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더 많은 것을 갈망함(질문, 대답, 설명).0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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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9-03 15:26 조회5,678회 댓글0건본문
제11과 더 많은 것을 갈망함
(9월 1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46분)
연구 범위: 고전 10:1~11, 레 4:32~35, 요 1:29, 히 4:1~11, 시 95:8~11.
기억절: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6).
미국 뉴욕에 있는 퀸즈 미술관에는 뉴욕의 건물들을 본떠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1:1,200의 비율로 만들어진 이 모형이 차지하는 면적만도 거의 879m2에 달한다. 100명의 공예가가 3년 넘게 작업한 끝에 1964년도에 완성된 모형은, 이후 도시의 1990년대까지의 모습을 반영하여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2021년도의 도시 경관을 그대로 보여 주지는 않지만 복잡한 도시의 본래 모습을 굉장히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모형은 어디까지나 더 웅장하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복잡한 원본의 복제품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모형이 이와 마찬가지다. 모형은 원본의 상징일 뿐 결코 원본이 아니다. 모형은 원본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 결코 원본을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원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성경은 하늘에 존재하는 더 큰 실체를 보여 주는 사건과 제도의 축소된 모형들로 가득하다. 이번 주 우리는 안식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4장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러한 실체 중 한 가지를 발견해 보려고 한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최종적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교훈을 배운다.
- 느끼기
믿음으로 인내하며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안식이 약속되었음을 감사한다.
- 행하기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으로 살겠다고 ‘오늘’ 결심한다.
2. 고전 10:1~11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기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고전 10:11)
※ 옛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구약에 나타난 희생 제도는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표상과 모형입니까?(레 4:32~35)
※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4.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히 4:3, 11)
※ 믿음, 순복.
5. 바울이 “오늘”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히 4:7)
※ 구원의 복음은 오늘 즉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6.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최종적인 안식에 참여할 사람은 누구인가요?(갈 3:26~29)
※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결론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표상과 상징을 통해 하늘에 존재하는 실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험은 하늘을 향해 전진하는 성도들을 위해 허락된 본보기로서 그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최종적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영적 교훈과 가르침을 받습니다.
9월 5일(일)
모세에게 속하여 침례를 받음
고전 10:1~11을 읽어 보라. 바울이 “본보기”라고 이야기했을 때, 고린도에 있던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고전10:1~1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답: 옛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다. 그런 본을 받지 않고 깨어서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고전 10:6에서 사용되었으며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 “본보기”(examples)라고 번역되는 헬라어는 튀포스(typos)이다. 영어 단어 ‘타입’(type)이 이 단어에서부터 왔다. ‘타입’은 그 자체로는 절대 원본이 아니며 상징 또는 어떤 다른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타입’은 다른 어떤 것의 모형이다.
히 8:5은 이러한 관계의 좋은 예를 보여 준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이 본문은 하늘과 땅에 있는 실체들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여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가 산 위에서 보았던 “본을 따라” 광야의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시는 출 25:9을 인용한다. 핵심은 지상 성소에 포함된 모든 예식과 절차들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계신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들의 상징이며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다시 언급한다. 여기에 언급된 “우리 조상들”은 애굽을 떠나 구름 기둥의 인도함을 받고, 홍해를 건넘으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침례를 받았던 그들의 조상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이 중요한 일들이 개인적인 침례의 표상 또는 본보기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출 16:31~35과 비교).
이스라엘은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는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전 10:4). 예수님이 “생명의 떡”(요 6:48)이요 “생수”(요 4:10) 되심을 기억한다면, 바울이 한 모든 말들이 타당한 것임을 알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구약의 역사를 본보기로 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영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묵상>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본보기를 통해 좋은 것이 되었든 나쁜 것이 되었든 우리는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 좋은 것은 그대로 본을 받을 것이고 나쁜 것은 결코 본받지 않아야 될 것이다.
<부가설명> 상경은 하나님께서 지구의 인생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으며, 하시는지, 또 하실는지를 기록한 계시의 말씀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한 것을 본보기로 하여 역사가 진행하는 모든 세대의 구원 받은 백성들이 실패하지 않도록 기대하신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침례로 서약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상하는 역사적 표상(튀포스)이었다. 침례까지 받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악을 즐겨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고, 음행하고,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였다. 오늘날 재림성도들 중에도 이런 상태에 빠지지 말라나는 보증이 없다. 그들이 만나를 먹었던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말씀을 배운다. 그들이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것 같이 우리도 성령의 지도로 말씀을 배운다. 그렇게 지도를 받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애굽에서 나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과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처럼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바울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 우리 안에 사는 경험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갈2:20).
