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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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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3-20 22:31 조회1,4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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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과-형제(兄弟) 사랑하기를 계속(繼續)하고>

                                              (2022년03월26일(안)(18시49분)


(03월20일) (日) <하나님의 백성(百姓)들을 돌봄>


(Q)~ (히브리서13:1~2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손님 대접(待接)하기를 잊지 말라”는 권면(勸勉)에 담긴 보다 더 깊은 영적(靈的) 의미(意味)는 무엇일까요?


(A)~⑴.저자(著者)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을 같이 태어난 형제(兄弟)처럼 또 같은 동족(同族)들처럼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친형제(親兄弟)들에게만 베풀지 말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성도(聖徒)들은 하나님의 자녀(子女)들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특별(特別)하고 영적(靈的)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 잇는 것이다.


⑵.저자(著者)는 (히13:1)에서 권면한 ‘형제(兄弟) 사랑’을 더 확대(擴大)하여 ‘손님 대접(待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待接)’에 관한 권면(勸勉)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反映)한 것이다(마 25:35). 당시(當時) 그리스도인들은 핍박(逼迫)으로 인(因)해서 복음전도여행(福音傳道旅行)과 그 여행(旅行)을 위한 숙식(宿食)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待接)하는 것은 복음전도사역(福音傳道使役)에 매우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待接)에 대한 권면(勸勉)은 초기(初期) 그리스도인에게 중요(重要)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義務)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히 13:1~2, 만나주석)


⑶.손님을 대접(待接)해야 하는 동기(動機)는 "이로써 부지중(不知中)에 천사(天使)들을 대접(待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창 18장)과 롯(창 19장)이 그랬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대접(待接)한 손님 중의 한 분은 아들이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이러한 입장에 처(處)하게 되리라고는 생각(生覺)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服從)하여 나그네를 접대(接待)하는 것을 그리스도는 자신(自身)이 대접(待接)받으신 것으로 여기시고 보상(報償)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마 25:3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복음서(福音書)에서 "너희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迎接)하였고"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덕(厚德)한 종들에게 그들이 "부지중(不知中)"에 행(行)한 선(善)까지 기억(記憶)하시고 은혜(恩惠)와 존귀(尊貴)를 그들에게 부어 주셨다.


⑷.하나님의 백성(百姓)인 그리스도인들은 손님 대접(待接)은 의무(義務)이자 축복(祝福)이라는 사실(事實)을 기억(記憶)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도움이 필요(必要)한 사람)들에게 물질적(物質的)으로 정서적(情緖的)으로 지원(支援)을 제공(提供)해 줌으로써 참된 형제(兄弟)사랑의 모습을 실천(實踐)하여 그들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03월21일) (月) <탐심(貪心)과 음행(淫行)>


(Q)~(히브리서13:3~4절)에서 말씀하시는 형제(兄弟) 사랑을 가로 막는 핵심(核心)적인 두 가지 요소(要素)는 무엇입니까?


(A)~⑴.하나님의 백성(百姓)을 넘어뜨리기 위(爲)한 사단의 올무 중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음행(淫行)과 ㉯.탐심(貪心)이다. 문화(文化)가 발달(發達)하고 자유분방(自由奔放)부절제(不節制)하게 사는 곳에는 탐심(貪心)과 음행(淫行)이 만연(蔓延)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 저자(著者)는(히13:4~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特別)히 탐심(貪心)과 음행(淫行)의 덫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권면(勸勉)하고 있는 것이다.


⑵.헬라와 로마 문화권(文化圈)에서 보편화(普遍化)되었던 성적 타락(性的墮落)의 풍조(風潮)에 신자(信者)들이 빠져들지 않게 하려는 경고적(警告的)권면(勸勉)이다. 여기서 우리는 ①.성(性)은 부부(夫婦)라는 관계(關係)안에서만 아름답고 선(善)한 것이며,(창 2:24). ②.간음(姦淫)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創造秩序)를 깨뜨리는 죄악(罪惡)된 행위(行爲)임.(고전6:18)을 깨닫게 된다.


