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신명기 서문(질문, 대답, 설명) 1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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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9-24 18:44 조회5,664회 댓글0건본문
제1과 신명기 서문
(10월 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4분)
연구 범위: 사 14:12~14, 겔 28:12~17, 창 3:1~7, 창 12:1~3, 행 7:20~36, 출 19:4~8
기억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신명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책이 아니다. 신명기에 앞서 이 책이 등장하게 된 정황이 있고, 그것을 둘러싼 세계와 배경을 설명하는 긴 역사가 존재한다.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한 것처럼, 신명기 역시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데 그 맥락은 이 책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맥락 없이 와이퍼의 존재 목적을 이해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신명기가 등장하게 된 맥락을 알지 못하면 그 책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신명기 속의 현대 진리’라는 이번 기의 주제에 비추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약 1,500페이지)를 사흘 만에 다 읽은 어떤 사람에게 책의 내용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에요.”
단 한 주의 교과를 통해 신명기라는 책에 앞서 존재했던 수천 년의 역사를 살핀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사의 핵심 내용에 집중한다면 ‘현대 진리’로 가득한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안타까운 역사가 반복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 느끼기
참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인 순종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 본다.
- 행하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TMI 위로
2.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요?(신 6:5)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한글판은 ‘뜻’이 ‘성품’이라고 번역되었다. 원어는 ‘네페쉬“
3. 타락과 홍수 이후에 반복되는 인간 역사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창 11:1~9)
※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사람은 사망의 정신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
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창 12:1~3)
※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출 19:4~8)
※ 제사장 나라,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진 형벌은 무엇이었습니까?(민 14:28~35)
※ 그들의 말대로 되게 하신 것이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강요되지 않은 참된 사랑이 되기를 원하시며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그 결과는 안타까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시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동일한 방법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9월 26일(일) 참된 사랑의 조건
요한일서 4:8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한다. 이 문장이 얼마나 단순해 보이는지와 상관없이 그 문장 속에 담긴 뜻은 굉장히 깊고 심오하여 그것의 깊은 의미를 온전히 헤아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사랑을 드러내 보이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표시이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한다. 마치 사랑이 하나님 자신의 정체의 본질인 것처럼 말이다. 모든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인 능력을 가진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는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만약 위의 성경절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하는 대신 ‘증오’나 ‘보복’이나 ‘무관심’과 같은 단어들로 하나님을 설명했다면, 인류는 근심하게 됐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을 우리가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준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것들을 다스리시는 모습은 그분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중력이 작용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온 우주에 스며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또한 그 사랑에 반응하여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참조, 신 6:5, 막 12:30).
그런데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조건 없이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강요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하셨을 때, 그곳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위험성도 항상 존재했다. 실제로 누군가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쟁투’가 시작된 곳이다.
완벽하신 하나님에 의해 완벽하게 창조된 루시퍼에게서 죄가 발견됐음을 보여주는 에스겔 28:15에서 우리는 특별한 통찰을 얻게 된다. 루시퍼가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처음부터 죄를 가진 채로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서 루시퍼는 참된 도덕적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렸다. ‘하늘에서 전쟁’이 있기까지 그의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묵상>
다음 성경절들은 왜, 사랑을 선택할 자유와 그렇게 하지 않을 위험이라는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사 14:12~14, 겔 28:12~17, 계 12:7)
[사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겔28:12~17]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계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답: 위의 성구들은 루시퍼가 일으킨 반역에 관한 것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피조물이었다. 그를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는 그가 그 창조를 받아들여서 그 창조를 영원히 보존하기를 기대하셨다. 그것이 그에게 베푼 창조주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의 사랑의 창조를 거절하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그가 창조로 받는 존재와 생명을 창조주께 반납해야 하는 결과를 깨달았다. 그가 그것을 반납하지 않겠다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마침내 반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끝날의 심판이고 집행이다.
