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자유롭게 누리는 쉼 - ( 요점 Q문-A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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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1-08-18 00:32 조회3,229회 댓글0건첨부파일
- 제8과 자유롭게 누리는 쉼 -이봉주.hwp (19.0K) 15회 다운로드 DATE : 2021-08-18 00: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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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자유(自由)롭게 누리는 쉼> (2021년08월21일(안) 19시 17분)
(8월15일(日) <치유(治癒)가 되는 쉼>
(Q)~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인간은 육신(肉身)의 질병(疾病)과 고통(苦痛)은 남녀노소(男女老少)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莫論)하고 피(避)할 수 없는 현실(現實)이다. 또 한 아무리 발전(發展)되고 발달(發達)된 첨단의학(尖端醫學)도 완전한 해결책(解決策)이 없다. 그렇다면 그 고통(苦痛)과 해결(解決)을 위해 우리가 어떠한 답(答)이 현명(賢明)한 해답(解答) 될까?
(A)~질병(疾病)은 죄(罪)가 지구(地球)에 들어온 이후(以後)에 생겨났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병(疾病)이나 고통(苦痛)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든지 또는 누군가의 소홀(疏忽)함 때문이든지 아니면 유전적(遺傳的)문제이든지 아니면 죄(罪)된 세상에 사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든지 상관없이 우리 인생들에게는 진정(眞正)한 쉼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들에게 쉼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진정한 치유(治癒)와 “쉼”을 갖게 될 것이다.
(8월16일(月) <근원(根源)부터 치료(治療)하심>
(Q)~ (마가복음 2:5~12)의 중풍병자(中風病者)를 어떻게 치유(治癒)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육신적(肉身的)인 치유(治癒)에 앞서 어떤 문제(問題)를 다루시는가?
(A)~(1) 육신(肉身)의 병(病)고침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 영혼(靈魂)의 죄(罪)사(赦)함은 영원(永遠)하며,
(2) 육신(肉身)의 질병(疾病)이 직접적(直接的)인 죄(罪)의 결과(結果)는 아니지만 인류(人類) 최초(最初) 범죄(犯罪) 이후(以後) 병(病)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본질적(本質的) 측면(側面)에서 볼 때 육신(肉身)의 질병(疾病)보다 그 본질적(本質的)인 원인(原因)인 죄(罪)가 먼저 해결(解決)되어야 하며,
(3) 전자(前者)는 부분적(部分的)이요 조건적(條件的)이고 후자(後者)는 전체적(全體的)이요 절대적(絶對的)이고,
(4) 전자(前者)는 인간(人間)의 방법으로도 가능(可能)할지 모르나 후자(後者)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⑸.모든 일에는 원인(原因)과 경과(經過)와 결과(結果)가 있는 것이다.
즉 오늘 본문(本文)에 중풍병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적인 중풍병을 치유(治癒)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내면적(內面的)인 근원(根源)부터 치유(治癒) 하시므로 근원적(根源的)인 용서(容恕)의 능력(能力)과 실체(實體)를 통한 참된 “쉼”을 경험(經驗)하도록 치료(治療)해주셨다.
(8월17일(火) <도망(逃亡)치다>
(Q)~ (열왕기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전투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으로의 대 승리를 맛본 선지자가, 어째서 이세벨의 말 한마디의 협박을 듣고 도망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A)~ ⑴.엘리야는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다는 점에서 그릇 행(行)하였다. 그의 사명(使命)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싸움은 이제 시작(始作)에 불과(不過)하였다. 그가 만일 굳건히 서서 왕비(王妃)에게 기별(寄別)을 보내 바알의 선지자(先知者)들을 이기게 하신 분이 지금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想起)시켜 주었더라면 천사(天使)들이 그의 생명(生命)을 보호(保護)할 준비(準備)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發見)했을 것이다. 놀라운 모습(模襲)으로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이세벨에게 임(臨)하여 백성들에게 대단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며 힘 있는 개혁(改革)이 전국(全國)을 휩쓸었을 것이다(선지자와 왕, 160).
