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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 최종적인 쉼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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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1-09-21 22:46 조회3,0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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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과 : 최종적(最終的)인 쉼>

                                           (2021년09월25일 (안) 18시25분)

 

(9월19일 (日) <최후(最後)의 모습(模襲)을 보여줌> (A Vision of the End)

 

(Q)~바위로 덮인 불모(不毛)섬 밧모 섬에 유배(流配)되어 괴로운 마음으로 갇혀있던 사도(使徒)요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말세(末世)를 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現實)의 어려움을 극복(克服)할 수 있는 어떻한 소망(所望)을 발견(發見)하게 되나요? 

 

(A)~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주께서는 세 히브리인을 풀무 속에서 보존(保存)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충실(忠實)한 종의 생명을 보존(保存)하셨다. 다시 박해(迫害)의 손길이 사도(使徒)를 무겁게 눌렀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證據)를 인하여’(계 1:9) 정죄(定罪)당해 황제(皇帝)의 칙령(勅令)에 의하여 밧모 섬으로 추방(追放)당했다. 

그의 원수(怨讐)들은 여기서는 그의 감화(感化)가 더 이상 끼쳐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그는 고난(苦難)과 고통(苦痛)중에 죽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에게해 가운데 있는 바위로 덮인 불모(不毛)의 섬인 밧모는 로마 정부(政府)가 죄수(罪囚)들의 유배지(流配地)로 택한 곳이었으나 하나님의 종에게는 이 침울(沈鬱)한 거처(居處)가 하늘의 문(門)이 되었다. 분주(奔走)한 생활환경(生活環境)에서 그리고 이전 생활의 활동적(活動的)인 수고(受苦)에서 차단(遮斷)된 채 이곳에서 요한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리고 하늘의 천사(天使)들과 교제(交際)하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미래(未來)의 모든 시대(時代)를 위(爲)한, 교회(敎會)를 위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 세상 역사(歷史)의 마지막 장면(場面)에 일어날 사건(事件)들이 그의 앞에 요약 제시(要約提示)되었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啓示)들을 기록(記錄)하였다”(사도행적, 570-571).

 

⑴.이 땅에서의 혈연관계(血緣關係)는 조만간 끝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永遠)히 가족(家族)이 되어 살게 될 것이다(마 12:50).

 

⑵. “요한이 받은 핍박(逼迫)은 은혜(恩惠)의 수단(手段)이었다. 밧모 섬은 부활(復活)하신 구주(救主)의 영광(榮光)으로 찬란(燦爛)하게 빛났다. 요한은 인간의 모습(模襲)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의 손과 발에는 항상(恒常) 그의 영광(榮光)이 되는 못 자국들이 있었다. 이제 그는 부활(復活)하신 그의 주님(主任)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허락(許諾)되었다. 그는 인간이 보고도 살 수 있을 만큼의 영광(榮光)을 옷 입고 있었다.

 

⑶.요한에게 보인 예수님의 모습(模襲)은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 모두에게, 우리에게는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증거(證據)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敎會)에 살아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 때때로 검은 구름이 하나님의 백성(百姓)들을 포위(包圍)한다. 압제(壓制)와 박해(迫害)가 그들을 소멸(消滅)시켜버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때에 가장 도움이 되는 교훈(敎訓)이 주어진다. 

 

⑷.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감옥(監獄)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택(擇)하신 종들에게 자신(自身)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위기(危機)에 처(處)한 그들과 함께 불 가운데 계신다. 가장 어두운 밤에 별들이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가장 찬란(燦爛)한 하나님의 영광(榮光)의 광선(光線)은 가장 깊은 암흑(暗黑) 속에 나타난다. 하늘이 어두울수록, 의(義)의 태양(太陽)이신 부활(復活)의 구주(救主)로부터 나오는 광선(光線)은 더 분명(分明)하고 감동적(感動的)이다”(엘렌 G. 화잇, The Youth’s Instructor, 1900년 4월 5일).