<교훈>
바울은 그의 글에서 구약의 역사를 본보기로 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영적 진리를 제시한다.
9월 6일(월) 의식과 희생 제도
레위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의식(儀式)과 희생 제도들은 우리가 어제 공부한 내용, 즉 구약의 상징들이 신약의 진리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해 더 많은 실례를 제시한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 중에 의식에 관한 내용을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의식들은 만약 제대로 공부하기만 한다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많은 중요한 영적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던 속죄 제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레 4:32~35의 말씀을 읽어 보라. 비록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제물을 바치며 예배할 성소나 성전은 없지만, 이 의식을 통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 의식을 요 1:29 그리고 벧전 1:18~21과 연결해 보라.
[레4:32~35]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33 그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34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 제단 밑에 쏟고 35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벧전1:18~21]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답: 이 의식은 구주 예수님의 희생과 속죄를 표상적으로 가르쳐준다.
의식은 중요한 가치와 정보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좋은 전달자인데, 그것이 주어진 상황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시간, 특정한 장소, 그리고 미리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한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기록된 희생 제사와 관련된 명령들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바칠 수 있는 제물과 때와 장소와 절차에 관하여 매우 세부적인 명령을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의식에 있어서 핵심은 피와 그것을 붓는 일과 뿌리는 일에 있었다. 그 일은 그리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으며 애초에 그렇게 계획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보기 싫은 죄를 다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식에 있어서 피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이었으며, 왜 그것을 제단의 뿔에 발라야 했는가? 성소와 연관된 대부분의 의식들이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에 관하여 설명이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모든 것이 정확히 설명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의 중요성에 대하여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레 17:11).
그런데, 레 4:35은 레 4:32~35에 대한 중요한 설명을 제시한다.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피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게 되는 모든 속죄 과정의 핵심이었다. 결국, 희생 제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표상이요 모형인 것이다.
<묵상>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면, 속죄를 위해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이셨던 예수님 자신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구원에 있어 우리가 왜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답: 죄는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한 상태를 뜻한다. 즉 영생의 생명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한 사람을 사망이 되게 해버린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사망을 실제적으로 처리하셔야 하기 때문에 친히 사람(마지막 아담)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이것을 믿어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
<부가설명> 묵상에서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면, 속죄를 위해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이셨던 예수님 자신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제안한다. 죄는 도덕적으로 표현해도 나쁘다. 그러나 존재와 생명적 시각으로 말한다면 나쁘다는 표현 정도로 그 상태를 지적하기에는 너무 모자라는 표현이다. 죄는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고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창조주를 철저하게 모독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온 우주가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루시퍼가 저지른 것이 이런 것이다. 이 지구 창조를 철저히 파괴하고 우주에 창조주를 조롱하는 사건이다. 근본적인 죄는 창조주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분의 창조한 것을 완전히 없애므로 ‘여호와는 없다’라고 우주에 공포(公布)한 상태이다. 여기 빠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렘5:12)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것을 심판하여 온 우주에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셔야 했다. 그래서 사망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루시퍼의 기만을 루시퍼 자신과 온 우주에 드러내시고 그에게 속아 사망이 되어 존재와 생명을 상실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구원신 것이다. 죄는 정말 무서운 것이다.
<교훈>
우리는 구약 시대의 의식과 희생 제도 속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발견한다.
9월 7일(화) 쉼의 “본보기”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표상과 상징에 대한 개념은 쉼에 대한 성경적 개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신약의 히브리서로 가 보도록 하자.
히 4:1~11을 읽어 보라.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출애굽과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것들은 하나님의 쉼 안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에 대해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가?
[히4:1~1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답: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하나님의 안식의 땅에 들어가는 것의 표상이다.
