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쉼이 없는 선지자(질문, 대답, 설명) 09/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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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9-10 15:59 조회5,434회 댓글0건본문
제12과 쉼이 없는 선지자
(9월 1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6분)
연구 범위: 욘 1~4, 렘 25:5, 겔 14:6, 계 2:5, 눅 9:51~56, 유 1~25
기억절: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성경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요나의 이야기이다. 여기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도망했다. 매우 극적인 방법으로 설득당해 마음을 바꾸고 순종했지만, 그 후 그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땅, 바로 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멸망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불평하였다.
참된 쉼과 평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얼마나 좋은 실례인가? 요나는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라고 외칠 정도로 쉼과 평안 없이 불만으로 가득했다.
예수님 자신이 요나의 이야기를 언급하시면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분명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요나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쉼과 평안이 부족했던 요나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학습 목표
- 깨닫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할지라도 끝까지 기다리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다.
- 행하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다.
2.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요나는 어떻게 응답했습니까?(욘 1:1~3)
※ 다시스로 도망갔다.
3. 예상치 않은 위기를 만났을 때 요나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욘 2:1~9)
※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4. 요나의 기별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욘 3:5~9)
※ 왕으로부터 모두 회개했다.
5. 요나가 하나님을 향해 화를 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욘 4:1~3)
※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를 거짓 선지자로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6.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유 21~23)
※ 니느웨 백성도 구원하고 요나도 자신을 올바르게 깨닫게 하시려는 사랑이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거절하고 도망쳤던 선지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셔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요나 자신도 하나님과 나누는 구원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쉼을 찾기를 바라셨습니다.
9월 12일(일) 도망치다
요나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선교사였다. 동시에, 그는 억지로 행동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요나가 무엇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의 삶을 막아섰다. 어깨에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마 11:30)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대신, 요나는 자신만의 ‘쉼’을 찾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떠나 어디에서 평안과 쉼을 찾기 원했는가? 그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는가? 요나 1장을 읽어 보라.
답: 그는 배 밑창에서 잠을 잤고 하나님을 떠나서 다시스로 도망가서 쉬려고 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곳과 반대 방향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했던 것처럼(참조, 출 4:13)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형편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왕하 14:25에 기록된 것을 보면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앞선 경우에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역사적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들은 주전 8세기에 근동 지방의 패권을 쥐고 있던 신 앗수르(Neo-Assyrian) 제국의 잔인함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때가 바로 요나가 이스라엘에서 활동하고 있던 때였다. 약 75년 후에 신 앗수르 제국의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였다. 이스라엘과 사마리아는 20여 년 전에 이미 몰락한 상황이었고, 히스기야왕은 주변 국가들 가운데 앗수르를 반대하는 세력과 힘을 합치고 있었다.
바야흐로 앗수르가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성경과(왕하 18, 사 36), 앗수르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와 니느웨에 있는 산헤립의 궁전 벽화는 히스기야의 남쪽 국경 지대의 요새 중 가장 중요했던 라기스의 처참한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어느 비석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산헤립은 그가 무너뜨린 46개의 견고한 도시들에서 이십만이 넘는 포로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앗수르의 왕은 라기스를 함락시킨 후,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였고, 히스기야왕을 끝까지 따르던 자들은 산 채로 몸의 가죽이 벗겨졌으며, 남은 사람들은 앗수르로 끌려가 헐값에 노예로 팔렸다.
앗수르 사람들은 그때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히 잔혹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제국의 중심으로 요나를 보내셨던 것이다. 요나가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묵상>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던 여러 성경의 인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각기 다른 경우에서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예, 모세, 기드온, 이사야, 바울)
덥: 모세도 많이 사양했으나 마침내 순복했다. 기드온은 보증을 요청했다.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다. 바울은 다메섹 경험 후에 사도가 되었다.
<부가설명>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롬8:28). 구약의 참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은 다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부르신 자들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라고 말씀하셨다(요15:16).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몫이다. 모세, 기드온, 이사야, 바울 등,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도 충성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깨닫고 자기들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충성하였다. 부르심을 거절한 사람들도 있다. 부르심을 바르게 이루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의 이욕에 굴복당할 때 그렇게 된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에서 떠났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 사람들에 관한 것은 거의 기록하지 않은 것 같다. 가룟유다는 자원해서 예수님을 따랐으나 결국 배반했다. 자기 생각을 예수님 사상에 굴복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쉼이 없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부르심에 순복하고 주님 안에서 자아가 죽을 때 참된 쉼이 있다(계14:13). 우리는 신자들이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뜻이다. 쉼이 있는 신자가 된다면 좋지 않겠는가?
<교훈>
앗수르는 당시의 기준으로도 매우 잔혹한 국가였으므로 요나는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다.