 

⑸.복음(福音)을 순결(純潔)하고 능력(能力)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죄(罪) 때문에 생긴 질병(疾病)을 고쳐 주는 치료제(治療劑)가 된다. 의(義)의 태양(太陽)은 ‘치료(治療)하는 광선(光線)’(말 4:2)을 가지고 떠오르게 된다. 이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은 상(傷)한 심령(心靈)을 고쳐 주고, 마음에 평안(平安)을 주고, 걱정을 없애고, 질병(疾病)을 없애줄 수 없다. 명성(名聲)이나 천재적 재능(天才的才能)이나 능력(能力)등은 그 모든 것들은 근심(謹審)에 눌린 마음을 기쁘게 해 주거나 허물어진 생애를 회복(回復)시켜 주는 일에 무력(無力)하다. 심령(心靈)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유일(唯一)한 희망(希望)이다. (치료봉사, 115)

 

⑹.하나님을 신실(信實)히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약속(約束)된 최종적(最終的)인 쉼이 있음을 깨닫게 되며, 예수님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平安)과 쉼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感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날마다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향(向)하도록 우리의 일상(日常)의 삶의 방향(方向)을 재정립(再定立)할 때 밧모 섬의 유배(流配)중에 요한에게 이르렀던 참 평안(平安)과 쉼을 우리도 허락(許諾)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9월20일 (月) <카운트다운> (Countdown)

 

(Q)~예수님께서는 인류역사(人類歷史)의 각 시대(各時代)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지막 때에 대한 신성(神聖)한 일정(一定)의 윤곽(輪廓)을 보여 주셔서 마지막 시대(時代)를 사는 사람들이 최후(最後)의 사건(事件)에 대비(對備)할 수 있도록 인도(引導)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주변(周邊)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確信)하고 평안(平安)을 누리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再臨)으로 다시 오시기에 앞서 있을 사건(事件)에 대비(對備)하기를 원(願)하신다. 이런 한 사실(事實)에 영원(永遠)한 쉼의 최종적(最終的)인 카운트 다운은 무엇을 말하며 이에 어떻한 준비(準備)가 필요(必要) 합니까? 

 

(A)~⑴.예수의 재림(再臨)은 마지막 때에 실제(實際)로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징조(徵兆)로는 종교계(宗敎界)나 천연계(天然界)나 사회적(社會的)으로나 국내외 정치적(國內外 政治的)으로나 징조(徵兆)로 보아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복음(天國福音)이 온 세상에 증거(證據)되면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곧 실현(實現)된다는 말씀이다.

 

⑵.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은 실제(實際)로 일어날 매우 중요(重要)한 사건(事件)이다. 이 예수님의 재림직전(再臨直前)에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예언(豫言)을 통하여 주신 생명(生命)의 말씀을 명심(銘心)하여 요한을 비롯하여 지나간 모든 사건(事件)들이 사실(事實)로 성취(成就)된 것을 똑똑히 기억(記憶)하여 철저(徹底)히 준비(準備)하시기를 위한 사랑의 호소(呼訴)이시다.

 

(9월21일 (火) <전진명령(前進命令)> (Marching Orders)

 

(Q)~(계시록 14:6~12)의 이 말씀은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는 세상에 어떤 기별(寄別)을 전(傳)해야 하는가? 이 기별(寄別)을 신속(臣屬)히 전(傳)해야 하는 이유(理由)가 무엇인가?

 

(A)~⑴.(계시록 14:6~12)의 이 말씀을 영원(永遠)한 복음(福音)이라 한다. 창세기(創世記)에 나오는 복음(福音)과 예수께서 전(傳)하신 복음과 사도(使徒) 바울이 전(傳)한 복음은 모두 동일(同一)하며 영속적(永續的)인 것이다. 이 복음(福音)의 의미(意味)는 하늘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永遠)히 존재(存在)할 것이다.

 

⑵.모든 민족(民族)과 종족(種族)과 방언(方言)과 백성에게 전(傳)한다는 것은 복음(福音)의 범위(範圍)가 어떤 한 나라나 민족(民族)에 국한(局限)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世界的)임을 말하고 있다. 모든 민족에게 전(傳)해져야 할 이 복음전파(福音傳播)의 사명(使命)이 완수(完遂)되었을 때 세상의 끝이 오게 된다(마 24:14).

 

⑶.특별한 의미(意味)에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파수꾼이요 빛의 전달자(傳達者)로 세상에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멸망(滅亡)해 가는 세상에 전(傳)할 마지막 경고(警告)가 위탁(委託)되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빛이 비치고 있다. 가장 엄숙(嚴肅)하고 중대(重大)한 사업(事業)인 첫째와 둘째와 셋째 천사(天使)의 기별(寄別)을 선포(宣布)하는 사업(事業)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보다 더 중요(重要)한 사업(事業)은 없다. 다른 어떤 것도 그들의 주의(注意)를 빼앗도록 허용(許容)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증언 9권, 19)

 

⑷.첫째 기별(寄別)을 거절(拒絶)한 자(者)들은 둘째 기별, 셋째 기별(寄別)을 깨달을 수 없다.” (초기문집, 260)

 

⑸.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誡命)을 지킴으로써 그분에게 순종(順從)하는 것, 이 둘은 항상(恒常) 나란히 간다. (신 5:29, 시 112:1, 렘 44:10, 전 12:13).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등장(登場)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特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者)들이다. (계 14:12).

