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질문, 대답, 설명( 03/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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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3-19 03:28 조회5,865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3월 2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49분)
연구 범위: 히 13, 롬 12:13, 엡 5:3~5, 벧전 5:1~4, 히 2:9, 히 4:16, 갈 2:20
기억절: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히 13:1).
히브리서 13장은 사도의 마지막 권고를 보여 준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히 13:1).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우리가 왕이요 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가족, 곧 그분의 형제, 자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편지의 수신자들을 단순히 각자의 구원을 향해 예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를 맺는 자라고만 여기는 대신 함께 구원받을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있다. 바울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을 “형제 사랑”으로 특징 짓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히 2:11). 그러므로, 믿는 자들도 서로를 대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행해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형제 사랑은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서로 돌아보”는 일을 포함했다(히 3:13, 10:24, 25, 12:15~17). 13장은 그 사랑에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손님 대접하는 일(히 13:2), 갇힌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을 방문하고 도와주는 일(히 13:3), 결혼을 귀하게 여기는 일(히 13:4), 탐심을 피하는 일(히 13:5, 6), 교회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일(히 13:7~17), 그리고 이 편지를 기록한 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히 13:18, 19)이 바로 그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이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베풀어 주신 은혜가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에 감사한다.
- 행하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비록 쉽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충성하며 살아간다.
TMI 위로 : 안교 소그룹이 함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감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권면에 담긴, 보다 더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히 13:1, 2)
※ 누구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를 제공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3. 형제 사랑을 가로막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입니까?(히 13:4, 5)
※ 탐심과 음심(淫心)이다.
4. 교회 안에서 지도자들과 신자들 사이의 올바른 신뢰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히 13:7~17)
※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으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어떻게 하면 “다른 교훈”에 떠내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을 수 있을까요?(히 13:9, 4:16)
※ 은혜의 보좌로부터 계속적인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
6. 영문 밖은 어떤 곳이었으며 그곳으로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히 13:10~14)
※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간다는 뜻이다.
결론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그 소망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며 음행과 탐심을 멀리하고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3월 20일(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봄
히브리서 13:1, 2, 로마서 12:13, 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8, 그리고 베드로전서 4:9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에서 말하는 “손님 대접”은 어떤 행동을 말하는가?
[히13: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롬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딛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답: 그리스도인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대접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 거기에는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낯선 사람을 환대하는 문화 속에 퍼져 나갔다. 손님 대접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 중에는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도 있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은 단순히 손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을 깜박 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바울은 동료 신자들을 위한 대접만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부지 중에 손님을 대접함으로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고 말할 때(히 13:2) 바울은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에 방문했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했을 것이다(창 18:2~15). 다른 사람을 대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그들과 소유를 나누고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을 의미한다(히 2:10~18).
감옥에 갇힌 자들을 향한 형제 사랑은 단순히 기도 속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감옥에 갇힌 자들을 의도적으로 등한시할 위험이 있었다. 사회에서 정죄받은 자들에게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자들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같은 처지에 놓는 셈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갇힌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어 핍박에 노출되는 상황을 무릅쓴 것이었다(히 10:32~34).
바울의 권면은 독자들에게 갇힌 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이미지와 언어를 사용한다. 첫째, 저자는 과거에 독자들이 갇혀 있던 형제들을 돌보아 주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다(히 10:33). 둘째, “학대”라는 단어의 사용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던 모세의 경험을 떠올리게 해 준다(히 11:25).
마지막으로 바울은 형제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들 또한 “몸을 가졌”음을 상기시킨다(히 13:3). 그들도 같은 인간 상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마치 자기 자신이 갇힌 바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하게 될지 헤아리는 마음으로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봐 주어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갇힌 자들에게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함으로 그들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묵상>
마태복음 7:12을 읽어 보십시오. 성경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형제 사랑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답: 먼저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 시대의 손님들은 요즘 같지는 않았다. 요한 3서를 읽어보면 교회가 전도자들을 맞아서 접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기로 한 것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자들이 많았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맞아서 접대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찾아온 손들 중에는 이단 교훈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영접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한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영접하여 천사를 접대하듯이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히브리서에는 그런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정말 나그네, 낯선 사람일지라도 접대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증거 하고 결과로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나 맞아서 접대하려면 너무 위험한 세상이다. 집에 들여놓으면 갑자기 강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것을 멀리 내다본 바울은 말세의 고통하는 때가 될 때 그런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딤후 3장에서 예언했다. 이런 시대에 손님 접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해야 할 것이다. 접대하는 마음은 항상 가져야 하지만 접대의 대상을 신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이것도 재림 직전에 있을 징조 중에 하나다(마24:13). 그래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만 뱀 같이 지혜롭게 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접대할 때 신분을 확인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도 어렵게 만들어놓은 세상이다. 기도와 말씀을 모든 일을 성령의 지도로 수행해야만 할 것 같다.
