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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예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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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3-08 01:59 조회3,9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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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예수,믿음의 주요 또 온전(穩全)하게 하시는 분>

                                                    (2022년03월12일 (안)18시36분)


(03월06일 (일)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Q)~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德目)은 무엇입니까? (히 10:35~39)


(A)~⑴.오직 믿음의 다른 말은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로 신학적(神學的) 용어(用語)로 죄인(罪人)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救主)로 영접(迎接)(받아들여)하여 믿는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義)롭다고 칭(稱)함을 받는다는 의미(意味)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죄인(罪人)이면서 의인(義人)의 상태(常態)로 의(義)의 칭(稱)함 곧 칭의(稱義)를 선물(膳物)로 받는다는 의미(意味)이다.


⑵.하나님을 의지(意志)하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기다림으로 박해(迫害)와 위험(危險)을 잘 인내(忍耐)하고 담대(膽大)하게 맞서서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救援)에 이를 것이다. 즉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向)하신 지극(至極)한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反應)하여 구주(救主)예수 그리스도를 구주(救主)로 구속주(救贖主) 굳게 믿고 신실(信實)한 삶을 사는 것이다.


⑶.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체(遲滯)하지 아니하시고 속(速)히 오시리라는 사실(事實)을 믿고 직면(直面)한 고난(苦難)과 박해(迫害)에 대해 담대(膽大)하게 맞서며 인내(忍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삯과 약속(約束)을 허락(許諾)하실 것이지만 반대(反對)로 뒤로 물러나 인내(忍耐)하지 못하고 배교(背敎)한다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엄중(嚴重)한 심판(審判)을 받게 될 것이다.


(03월07일 (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Q)~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제물(祭物)로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이 놀라운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히 11:17~19)


(A)~⑴.<아브라함은 시험(試驗)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라는 명령(命令)을 받았다.(창 22: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命令)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理解)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그는 순종(順從)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과거(過去)에 그를 인도(引導)하셨던 하나님께서 장차(將次)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행동(行動)으로 옮겼다.


⑵.저는 약속(約束)을 받은 자(者)로되 그 독생자(獨生子)를 드렸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獨生子) 이삭을 바치라고 명(命)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酷毒)한 믿음의 시험(試驗)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子孫)을 허락(許諾)해 주신다는 약속(約束)의 성취(成就) 여부가 이삭의 생명(生命)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父子間)의 애정(愛情) 문제(問題)를 제외(除外)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約束)과 명령(命令) 사이에 커다란 모순(矛盾)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葛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矛盾)을 제거(除去)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處理)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問題)였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성취(成就)시킬 독생자(獨生子)를 하나님께 드렸다. (히 11:17, 만나주석)


⑶.<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히11:8)>

저자(著者)는 본 절(節)에서 (히11:8~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偉大)한 조상(祖上)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標本)으로 제시(提示)한다.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分明)하게 언급(言及)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칼루메노스’은 ‘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卽時) 즉각적(卽刻的)으로 순종(順從)하였음을 시사(時事)한다(Westcott). 순종(順從)과 믿음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로 아브라함의 순종(順從)은 그의 믿음을 외적(外的)으로 표현(表現)한 것이었다.


⑷.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目的地)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信賴)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命令)에 순종(順從)하여 길을 떠났다.


⑸.<시험(試驗)하시려고.>

성경(聖經)에 나타난 시험(試驗)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서 기원(紀元)한 시험(試驗)으로(엡 2:2) 인간(人間)을 타락(墮落)케 하는 유혹(誘惑)(temptation)이다(창3:1-6).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試驗)으로 성도(聖徒)의 신앙(信仰)을 증험(證驗)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 (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試驗)은 후자(後者)의 경우(境遇)로 그를 믿음의 조상(祖上)으로 연단(鍊鍛)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人間的)인 생각(生覺)을 완전(完全)히 굴복(屈伏)시켜야 하는 순종(順從)의 시험(試驗)이었다.


⑹.<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獨子) 이삭. 3중으로 강조(强調)된 점층법적(漸層法的) 표현(表現)이다.> 즉 

(1)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 중에서도 가장 고귀(高貴)한 사람 (2) 그중에서도 100세에 낳은, 이 세상(世上)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자 (3) 이스마엘이 떠난 후(後) 자신(自身)에게 남은 유일(唯一)한 혈통(血統)이며 25년을 기다려 얻은 ‘언약(言約)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强調)한 말이다. 이 말에는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愛情)을 최고도(最高度)로 불러일으켜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을 만들어 놓은 후 그러한 상황(狀況)하에서도 자신(自身)의 명령(命令)에 순종(順從)토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鍊鍛)의 의미(意味)가 담겨있다.


