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예수, 새 언약의 중보자(질문, 대답, 설명) 0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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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2-12 02:44 조회6,305회 댓글0건본문
제8과 예수, 새 언약의 중보자
(2월 1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5분)
연구 범위: 히 7:11~19, 히 8:10~12, 렘 31:31~34, 히 8:1~6, 출 24:1~8, 겔 36:26, 27
기억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롭고 더 좋은 언약을 중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요구하는 죽음의 형벌을 없이하시고 새 언약이 가능케 하셨다.
이와 같은 진리가 히브리서 10:5~10에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언약이 요구하는 대로 완전히 순종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같은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아의 바람을 보여 주는 시편 40편을 언급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원래의 문맥에서 이 구(‘하나님의 뜻을 행하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덕적 순종을 묘사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가 동물의 제사가 제공할 수 없었던 가납할 만한 속죄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 구를 사용한다”(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성경 주석 13권, 570).
바울은 시편 40편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관련된 특별한 중요성을 읽어 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개시된 새 언약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어 주었는지 깨닫는다.
- 느끼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보증해 주고 계심에 감사한다.
- 행하기
마음의 변화를 통한 참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다.
TMI 위로
2. 옛 언약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가진 한계는 무엇이었습니까?(히 7:11~19)
※ 새언약을 가리키는 표상적 역할이며 죄를 온전히 처리할 수 없었다.
3. 옛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의 본질은 무엇입니까?(히 8:10~12, 렘 31:31~34)
※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4.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히 8:1~6)
※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후에 사람을 위하여 하늘 보좌에서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5. 히브리서 8:6에 기록된 “더 좋은 약속”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예수님이 친히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 것이다.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순종은 무엇에서부터 시작될까요?(마 22:34~40)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나타난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다.
결론
옛 언약은 우리에게 장차 다가올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 줄 뿐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온전함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새 언약을 제정하시고 우리를 위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마음의 변화를 통해 사랑이 동기가 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월 13일(일) 새 언약의 필요성
히브리서 7:11~19을 읽어 보라. 새 언약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히7:11~19]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답: 레위 계통의 제사장으로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신 사실은 새 언약이 개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옛 언약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었다(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율법은 그 외의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저자는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제사장 직분에 관한 율법과 언약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결론 내린다(히 7:12, 18, 19).
옛 언약의 문제는 그것이 온전함을 제공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히 7:11). 바울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과 그 사역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제사, 절기, 등등) 그들을 통해 바쳐진 제물들은 참되고 온전한 속죄 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제공할 수 없었다(히 10:1~4, 히 9:13, 14, 히 10:19~23).
새 언약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을 소홀히 대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사역과 성전의 의식들은 그들을 우상 숭배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올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켜 보여 주기 위해 제정되었다. 히브리서는 모든 제사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히 10:1)임을 강조한다.
모든 제사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여 줌으로 백성들에게 그들의 소망과 믿음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사 53장과 비교)에게 두도록 도와주어야만 했다. 바울이 율법에 관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또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와 같은 개념을 강조하고 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이 아무리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없다(롬 3:20~28, 롬 7:12~14). 십계명은 의로움에 대한 완전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거울을 본다고 해서 얼굴에 있는 주름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 자체가 의로움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온전한 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속주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묵상>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아무리 완벽하게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율법은 아담 자손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죄인인 상태에서 율법을 지켜도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을 거울로 비유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셨다. 어두운데서 갑자기 햇빛으로 나오면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처럼 사망의 죄인이 구주의 빛으로 그냥 나오면 빛이 도리어 어둠을 더욱 짙게 하고 빛을 피하게 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훈련하여 희미한 빛에서부터 점점 밝아져서 정오의 빛으로 나오게 하신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은 사망과 죄의 몸으로 육신의 생명을 죽을 때까지만 이어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생명의 빛으로 나올 때 있을 부작용을 생각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점점 광명으로 나오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은 이 훈련의 의미를 몰라서 그들이 더 어두워졌다. 그들은 그 어두움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이 비치자 그 빛을 꺼버렸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런 역사적 경험을 거울삼아 참 빛으로 나아가서 빛에 거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자신을 밝게 보고 주님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감사와 충성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옛 언약은 백성들에게 장차 다가올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켜 보여 줄 뿐 온전한 속죄와 구원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했다.
