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이처럼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질문, 대답, 설명) 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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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10-31 06:35 조회5,799회 댓글0건본문
제6과 이처럼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11월 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9분)
연구 범위: 신 4:1~9, 마 15:1~9, 민 25:1~15, 고전 10:13, 신 4:32~35, 마 5:13~16
기억절: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8).
신명기의 첫 세 장은 지금까지 그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기억하게 해 주는 역사 수업이었다. 4장에 이르러서는 역사 수업이 설교 형식으로 변한다. 그동안 그들이 지나온 사건들을 돌아보는 것은 그저 역사 공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신명기 4장은 “이제”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들은 이제 막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지나온 과거를 살펴보는 일을 마쳤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그 인도하심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시는 일들을 해야 했다(신 10:12).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는 말에 이어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듣다”(shama)이다. 이 단어는 신명기 6장에 등장하는 ‘셰마(Shema) 기도문’의 첫 단어와 같은 단어이며 신명기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명기 4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신 4:1).
*학습 목표
- 깨닫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큰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한다.
- 느끼기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큰 일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한다.
- 행하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간다.
TMI 위로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규례와 법도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주신 경고는 무엇이었습니까?(신 4:1, 2)
※ 주신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지키라.
3. 바알브올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민 25:1~15)
※ 생활이 잘못되면 영적으로도 잘못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
4. 바알브올 사건에서 죄에 가담하여 멸망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신 4:3, 4)
※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과 붙어있지 않은 것이다.
5.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큰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신 4:32~35)
※ 출애굽 사건과 광야 생활의 안전이다.
6.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와 지식이 될 것이었습니까?(신 4:6)
※ 하나님의 규례를 준행하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큰 나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큰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이스라엘은 변치 않는 충성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이방 나라들에 나타내 보여야 했습니다. 우리 또한 순종의 삶을 통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10월 31일(일) 가감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4:1, 2을 읽어 보라. 그분의 “규례와 법도”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주신 경고는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왜 이러한 경고를 즉시 받아야 했는가?(참조, 신 12:32)
[신4:1,2]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답: 이제 곧 약속의 땅에 갈것인데 거기서 주신 생명을 잘 보전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들은 주신 명령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율법을 변경하려고 할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다.
“사탄은 그가 하늘에서부터 시작한 일 곧 하나님의 율법을 변개하려고 굴함이 없이 끈질기게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자신이 타락하기 이전에 천국에서 제시했던 이론 즉 하나님의 율법이 불완전하므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그 이론을 세상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소위 기독교회라고 공언하는 대부분이 저들의 말로 표명하지 않을 때에는 행동으로라도 동일한 오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2권, 107).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을 무시함으로써 그 조항의 실질적인 효용을 잃어버린다거나, 율법에 들어 있지 않은 조항을 추가함으로써 결국 율법을 범하게 되어서 문제에 빠져버린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마태복음 15:1~9을 읽어 보라. 비록 구체적인 상황은 다를지라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했던 것과 같은 어떤 예를 발견할 수 있는가?
[마15:1~9]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답: 유대인들은 그들이 만든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다. 즉 전통을 따르느라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주 우상 숭배에 관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이방의 풍습을 따랐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고 계시던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이 만든 수많은 전통을 더함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의 뜻에 따라 더하거나 빼거나 하여 율법은 변경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로 인한 슬픈 결과를 맛보게 되었다.
<묵상>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사람이 만든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됨으로 성경의 진리가 훼손된 경우가 있을까요?
답: 작은 뿔의 세력이 하나님의 계명, 곧 십계명을 변경시켰다.
