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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율법과 은혜(질문, 대답, 설명) 11/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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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11-05 13:55 조회5,8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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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율법과 은혜

 

(11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3분)

 

연구 범위: 겔 28:15, 16, 신 4:44, 롬 3:20, 신 10:1~15, 신 5:6~22, 신 9:1~6

 

기억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여러 교파에 속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율법과 은혜에 관하여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의 표준이며, 그와 같은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갈 3:22)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그 율법을 범했으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물론 그 율법 안에는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증명할 수 없는 너무나 빈약한 논리들로 안식일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더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다른 차원의 주제이므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비록 각기 다른 방법과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율법과 은혜에 관한 주제는 신명기를 비롯한 성경 전체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조금은 특별한 맥락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보여준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순종을 명령하고 계심을 깨닫는다.

 

- 느끼기

 우리의 행복을 위해 율법을 주시고 순종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율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간다.

 

TMI 위로

 

2. 하늘에도 도덕법이 존재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겔 28:15, 16)

 

※ 불의가 드러났다는 표현으로 계시해주셨다.

 

3.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계신 내용은 무엇입니까?(신 17:19, 30:9, 10, 32:46)

 

※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순종을 강조하셨다.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순종하라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신 10:13)

 

※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5. 신명기에서는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의 의미가 어떻게 확장되어 나타나고 있습니까?(신 5:12~15)

 

※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다. 곧 구원의 기념이다.

 

6.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신 9:4~6)

 

※ 그들의 의로움으로 이 땅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결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결국 그들의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11월 7일(일) 하늘에 있는 법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은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정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덕적 자유를 가진 도덕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와 같은 자유는 사랑의 내재적 특징이다.

 

 그리고 도덕적 자유라는 개념의 핵심은 도덕법이다. 원자보다 작은 입자, 바다의 파도, 캥거루와 같은 것들이 자연법칙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들은 도덕법을 따르지는 않는다. 아니, 그런 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도덕적인 존재만이 도덕법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도 천사들을 위한 도덕법을 갖고 계신다. 

 

 

 루시퍼의 타락을 기록하고 있는 에스겔 28:15, 16을 읽어 보라. 그에게서 “불의”가 드러났고, 그는 “범죄”하였다. 이와 같은 단어들이 하늘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된 것을 볼 때, 하늘에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에 관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겔28:15,16]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답: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도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한도 안에서 자유 선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불의”와 “범죄하였도다” 같은 단어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같은 단어를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이것은 지구뿐만 아니라 하늘에도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도덕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살고 있는 하늘에도 어떻게 이와 같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가?

 

답: 도덕적 존재는 도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도덕적으로 존재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되어 있으며, 이 율법의 원칙은 곧 하늘의 원칙이다. 하늘의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을 얻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이다”(산상보훈, 109).

 

 하늘이건 지구이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존재들을 살게 하신 곳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치하기 위한 도덕법이 존재한다. 그리고 하늘이건 지구이건 상관없이, 그 법을 범하는 것은 죄이다.

 

<묵상>

 

 도덕적인 존재들이 있는 곳에 도덕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와 같은 법이 없다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부가설명> 창조주께서는 그른 것을 만들지 않았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상대적 존재가 아니시다. 그분은 절대적 존재이시다. 즉 존재 자체이시고 그러므로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시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닌가?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있는 것을 아는 그런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장님이 되어봐야 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아니다. 완전하지 못한 것들은 완전한 것의 상대개념으로 성립되겠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창조하신 것은 그 자제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시퍼가 이 절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심히 좋았다. 이런 표현은 좋지 않은 것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모세가 기록할 당시에는 좋은 것 좋지 않은 것, 선한 것 악한 것, 의와 죄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생긴 후에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렇게 상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까? 도덕이라는 표현은 죄가 생긴 후에 만들어진 단어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것만 있는 곳에 도덕이라는 것이 어떤 사상으로 있었을까? 도덕법이 없으면 옳고 그런 것은 어떻게 분별하느냐고 물었는데, 그것은 루시퍼의 반란 후에 생긴 개념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 그것이 완전한 것이고 오늘날 표현으로 도덕적 선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사망하는 생명, 곧 불완전한 생명에서 영생, 곧 완전한 생명을 얻었다. 이 생명이 작용하는 대로만 살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고 그 감사는 진정한 경배가 되고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자. 루시퍼의 반역은 여호와가 아닌데 자기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서 생긴 것이 아닐까?

 

<교훈>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존재들을 살게 하신 곳에는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그들을 통치하기 위한 도덕법이 존재하며 이를 범하는 것은 죄이다.

 

 

11월 8일(월) 신명기에 나타난 율법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히브리 민족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땅을 기업으로 취하기 위해 가나안 국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명기는 그들이 그 땅을 취하기 전에 모세가 히브리 백성들에게 전한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 중에는 그들이 순종해야 할 명령들이 들어 있었다.