여기에서 인내와 충성이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비록 본문이 일곱째 날 안식일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이 본문과 그에 앞서 등장하는 말씀의(히 3:7~19)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라는 부르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복음 안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으라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과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 배운 교훈들을 진지하게 기억하라고 독자들에게 권고한다.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기회의 시간이 주어졌으니 주의를 기울이라! 이스라엘은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신뢰와 순종으로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대신, 그들은 반역하였고(히 3:7~15와 비교),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안식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다.
히 4:3은 믿음과 안식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우리는, 쉼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실제로 주실 수 있는 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때만 그분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약속을 주시는 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앞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믿었다. 그 희생 제물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쉼을 경험할 수 있었다.
히 4:3을 다시 읽어 보라. 여기서 언급된 자들의 주된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이...복음 전함을 받은”(히 4:2) 자들로서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답: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았다. 들은 바 말씀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 즉,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쉼으로 들어가는 데 어떤 도움을 주나요?
답: 구원받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삶이다. 그것은 죄의 세상에서 참된 쉼을 경험하게 한다.
<부가설명> 죄를 인간의 도덕적 잘못으로만 생각하는 한 인간의 행위가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세상에 있는 일반 종교들이 다 이런 사상으로 인간의 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죄가 인간 행위 이전의 상태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히 계시한다. 죄는 사망의 존재가 된 상태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전15:22). 아담의 씨로 출생한 모든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다. 죽은 존재라는 말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해서, 다시 말해서 스스로 행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죽은 자의 행위는 썩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존재들이다(엡4:22). 그들이 아무리 화장(化粧)하고 향수를 치고 꾸며도 그것이 사망을 없애고 생명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래서 창조주께서 친히 피 흘려(행20:28) 죽으시므로 사망을 처리하신 것이다(히2:14, 딤후1:10).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들은 완전히 썩어서 땅에 묻히기 전에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부활로 드러내신 영생의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생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분을 믿은 모든 사람에게 되돌려진다(골3:1~4). 이것이 생명의 부활이다(요5:28).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참된 쉼을 누린다. 아멘.
<교훈>
우리는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함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쉼 속으로 들어간다.
9월 8일(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4:4~7과 시 95:8~11을 읽어 보라. 시편과 히브리서에서 공통으로 주어진 경고는 무엇이며 그 경고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히4:4~7]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시95:8~11]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답: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믿음을 고무하고 있다.
히 4:4~7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맥락에서 창조 기사와 시 95:11의 말씀을 인용한다.
시 95:8~11은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과 하나님의 안식을 연결하면서 믿음 없는 이스라엘은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리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맹세를 언급한다. 물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대가 국경을 넘어 그 땅의 성들을 차지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실체를 경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골적인 불순종을 통해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은 물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히 4:6은 참된 안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 쉼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불순종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히4: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답: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다.
“오늘”이라는 말은 긴급성을 표현한다. “오늘”이라는 말은 낭비할 시간이 없음을 뜻한다. “오늘”이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응답하고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바울은 “오늘”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안식이라는 맥락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한편, 시 95:7, 8은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서만 가능한 참된 안식을 놓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경고와 호소이다.
<묵상>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할까요? “오늘”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답: 히3:13은 사람들이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오늘만 자기에게 허락된 날임을 깨닫고 ‘오늘’ 즉시 순종하고 충성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라고 권한다.
“오, 그대여!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주께로 돌아서라. 그대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대를 향상시키거나 악화시키고 있다. 그대의 행위가 사단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면 그 행위는 계속해서 해로운 결과를 끼치는 영향을 뒤에 남길 것이다. 순결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그대가 행하는 길이 황폐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재림신도의 가정, 358).
<부가설명> 히브리서 3:13은 사람에게는 오늘이라는 매일만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계시한다. 바울은 시편 95편에 기록된 ‘오늘’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여 믿어야 할 시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뿐이다. 고대 이스라엘이 구원의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잃어버린바 된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어 다윗은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곧 믿고 순종하라고 권하였다. 히브리서 4:7에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이 구절을 일반 개신교 많은 신학자들이 제7일 안식일을 폐하고 다른 안식일을 제정할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3장과 4장을 성경의 원리에 의하여 자세히 읽으면 전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의 기별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고 바울을 그렇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확신을 얻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참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기로 “오늘” 결심해야 한다.