<부가설명> 진정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라고 교과 저자도 그렇게 썼고, 어떤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아주 맞는 말 같은데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반응을 기대한다. 긍정적인 반응이든지 부정적인 반응이든지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본질 안에 들어 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랑은 그것이 베푼 것인지 아닌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정의를 할 수 없다. 이런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은 사랑의 받는 쪽의 몫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자유 선택이라고 한다. 아주 제한된 선택이다. 사랑이 베풀어지지 않았으면 선택이 없다. 그런데 그 선택하는 자는 사랑이신 창조주께서 창조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창조주께서 베푼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신 분은 사랑이신 창조주이시다.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지 않은 자유 선택은 없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받든지 거절하든지 할 수 있다. 받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는 선택은 없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의미의 자유 선택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루시퍼는 창조주의 사랑을 거절하는 반응을 했다. 결과는 영원한 멸망이 되는 것이다.
<교훈>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해야 함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9월 27일(월) 타락과 홍수
학생이라면 누구나 아이작 뉴턴의 머리 위에 떨어진 사과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경험으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였다. 사과가 정말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핵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은, 사과를 떨어뜨렸던 그 힘(중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뉴턴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하늘을 주관하는 법칙들과 이 땅을 주관하는 법칙들이 다르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이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뉴턴의 발견이 기여한 곳은 자연법칙에 관한 분야였지만 그와 똑같은 원리가 도덕 법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루시퍼를 하늘에서 쫓겨나게 한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할 자유’가 지구에서도 인류를 타락으로 이끌었다.
창세기 2:16, 17과 창세기 3:1~7을 읽어 보라. 완벽한 하나님에 의해 완벽하게 창조된 세상 속에 살게 된 완벽한 사람들에 관해 설명하는 이 성경절들이, ‘사랑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라는 강력한 진리를 어떻게 드러내 보여 주는가?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3:1~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답: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할 수 있는 의지를 인격적 피조물에게 주신 분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하여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악했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 역시 악했음을 보여 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큰 홍수로 멸망시키셨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두 번째 창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듯이(창 11:1~9) 인간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공공연히 반항했던 것 같다. “탑의 일부가 완성되었을 때, 그 일부분은 건축자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다른 방들은 호화찬란하게 장식되어 그들의 우상들에게 봉납되었다. 백성들은 그들의 성공을 기뻐하고 금, 은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고, 천지의 주재를 대적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19).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지구 곳곳으로 흩으셨다.
<묵상>
이사야 1:18~21을 읽어 보십시오. 인간의 타락 이후 반복되는 슬픈 역사 속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답은 이 질문 아래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8~21).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유의 존재로 창조하셨다. 천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선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 같다. 자유와 속박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을 때 느끼든지 누리든지 하는 상태이다. 그런데 죽으면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존재에게도 자유의지라는 말이 해당하는 것인가? 천사나 사람이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거절하는 반응을 하면 그들은 사망의 존재가 된다.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사망의 종이 된다. 생명을 가진 자는 생명의 종이다. 피조물에게는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는 없다. 사람들은 무조건 죄의 종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는데(요8:34)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다 사망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죄인다. 그래서 사망의 종이다. 진리를 믿을 때 자유하게 되는데(요8:32) 이 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죄와 사망의 종에서 생명의 종이 된다는 뜻이다. 그들은 생명의 활동으로 창조주와 함께 친교하는 행복을 누리고 그것이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가 되는 것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생명의 종이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반응으로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것이 타락(墮落)이다. 이 함자는 떨어질 타, 떨어질 락이다.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졌다는 말이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요5:34). 이 사람들은 자유인인데 생명의 지배를 받는 생명의 종이다(롬6:16~22).
<교훈>
루시퍼를 하늘에서 쫓겨나게 한 법칙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들에게 똑같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홍수로 재창조하셨다.
9월 28일(화) 아브람을 부르심
아브람(나중에 아브라함으로 개명됨)은 하나님께서 바벨에서 모든 사람을 흩으신 이야기 바로 뒤에 기록된 창세기 11장의 족보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창세기 12:1~3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이루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이 내용을,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복음의 전파가 이뤄진 이후에 읽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답: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해당된다.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이설에 대응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는지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계신 것은 시종일관 변함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7~9).
아브라함을 향한 부르심은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어지는 창세기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의 문제 많은 후손들이 너나없이 계속해서 문제투성이의 가족 관계를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침내 결정적인 전환점인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까지 이르게 된다.