 

⑹.첫째 천사(天使)가 외친 ‘심판(審判)의 시간(時間)이 왔다’는 달리 말하면 ‘심판(審判)이 시작(始作)되었다’라고 외친 것을 본 것이다. 즉 ‘수업(授業) 시간(時間)이 되었다’는 말은 ‘수업(授業)이 시작(始作)되었다’는 말과 같다.

요한계시록 14장의 문맥(文脈)에서 첫째 천사의 기별(寄別)은 세상의 끝 즉 재림(再臨)의 때에 관한 묘사(描寫)가 아니다. 오히려 재림 전에 있을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 전에 이미 이르러왔고 그래서 시작된 심판(審判)은 어떤 심판(審判)인가? 성경(聖經) 원문(原文)은 재림 전에 있는 조사심판(調査審判)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分明)하다. 그러므로 세 천사의 기별은 재림 전에 조사(심리(審理))를 위한 심판이 시작되어 세상 끝에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내리는 최후(最後)의 심판(집행심판(執行審判))의 날까지 외쳐지는 기별(寄別)이다.

 

⑺.첫째 천사의 기별은 이 세상 역사(歷史)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가납여부(加納與否)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事實)을 분명(分明)히 말하고 있다(전 12:13-14, 롬 14:10, 고후 5:10). 여기서 유념(留念)해야 할 사항(事項)은 심판(審判)은 복음의 일부(一部)라는 것이다. 즉 기쁜 소식(消息)이다.

 

⑻.(계시록 12:8)의 큰 성(城)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 처음 언급(言及)된 곳이 이곳이다. 마지막 때의 큰 성(城) 바벨론에 대한 신학적 개념(神學的槪念)은 구약(舊約)의 고대(古代) 바벨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고 그분의 백성을 압제(壓制)하는 종교적(宗敎的) 정치적(政治的) 세력(勢力)이다.

 

①.그 시작부터 바벨론은 참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무신론적(無神論的) 세력(勢力)의 화신(化身)으로 서 있다(창 11:2-4).결국(結局) 이들은 흩어짐을 당하게 된다(창 11:9).

 

②.구약(舊約)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은 참 하나님을 믿는 종교(宗敎)를 적대(敵對)하고 세상을 지배(支配)하려고 애쓰는 종교체제(宗敎體制)를 대표(代表)한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 원수(怨讐)로 묘사(描寫)되며, 이사야는 바벨론 왕을 루스벨과 동일시(同一視)한다.

 

⑼.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전에 사탄이 ‘모든 거짓 권능(權能)과 징조(徵兆)와 이적(異蹟)과 불의(不義)한 모든 속임으로’ 활동(活動)할 것인데 ‘진리(眞理)를 사랑하는 마음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救援)함을 얻지 못’ 할 자(者)들은 ‘미혹(迷惑)하는 마음이 발동(發動)하여’ ‘거짓 것을 믿게’(살후 2:9-11)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상태(常態)가 이루어지고 모든 그리스도교국의 각 교회(敎會)들이 세상과 완전(完全)히 연합(聯合)할 때 바벨론의 타락(墮落)은 절정(絶頂)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변화(變化)는 현재(現在) 진행(進行) 중에 있으며, 요한계시록 14장 8절의 완전(完全)한 성취(成就)는 아직 장래(將來)에 속한 일이다. (각 시대의 대쟁투, 389-390)

 