⑵.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保存)하기 위해 도망(逃亡)함으로써 원수(怨讐)의 술수(術數)에 넘어갔다. 브엘세바로 도망간 것은 갈멜산에 얻은 승리(勝利)의 효과(效果)를 현저히 감소(減少)시키는 행위였다.(성경주석, 왕상 19:2-3)
⑶.<용기(勇氣)는 하나님을 쳐다봄으로 가능(可能)함>
어떤 특수(特殊)한 일을 수행(遂行)함에 있어서 아무리 용감(勇敢)하고 성공적(成功的)이었던 사람일지라도 그의 믿음이 시험(試驗)을 당할 만한 환경(環境)이 조성(造成)되었을 때, 만약 그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용기를 잃게 될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능력의 현저한 증거를 그에게 주신 이후(以後)라 할지라도, 비록 그가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하게 된 후일지라도, 만약 그가 전적(全的)으로 전능자(全能者)를 신뢰(信賴)하지 않으면 실패(失敗)하고야 말 것이다. (리뷰 1913. 10. 16).
⑷.믿음과 신앙(信仰)이 아무리 신실(信實)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환경(環境)과 상황(狀況)에 따라 얼마든지 불안(不安)과 낙담(落膽)과 우울감에 빠질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도망(逃亡)을 칠 수 있는 것이 죄인(罪人)인 인간(人間)들임을 엘리야의 경우(境遇)에서처럼 교훈(敎訓)하고 있다.
(8월18일(水) <지쳐서 더는 달릴 수 없게 됨>
(Q)~(열왕기상 19:4)에서 엘리야는 광야(廣野)로 하룻길쯤 도망(逃亡)가다가 하나님께 자기 생명(生命)을 취(取)해 달라는 즉 죽여 달라는 기도(祈禱)를 한 원인(原因)이나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A)~⑴.불(火)과 능력(能力)의 선지자(先知者)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場面)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軟弱)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實狀) 선지자(先知者)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歎願)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權能)을 힘입어 큰 기적(奇蹟)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恒常)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軟弱性)을 생각하며 늘 겸손(謙遜)한 자세(仔細)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만나주석-왕상 19:4)
⑵.(왕상 19:4)절에서 엘리야가 자신이 선조(先祖)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具體的)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于先) 본 절(節)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自嘲)하는 비애(悲哀) 섞인 말임을 명확(明確)히 하자.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을 필생(畢生)의 사명(使命)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記憶)하자.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成功)한 듯 보이는 순간(瞬間)에 닥친 위기(危機)(왕상 19:1~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挫折)과 허탈감(虛脫感)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悲嘆)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선조(先祖)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歷史)의 성공(成功)과 실패(失敗)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失望)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왕상 19:4, 만나주석)
⑶.엘리야가 멈추어 섰을 때 죄책감(罪責感)몰려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실망(失望)하게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엘리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軟弱)한 실체(實體)를 경험(經驗)하게 되고 자신의 무능(無能)을 인식(認識)함으로 우울증과 자기혐오(自己嫌惡)의 나락(奈落·那落)에 서게 된다. 이때에 자신의 무능(無能)과 무가치(無價値)함을 인정(認定)하고 멈추어 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라신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도우실수 있기 때문이다.
(8월19일(木) <쉼 그리고 그 이상(以上)의 것>
(Q)~(열왕기상18:38)에서의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奇蹟)을 보였고 바알 선지자들의 즉결 처형(處刑)을 실행(實行)했던 엘리야도 (왕상 19:1~5)에서는 이세벨의 협박(脅迫)을 듣고 도망(逃亡)가면서 죽기를 간구(懇求)한 엘리야의 경험(經驗)에서 우리는 진정(眞正)한 “쉼”과 그 이상의 영원(永遠)한 미래(未來)에 대하여 어떤 교훈(敎訓)을 얻을 있습니까?
(A)~⑴.우리는 엘리야의 경험(經驗)을 통해서 인간(人間)의 방법(方法)이나 능력(能力)의 힘을 의지(依支)할 때는 여지없이 실패(失敗)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能力)의 결과(結果)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리고 자신의 생각과 능력(能力)을 보거나 믿을 때에는 여지없이 지치고 낙담(落膽)하고 실수(失手)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限界)를 인정(認定)하고 전능자(全能者)의 도움이 절실할 때 까지 기다리신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방향(方向)을 전환(轉換)시키시고 참된 쉼과 더 좋은 미래(未來)를 경험(經驗)할 수 있도록 원(願)하신다.
⑵.믿음이란 단순한 감정(感情)이나 기분(氣分)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銘心)하고, 우울하거나, 낙심(落心)되거나 두렵거나 걱정과 어려움이 임(臨)할 때 우리는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에게 맏길 때 진정한 “쉼”과 안식(安息)을 누릴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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