순교자 스데반이 모세와 출애굽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7:20~36을 읽어 보라.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첫 약속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가?
[행7:20~36]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답: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는 것으로 약속이 성취된 것을 설파하였다.
무지와 오류가 넘치고 참된 진리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백성, 그분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구원의 계획에 관한 진리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셨다.
<묵상>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요? 재림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사명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 아래 설명이 대답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무리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 마지막 은혜의 초청을 세상에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일에 우리를 부르심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재림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가설명> 아브람을 부르시고 할례 언약을 맺을 때에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셨다(창17:5). 그에게 12장에서 하신 언약 곧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아들이 후사가 되고 그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그 약속을 확인하신다. 그 약속은 민족적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이루어진 것을 스데반이 역설(力說)했다. 그처럼 이제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한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갈3:6~9, 29).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믿고 충성했다(느9:7,8). 그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구원의 복음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맡기셨는데 이삭고 그의 자손으로 난 야곱 거기서 12아들이 12지파를 이루어 민족과 국가가 형성되었으니 그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여 약속한 복이 모든 민족에게 이르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고 오늘날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 신자들은 이 복음을 전하는데 실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특히 재림교회는 이 일을 꼭 성취해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로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약속을 이루어 가신 이유는 그들을 온 세상을 향한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다.
9월 29일(수)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데서부터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에 이르기까지... 출애굽과 그에 연관된 모든 일들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이었겠는가? 그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그 모든 일들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임에 분명하다.(그 시대에 죽었던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바다 아래서 죽은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하나님께서는 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구해내는 이처럼 놀랍고 극적인 구원을 이루셨는가? 모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4).
출애굽기 19:4~8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는가?
[출19:4~8]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7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답: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5절 6절).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불러내셨다. 그리고 이 후손들과 함께 당신의 언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이 관계야말로 언약의 핵심이다.
“내 소유”(segullah)라는 개념은 쉽게 오해될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선천적으로 거룩하거나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허락하신 경이로운 진리 때문이었다. 그 진리는 그들이 순종할 뿐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온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편에서 지켜야 할 언약의 조항들, 곧 십계명을 주시고(출 20) 그것을 비준하셨다. 제물의 피를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진 제단에 피를 뿌린 후에, 모세는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출 24:7) 하였고 백성들은 다시 한번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묵상>
히브리서 9:19, 20을 읽어 보십시오. 피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 피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히9:19,20]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답: 이 피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사망을 폐하시는(딤후1:10)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 이 피를 뿌림으로 언약에 조인이 되는 것이다.
<부가설명> 언약은 혼자 체결할 수는 없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성경의 언약이라는 히브리말 ‘베리트’를 신약에서는 ‘디아데케’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베리트는 언약 계약에 다 사용되는 것 같다. 헬라어 디아데케는 언약이다. 계약이 아닌 것 같다. 영어로는 언약 covenant, 계약은 contract이다. 신약에서 디아데케는 ‘유언’으로도 번역되었다(히9:6,7). 유언의 정의를 보니 “유언(遺言)"이란 사람이 그가 죽은 뒤의 법률관계를 정하려는 생전의 최종적 의사표시로서 유언자의 사망으로 그 효력이 생깁니다. 유언은 반드시 유언자 본인의 독립한 의사에 따라 행해져야 하는 행위로, 상대방의 수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독행위입니다. 유언자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유언할 수 있고, 언제든지 이를 변경 또는 철회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아담이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유언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24장에 기록된 언약 체결은 유언의 성질이 아니고 계약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의사를 묻고 하나님께서 발표하시고 짐승의 피로 조인했다. 이런 계약은 쌍방이 다 책임을 진다. 그러나 언약은 일방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제시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언약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은 마치 아브람이 후사를 얻기 위하여 하갈을 얻은 것과 같다(갈4:22~30). 이스라엘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언약에 머물러 있지 못하자(히8:9) 하나님은 그 언약을 파기하셨는데, 그것을 모세가 돌비를 깨뜨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계1:5,6, 5:9,10).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일을 기쁘게 수행하게 된다.