 

 다음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어떤 내용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설명되고 있으며 이것이 백성들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신 4:44, 17:19, 28:58, 30:10, 31:12, 32:46, 33:2)

 

[신4:4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신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신28: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신30: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신32:4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신33: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개역).

 

※ 참고: ‘번쩍이는’은 ‘에쉬다트’이고  ‘불’은 ‘다트’인데, ‘에쉬다트’는 ‘율법의 불, 또는 불은 율법이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다트’는 ‘법령, 포고, 법, 규정, 관례’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역판 번역이 이해하기에 더 좋은 것 같다.

 

답: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하도록 강조하고 그것을 잘 순종하라고 했다. 그것이 그들의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신명기를 그저 간단히 훑어보기만 해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순종은 백성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의무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이루어 주셨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었다. 그 일은 그들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들은 애초부터 그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일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이 바로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우리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그 행위로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우리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대한 반응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신명기는 은혜와 율법의 관계를 보여주는 거대한 실물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이스라엘이 결코 그들 스스로 애굽에서 탈출할 수 없었던 것같이 말이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간다.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계 14:12)들로 묘사된 환란과 짐승의 표의 때를 지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과 맺으시는 관계는 율법과 은혜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율법을 범한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서 시작된 진정한 순종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준다.

 

<묵상>

 

은혜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답: 은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것이고 율법은 이 베풀어주신 것을 잘 지키는 길이다. 이 길을 떠나면 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

 

<부가설명> 창조주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요일2:25). 이것이 은혜요 사랑이다. 이렇게 생명을 받아 생명의 존재가 된 사람들은 그 생명이 나타내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의 생명이 활동하는 대로 하지 말고 스스로 행동을 만들어서 하라고 충동했다. 그것이 사탄이 한 짓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행동을 만들어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먹지말라고 하신 그 과일을 먹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그에게서 떠났다(엡4:18). 그래서 의와 선과 생명의 완전에서 생명을 잃었고 생명을 잃어버리자마자 그는 사망이 되어서 죄와 불의와 악에 빠졌다. 곧 사망이 되어 썩어져가는 행동이 나온게 된 것이다(엡4:22). 주신 은혜를 지키지 못하자 그는 사망이 되었다. 지금도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의 생명을 받았으나(요5:24), 이 생명이 가는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면 사망의 영역으로 떨어진다. 베드로처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14:30)라고 손을 내밀고 부르짖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하는 정신이다. 그러면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하신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경험의 연속이 아닌지 모르겠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많은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1월 9일(화) 네 행복을 위하여

 

 성경을 거부할 이유를 찾는 회의론자들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강한 말씀들을 지적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비교할 때 구약의 하나님은 가혹하고, 복수심이 가득하며, 무자비한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뿐더러 그러한 주장이 처음 제기된 수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다. 

 

 구약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자 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신명기에 확실하게 나타난다.

 

 신명기 10:1~15을 읽어 보라. 이 본문의 직접적인 배경은 무엇이며, 그들이 죄를 지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셨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이 본문은 우리에게 은혜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신10:1~1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답: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 본문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친다. 특별히 10장 12, 13절에 집중해 보라. 꽤 길지만, 명백히 이해할 수 있는 질문 형식의 문장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본문에 사용된 “너” 그리고 “네게”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단수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말씀하고 계셨지만, 만일 백성들 개개인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각각의 구성원들이 올바르게 행동할 때만 온전한 완전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우리는 13절의 마지막 부분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네 행복을 위하여(for your good).”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지키고 계시며,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으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이 될 것이다.

 

<묵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가? 

 

<부가설명> 아담의 후손으로만 죽을 때까지만 사는 육체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롬8:7).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육체의 생명만(창6:3, 레17:11, 시78:39)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라야 준행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된다. 이 생명이 우리 몸 안에서 작용할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따라 생활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 자체가 영생이다. “나는 그 분의 계명이 영생임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르는 것이라."고 하시더라.”(요12:50, 한글킹). 이 구절이 다른 번역들은 ‘계명’을 ‘명령’으로 번역했다. 틀린 번역은 아니다. 원어는 ‘엔톨레’인데 ‘계명, 명령’ 등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이 생명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32:46,47). 만일 이 계명을 부인하거나 준행할 마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막12:27).

  

<교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1월 10일(수) 애굽에서 종 된 자

 

 신명기에는 한 가지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는 사실이다. 신명기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신 26:8, 참조, 신 16:1~6).