2월 14일(월) 새 언약의 특징
히브리서 8:10~12을 신명기 6:4~6, 30:11~14 그리고 예레미야 31:31~34과 비교해 보라. 이 말씀들이 새 언약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히8:10~12]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신6:4~6]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30:11~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답: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항상 마음에 있으므로 생활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도 의미가 같다.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새 언약은 예레미야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새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 당신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처음 맺으셨던 언약을 갱신하신 것이었다(렘 31:31~34). 그러므로 예레미야 31장은 ‘새로운’ 언약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맺은 처음의 언약을 ‘갱신하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새로운’이라고 해석되는 히브리어 하다샤(hadasha)는 ‘갱신’과 ‘완전히 새로운’이라는 두 가지 뜻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
옛 언약의 문제는 백성들이 그 언약을 깨뜨렸다는 데 있었다(히 8:8, 9). 언약 자체가 아니라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상징들을 통하여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그들의 믿음을 그분에게 두었다면, 언약은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평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삶 속에서 언약의 목적들이 성취되고 마음에 율법이 새겨져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시 37:31, 40:8, 119:11, 사 51:7).
새 언약이 옛 언약을 갱신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완전히 새로운 측면도 존재한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 관한 약속은 포로 생활 이전에 존재했던 언약의 조건, 즉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으로 여러 차례 파기되고 갱신되기를 반복했던 그 언약의 조건들이 갱신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새 일”(렘 31:22)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렘 31:32)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백성들의 불충실함으로 인해 모세의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들은 전혀 성취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들에 의해 주어진 보증 덕분에(히 7:2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의 목적들을 성취하실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율법을 변경시키거나 기준을 낮추지 않으셨다. 대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언약적 약속의 보증으로 보내셨다(히 7:22, 6:18~20). 이것이 바로 이 언약이 저주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에, 새 언약은 축복만 포함하고 있다(갈 3:13).
<묵상>
디모데후서 2:13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주 불충실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당신의 백성들과 계획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답: 그분의 언약은 틀림없이 성취된다는 확신을 준다. 우리도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가설명> 새언약, 옛언약이라는 말은 언약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내용은 옛 언약이 파기되었으므로 그 언약을 새롭게 한 것이다. 언약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것이 이 지구의 사람에게는 최초의 언약이다(호6:7). 그 언약은 영원한 생명의 언약이다(요일 2:25). 그런데 아담이 그 언약을 어겨서 이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는 육체가 되었고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그에게서 출생하는 자손들은 아담에게 없어진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었다. 모든 그의 후손은 다 육체와 사망의 존재로 출생한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하신다. 처음에 아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도 창조주의 일방적인 언약 선포였던 것처럼 여자의 후손으로 뱀을 멸하고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다는 구원 복음의 선언도 일방적이다. 이것이 다 언약인데 새언약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옛언약은 어디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호렙산 아래서 백성들고 맺은 언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백성들과 의논해서 그들이 언약대로 준행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맺은 언약이다. 그리고 언약의 열 말씀을 선포하신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언약의 내용이다. 그것을 쓰고 짐승의 피를 뿌려 조인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언약의 조문을 어겼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히8:9). 그것은 먼저 피로 조인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겠다는 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조인했다. 역사적 시간으로 호렙산 언약보다 늦었다. 그래서 이 언약을 새언약이라 한다. 그것은 아담 자손들을 예수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는 언약이다. 에덴동산 언약이나 똑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언약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언약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자가 된다. 그들은 언약 조문이 생명의 길이 되어서 그길로 가는 것이 생활이 되게 한 것이다. 은혜의 언약이다.