⑶.<순결(純潔)함과 정숙(貞淑)함의 의무(義務)를 권(勸)하였다.(히13:4)>

혼인(婚姻)은 하나님이 정(定)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혼인(婚姻)을 귀(貴)한 것으로 여기고" 신중(愼重)하게 취급(取扱)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인정(認定)하신 혼인(婚姻)을 부정(否定)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혼인(婚姻)은 신성(神聖)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人間)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아시고 낙원(樂園)에 거(居)하는 아담을 위(爲)해 혼인(婚姻)을 관습(慣習)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人類)의 조상(祖上)이 되는 처음 두 사람을 혼인(婚姻)시키고 축복(祝福)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인간(人間)으로 혼인(婚姻)에 관심(關心)을 가지고 주(主) 안에서 결혼(結婚)하게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도 혼인(婚姻)잔치에 참석(參席)하셔서 첫 기적(奇蹟)을 행(行)하심으로 결혼(結婚)을 존귀(尊貴)스럽게 여기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또한 혼인(婚姻)은 순결(純潔)치 못한 것과 침소(寢所)를 더럽히는 행위(行爲)를 저지한다는 점에서도 귀(貴)한 것이다. 결혼(結婚)은 그 배우자(配偶者)들이 서로 순수(純粹)하며, 정결(淨潔)함을 지키고, 침소(寢所)를 더럽히지 아니할 때에 즉 불법적(不法的)이고 부정(不淨)한 사랑에 의해 침소(寢所)를 더럽히지 아니할 때에 귀(貴)하고도 복(福)된 것이 된다. (히 13:1~5, 매튜헨리)


(03월22일)(火)<너희를 인도(引導)하던 자(者)들을 기억(記憶)하라>


(Q)~(히브리서13:7~17절)에서 교회(敎會)안에서 지도자(指導者)들과 성도(聖徒)들 사이의 올바른 신뢰관계(信賴關係)가 중요(重要)한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A)~⑴.유대교의 형식주의(形式主義)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완전(完全)한 속죄(贖罪)를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구별(區別)하여 온전(穩全)히 하나님께 산제사(祭祀)로 드려야 할 것을 말한다(롬 12:1)


⑵.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받은 자(者)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제사(祭祀)가 요구(要求)된다.(롬12:1) 이것은 단순(單純)히 믿음을 고백(告白)하는 차원(次元)을 넘어서서 형제(兄弟)들의 아픔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구체적(具體的)으로 동참(同參)할 뿐만 아니라 가난(家難)한 이웃의 필요(必要)와 궁핍(窮乏)에 대해 경제적(經濟的)으로 지원(支援)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이를 통(通)하여 우리는 

㉮.하나님은 신앙(信仰)의 고백(告白)과 구체적(具體的) 행위(行爲)를 아울러 요구(要求)하시며(약2:17) 

㉯.하나님께서는 자기(自己)의 공로(功勞)를 자랑하기 위(爲)한 선행(善行)은 열납(悅納)하지 않으심을 깨닫게 된다.(참조, 시편10:14)


⑶.<(영적(靈的) 지도자(指導者)들은)>

①.마치 자신(自身)의 이해(利害)가 달린 문제(問題)에 신경(神經)을 쓰듯이 성도(聖徒)들을 위(爲)해 애쓰며, ②.하나님 앞에서 완전(完全)한 책임(責任)을 지겠다는 자세(姿勢)로 영혼(靈魂)을 돌봐야함을 보여준다. 지도자(指導者)는 신자(信者)들의 형통(亨通)을 보고 참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살전 2:20) 신자(信者)들의 실족(失足)을 자신(自身)의 책임(責任)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지도자(指導者)의 기본자세(基本姿勢)는 섬김이지 군림이 아님(고후 4:5)을 깨달아야 한다.