9월 13일(월) 사흘간의 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요나는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짧은 ‘쉼’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몰고 오신 폭풍으로 가로막혔고, 요나는 무덤이 될 뻔한 바다에서 구원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구하기 위해 물고기를 보내신 것이다.
사흘간 물고기 뱃속에 머물게 되고 나서야 요나는 비로소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인지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드린 기도를 읽어 보라(참조, 욘 2:1~9). 요나는 무엇이라고 기도했는가?
[요2:1~9]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답: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2:7~9).
그가 비록 깊은 바닷속, 매우 위험한 상황 속에 있었지만, 요나의 기도는 성소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주의 성전”을 바라보았다.
성전은 이 순간 요나의 기도의 초점일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뿐이다. 그분은 성소에 계신다(참조, 출 15:17, 출 25:8). 성소는 기도의 중심이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장소이다.
요나가 이 기도를 드릴 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요나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욘 2:7). 그곳이 바로 요나의 소망이 있는 곳,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이 이르러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나는 마침내 이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는 구원함을 받았다. 큰 물고기가 그를 토해 냈을 때, 요나는 도망자에 불과했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가장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배웠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기로 하였다. 비록 극도로 악한 도시의 사람들이 타지에서 온 선지자로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자인지에 대하여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니느웨로 향하였다.
<묵상>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기 위해 때때로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물고기 뱃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요나의 이야기는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익숙해져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답: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다.
<부가설명>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갈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기까지 간섭하시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그가 비록 선지자였으나 당시의 신에 관한 일반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민족들마다 그들의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상식이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배가 심한 풍랑에 요동할 때 사람들이 각각 자기 신에게 기도할 시간에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선장이 와서 깨웠을 때 그 원인이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는 자기 때문이었음을 즉시 깨달았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한 민족의 신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로서 오직 한 분 참신임을 깨닫고 고백한다. 그러나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가 여호와이심을 이렇게 스스로 증명하신다. 요나는 고향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도망가는 중에 배우고 깨달았다. 그리고 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쉼을 얻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면 쉼이 온다. 우리도 쉼이 있는 신자들이 되자.
<교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며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가장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배웠다.
9월 14일(화) 사명을 완수함
욘 3:1~10을 읽어 보라. 이 악한 도시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할 때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요나는 큰 성읍 니느웨를 걸어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그가 전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비록 상황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되어 있지 않지만, 요나의 기별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었고 많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과 경고를 믿었다.
근동 지방의 전형적인 방법에 따라, 니느웨의 왕은 조서를 내림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 보였다. 짐승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금식하며 슬퍼해야 했다. 왕은 보좌에서 내려와 재 위에 앉았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욘 3:6~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렘 25:5, 겔 14:6, 그리고 계 2:5과 비교해 보라. 왕의 연설에는 참된 회개란 무엇인지에 대해 그가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어떤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는가?
[욘3:6~9]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렘25: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겔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답: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선포하여 인용한 다른 구절들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한 상태가 되었다.
왕의 연설은 짧았지만,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또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신학으로 가득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 성령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역사하셨음이 분명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도하심에 관한 이야기를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사실상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에 온전히 의지합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했던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배타적이며 따라서 선택받은 자들만 그 속에서 쉼을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묵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회개가 그렇게나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죄를, 특히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답: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기가 생명이 없고 존재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그것을 고백할 때 그는 생명을 얻는다(행11:18).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회개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서는 회개가 아니다”(정로의 계단, 23).
<부가설명> 내가 깨달은 대로는 회개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근본적인 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날마다 생활 중의 허물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목욕하는 회개와 발 씻는 회개라고 표현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해서 하는 말이다(요13:8~10). 근본적인 회개, 곧 목욕하는 회개는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와 생명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회개다. 이 회개를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이다(행11;18). 거듭나게 하는 회개이다. 이렇게 거듭났는데, 죄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에 때가 묻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죄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넘어져 깨어지기도 하고 사방에서 유혹하여 유혹의 욕심에 빠지는 때도 있다.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사로잡에 죄 아래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즉시 예수님께 발을 내어밀고 예수님의 손에 씻김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씻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씻어주셔야 깨끗하게 된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날마다 호흡마다 발 씻는 회개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대기(大氣) 자체가 죄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호흡마다 죄를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간마다 호흡마다 주님의 사죄의 은혜를 마셔야 할 것이다.
<교훈>
니느웨 사람들은 비록 자비로운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의 말씀을 주셨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회개하였다.
<적용>
혹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아뢰지 못한 감추어 둔 죄가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성령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도를 드려 보세요.
9월 15일(수) 마음의 평안이 없는 화가 난 선교사
안타깝게도 요나의 이야기는 3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욘 4:1~11을 읽어 보라. 요나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의 불완전한 성품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욘4:1~1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답: 요나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취급받을 것을 지극히 싫어하여 하나님께 화를 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이런 자리에 빠질 가능성이 항상 있으므로 항상 굴복하는 믿음을 훈련해야 할 것이다.