<교훈>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기억하고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함으로 참된 형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3월 21일(월) 탐심과 음행
히브리서 13:4, 5, 누가복음 16:10~18, 고린도전서 5:1, 에베소서 5:3~5, 골로새서 3:5을 읽어 보라. 어떤 두 가지 악이 이 성경절들에 나타나는가?
[히13:4,5]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눅16:10~18]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엡5:3~5]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답: 탐심과 음행.
바울은 음행과 탐심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 두 가지는 형제 사랑을 가로막는 무서운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신약의 저자들과 고대 도덕가들은 이 둘의 연관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결혼 관계를 약화시키는 모든 것들을 피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 가르침에는 결혼 서약을 위반하는 것과 부당한 이혼을 삼가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비교, 마 19:9).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는 권면은 결혼 외의 성관계를 통해 결혼 관계를 모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음행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모든 종류의 성적 부도덕을 가리킨다(고전 5:9~11, 6:9, 10, 엡 5:5, 딤전 1:9, 10, 계 21:8, 22:15). 그리스-로마 시대의 성도덕은 매우 느슨했고, 특히 남성들은 공개되지 않는 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식의 이중적인 도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믿는 자들은 사회적 관습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존재했던 주된 악습 중 하나였다. 바울은 그가 기록한 다른 편지서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딤전 6:10).
이와 같은 악습을 피하는 방법은 몇몇 서신에서 바울이 격려했던 태도를 갖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만족” 해야 했다(고후 9:8, 빌 4:11, 12).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떠나지 아니하”실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히 13:5). 이 약속은 여러 장소와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약속이다(창 28:15, 신 31:6, 8, 수 1:5, 대상 28:20).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시편 118:6의 말씀으로 응답하도록 청함을 받는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편 118편에서 시편 기자는 불신자들에 의해 가해지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변치 않는 신뢰를 표현했는데 이는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적합한 기별이다.
<묵상>
현대 사회가 성적 순결을 약화시키고, 사람들에게 돈에 대한 사랑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실제적인 방법으로 이 두 가지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답: 성을 즐거움을 누리는 운동이나 놀이처럼 여기도록 한다. 성경의 교훈이 신자의 사고방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가설명> 다니엘 2장의 우상의 계시는 세상 역사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 우상에서는 역사철학도 포함되어 있다. 그 머리가 순금이다. 머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기관이다. 그것은 역사를 지배하는 것이 황금만능주의라는 것을 암시한다. 세상은 물질 만능이 아닌가. 그러니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오늘날을 빈익빈 부익부 시대라 더욱 그렇다. 사람의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는 손길이 참 많다. 신자들도 거기 빠지는 사람들이 꽤 있다. 도박, 경품, 등등.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심이 우상이 아니고 그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정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오늘날 사회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말들을 모두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성범죄에 관한 말들을 순화시켰다. 성폭력이라는 말이 강간이라는 말을 대신하고 성추행이라는 말을 성희롱이라는 말로 대신해서 그만큼 성에 관한 말을 소위 순화라는 명목으로 부드럽게 사용함으로 거기에 관한 부담을 없앴다. 또 스마트폰, 컴퓨터, 유튜브 등, 대중매체들이 이런 것들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놓는다. 성경은 가정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신7:26), 이제는 손에 들고 다닌다. 노아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 그런 정신이 점점 더 보편화 되고 누구든지 부담없이 즐거운 놀이로 여긴다. 사회가 그러게 조장할 뿐만 아니라, 당자들이 좋게 여긴다. 사회가 그렇게 문화환경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의 풍속도 가나안의 풍속도 다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 문화가 되도록 성령의 역사를 따라 굴복하고 살아야 하고 굳게 지키고 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음행과 탐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원수가 사용하는 매우 심각한 공격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월 22일(화)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기억하라
히브리서 13:7~17을 읽어 보라. 우리는 지도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히13:7~1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답: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순종하며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도록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
히브리서 13:7~17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순종하라는 권면이 담겨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주었던 지도자들을 “기억하라”는 요청으로 시작해 현재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 부탁으로 마무리된다(히 13:17). 과거의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전하고 교회를 시작했던 사람들이었다.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외적인 행위로서 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음으로 그들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에게 있어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최고의 행위는 그 대상이 했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교회를 처음 설립했던 지도자들을 신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모방해야 할 믿음의 영웅들의 목록에 추가시켰다. 이 목록에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영웅들과 히브리서 12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완전한 모본 되시는 예수님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가르침이 변질되는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불변하심에 전혀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히 13:9).
