 둘째, 예수님의 고난은 그분을 우리의 모본이 되게 했다(히 5:9). 예수님께서는 전에 한 번도 순종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순종을 “배우셨다.” 자신이 하나님이신데 누구에게 순종해야 했겠는가? 예수님은 영원한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하나 된 분으로서, 온 우주의 통치자로서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순종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불순종에서 순종으로가 아니라 주권과 지배에서 복종과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높임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순종하는 인자가 되신 것이다. 

 3. 고난의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게 하였다(히 2:17, 18). 예수님께서 더 자비로워지기 위해 고난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했다(히 10:5~10, 비교, 롬 5:7, 8). 고난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실체가 더 분명히 표현되고 드러난 것이다.

 

<묵상> 

 만일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다면, 죄 많은 우리들도 분명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를 향한 엄청난 사랑을 보여 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확신 가운데서 인생의 고난을 견뎌 낼 수 있을까요?

 

답: 예수님께 온전히 굴복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성령께서 우리를 능히 순종하도록 이끄실 것인데, 우리가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 이 이끌림에 따라갈 수 없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신 분이시다. 저자의 말대로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순종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 그분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사람이 되어 피조물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피조물인 사람이 순종하듯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 순종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빌2:5~8). 그분은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을 위하여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신 일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날 때 그분이 순종하며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본으로 드러내셨다. 우리는 순종의 본질을 성경에서 바르게 배워야 한다. 내가 깨달은 대로는 내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지체는 몸의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참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의 지체가 되었으면 지체 노릇 바르게 하는 것이 그냥 순종이다. 이런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면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셨고 순종을 배우셨으며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다.

 

 

1월 20일(목) 우리의 모본으로서의 형제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신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함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실 수 있다.

 

 히브리서 12:1~4을 읽어 보라.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 삶의 경주를 해야 하는가?

[히12:1~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답: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을 바라보며 인내로 증인들의 삶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본을 충성스럽게 딸으는 믿음으로 경주해야 한다.

 

 이 본문에서 사도가 믿음의 모본으로 제시하는 인물들의 긴 목록의 정점은 예수님이다. 이 본문은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부른다. “믿음의 주”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르케고스(archegos)는 ‘개척자’로 번역할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의 앞에서 달리신다는 의미에서 경주의 개척자이다. 히브리서 6:20은 예수님을 “앞서가신” 분이라고 부른다. “온전케 하시는 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가장 순결한 모습의 믿음을 하나님께 드러내 보이셨음을 깨닫게 한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이 경주를 마치셨으며, 그분이야말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 주신 분이란 사실을 가르쳐 준다.       

 히브리서 2:13은 이렇게 기록한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이사야 8:17, 18을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는 북방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두려운 침입의 위협 앞에서 이 말을 했다(사 7:1, 2). 그의 믿음은 당시 왕이었던 아하스의 믿음과 대조된다(왕하 16:5~18).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사 7:1~11).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의 자손인 아하스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조를 통해 그 약속을 확인하라고 제안하셨다.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징조를 구하는 대신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왕하 16:7)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아하스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보다는 디글랏 빌레셀의 아들이 되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원수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셨다(히 1:13, 10:12, 13).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약속을 우리에게도 주셨으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을 믿어야 한다(롬 16:20).

 

<묵상>

인간의 도움을 의지했던 아하스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비교하여 묵상해 보십시오.

 

답: 아하스는 보이는 세력을 의지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세처럼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하여 달려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이 증언한다. 황송하도록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형제라고 하셨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교회를 이룬 사람들에게 형제라고 한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만 있는 세상 죄인들에게 형제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2:11~13). 형제에서 불신자는 제외된다. 예수님이 형제로서 우리의 모본이라고 할 때 그 형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난 사람들의 맏형님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 상태로 있는 사람들의 형제도 아니고 그 죄인들의 모본도 아니다. 죄인은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 예수님이 아무리 모본을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할 수도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사는 것은 거듭나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셨기 때문이다(요일5:11~13, 갈2:20). 이 진리에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시고 하늘에서 봉사하시기 때문이다(요16:8~10). 우리는 아하스 같이 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 믿음의 본보기가 되셨다. 

 

 

1월 2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히브리서 2:13에는 그분의 형제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3). 신학자 패트릭 그레이(Patrick Gray)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형제들의 후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로마의 후견인 제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큰 형이 어린 형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미성년인 형제와 그 형제의 유산을 책임지게 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어린 형제들을 돌보아야 하는 형의 자연스러운 책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Godly Fear: The Epistle to the Hebrews and Greco-Roman Critiques of Superstition, 126). 이 같은 이해는 히브리서가 왜 우리를 예수님의 형제일 뿐 아니라 그분의 자녀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 준다. 우리의 큰형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 교사이고, 후견인이며, 보호자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교훈으로 하나님 안에 그 기원이 있는 무아의 봉사에 대한 완전한 모본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신다. 세계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드심으로 그분은 계속하여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하나님께서는 이 봉사의 이상을 당신의 아들에게 맡기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본을 통하여 봉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인간의 선두에 서도록 보내심을 받았다”(시대의 소망, 6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그 일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현실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왜 그렇게도 비참한 실수가 되겠는가?

※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완전히 버리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죄 아래에 팔린”(롬 7:14) 자로 태어나지 않으신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라. 모세가 자신들처럼 노예가 아니었던 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모세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 예수님이 죄 아래 팔린 자가 아니기 때문에 죄 아래 팔린 우리를 속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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