⑺.<번제(燔祭)로 드리라.>

인신 제물(人身祭物)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命令)은 인간의 이성(異性)으로서는 도저히 납득(納得)할 수 없는 것이나 신앙(信仰)으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제(難題)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1) 이는 피 흘리는 것을 싫어하며 생명(生命)의 존엄성(尊嚴性)을 강조(强調)하던 하나님의 속성(屬性)(창9:4-6)과 상치(相馳)되며 (2) 거듭된 약속(約束)과 맹세 속에 겨우 태어난 유일(唯一)한 약속(約束)의 씨 이삭을 다시 거두어 가려 하시는 것 역시(亦是) 하나님의 약속(約束)(창17:5, 6)과는 일견(一見) 모순(矛盾)되는 듯 하기 때문이다.


(03월08일 (화) <모세 :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


(Q)~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寶貨)를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기로 선택(選擇)할 수 있었던 결정적(決定的)인 이유(理由) 무엇입니까? (히 11:24~26)


(A)~⑴.모세는 자신(自身)과 백성(百姓)들을 위해 하나님이 정해놓은 고귀(高貴)한 운명(殞命)을 확신(確信)했기 때문에 현재의 명예(名譽), 지위(地位), 권력(權力)을 거절(拒絶)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런 것을 희구(希求)하는 것보다 더 헛된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히브리 백성들은 지상(地上)의 가장 강력(强力)한 나라에 비참(悲慘)한 노예생활(奴隸生活)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約束)들에 대한 믿음만이 그로 하여금 애굽의 보좌(寶座)를 거절(拒絶)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⑵.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偉大)한 제국(帝國)의 보좌(寶座)와 노예민족(奴隸民族)과 함께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選擇)해야 했다. 심지어(甚至於) 히브리 백성들의 지도자(指導者)로서도 그는 “고난(苦難)”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치료(治療)할 수 없을 만큼 목이 뻣뻣하고 반역적(叛逆的)이며, 언제나 불평(不評)을 했다. 어느 관점(觀點)에서 봐도 그가 선택(選擇)한 운명(殞命)은 세상의 권력(權力)과 명성(名聲) 대신으로 제공(提供)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⑶.모세는 자신이 애굽 왕(王)이 되는 것이 백성들을 해방(解放)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위치(位置)에 서는 것이라고 합리화(合理化)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의 통치자(統治者)는 그 나라의 우상 숭배적(偶像崇拜的)인 종교체제(宗敎體制)에서 제사장(祭司長)이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궁중생활(宮中生活)의 타락(墮落)시키는 영향력(影響力)에 항상(恒常) 노출(露出)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악(罪惡)의 낙(樂)을 누리는 것 보다 그는 언약(言約)과 관련(關聯)한 약속(約束)들과 특권(特權)들에 눈을 고정(固定)하였다. 모세는 인상적(印象的)이지만 외양(外樣)만 번지르르한 현재(現在)의 영광(榮光)과 권세(權勢)를 덜 눈에 띄고 심지어(甚至於) 눈에 보이지 않는 언약(言約)의 약속(約束)들 그리고 특권(特權)들과 자발적(自發的)으로 바꾸었다.(참조 출 2:11 주석).

 

⑷.모세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約束)을 이해(理解)했으며, 히브리 백성(百姓)을 애굽에서 해방(解放)시키는 것에는 히브리 백성이나 애굽인들이 그 당시(當時)에 깨달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멀리서 그의 믿음의 눈은 모든 민족(民族)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아브라함에게 약속(約束)된 그 후손(後孫)의 강림(降臨)을 바라보았다. (참조 창 22:18; 갈 3:8, 16).