<부가설명> 오늘 아침(10월 20일 수요일) 천주교 방송을 봤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잊었지만, 화면에 ‘마리아(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자막이 나와 있다. 성경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 기록에서 그 모친 마리아를 부른 말은 ‘여자여(귀네=gunh)’이다. 주석가들은 예수님이 모친에게 이런 칭호를 사용하신 것을 해명하느라 애를 먹는 것 같다. 예수님은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셨다.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모친을 ‘어머니(메테르=μήτηρ)’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할 때 ‘여자여’라고 기록하게 감동하신 것은 교회 미래에 마리아를 이처럼 신격화 시킬 것을 보시고 그런 위험에서 교회를 보호하시려는 예수님의 배려를 ‘어머니’라고 기록하지 않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기록했는데도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여 여신으로 숭배하지 않는가? 성경과 전혀 상관없은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신흥 기독교로 크게 성장한 안상홍 증인회=하나님의 교회에서 안상홍의 부인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고전4:6). 인간이 지식과 권력을 쥐고 하나님께서 가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말씀에 인간의 도덕과 윤리적 시각으로 말씀을 변경시키면 안 된다. 우리는 기록한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따라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11월 1일(월) 바알브올
신명기 4:3, 4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가적인 역사 수업을 받게 되는데 이는 과거를 기억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그들이 배워야 할 영적, 실제적 진리를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민수기 25:1~15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이 실패로부터 그들은 어떤 영적, 실제적 진리를 깨달아야 했는가?
[민25:1~15]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7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14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이며 15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답: 모압 미디안 사람들의 제사에 참여하여 그 여자들과 간음하였다. 이 일로 그들은 염병에 감염되어 사망에 떨어졌다. 그들이 우상숭배 하는 것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반역하는 죄가 된다는 교훈과 육체적 간음은 곧 영적 간음으로 발전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결과에 이름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주변에 있는 이방 국가들을 진멸한 것을 보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명령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자들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이방 신들을 가까이함으로 그들이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했던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반역을 보이곤 했다.
“음행하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이방 신들과 그들의 풍습을 따랐다는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곤 하는데(참조, 호 4:12~14), 이경우에는 적어도 초기에는 그들 가운데 실제로 성적인 범죄가 행해졌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사탄은 다시 한번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이용하여 이방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유혹의 손길에 내어 준 이스라엘 남자들을 범죄에 빠져들게 하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육체적인 음행은 영적인 음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이방 신을 숭배하는 일에도 동참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 가담”하여 거짓 신에게 제사까지 드리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껏 배우고 들었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욕망과 정욕 앞에 그 모든 것을 다 내던져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첫 번째 죄, 곧 육체적 음행을 저지르는 일에 있어 양심을 버렸을 때, 다음 단계, 곧 영적인 죄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들이 얼마나 타락했던지,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고 있을 때,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오는 일조차 있었다.
<묵상>
사탄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자극하여 죄에 빠지도록 유혹함으로 이루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게 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하도록 부탁한 모압왕 발락은 발람이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주자 노하여 발람을 돌려보냈다. 발람은 복을 빌도록 하나님께서 그 입을 주장해서 감히 저주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못했다. 발락이나 발람이 다 낙담했다. 발람은 떠나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꾀를 발락에게 제시했다. 그들 앞에 축제를 열고 초청하라는 것이다. 발락은 발람의 꾀를 따라 그대로 했고 이스라엘은 영낙없이 걸려들었다. 그들은 우상 축제에 참석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 신전 창녀들과 행음했다. 성경은 이것을 발람의 꾀라, 또는 발람의 교훈이라고 표현한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31:16)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재림신자들은 실제로 이런 죄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이런 죄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사상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 성경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신앙한다든지 성경을 자기 의견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다 발람의 교훈을 따른 것이 될 것이다. ‘바알브올’은 ‘브올 지방의 바알’이라는 말이다. 즉 브올 지방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바알은 ‘주인, 남편’이라는 뜻이다.
<교훈>
육체적인 음행에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영적인 음행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단호히 행동해야 한다.
11월 2일(화) 여호와 하나님께 붙어 있으라
바알브올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바알브올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했다. 하지만 그중에 많은 사람은 반역에 동참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신 4:4).
위의 성경절이 죄에 빠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죄와 유혹 그리고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이 말씀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굳게 붙어 있었다. 우리도 예수님께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
이 성경절과 그 앞 절에 등장하는 ‘모든’이라는 단어의 대비에 집중해 보라.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은 멸망당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생존하였다. 그 당시 중간 지대는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예수님 편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선택해야 한다(마 12:30).
