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쉼이 없는 선지자 - (핵심 Q-A)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1-09-14 18:05 조회2,909회 댓글0건첨부파일
- 제12과 쉼이 없는 선지자 이봉주-한글.hwp (23.5K) 17회 다운로드 DATE : 2021-09-14 18:05:25
본문
제12과 : <쉼이 없는 선지자(先知者)>
(2021-09-18(안) 18시36분)
(09월12일(日) <도망(逃亡)치다>
(Q)~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니느웨)에 불순종(不順從)(“다시스”로)했으며, 또한 선지자(先知者) 요나의 신앙(信仰)으로부터 배울 교훈(敎訓)?
(A)~⑴.하나님의 뜻을 인간(人間)의 관점(觀點)(요나의 주관적(主觀的)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인 명령(命令)을 거부(拒否)하게 되었다.
⑵.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選擇)하여 자기 생각대로 판단(判斷)하고 행동(行動)하였다.
⑶.요나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拒逆)하려 했던 궁극적(窮極的)인 이유(理由)는 하나님의 권능(權能)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民族)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警告)를 받아들이고 심판(審判)을 면(免)한다면, 그에 대한 영향(影響)은 곧바로 이스라엘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實際)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앗수르에게 위협(威脅)을 받았고, 예후가 통치하던 B.C.841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선포(宣布)할 당시만 해도 니느웨의 멸망(滅亡)을 기대(期待)했다(4:2).” (욘 1:3, 만나주석)
⑷.요나는 하나님의 명령(命令)이 감당(堪當)하기에 너무 “어렵”다는 것을 발견(發見)했고, 따라서 그들처럼 적어도 이 경우(境遇)에는 “그와 함께”(요 6:60, 66) 행(行)하지 말아야겠다고 느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이행(移行)해야 할 짐을 지우실 때에는 그들이 그 짐을 감당(堪當)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사실(事實)을 깨닫지 못했다.(욘 1:3, 재림교주석)
⑸.요나는 자기 의무(義務)를 피(避)하여 그렇게 멀리 떨어지고 분주한 곳으로 도망(逃亡)쳐 양심(良心)의 소리를 잠재우기를 희망(希望)했다.
⑹.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順從)이후에 오는 참된 쉼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生覺)과 방법(方法)으로 “쉼”을 찾았으나 그 방법(方法)의 “쉼”은 진정(眞正)한 쉼이 아니라는 것을 인내(忍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르는 방법으로의 순종(順從)을 통해서 진정한 “쉼”을 얻었다.
⑺.인간적(人間的)으로의 방법이나 행동(行動)들은 인간의 죄성(罪性)과 연약(軟弱)함으로 인하여 실패(失敗)할 수밖에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순종(順從)을 따를 때 에야만 진정한 “쉼”을 누리게 된다는 교훈(敎訓)이다.
⑻.요나 자신도 하나님과 나누는 구원(救援)의 관계(關係)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順從)함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쉼을 찾기를 바라셨습니다.
(09월13일(月) <사흘간의 쉼>
(Q)~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의 “쉼”을 통해 깨달았던 것과, 우리가 교훈(敎訓)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A)~⑴.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내적(內的)인 상태(常態)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구(求)하는 시간(時間)을 통(通)하여 “참된 쉼”의 귀중(貴重)함을 깨달았다.
⑵.요나는 도망자(逃亡者)에 불과(不過)했던 자신을 향(向)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며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가장 안전(安全)한 장소(場所)는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것임을 확실(確實)히 배웠다.
⑶.요나(욘 2:3절)에서 자신(自身)이 처(處)한 상황(狀況), 즉 깊음 속으로 빠져든 자신(自身)의 처지(處地)를 계속(繼續) 토로(吐露)하면서 그의 절망적(絶望的)인 상황(狀況)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자신이 인간적(人間的)인 상황(狀況)을 경험(經驗)하면서 비로소 인간적(人間的)인 어떠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형편(形便)에 처(處)해 있음을 고백(告白)하게 되며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의 의존적(依存的)인 존재(存在)로 순종(順從)의 삶을 다할 때 비로소 참된 “쉼”이 존재(存在)한다는 것을 통찰(洞察)하게 되었다.