(03월09일 (수) <믿음으로 라합과 나머지 사람들은>


(Q)~이방인(異邦人) 기생(妓生) 라합의 어떤 행동(行動)이 그녀를 믿음의 영웅(英雄)중 한 사람이 되게 했을까요? (히 11:31)


(A)~⑴.믿음으로 기생(妓生) 라합은 정탐(偵探)꾼을 평안(平安)히 영접(迎接)하였으므로 순종(順從)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滅亡)치 아니하였도다. ‘기생(妓生)’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조나’을 번역(飜譯)한 것으로 이방(異邦) 신전(神殿)에서 일하는 창녀(娼女)가 아니라 일반창녀(一般娼女)를 가리킬 때 사용(使用)된 용어(用語)였다(수 2:1, Bruce). 라합은 이러한 신분(身分)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尊敬)받는 인물(人物)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라, 아비가일, 에스더와 더불어 구약성경(舊約聖經)의 대표적(代表的)인 여인(女人) 중의 한사람으로 평가(評價)되었다(바빌론 탈무드 Megillah 15a). 


⑵.신약성경(新約聖經)에서도 라합의 믿음은 본 절 이외(以外)에 (약 2:25)에서 찬양(讚揚)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족보(族譜)에도 등장(登場)한다. 이와 같이 그녀가 믿음의 인물로 추앙(推仰)받는 것은 이스라엘의 첩자(諜者)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行動)이 동족(同族)에게 발견될 경우(境遇) 죽음을 면(免)치못하게 됨을 알고서도 그러한 행동을 실행(實行)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占領)하는 데 중대(重大)한 공헌(貢獻)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실천(實踐)한 행위(行爲)였다(수 2:1-21, Morris). 


⑶.한편 ‘순종(順從)치 아니한 자’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토이스 아페이데사신’은 믿음으로 순종(順從)하여 행동(行動)으로 옮긴 라합과 대조(對照)를 이루는 여리고 백성들을 가리킨다(Lane).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滅亡)당하였다. 저자(著者)는 여리고 사람들의 멸망(滅亡)을 언급(言及)하므로 수신자(受信者)들에게 순종(順從)치 아니함으로 광야(廣野)에서 멸망(滅亡)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想起)시키고 있다(히3:18). (히 11:31, 만나주석)


⑷.라합. 여기 언급(言及)된 사건(事件)의 기록(記錄)은 (수 2:1~24; 6:23~25)을 참조하라. 언뜻 보면 라합의 이름은 이 믿음의 영웅(英雄)들의 목록(目錄)에 놓여 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녀는 창기(娼妓)일 뿐 아니라 이방인(異邦人)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事實)이 그녀의 믿음의 행동(行動)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녀의 사상(思想)을 살펴보려면 (수 2:8~13)을 참조하라. 그녀의 이름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예로운 조상들 중 한 명으로 마태의 족보에 나타난다(참조 마 1:5 주석).” (히 11:31, 재림교주석)


⑸.(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외(外)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직접(直接) 보지는 않았지만 듣고 믿고 순종(順從)한 사람들의 결과(結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救援)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것이다. 


(03월10일(목) <예수,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穩全)하게 하시는분>


(Q)~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競走)를 완주(完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必要)한 삶의 모습(模襲)은 무엇입니까? (히 12:1~3) 


(A)~(ⅰ).<예수를 바라보자> 

⑴.즉 모든 어려움을 극복(克服)하고 마지막까지 인내(忍耐)할 수 있는 은혜(恩惠)와 능력(能力)을 위하여. 베드로가 갈릴리 광풍(狂風)의 파도(波濤) 위를 걸을 때 깨달은 것처럼(참조 마 14:24~32), 구주(救主)에게서 시선(視線)을 돌리면 비록 잠시(暫時)일지라도 위험(危險)하다. 예수께 믿음의 눈을 계속 고정(固定)하면 능력(能力)의 근원(根源)이신 이, 우리에게 참고 극복(克服)하도록 힘을 줄 수 있는 그분과 끊어지지 않는 접촉(接觸)을 유지(維持)하게 한다. 


⑵.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고 할지라도 시련(試鍊)과 고통(苦痛)을 당하게 되면 피곤(疲困)하게 되고 낙심(落心)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시련(試鍊)이 오래고 무거우면 더 그렇다. 이러한 현상(現象)은 믿음이 불완전(不完全)하고 타락(墮落)된 본성(本性)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발단(發端)되는 것이다.


⑶. 이것을 막기 위한 최상(最上)의 방법(方法)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생각(生覺)하는 것이다. 믿음과 명상(冥想)은 신선한 힘과 위로(慰勞)와 용기(勇氣)를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苦難)받으면, 또한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것을 확실(確實)히 약속(約束)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망(所望)은 그들의 투구가 될 것이다. (히 12:1~3, 매튜헨리)


(ⅱ) 이러한 예수께 대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의무(義務)가 무엇인가?