<적용>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온전한 헌신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그것을 내려놓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9월 9일(목) 하늘 도성을 정복함
히브리서 4장에 나타나는 핵심적인 내용의 논리적 전개는 특히 히 4:8~11을 읽어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이 분명 있다. 그 안식에 들어갈 사람들은 유대인 신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 속에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갈 3:26~29을 읽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등장하는 언약의 백성들의 특징들을 확인해 보라. 바울이 기록한 문맥 속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갈3:26~2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답: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에는 어떤 사람들도 차별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언약의 백성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이 일곱째 날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종말에 또 다른 쉼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 말씀을 안식일의 쉼의 정당성을 반박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성경 본문의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특별한 안식에 대한 종말적 초점이 창조의 때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안식일의 쉼을 기념하는 것은 미래에 경험할 최종적인 안식을 작은 범위 안에서 매주 미리 맛보는 것임을 암시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다가올 세상(olam haba)에 대한 작은 전조로 여겨졌다.
지구 역사의 첫 번째 안식일에서부터 약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모든 일을 멈추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문맥은 안식일 계명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쉼 속에서 완성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그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바탕으로 약속된 최종적인 안식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일곱째 날 안식일을 대체하지 않는다. 그 약속은 오히려 일곱째 날 안식일을 더 강화한다.
세상은 근면함과 성공을 위해 애쓰는 것을 매우 가치 있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며, 우리를 구원하고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 이것은 세상의 문화에 역행하는 삶의 방식이다.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재림을 사모하는 우리들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답: 성경적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땅의 것보다 위엣 것을 생각하며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부가설명> 제7일 안식일은 에덴동산에서 창조된 사람의 쉼을 위한 날로 지정하셨다기보다는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과 친교하는 즐거운 날로 제정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에덴동산에는 수고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하는 것과 그 개념이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아담 부부가 지7일 안식일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며 창조주와 친교할 때 생명력은 더욱 풍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창조한 세계의 진정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초의 그 안식일은 신천신지의 안식일과 같고 에덴동산의 쉼이 있는 삶은 신천신지의 삶과 같았을 것이다. 수고없는 세상, 피곤함과 두려움이 없는 환경과 생활, 거기서 창조주와 함께 영생하는 즐거움과 행복 이것이 안식일이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그래서 신천신지에서도 제7일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모여서 예배한다(시66:23). 제7일 안식일이 이 안식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 안식의 의미를 알면 굳이 제7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창조의 섭리를 파괴하는 주장이다. 창조주께서 엿새동안 창조하신 사실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제7일 안식일은 없어질 수 없다. 그것은 창조와 구원의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이고, 천체는 창조주께서 제정하신 규례를 따라 영원하다는 것을(전1:4) 가르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교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바탕으로 약속된 최종적인 안식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일곱째 날 안식일을 대체하지 않는다.
9월 1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때로 우리의 문제들과 어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문제들을 동료 인간들과 나누며 우리를 제대로 도울 수 없는 자들에게 우리의 고통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슬픔을 기쁨과 평안으로 바꾸실 수 있는 예수님께는 털어놓지 않는다.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이 십자가에 영광과 승리를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매우 소중하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깨닫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실제적으로 순종하면, 그 말씀이 우리의 발걸음을 우리가 결코 넘어지지 않을 평탄한 길로 이끌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부담과 고민을, 그들을 받아 주시고 평안과 쉼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께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87. 3. 17).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그대는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의 이름을 시인할 그 때를 기쁨이 가득 찬 희망과 기대로써 바라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하여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준비는 그의 초림시에 우리에게 가져온 위대한 구원에 대하여 확고한 신앙을 갖는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야만 한다”(엘렌 G. 화잇, 높은 부르심, 3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일곱째 날 안식일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기에 그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하늘의 쉼을 예시한다고 이야기하는가? 다시 말해 안식일의 쉼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원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가?
※ 안식일의 쉼은 엿새 동안 창조하신 그 세계를, 회복한 세상에서도 창조주께서 친히 붙드시고(히1;3) 주장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을 증명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2. 속죄는 화해를 의미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을 보여 준다. 롬 5:11에 기록된 이 중요한 진술을 생각해 보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만약 누군가가 그대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 경험이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믿음의 삶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저질렀던 모든 실수와 믿음의 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비록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들이 그들이 경험했던 것들과 다르지만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즉, 그리스도인 삶을 살면서 그들이 경험했던 문제들을 우리가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의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을 불신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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