(09월14일(火) <사명(使命)을 완수(完遂)함>
(Q)~그에게 주어진 명령(命令)이나 사명(寺名)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遂行)했는지 살펴보세요.
(A)~⑴.요나는 새로운 사명(使命)을 위촉(委囑)받고 거기에 기꺼이 순종(順從) 한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다시 사명(使命)을 부여(附與)하셨다는 것은 이전(以前)의 불복종(不服從)을 완전히 용서(容恕)하신다는 증거(證據)였다. 요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니느웨와의 전쟁(戰爭)을 포고(布告)하기 위해 파견(派遣)된 전령(傳令)이었다(2절). "일어나 저 큰 성읍(城邑)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선포(宣布)하라." 우리에게 선포(宣布)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듣고 경고(警告)로 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에게 선포(宣布)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믿음을 거기에 혼합(混合)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를 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파송(派送)되었다.
⑵.그는 자기의 사명(使命)을 신실(信實)하게 그리고 담대(膽大)히 전(傳)했다. 요나는 그들에게 이 큰 성읍(城邑)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니느웨성이 전쟁(戰爭)에 의하지 않고 하늘로부터의 직접적(直接的)인 타격(打擊) 즉 지진(地震)이나 유황(硫黃)불에 의해(소돔처럼) 무너지리라는 것을 공표(公表)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⑶. 요나는 그 성(城)이 곧 무너진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40일이 지나면 그 성(城)은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예기간(猶豫期間)이 허용(許容)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기다리실 것이다. 즉 이런 경고(警告)가 주어지면 그들이 스스로를 낮추고 그 행위(行爲)를 고쳐서 경고(警告)된 파멸(破滅)을 방지(防止)할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시기 위해서이다.
⑷.비록 니느웨의 악(惡)이 복수(復讐)해 줄 것을 절규(絶叫)했지만 하나님께서 사십일 간(間)은 그 성(城)을 살려 두실 것이다. 이것은 심판(審判)의 길로 오시는 하나님을 회개(悔改)로 자을 수 있도록 시간적(時間的) 여유(餘裕)를 주기 위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以上) 더 기다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⑸.어느 죄인(罪人)이라 할지라도 참된 회개(悔改)의 경험(經驗)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쉼”을 얻게 되는 것이고 참된 행복(幸福)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09월15일(水) <마음의 평안(平安)이 없는 화(禍)가난 선교사(宣敎師)>
(Q)~(요나 4:1~4)을 보면 요나 선지자(先知者)는 하나님께 불만(不滿)을 토(吐)하고 있다. 선지자(先知者)로써의 사명(使命)을 잘 완수(完遂)하였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마음의 평안(平安)즉 <쉼>이 없는 이유(理由)는 무엇인가?
(A)~⑴.요나는 부당(不當)하게도 하나님과 논쟁(論爭)을 벌인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문제(問題) 삼았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悔改)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푸셔서 살려 주셨는데 요나는 이것을 불만(不滿)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요나는 니느웨인들에게 진노(震怒)의 메시지만 전(傳)했고 그들의 회개(悔改)를 방조(傍助)하거나 격려(激勵)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우리의 예상(豫想)과 전혀 어긋난다. 그들은 회개(悔改)했고 자비(慈悲)를 얻었던 것이다
⑵.요나는 그들(니느웨)이 자비(慈悲)를 얻은 데 대해 불평(不平)했고 그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였다. "요나는 심(深)히 싫어하고 노(怒)하였다." 그는 열화(熱火)같이 노(怒)하였다.