⑴. <우리는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계속(繼續)해서 우리의 본보기로 삼고 그를 보고 용기(勇氣)를 얻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고통(苦痛) 가운데서 그를 바라봄으로 그의 지시(指示)와 도우심을 받고 또 그가 우리를 받으시게 해야 한다.


⑵.<우리는 그를 생각(生覺)해야 한다.>

생각(生覺)하되 깊이 생각하고 그의 경우(境遇)를 보고 자신의 해야 할 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조리(條理)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통(苦痛)과 우리의 고통을 비교(比較)해 보고 또 그의 고통이 그 성격(性格)과 정도(程度)에 있어서 우리 것 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내(忍耐) 또한 우리의 인내(忍耐)보다 큰 것이었다는 것도 찾아내어 그를 우리가 본(本)받아야 하는 완전(完全)한 분으로 삼아야 하겠다.


(ⅲ).<완전(完全)을 위해 이루어야 할 의무(義務).>

이에 대하여 본문(本文)에는 "인내(忍耐)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競走)를 경주(競走)하며"(히12:1절)라고 하였다. 바울은 경주(競走)에 비(比)하여 그리스도인의 의무(義務)를 말하였다. 이는 그가 올림픽이나 또는 기타(其他)의 경기(京畿)를 통(通)하여 응용(應用)한 말일 것이다.


⑴.그리스도인에게는 달려야 하는 경주(競走)가 있다. 

그것은 섬김의 경주(競走)요 고난(苦難)의 경주(競走)이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코스는 복종(服從)인데 우리는 능동적(能動的)으로 때로는 수동적(受動的)으로 복종(服從)해야 하는 것이다.


⑵.<이 경주(競走)가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들이 달려야 할 경주(競走) 과정(過程)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신실(信實)한 종들 즉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허다한 증인(證人)들의 본을 통하여 설계(設計)된 것이다. 경주(競走)에는 방향(方向)이 있고 또 가서는 아니 될 경계(境界)도 있다. 또한 우리가 달려야 할 목표(目標)와 또 기대(期待)하는 상(想)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⑶.<이 경주(競走)는 인내(忍耐)와 끈기로써 해내야 한다.>

경주(競走)를 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길 앞에 놓여진 시련(試鍊)들을 극복(克服)하려는 인내(忍耐)가 있어야 한다. 또한 경주(競走)를 할 때 기권(棄權)을 하거나 돌아서 버리고 싶은 모든 유혹(誘惑)을 물리칠 수 있는 의지(依支)도 있어야 한다. 믿음과 인내(忍耐)는 모든 것을 정복(征服)하는 은혜(恩惠)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인내(忍耐)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언제나 생생하게 역사(歷史) 되어져야 한다.


(ⅳ).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로 그리스도인으로 잘 달려가게 격려(激勵)하교 또 원기(元氣)를 북돋아 주는 훌륭한 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앞에서 언급(言及)하였던 구약(舊約)의 성도(聖徒)들은 결코 이러한 분을 소유(所有)하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본문(本文)에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穩全)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절)고 하였다. 


⑴.<모든 무거운 것>이라 함은 

육(肉)이나 현재의 생활이나 세속(世俗)에 대한 과도(過度)한 애정(愛情)과 염려(念慮)를 말한다. 현재의 생활에 대한 지나친 염려(念慮)나 지나친 사랑은 영혼(靈魂)에 대하여 너무 무거운 짐이 되며, 영혼(靈魂)이 위로 향(向)해 올라가려 할 때 끌어 내리며, 영혼(靈魂)이 나가려고 할 때 뒤로 잡아끄는 그런 역할(役割)을 한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義務)와 극복(克服)해야 하는 어려움들을 더욱 무겁고 감당(堪當)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⑵.<우리를 얽어매는 죄(罪)>란 

우리로 쉽게 죄에 빠지게 하는 환경(環境), 우리의 관습(慣習), 우리의 동료(同僚)들에 의해 우리가 죄를 범(犯)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罪)란 저주(詛呪)해야 하는 불신(不信)의 죄를 뜻하거나, 또는 유대인들이 너무 구약(舊約)에 집착(執着)하는 죄를 뜻하는 것이든 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외적(外的), 내적(內的)인 모든 구속(拘束)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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