⑽.나는 둘째 천사가 교회의 타락(墮落)을 선언(宣言)한 후에 교회들이 점차로 부패(腐敗)하여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란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引用)했으나 그것을 강력(强力)하게 증명(證明)하지 않았다. 그 정도(程度)로는 변화(變化)되지 않은 마음들이 찔림을 받지 못한다. 육적(肉的)인 마음이 미워하는 것은 성령(聖靈)과 진리(眞理)의 능력(能力)과 그리스도의 구원(救援)뿐이다. 공중(公衆)전도(傳道)는 사탄의 진노(震怒)를 자아내고 죄인(罪人)들을 전율(戰慄)케하며 마음과 양심(良心)에 다가오는 심판(審判)의 두려운 실재(實在)를 심어 줄 수 있는 요소(要素)가 아무것도 없다. 악(惡)한 사람들은 일반적(一般的)으로 참된 경건(敬虔)은 없으나 경건(敬虔)의 모양(模樣)을 좋아하며 그들은 그러한 종교(宗敎)를 지지(支持)할 것이다. (초기문집, 273)

 

⑾.셋째 천사의 기별은 “짐승의 표(表)를 받지 말고 하나님의 인(印)을 받으라”는 기별(寄別)을 전(傳)하는 거룩한 일을 맡은 사람들을 위협(威脅)하고 있는 위험(危險)들이 제시(提示)되었다. 그들은 이 기별이 온 세상에 대하여 최고의 중요성(重要性)을 띤 기별임을 기억(記憶)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硏究)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들이 지상(地上) 역사(歷史)의 마지막 장면(場面)에서 매우 큰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한 불법(不法)의 비밀(秘密)을 경계(警戒)하는 방법(方法)을 터득(攄得)하려 함이다.

 

⑿.(무엇이 하나님의 표(表)인가?(출 31:13-17))―순종(順從)의 표(表)는 넷째 계명(誡命)의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것이다. 만약(萬若) 사람들이 넷째 계명(誡命)을 지키면 다른 모든 계명(誡命)들도 지킬 것이다(편지 31, 1898).

 

⒀.(생명과 사망(死亡)의 문제(問題))인―셋째 천사의 기별은 앞서서 전(傳)해진 두 기별(寄別)을 포괄(包括)한다. 그것은 “큰 음성(音聲)”으로 전(傳)해진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성령의 능력(能力)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위기(危機)에 처(處)해 있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은 생명과 사망의 문제이다. 이 기별로 인해서 받게 되는 감명(感銘)은 그 기별을 전(傳)하는 사람들의 열성(熱誠)과 엄숙(嚴肅)성의 정도(程度)에 비례(比例)할 것이다(원고 16, 1900).

 

⒁.눈에 보이는 표(表)가 아님(계 14:1-4)―대쟁투(大爭鬪)의 계쟁점(係爭點)으로 인해서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이게 된다. 즉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敬拜)하고” 짐승의 표(表)를 받는 사람들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받는 사람들, 곧 “그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는” 사람들로 나눠진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표(表)가 아니다.(사인즈 1899. 11. 1).

 

⒂.불법(不法)의 비밀(秘密)을 경계(警戒)하라(계 18:1-8; 살후 2:7-12)―셋째 천사의 기별은 이 지상(地上) 역사(歷史)의 마지막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중요한 문제로 부상(浮上)한다.…

 

⒃.우리 재림교인들은 ‘세 천사의 기별’이 이 시대를 위한 ‘현대진리(現代眞理)’(벧후 1:12)라고 믿으며 우리 재림교인(再臨敎人)들의 존재(存在)의 목적(目的)은 “세 천사(天使)의 기별(寄別)”을 세상 땅 끝까지 전(傳)함으로 불신자(不信者)들에게 임(臨)할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온 세상에 알리고 그 사람들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悔改)하고 돌이키게 한 “요나” 선지자(先知者)처럼 우리 재림교회 성도(聖徒)로 부르신 이유(理由)이며 특권(特權)이며 핵심(核心)이다. 

 

⒄.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目的)은 “세천사의 기별(寄別)”을 온 세상 땅 끝까지 전파(傳播)하며 최종적(最終的)인 쉼을 얻기 위해 준비(準備)하고, 또 준비(準備)하라는 은혜(恩惠)의 복음증언자(福音證言者)즉 “세천사의 기별자(寄別者)가 되라는 축복(祝福)의 기별(寄別)이다.

 

(9월22일 (水) <평안(平安)한 휴식(休息)> (Rest in Peace)

 

(Q)~(요한복음 11:11)에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어떻게 묘사(描寫)하고 계시며, 사람이 죽으면 편히 쉬고 있는 것인가요? 평안(平安)한 휴식(休息)을 성경(聖經)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요?

 

(A)~⑴.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은 사실(事實)에 대하여 잠들었다는 말로 비유(譬喩)하셨다(요 11:11 절). 