“붙어 떠나지 않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베크(dbq)인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꼭 붙어 있겠다는 강한 결심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창세기 2:24에서 사용되었는데, 거기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고 표현되었다. 이 단어가 신명기에서 네 번 더 등장하는데(신 10:20, 11:22, 13:4, 30:20), 모든 경우에서 의미하는 바는 같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으로부터 능력과 힘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동사의 주어였다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붙어 있기로 선택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힘으로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실 수 있으시다. 그렇게 되기 위해 바알브올에서 하나님께 충성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 꼭 붙어 있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어떤 유혹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할 수 있다.
<묵상>
고린도전서 10:13과 유다서 1:24을 읽어 보십시오. 신명기 13:4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말씀이 신약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까?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유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신13: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답: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분을 섬기고 의지하여 감당할 시험만 주시는 하나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르게 되며 사람이 이것을 모아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뿌리가 없다. 또 스스로 둥치가 될 수도 없다. 다만 가지가 될 뿐이다. 가지는 둥치나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이미 가지의 자격을 잃어버린다. 붙어 있으라는 표현에는 사람들의 이런 실상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은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장성해서 스스로 섰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장성하기까지 사람은 부모에게 붙어 있다. 존재와 생명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한 사람이 없다. 누군가가 존재하게 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게 한 그 누구를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는 약해지고 외로워지고 사그라진다. 그래서 창조주께서 사람을 자기에게 꼭 붙어 있으라고 간곡히 말씀하신다. 우리는 호흡마다 걸음마다 예수님께 붙어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에게 붙어있도록 부르셨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0:21),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않에서 모든 사람들을 다 오라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 가서 꼭 붙어 있도록 하자.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며 존재의 근원이시다.
<교훈>
바알브올에서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았던 자들은 죽음을 면하였다. 이처럼 우리도 죄의 유혹 앞에서 하나님 편에 꼭 붙어 있기로 선택해야 한다.
11월 3일(수) 이처럼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명기 4:4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신명기 전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며 나머지는 그것에 대한 해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말씀을 읽으면서 거기에 나타난 원칙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라.
신명기 4:5~9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신4:5~9]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답: 그들의 신분을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올바르게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듣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선택 받았음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에서 처음 불러내시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참조, 창 18:18)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은 ‘큰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큰 나라로 만드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땅의 모든 족속”(창 12:3)에게 “복이 되게”(창 12:2)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최고의 축복은 그들의 혈통을 통해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이셨지만, 그때까지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그들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드러나야 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고 있었지만 이방 민족들은 돌과 바위와 나무와 귀신을 섬기고 있었다(신 32:17, 시 106:37). 이 얼마나 극명한 차이인가!
모세는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두 가지 사실을 언급했다. 첫째, 하나님이 그들 가까이 계셨다. 성소와 같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둘째, 그들은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신 4:8).
<묵상>
신명기 4:32~35을 읽어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2~34).
의심의 여지 없이 이스라엘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부가설명> 모세는 이스라엘을 큰 나라라고 하였다. 당시로서 이 말은 사실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아주 번성하였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인 백성보다 더 많아지기 시작하자 겁이 났다. 그들이 반란하면 막을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구 억제 정책을 썼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자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다 죽이라고 지시한 것이다. 바로가 두려워한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였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출1:9). 당시의 강국 애굽 백성보다 이스라엘 사람 수가 더 많았으니 큰 나라가 된 것이다. 그들이 광야를 지나오면서 싸운 족속들은 그 수에 있어서 적은 수였다. 이스라엘의 군사 수만 60만명이 넘었다. 그들이 연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만 했다면 가나안 정복은 아주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기 보다는 애굽에서 익숙해진 우상을 택하였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적한 국민들이 이스라엘 보다 많고 강하다는 말도 했다. 한 나라씩 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 족속이나 그 이웃들은 서로 연합하여 전쟁한 것을 성경 여러 곳이서 읽을 수 있다. 아무튼, 진리의 백성들은 예수께 꼭 붙어서 세상을 따르지 말고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큰 나라로 만드셨으며 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했다.