<교훈>
위대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조항으로 십계명을 주셨다.
9월 30일(목) 배도와 형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 참조, 출 24:3, 24:7).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을 했을 때마다 진심을 담아 했음이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역사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결국 한 가지로 요약되는, 그들 편에서 지켜야 할 일을 지키지 않았다.
언약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꼭 지켜야 했던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이었는가?(출 19:4, 5)
[출19:4,5]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답: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법을 지키라는 부르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율법주의적인 것이 아니다(참조, 마 7:24~27, 요 14:15, 약 2:20, 롬 6:11, 12).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실패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시내산이 보이는 그곳에서부터 반역은 시작되었다(참조, 출 32:1~6). 안타깝게도 그들의 불충실함은 일상이 되어버린 듯했고 그로 인해 약속의 땅으로 속히 들어가는 대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게 되었다.
민수기 14:28~35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들이 신뢰하지 않기로 했을 때 그 민족에게 내려진 형벌은 무엇이었는가?
[민14:28~35]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답: 40년 광야에서 지내면서 다 죽을 것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신뢰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죄가 더 심각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 모두가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했기 때문이었다(민 14:22). 그들이 지금껏 보고 경험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또한 성공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으며 약속된 땅을 차지하기를 거부했다(민 13, 14장).
<묵상>
불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이 사실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요?
답: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행하신 역사적 사실이 증명한다. 우리는 자아를 말씀에 굴복해야 하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0:23에서 사도 바울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으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짐을 그분 앞에 가져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가설명> 출애굽기 19:4,5에서 하나님은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언약을 지키라고 하셨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돌비에 새긴 말씀을 성경은 십계명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말 성경에 십계명이라고 번역된 곳이 세곳 있다. 출34:28과 신4:13, 10:4이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 이 세 곳에 십계명이라는 말이 없다. 언약의 열 말씀들이라고 했다.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십계명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결국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체결하신 언약의 조문이다. 언약의 조문은 쌍방이 합의하기 전에는 절대로 한 글자도 없애거나 바꿀 수 없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3:15). 그러므로 언약 문서의 언약 조문인 열 말씀들은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는 것이다(마5:18). 사람이 감히 이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다 이행하셨다. 그래서 출19:4,5은 계1:5,6과 5:9,10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계시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렇게 이루신 사실을 내가 이룬 것으로 여김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셔서 그분의 일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갈2:20).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은 스스로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한다. 형벌이기보다는 영벌(永罰)이다. 영벌은 영생의 반대이다(마25:46).
<교훈>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했음에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곧장 들어가는 대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10월 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간단히 요약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올바르게 이해될 경우) 우주적 쟁투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는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충분한 도덕적 이유가 된다. 내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언약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John C. Peckham, Theodicy of Love, 4).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포는 모세와 아론은 물론 갈렙과 여호수아에게도 참으로 쓰라린 실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던 축복들이 저들로부터 거두어졌을 때에 울며 크게 슬퍼하였다. 그들은 까닭 없이 불평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울 이유를 주셨다. 만일 그들이 자기 앞에 그대로 놓여 있는 그들의 죄를 슬퍼했더라면 이런 선고는 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재앙에 대하여 슬퍼하고 그들의 슬픔은 회개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내린 선고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39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자유 의지와 사랑에 관한 질문들을 가지고 토의해 보라.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기 위하여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에 가득한 고통을 보면서, (세상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인정하는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면) 사랑은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도전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다. 이 사랑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다.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며 이 사랑을 받아들일 때 영생하는 것이다.
2. 순종이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개념이라는 전제하에,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어떤 경우에 율법주의로 전락하는가?
※ 하나님의 계명은 영생이다(요12:51). 우리 성경에 ‘명령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명령이 원문으로 ‘엔톨레’이다. 이것은 계명이라고 번역하는 말이다. 영생을 가진 사람들은 계명대로 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생명은 얻지 못했는데 율법 조문을 지켜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3. 화요일 교과에 언급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가진 유사점에 대하여 토의해 보라. 둘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으며 우리가 그것에 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제7일 안식일은 언약의 의미를 나타낸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언약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열 말씀들 중에 유일한 조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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