 

 하나님께서 은혜로 노예 생활과 압제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해 내시는 출애굽 사건은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나타내는 예로 언급된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미 6:4).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부터 구해 냄을 받은 이 사건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히 11:29, 참조, 고전 10:1~4).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의 기초가 되는 십계명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는 신명기 5:6~22을 읽어 보라. 특별히 네 번째 계명과 그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에 집중해 보라. 율법과 은혜의 실제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신5:6~2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17 살인하지 말지니라 18 간음하지 말지니라 19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답: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었으니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다. 구원하여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관한 표현이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구원받았으니 준행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모세는 일곱째 날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넷째 계명의 기본적인 내용을 언급한 후 추가적인 강조를 한다. 비록 출애굽기에서 이미 두 돌판에 새겨진 내용이었지만, 모세는 여기에서 이미 주어진 계명의 의미를 확장한다. 안식일을 창조의 기념일로 지킬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도 지키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애굽에서부터 구해 냈으며 그들의 일로부터 쉬게 했다(히 4:1~5). 이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있어서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의 상징이 될 뿐만 아니라 구원과 은혜의 상징이 된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어린아이들, 종들, 동물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유하는 나그네들까지도 쉴 수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언약의 백성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나누는 날이었다. 그와 같은 명령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은혜로 행하신 일을, 이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묵상>

 

 마태복음 18:21~35을 읽어 보십시오. 이 비유에서 배우게 되는 원칙이 어떤 방법으로 안식일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까?

 

[마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답: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었으니 안식일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처럼 왕에게 1만달란트 탕감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용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신다. 

 

<부가설명>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난 은혜와 진리이다(요1:14,17). 예수께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골1:13,14). 그것은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요5:24). 이제는 사망의 존재가 아니다. 죄의 종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죄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고후5:21)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로 죽은 자가 살아나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살게 한 그 생명력의 작용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넉넉히 준행하는 자가 된다(롬8:37).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시니 이 생명의 작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본성이다. 마치 시장할 때 음식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이 생명이라고 한 것이다(요12:50). 그러므로 당연히 이 생명의 복음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하려는 것이 마치 시장할 때 음식을 먹는 것처럼 새 생명의 생리가 된다(행10:10 이하 참고).

 

<교훈>

 

창조와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 허락된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언약의 백성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나누는 날이었다.

 

 

11월 11일(목) 너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성경을 기초로 하는 모든 신앙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위대한 주제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엘렌 G. 화잇은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영광을 먼지로 덮어 버리고, 사람 스스로가 할 수 없는 일을 사람을 위해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질 준비가 된다”(The Faith I Live By, 109).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거룩하심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거룩하지 않은 존재들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엄청난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일, 곧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났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씻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면서 신명기 9:1~6을 읽어 보라. 모세는 여기에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를 보여주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를 어떻게 보여 주고 있는가?

 

[신9:1~6]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3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답: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아낙 자손을 쫓아내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요, 그들이 전쟁한 것은 이 은혜를 힘입어 준행한 것 뿐이다. 전혀 그들의 공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복음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요약하고자 한다면, 신 9:5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참조, 딛 1:2)라고 약속하신 “영원한 복음”(계 14:6) 때문이다. 만약 그 약속이 “영원 전부터” 주어졌다면 구원은 결코 우리의 행위 때문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 전”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그대의 잘못과, 그대의 결함과, 그대의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위해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그분과 그분의 율법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신다. 약속은 이미 주어졌으며 성취되었다. 그대의 행위와 그대의 순종이 아무리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그대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람의 행위와 순종은 이미 받은 구원의 결과일 뿐이다.

 

<묵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 구원받은 상태,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그 생명으로만 생활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항상 ‘사람은 존재하고 살아가는데,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을 전제로 연구한다. 내가 깨달은 대로는 이런 생각은 성경에 계시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결단코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한다. 성경의 복음 진리는 살아 있는 죄인을 구원해서 살아가는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죽어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생명이 없는 시체들을 살려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수 있게 하시고 이 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산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 될 일인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우리가 육체에 거하는 사망의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듭나는 것 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육체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자가 된다(롬8:9). 그렇게 되었을 때 순종은 자연스러운 생활이 된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 때문이다. 이제 그에 대한 반응으로 순종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다. 

 

 

11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2조 개나 되는 은하계가 온 우주를 빛내고 있다. 각각의 은하계는 약 일천억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일천억 개의 별을 가지고 있는 2조 개의 은하계에 있는 별을 세보면 200,000,000,000,000,000,000,000개의 별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리는 이렇다. 무언가를 탄생시키고 창조하는 것은, 그것이 낳고 만든 것보다 크고 위대해야 한다. 피카소는 그가 그린 그림들보다 더 위대하다. 이 세상을 계획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보다 훨씬 크시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음 성경절을 읽어 보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이 말은 200,000,000,000,000,000,000,000개가 넘는 별들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오셔서, 죄 없는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죄의 결과들을 짊어지셨고 우리가 영생의 약속을 갖게 하셨다는 뜻이다. 우리 앞에는 위대한 진리가  놓여 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핵심적인 연구를 위해

1. 월요일 교과에 있는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순종과 율법주의는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율법주의는 율법 지키는 것을 구원의 공로로 생각하는 것이고 순종은 구원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삶을 뜻한다.

 

2. 십계명을 범하므로 비참한 결과를 맛보아야 했던 사람들에 관해 들어본 이야기가 있는가? 그 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보여주는 율법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 성경에 그런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즐거운 반응을 뜻한다.

 

3. 십자가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 만일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십자가는 소용없는 헛 것이 된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신 것이다(딤후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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