⑶.요나는 심(深)히 싫어하고 노(怒)할 정도(程度)로 사제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심령(心靈)을 다스리지 못했다. 따라서 성(城)이 무너지듯 그는 시험(試驗)과 유혹(誘惑)에 노출(露出)되었다.
⑷.요나가 하나님의 행위(行爲)를 불쾌(不快)히 여기고 노(怒)여워할 정도로 하나님께 대해 존중심(尊重心)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셨을 때 다윗이 분노(忿怒)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삼하 6:8). 우리는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즐거워해야 하며 비록 그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묵인(黙認)해야 한다.
⑸.요나가 니느웨인들의 회개(悔改)와 신적(神的) 은총(恩寵)에로의 영입(迎入)을 싫어하며 노(怒)할 정도로 인간들에 대해 애착심(愛着心)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서기관(書記官)과 바리새인의 범(犯)한 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구주(救主)께서 세리(稅吏)와 죄인(罪人)들을 즐겨 환대(歡待)하신다는 이유로 불평(不平)을 했다.
⑹.요나는 자기 나라의 명예(名譽)에 대해서는 질투심(嫉妬心)이 대단했다. 니느웨의 회개(悔改)와 개혁(改革)은 회개(悔改)하지 않고 개혁(改革)되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 완고성(頑固性)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회개(悔改)하는 이들 이방인(異邦人)에게 베푸신 은총(恩寵)은 유다 민족(民族)에게 흉조(凶兆)가 되었던 것이다. 요나의 열심(熱心)은 지식(知識)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 10:2).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고려(考慮)한다는 구실(口實)로 하나님의 행위(行爲)를 불쾌(不快)히 여기는 자가 적지 않다는 데 유의(有意)하자.
⑺.요나는 자기 자신의 명예(名譽)에 대해 질투심(嫉妬心)을 품고 있었다. 요나는 니느웨가 만일 40일 이내에 멸망(滅亡)되지 않으면 자기가 거짓선지자로 간주(看做)되며 그런 불명예(不名譽)스런 낙인(烙印)이 찍힐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점을 우려(憂慮)하거나 불만(不滿)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멸망(滅亡)의 경고(警告) 속에는 파멸(破滅)을 방지(防止)하기 위해 그들이 회개(悔改)해야 하며 회개(悔改)하면 파멸(破滅)이 방지(防止)된다는 암시(暗示)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⑻ 요나는 새삼스럽게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逃亡)간 자신을 정당화(正當化)시키기 시작(始作)한다. 그는 처음에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命令)을 받자 줄행랑을 쳤고 앞에서 충분(充分)한 이유(理由)를 지닌 채 자신을 정죄(定罪)하였었다.
선교(宣敎)가 성공(成功)할까봐 두려워하다니 요나는 참으로 이상(異常)한 부류(部類)의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 봐야 아무 소득(所得)이 없다는 데서 실망(失望)을 느끼고 일을 그만 두고 싶은 유혹(誘惑)을 받는데 반해 요나는 자기 선포(宣布)로써 좋은 결과(結果)가 나올까봐 선포(宣布)를 거절(拒絶)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꼭 같은 부패(腐敗)한 견해(見解)를 고집(固執)하고 있다.
⑻. 격정(激情)을 못이긴 요나는 죽음을 소원(所願)하고 있다(3절). 이것은 까닭 없는 격정(激情)에 의한 이상(異常)한 표현(表現)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取)하소서. 니느웨를 살리셔야 한다면 나로 주의 말씀과 내말의 반증(反證)이 드러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영광(榮光)이 이방인(異邦人)에게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로 죽게 하소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은혜(恩惠)가 충분(充分)치 못하여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 둘 다는 충족(充足)시키지 못한다거나 니느웨인들이 은총(恩寵)속으로 영입(迎入)되기 때문에 유대인은 자비(慈悲)로부터 더욱 멀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이다.