<교훈>
새 언약 속에는 백성들의 불충실함으로 인해 깨져 버린 언약을 갱신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일에 대한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2월 15일(화) 새 언약에 있는 더 좋은 중보자
히브리서 8:1~6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언약의 더 좋은 중보자가 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8:1~6]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답: 그분의 참 장막에서 봉사하시며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중보자로 번역되는 헬라어 메시테스(mesitēs)는 중간이라는 뜻을 가진 메소스(mesos)라는 단어에서 왔으며 중간에서 걷거나 서 있는 사람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였다. (1) 둘 이상의 당사자들 사이의 중재자, (2) 협상가 또는 사업상 중개인, (3) 법적 증언의 증인, (4) 협상의 실행을 보증하는 보증인.
히브리서에 사용된 ‘중보자’라는 번역은 메시테스(mesitēs)라는 단어가 가진 넓은 의미를 담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위에서 설명된 헬라어 의미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까지의 사용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네 번째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자’, 또는 문제를 가진 당사자들을 화해시키는 협상가, 또는 계약을 증명하는 증인, 또는 계약이 충족되었음을 증명하는 증인으로 나타나는 대신 오히려 새 언약의 ‘보증인’으로 소개된다(히 7:22). 히브리서에서 ‘중보자’라는 단어는 ‘보증인’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언약적 약속들이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신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으나 깨져 버린 첫 언약의 요구들을 충족시킴으로 새 언약의 제정을 가능하게 했다(히 9:15~22).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깨져 버린 언약의 법적 의무들을 직접 짊어지신 보증인이시다. 또한,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는 것이다(히 6:19, 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심으로 언약을 보증하신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그분을 당신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아버지께서는 우리 또한 부활시키셔서 당신에게로 이끌어 가실 것임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시며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한 온전한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모세보다 더 큰 중보자이시다(히 8:1~5, 히 10:5~10). 모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했지만(출 34:29~35),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이시다(히 1:3, 요 1:14).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했지만(출 33:11), 예수님은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히 4:12, 13, 요 1:1~3, 14).
<묵상>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을 충족시키셨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것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우리 순종의 역할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그분의 지체가 되어서 그 지체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못하면 예수님의 몸은 지체 장애가 된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이 중보자로 계시지 않으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비록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예수님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야곱의 환난 때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때는 예수께서 성소 봉사의 중보를 마치셨기 때문에 성소 봉사의 중보가 필요 없어서 중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당신 안에 품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지금 우리가 땅에 있지만 예수님 안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라고 확언했다.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 중보자라는 말에는 대제사장으로 봉사할 때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중보자시오, 또 우리를 예수님 안에 두셨기 때문에 언제나 중보자이시다. 야곱의 환난 때도, 영원한 나라에서도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항상 예수님 안에 있다. 참 오묘한 이치이다.
<교훈>
십자가 죽음을 통해 첫 언약의 요구들을 충족시킴으로 새 언약의 제정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
2월 16일(수) 새 언약에 있는 더 좋은 약속
우리는 자칫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큰 상급을 약속한다는 의미에서 “더 좋은 약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신자들에게도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상급을 약속해 주셨다(히 11:10, 13~16). 히브리서 8:6에서 언급하고 있는 “더 좋은 약속”은 다른 종류의 약속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그 둘 사이의 공식적인 약속의 교환이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출애굽기 24:1~8과 히브리서 10:5~10을 비교해 보라. 두 약속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출24:1~8]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2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히10:5~10]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답: 언약서가 있고 그것을 준행하겠다는 약속이 있고 피로 비준하였다.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예수께서 친히 다 행하셨다. 그분이 친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 그분이 몸을 드려서 자기 피로 비준하였다. 하나님의 율법(뜻)을 행한다는 것인 같은 것이고 비준한 피가 다르고 백성이 친히 준행해야 했고, 예수께서 친히 다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하신 것이 우리가 한 것이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피로 비준되었다. 이 피는 제단 위와 아래에 뿌려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로 약속했다.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에덴 낙원에서 우리의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과 똑같으니 곧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만일에 영생을 이보다 약한 조건으로 허락하여 준다고 하면 온 우주의 행복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고 모든 비애와 고통을 일으키는 죄가 영원히 불멸(不滅)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6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의 절대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당신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온전한 삶을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순종은 언약적 약속들을 보증한다(히 7:22).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언약의 축복을 주실 것을 요구한다. 그 후에 그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약속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힘 주시는 성령을 주신다.