11월 4일(목)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명기 4:1~9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신분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부여된 선교적 사명 또한 보여 주는 말씀이다. 그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그들이 순종하고 따르며 행해야 함이 표현되어 있다.
신명기 4:6을 다시 한번 읽어 보라. 여러 민족 앞에서 무엇이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신4: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답: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하나님의 귤를 지키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다.
얼핏 보면 규례와 법도 자체가 지혜와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의 지혜와 지식은 그것을 지키고 순종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순종이 곧 그들의 지혜와 지식이었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세상이 가져 보지 못한 법과 규칙과 규정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사실 그러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의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진리를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리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 모든 빛과 진리가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을 둘러싼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 어떠한 유익도 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순종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규례와 법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순종이 세상에 보냄받은 증인으로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묵상>
마태복음 5:13~16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요? 이 말씀이 우리 재림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답: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 드러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세계 열방 앞에서 놀랄 만큼 번영했을 것이다. 각종 공교한 일에 필요한 지혜와 기술을 주실 수 있는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저희의 교사가 되시고 그들이 당신의 율법에 순종하는 일을 통해 그들을 고상하게 하고 향상하게 하셨을 것이다. 만일 저희가 순종했더라면 다른 나라 백성을 괴롭혔던 질병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왕성한 지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이 저희가 하는 모든 일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저희는 제사장과 방백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가 되도록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셨다”(실물교훈, 288).
<부가설명>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는 것은 지혜를 버리는 것이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8:9).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혜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말씀을 버리는 것이 어떤 상태일까? 말씀을 따라 생활하지 않는 상태이다. 오늘날 우리도 지혜를 버리고 있지 않은지? 세상의 여러 도덕적이고 사상적인 책들이 지혜로워보일 수 있다. 세상에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 세상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 신자들보다 지혜롭다. 세상은 이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남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가르친다. 미련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그렇게 미련하고 약하게 사셨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13:4).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도 전도의 미련한 방법이고 승리하는 방법도 약하여 지는 것으로 승라한다. 세상이 볼 때 얼마나 미련하고 약한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이런 하나님께 우리는 꼭 붙어서 결코 떨어지지 말자.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는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
11월 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늘에서 대쟁투가 시작된 시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전복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 되어 왔다. 사탄은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창조주를 반역하였다. 그는 하늘에서 쫓겨났지만 이 세상에서 여전히 동일한 그 싸움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인류를 기만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 그가 꾸준히 추구해 오는 목적이다. 그 목적이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다 버리게 하거나 그 일부분을 버리게 함으로써 성취되든지 간에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똑같다. 율법의 한 조목을 범하는 자는 온 율법에 대한 경멸을 나타낸다. 그의 감화와 행동은 범죄의 편에 있으며 그는 결국 율법을 ‘모두 범한 자’(약 2:10)가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582).
바알브올 사건에 관하여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금지된 곳으로 나아가 사탄의 올무에 걸렸다. 노래와 춤과 이교 축제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충절을 포기하였다. 환락과 축연에 가담하여 술을 마시며 방종할 때에 그들의 지각은 몽롱해져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정욕이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음탕한 행위로 말미암아 양심을 더럽힌 그들은 우상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이교도의 제단에 희생 제물을 드리고 가장 비루한 의식에 참여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5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오늘날 재림 성도인 우리가 놓인 상황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세상과 다른 교회들과 비교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빛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빛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혜와 지식”을 세상에 얼마나 잘 나타내고 있는가?
※ 지금 바른 생각은 옛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양극이다. 죄와 의를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하면 지혜와 지식을 드러낼 수 없고 오직 고민과 방종만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와 의에 관한 교훈을 바르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신 4:4). 이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붙어 떠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선물인 자유 의지로써 하나님께 붙어 있기로 선택해야 한다. 일단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계속해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가?
※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으면 그 생명으로 생활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그 고백을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일요일 교과에 나와 있는 질문을 깊이 묵상해 보라.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도 모르게 이런 실수를 범할 수 있는가?
※ 성경을 말씀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해석하고 전통을 따지면 그런 실수에 쉽게 빠진다. 우리는 정말로 말씀 일변도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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