⑼.요나는 너무도 냉정(冷靜)을 잃고 있어서 죽기에 적합(適合)하지 않았다. 실상(實狀) 하나님과 언쟁(言爭)을 벌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감히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석(審判席) 앞에 나아갈 생각을 하는가? 이것은 세상 밖으로 나갈 자의 심적(心的) 자세(姿勢)로 온당치 못하였다. 그러나 흔히 격(擊)한 감정(感情)에서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準備)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으로 해서 죽음을 바랄 이유가 조금도 없다. 우리의 책무(責務)는 생명의 사업(事業)을 행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께서 원(願)하시는 시기(時機)와 방법(方法)에 의해 우리 생명을 가져가시도록 그에게 맡기는 일이다.
⑽."내가 성내는 것은 합당(合當)한가?" 분노(忿怒)가 일어날 때 우리는 이런 점검(點檢)으로써 분노(忿怒)를 소화(消火)해야 한다. "내가 그토록 빨리, 그토록 자주, 그토록 오래 화(禍)를 내는 것은 합당(合當)한가? 내가 그토록 격정(激情)에 휘말려서 성난 김에 남한테 그런 욕설(辱說)을 퍼붓는 것이 합당(合當)한가? 내가 이런 고집(固執) 센 분노(忿怒)가 나를 지배(支配)하도록 허용(許容)하는 것은 가(可)한가?"
⑾.인간은 선지자(先知者)든 남녀노소(男女老少)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莫論)하고 부족(不足)함과 편견(偏見)과 이기심(利己心)이 있기 때문에 인생여정(人生旅程)에서의 참 평안(平安)과 참 안식(安息)을 갖지 못하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로 바람을 잡고 허망(虛妄)하게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에게(그토록 죄(罪)많은 “니느웨”사람들일지라도) 다가 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理解)해주시고 돌이켜서 하나님안에서의 참 행복(幸福) 참 “쉼”을 누리도록 지금도 초청(招請)하고 계신다. 세미(細微)한 성령(聖靈)의 음성(音聲)을 듣기 바라신다.
(09월16일(木) <모두를 위한 계획(計劃)>
(Q)~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을 어떻게 요약(要約)할 수가 있습니까?
(A)~⑴.영혼(靈魂)의 무한(無限)한 가치(價値)를 알지 못한 요나였다. 요나는 그 성읍(城邑)의 악(惡)함에도 불구(不拘)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셔서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 회개(悔改)하게 하신 그분의 목적(目的)을 알았을 때에 먼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恩惠)를 기뻐했어야 하였으나, 그 대신 자신이 거짓 선지자(先知者)로 여김을 받을 가능성(可能性)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자신의 평판(評判)에 눈멀어 그는 그 불쌍한 성읍(城邑) 중에 있는 영혼(靈魂)의 무한(無限)히 큰 가치(價値)를 보지 못하였다.
⑵.니느웨 사람들을 향(向)한 하나님의 자비(慈悲)는(요나 3:10) 요나를 격분(激忿)하게 했다. 하나님의 자비(慈悲)는 그가 불순종(不順從)했을 때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하나님께서 동일(同一)한 자비(慈悲)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셨을 때 그는 그것을 질투(嫉妬)했다.
.
⑶.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그분의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願)하셨다. 그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다. 요나를 부르신 또 다른 이유(理由)는 하나님께서 요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하나님과 함께 동역(同役)하면서 하나님을 닮아 가기를 원(願)하셨다. 하 나님께서는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구원(救援)의 관계(關係)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順從)함을 통 해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쉼을 찾기를 바라셨다. 그 일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믿음과 소망(所望)을 나누어 주는 일이 포함(包含)되어 있었다.
⑷.인간들은 편견(偏見)으로 말미암아 차별(差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차별(差別)이 없으시다. 차별(差別)하는 마음에는 참된 안식(安息)과 평안(平安)이 없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구원자(救援者) 예수그리스도가 내안에 있을 때 차별(差別)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참 안식(安息)과 진정(眞正)한 “쉼”이 있게 될 것이고 누리게 될 것이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