요나 4장은 자신의 선교 사역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화를 내고 있는 요나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요나는 자기가 바보처럼 보이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서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 당신의 선지자와 대화하시며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선지자와 같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더 성장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극복해야 할 약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요나는 그 도시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게 하심으로 그 성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을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인해 기뻐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여김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평판에 눈이 멀어 그는 그 불쌍한 도시에 있는 영혼들의 무한히 큰 가치를 보지 못했다”(선지자와 왕, 271).
당신의 선지자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듯 보였다. 요나가 도망쳤을 때는 그를 다시 돌이키시기 위하여 폭풍과 물고기를 보내셨다. 이번에도 그가 잘못 행동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함께 대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욘 4:4).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이런 사랑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동기를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분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겠는가?
눅 9:51~56을 읽어 보라. 여기에 나오는 경우와 요나의 이야기에서 생긴 일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눅9:51~56]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답: 야고보 요한의 정신과 요나의 정신이 비슷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시다.
<묵상>
하나님의 심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운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부가설명> 요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하시는 바로 그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공포의 두려움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이 조사 심판의 의미이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때를 기쁨이 가득한 희망과 기대의 시간이 된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그대는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시인할 그 때를 기쁨이 가득 찬 희망과 기대로써 바라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하여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준비는 그의 초림시에 우리에게 가져온 위대한 구원에 대하여 확고한 신앙을 갖는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야만 한다”](엘렌 G. 화잇, 높은 부르심, 368). 요나는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도 조사 심판이 기쁨과 희망과 기대가 가득한 복음으로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비록 요나가 인간적인 부족함을 드러내 보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인내로 그에게 다가오셔서 그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셨다.
9월 16일(목) 모두를 위한 계획
요나는 자신의 체면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니느웨가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나의 이야기 속에서 니느웨 백성들은 별문제가 없는 듯 보인다. 그들은 선지자의 기별을 이해했고 빠르게 회개했다. 이 선교 이야기 속에서는 오히려 요나가 문제인 듯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저하는 선지자를 끝까지 찾으신 이유는 니느웨 백성들이 선교사의 메시지를 필요로 했던 것만큼, 요나 자신에게도 이번 선교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유다서를 읽어 보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유 21)는 무슨 뜻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유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답: 우리는 자신을 믿음으로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신약에 기록된 그의 짧은 책에서, 유다는 21절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다음 절들에서 유다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라고 이야기한다.
유 20~23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요나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유 20~2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답: 죄와 사망의 사람들을 거기서 이끌어내어 생명과 의의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이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과 앗수르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불러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로 가라는 부르심을 거부할 정도로 그들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그분의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다.
요나를 부르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구원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쉼을 찾기를 바라셨다. 그 일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믿음과 소망을 나누어 주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묵상>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답: 요나가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다. 당시에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은 천만의 말씀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베드로의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 번 부인했다. 그때 자신의 진정한 상태가 어떤 것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나의 진정한 상태를 모를 것이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며 기도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애굽에 내려가서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할 때 그의 실상이 드러났다. 우리를 이런 자리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확인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브라함은 그 후에 그랄에 가서도 같은 일을 저질렀다. 우리가 자주 같은 환경에 빠져서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고쳐야 할 그것을 확실히 고치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요나는 깨달았을 것이다. 아브라함도 마침내 깨닫고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도 순복했다. 베드로도 깨닫고 순교하기까지 나아갔다. 우리는 어떤가? 감히 누가 나는 그들 같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령님의 붙들어 주심을 간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것만큼이나 요나 자신도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이 경험이 필요했음을 아셨다.
9월1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요나에게 위탁된 책임은 무거운 것이었으나 그에게 가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붙드시고 그에게 성공을 허락하실 수 있으셨다. 만일 선지자가 의심치 않고 순종하였더라면 많은 쓰라린 경험을 겪지 않고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요나가 절망에 빠진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연속적인 시련과 이상한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 자신의 구원하시는 무한하신 능력에 대하여 선지자의 확신을 소생시켜야 하셨다”(선지자와 왕, 266).
“많은 사람은 매우 단순하고 겸손한 방법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 곧 세상에서 가장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한 남녀들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대하여 사람들이 자기가 가장 흥미를 갖는 사물에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단순하고 솔직한 말로 인하여 감동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실물교훈, 2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람들이 자신이 전한 말씀을 듣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실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요나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받은 빛과 전혀 다르게 행동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 선민의식이 지나치면 그런 사고방식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그보다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이 절대적이다.
2.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의 구원뿐 아니라 믿는 자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이미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새 마음’과 ‘새 영’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진리를 아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변화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 진리의 말씀을 경험적으로 깨달을 때 진전한 변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 유다서를 다시 읽어 보라. 그 책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 말세에 확실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4.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큰 유익을 주는가?
※ 자기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하나님이 마련하신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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