⑵. “잠들었도다”라는 말은 헬라어 “코이마오(koimao-)”로 일상적(日常的)인 “잠”(마 28:13; 눅 22:45 등)과 죽음의 “잠”(마 27:52; 고전 7:39 등)을 표현(表現)할 때 사용되었다. 제자(弟子)들은 예수님께서 일반적(一般的)인 “잠”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誤解)했다. 

 

◎.<다음의 비교(比較)를 통해 잠이 죽음을 나타내기에 타당(妥當)한 것인지 살펴보자.>

 

①. 잠자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상태(無意識 常態)에 있다. →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도서 9:5, 6). 

②. 잠자는 동안 우리는 삶의 모든 활동(活動)으로부터 쉼을 누린다. →

  “네가 장차(將次) 들어갈 음부(陰府)에는 일도 없고 계획(計劃)도 없고 지식(知識)도 없고 지혜(智慧)도 없음이니라”(전 9:10). 

③. 잠자는 동안에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不可能)해진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消滅)하리로다”(시 146:4). 

④.우리는 깨어날 때까지 계속 잠을 자게 된다. →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욥 14:12). 

⑤. 잠을 자면 깨어 있는 자들의 활동에 동참(同參)할 수 없다. →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永永)히 분복(分福)이 없느니라”(전 9:6). 

⑥. 우리는 잠잘 동안에 정서적(情緖的)인 활동(活動)을 멈춘다. →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猜忌)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전 9:6). 

⑦.누구에게나 잠은 일상적(日常的)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⑧. 잠자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讚揚)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 →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讚揚)하지 못하나니”(시 115:17; 참조 사 38:18).

 

⑶.믿음의 조상(祖上)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約束)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歡迎)하며(히브리서 11:11~13)절에 언급(言及)된 인물(人物)들은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後孫)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約束)의 성취(成就)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바를 실행(實行)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一生)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身體的)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約束)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意味)한다(Morris).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約束)의 성취(成就)를 바라보았다. 는 말씀이다. 

 

⑷.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죽음과 부활(復活)을 무의식 상태(無意識 常態)인 “잠”(요 11:11, 14)과 아침이 되어 깨어나는 것에 비교(比較)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구원(救援)받은 자(者)와 잃어버린바 된 자(者) 모두가 부활후(復活後)에 각자(各者)의 상급(賞給)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强調)하시며(요 5:28, 29), 언제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준비(準備)되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다.

 

(9월23일 (木) <주 안에서 항상(恒常)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Q)~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 가운데 언제나 기뻐할 수 있고 온전한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특별한 비결(秘訣)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의 비결(秘訣)을 설명(說明)해 보자. 

 

(A)~⑴.요즘에 길을 찾을 때 “내비게이션”을 켜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을 향(向) 해, 심지어(甚至於) 외국(外國)에서조차 불안감(不安感) 없이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원리(原理)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언(豫言)의 시간표(時間表)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안(平安)함이 이런 것으로 설명(說明)할 수가 있다.

 

⑵.(빌립보서 4:4~6)에 사도 바울은 혼란(混亂)과 고통(苦痛) 가운데서도 참된 쉼과 평안(平安)을 얻는 방법(方法)에 대해 우리의 현재상황(現在狀況)이 어떻던, 어떤 시련(試鍊)이 닥치든,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선(善)하심, 그분의 사랑, 그리고 우리를 위하 여 십자가(十字架)를 지신 그분의 희생(犧牲)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항상(恒常) 기뻐할 수 있고, 그분께서 지친 영혼(靈魂)에 주시는 평안(平安)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 비결(秘訣)이  “주 안에서”라는 대목을 바울이 강조(强調)하고 있다.

 

⑶.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 안에서”의 구절(句節)은 바로 쉼, 평화(平和), 그리고 사람의 안목(眼目)으로는 감(敢)히 알 수 없는, 지금의 삶을 뛰어넘는 압도적(壓倒的)인 희망(希望)을 말한다.

 

⑷.<신자(信者)의 특권(特權)>으로 (로마서 8:1-9)에서 사도 바울은 참된 신자(信者)의 특유(特有)한 특권(特權) 하나를 들어 말하면서 이 특권(特權)에 속한 자들의 특성(特性)을 열거(列擧)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나니"(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정죄(定罪)가 없다는 사실(事實)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형언(形言)할 수 없는 특권(特權)이자 위로(慰勞)가 아닐 수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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