히브리서 13:7절의 지도자들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은 본문 끝에서 좀 더 강한 어조로 다시 한번 반복된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지도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자들이기 때문에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지도자들은 회중 또는 양떼의 영적 평안함을 책임지며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해야 할 목사들로 묘사된다(벧전 5:1~4, 고전 3:10~15). 이와 같은 이해는 오늘날 교회와 각기 다른 단계에서 봉사하는 교단의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성경의 문맥은 이 지도자들이 “큰 목자”(히 13:20) 되시는 예수님 아래서 섬기는 작은 목자들임을 나타낸다. 지도자들의 돌봄과 신실함이 신자들의 순종과 신뢰와 결합한다면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신자들을 기쁨으로 섬길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께 그들에 대한 보고를 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묵상>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지도자들과 신자들 사이의 건강한 신뢰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그것이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지도자는 지도자 다와야 하고,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지도받는 사람 다와야 한다. 지도자가 지도자답지 못하고 피지도 자가 지도받는 사람답지 못한 집단은 건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엡1:22,23). 본 교과 저자의 말대로 교회 지도자의 머리도 예수님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도를 받아 교인들이 건강한 지체로서 제 기능을 다 해야 한다. 지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몸이 건강하지 않게 된다. 지체 하나만 건강하지 않은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지도를 받는 교회의 교인 지도자들은 먼저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분의 사고방식 그분의 생활 방식을 본받아서 평신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목사가 첫째 자리에서 그렇게 해야 하고 다음은 교회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하고 다음으로 온 교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가 건강하게 운영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은 지체들이 다투지 않는다. 발이 머리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위가 심장이 되겠다고 하지도 않는다. 각각 맡은 자리에서 제 기능을 수행한다. 그때 몸은 건강하고 몸이 해야할 기능을 다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본받으라고 권고한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지도자답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다. 정말 우리교회가 이런 건강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재림교회가 그렇기를 바란다.
<교훈>
신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영혼을 책임지기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순종해야 한다.
3월 23일(수)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히브리서 13:9, 2:9, 4:16과 히브리서 6:19, 20을 비교해 보라. 은혜는 어떻게 주어지는가?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굳세어지는가?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6:19,20]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답: 은혜의 보좌에서 나오는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해야 한다.
히브리서 13:9에서 다루고 있는 다른 교훈과 음식 사이의 관계는 정하고 부정한 음식의 구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왜 그런가?
첫째, 우리는 사도행전 15장을 통해 초기 기독교 교회가 신자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행 15:7~11), 그들이 계속해서 일부 음식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는(행 15:19, 20)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음을 알고 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는 것과 그밖의 다른 성경적 규례들은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새 언약이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해 두었다고 이야기한다(히 8:10~12). 그러나 저자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동물의 제사와 성소에서의 레위 계통 제사장의 중보는 예수님의 더 나은 제사와 제사장의 중보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히 8:4, 5, 10:1~18).
둘째, 주어진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은 독자들이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혜택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히 13:9). 바울은 영적인 혜택 또는 은혜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성전에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던 것의 연장선에서 진행되는 유대교 의식 또는 의식적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은혜는 이와 같은 식사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제사장으로서의 중보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먹을 수 있는(요 6:47~58)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제단이 있”다(히 13:10).
히브리서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온다(히 4:16).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은혜는 하나님의 보좌에 단단히 매인 “튼튼하고 견고한” “닻”이다(히 6:19, 20, 비교, 히 4:16).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받는 이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확신을 준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굳게” 되면, 다른 교훈에 “끌리”거나(히 13:9) 하나님으로부터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다(히 2:1).
<묵상>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의 행위를 통해 그 희생에 무언가를 더하려고 하는 것이 왜 복음과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은혜에 반대되는 것일까요?
답: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에 자기 공로를 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그 크신 은혜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5, 6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순종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가설명> 다른 복음 다른 교훈은 언제나 구원을 받는 데는 사람의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들어간다.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것도 들어간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은 구원받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임을 마치 사람이 구원받는 조건을 채우는 방법으로 생각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멸망 받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죄를 사람의 행위에 기초를 두고 생각하고 가르친다. 이것도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다른 교훈이다. 구원을 바르게 알려면 성경이 계시하는 가장 본질적인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죄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죄인이 되어있다는 말은 죄가 사람의 행위와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본질적인 죄는 아담의 씨로 출생하는 사람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다 사망이 된 사망의 존재를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전15:22, 롬5:12,18). 사망이 자기 행위로 생명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이신 분이 사망을 처리하고 생명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생명을 얻는다. 이 생명을 얻으면 이 생명이 선한 행위를 열매로 맺는다. 그가 예수를 믿고 선한 행위를 한다면 구원받는 조건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그 생명이 이루는 열매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른 교훈을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교훈>
은혜는 우리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3월 24일(목) 영문 밖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0~14, 마가복음 8:34, 마태복음 10:38, 누가복음 14:27과 갈라디아서 2:20을 비교해 보라. 영문 밖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히13:10~14]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답: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속에 계셔서 그리스도인을 친히 살아주시도록 한다는 뜻이다.