<묵상>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요구들을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실이 고린도후서 1:20~22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나요? 여기에서 우리를 위한 어떤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고후1:20~22]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답: 예수께서 언약을 다 이루셨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다 예가 되었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영원 전에 세웠고 태초부터 있는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따로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 없게 되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 거듭난 사람들의 생명이 된다. 그러면 그 생명이 역사하여 그리스도인을 살아가게 한다.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언약을 성취한 그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나는 그 분의 계명이 영생임을 아노라”(요12:50 한글킹). 계명이 영생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얻은 사람은 계명이 생활이 된다. 이를 악물로 계명을 지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었다는 뜻을 깨달아야 하고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과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생명의 성령께서 순간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경험을 순간마다 해야 한다.
<교훈>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약속을 누리게 될 것이다.
2월 17일(목) 새 언약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함
예레미야 31:33과 에스겔 36:26, 27에 나타난 새 언약의 약속을 비교해 보라. 이 둘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렘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답: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다.
첫 번째 언약의 문서는 하나님에 의해 돌판에 기록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의 증거로 언약궤에 보관되었다(출 31:18, 신 10:1~4). 하지만 돌판에 기록된 문서는 깨질 수 있었으며,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은 예레미야가 경험한 것과 같이 찢겨 불태워질 수 있었다(렘 36:23).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록하실 것이었다. 마음은 기억과 이해를 관장하고(렘 3:15, 신 29:4), 특별히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곳을 가리킨다(렘 3:10, 29:13).
이 약속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 율법과 그것에 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었다(렘 17:1). 그들은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렘 13:10, 23:17), 옳은 일을 결코 행할 수 없었다(렘 13:23).
이스라엘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율법의 변경을 선언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충성이 당신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나오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된 도입부와 함께 십계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과 보호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다(출 20:1, 2).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사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로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의 순종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나타내 보여 주는 감사의 표현이 되어야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이 새 언약의 시작이다(눅 22:20). 참된 순종은 사랑의 표현으로서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마 22:34~40). 이와 같은 사랑은 믿는 자의 삶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며(롬 5:5), 성령의 임재는 사랑으로 표현된다(갈 5:22).
<묵상>
만일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다면, 우리가 그들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순종이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랑의 실체를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을까요?
<부가설명> 아마도 교과 설명을 하면서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라는 말을 여러번 했다.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므로 사랑 자체가 되신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계시하였다. 요일 3:14을 읽으면 생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 증명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말씀이다. 믿음은 역사(役事)로, 사랑은 수고로, 소망은 인내로 드러낸다. 하나님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는 수고와 부활로 생명 자체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뜻을 생활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다. 사랑의 극치는 죽을 사람을 살리려는 정신과 수고이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사망에 있는 자들을 이끌어 내는 수고인데 흔한 말로 전도, 선교라고 한다. 이 정신이 없고 이 정신이 발로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교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율법에 순종함으로 당신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2월 1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 같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심어지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애에 실천되지 않을 것인가? 사랑의 원칙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심어지고 사람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새로워지면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생애를 형성하지 않을 것인가? 순종-사랑으로 하는 봉사와 충성-은 제자 되는 참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일 2:4)다고 하였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는 증거이다.
자기의 죄가 흉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의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깊은 사랑이 뿌리 박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은 그의 신성한 품성을 감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도덕적 결점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을 보지 못하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다”(정로의 계단, 60, 64, 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기록된 엘렌 G. 화잇의 글을 묵상해 보라.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의 죄가 더 분명히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여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함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주는가?
※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더욱 큰 은혜로 나타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롬5:20).
2.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에 기록된다는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이와 같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은 “죽은 행실”(히 9:14)이라고 표현된 율법주의적 순종을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는가?
※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날 때 된다(롬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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