문밖에 있는 장소는 진영 전체에서 가장 부정한 곳이었다.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의 사체가 그곳에서 불태워졌다(레 4:12). 문둥병자들도 진영 밖으로 쫓겨났으며(레 13:4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사람들과 다른 범죄자들을 처형하는 곳도 진영 밖이었다(레 24:10~16, 23, 왕상 21:13, 행 7:58). 이와 같은 규례는 하나님의 임재가 진영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불결한” 것도 보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모든 부정한 것들은 진영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민 5:3, 신 23:1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밖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셨다(요 19:17~20). 이 사실은 그분에게 지워진 수치를 강조한다(히 12:2). 예수님께서는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정죄받아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하시고 성벽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막 14:63, 64, 참조, 레 24:11, 16). 예수님께서는 “수치스럽고,” “불결한” 존재로 치부되어 진영 밖으로 쫓겨 나셨다(히 12:2). 하지만 바울은 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견디신 수치를 견디며,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권면한다(히 12:2, 참조, 히 13:13). 이것이 바로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선택한 모세가 따라갔던 길이었다(히 11:26).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제 하나님의 임재가 진영 밖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는 행동은 “그분의 수모를 감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금송아지 반역 사건 이후 모세가 하나님의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진 밖”으로 나갔던 것 같이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다(히 13:13). 이 이야기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반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또한 거절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출 33:7). 그러므로, 고난과 치욕의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님을 따르라고 초청하며(12:2), 그들이 현재의 고난을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기(히 12:11) 위한 일시적인 훈련으로 여기도록 초청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시는 “장차 올 도성”을 찾기 위해 타락한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히 13:14, 히 11:10, 16).
<묵상>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대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대의 삶 속에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비난”과 “수치”는 무엇입니까?
답: 자기들과 같지 않은 삶을 비난하는 것이다. 사회조류를 따르지 않으므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를 지고 골고다로 나가신 그 길을 따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모든 수모를 감내(堪耐)하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시게 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문화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또 죄인들과 세리와 창녀들을 위해준다고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을 받고 종내는 정죄 받았다. 사도들고 그런 경험으로 순교당했다. 당시는 종족마다 우상숭배자들이었고 유대인은 철저히 문자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예수님과 그를 믿는 무리들이 편히 설 자리가 없었다. 어느 문화권에 들어가도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행28:22).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부터 또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조롱을 받았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손을 잡았을 때 예수님의 이름은 인기를 얻었다. 종교가 정치 권세를 누리게 되자 급속히 세속화되었다. 20세기를 기독교 문화시대라고 했다. 21세기는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기독교가 사회문화를 주도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는 예수 믿는 것이 수치가 될 수 없다. 교회가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카톨릭이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도 순수하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선 다른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들과 동화하지 않는다고 수치를 붓는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주님 힘을 주소서.
<교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견디신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3월 2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신자들은) 성도들과의 달콤한 교제를 만끽했다. 그들은 친절하고 사려 깊고 극기하였으며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날마다 서로 교제하는 중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사랑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보기 시작하였다. 실수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불친절한 비평의 여지를 주어 그들은 구주와 그분의 사랑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외적 의식에 관하여 더욱 엄격하고 신앙의 실천보다는 교리에 관하여 더욱 까다롭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열심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보지 못하였다.…
교회 내에서 우애가 감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요한은 신도들에게 이 사랑의 계속적인 필요를 역설하였다.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들에는 이 사상이 가득 차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사도행적, 547, 54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인 삶은 종종 예수님과 신자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인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공동체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그 공동체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개인적으로만 관계하면 교회에서 떠나게 된다. 그러면 지체가 아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지면 이미 지체가 아니고 생명을 잃고 썩어버린다.
2. 교회에서 형제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같은 반원들과 목록을 만들어 보라.
※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벧전4:7,8). 비판과 비난이 없어지고 서로 도우며 격려하고 봉사할 때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3. 참된 형제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의 특징과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 참된 형제 사랑은 거짓 형제 사랑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 참된 형제 사랑은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도록 협력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협력하는 것은 거짓 사랑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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