⑷.<(신자(信者):성도(聖徒))들은>

지도자(指導者)에 대한 불순종(不順從)은 지도자(指導者)로 하여금 자신(自身)의 직무(職務)를 근심(謹審)가운데 수행(遂行)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 결국(結局) 신자(信者)자신(自身)에게 손해(損害)가 됨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聖徒)는 지도자(指導者)를 하나님의 권위(權威)를 받은 자(者)로써 인정(認定)해야 하고(고후 6:1), 지도자(指導者)를 격려(激勵)하며 영혼(靈魂)을 돌보는 일에 전념(專念)하도록 하고(행 6:4) 불순종(不順從)으로 인(因)한 지도자(指導者)의 사기저하(士氣低下)는 성도(聖徒) 자신(自身)의 영적건강(靈的健康)에 유해(有害)함을 깨달아야 한다.


⑸.(히브리서 13:7~17)의 핵심(核心)은 순종(順從)과 기억(記憶)하라는 권면(勸勉)인데, 저자(著者)는 지도자(指導者)들의 행실(行實)의 결말(結末)을 주의(注意)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本) 받음으로 그 지도자(指導者)들을 “기억(記憶)하라”고 권면(勸勉)하며, 또한 지도자(指導者)들은 신자(信者)(성도(聖徒)들을 평안(平安)함을 책임(責任)지며 그들의 영적상태(靈的常態)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報告)해야 할 지도자(指導者)들로 묘사(描寫)된다.(참고, 벧전 5:1~4, 고전 3:10~15) 결론적(結論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永遠)토록 동일(同一)하시니라(히13:8)고 말씀하고 계신다.


(03월23일) (水) <다른 교훈(敎訓)에 끌리지 말라>


(Q)~(히브리서13:9과 4:16절)에서 히브리서 저자(著者)가 권면(勸勉)하고자 하는 “다른 교훈(敎訓)”에 떠내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恩惠)안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비결(秘訣)은 무엇일까?


(A)~⑴.그리스도인들의 영적(靈的)인 유익(有益)과 풍성(豊盛)함은 식물(食物)과 그에 따른 의식(儀式)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恩惠)’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의 효능(效能)에 관(關)한 하나님의 말씀(히2:9)과 기도(祈禱)를 통(通)해서(히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傳達)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恩惠)에 의(依)해서만 온전(穩全)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食物)이나 그 의식(儀式)에 의해서 온전(穩全)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食物)과 그에 따른 규례(規例)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救贖使役)이 도래(到來)할 때까지로 제한(制限)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히 13:9, 만나주석)


⑵.이미 받은 순수(純粹)한 복음기별(福音寄別)과 다른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끌리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새롭고 낯선 가르침에 쉽사리 영향(影響)을 받는다. 영적식별력(靈的識別力)의 결핍(缺乏)으로 그들은 새 가르침을 성경(聖經)과 비교(比較)하여 진리(眞理)와 오류(誤謬)를 구별(區別)해낼 능력(能力)이 없다. (참조 엡 4:14; 골 2:4, 8)


⑶. 식물(음식물)로써 즉 우리의 행위(行爲)로 구원(救援)받는 조건(條件)이 아니라 은혜(恩惠)로써 굳게 해야 한다. 즉(卽) 종교(宗敎)와 신학(神學)의 일시적(一時的) 유행(流行)에 “끌리지” 않도록 함이. 그리스도의 견고(堅固)케 하는 은혜(恩惠)의 능력(能力)은 그리스도인을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최선(最善)의 보호책(保護策)이다. “은혜(恩惠)”에 관(關)해서는 (롬 1:7; 3:24 참조).


⑷.<(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敎訓)에 끌리지 말라 … 는 말씀을 부연설명(敷衍說明)하자면>

식물(食物)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食物)로 말미암아 행(行)한 자(者)는 유익(有益)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저자(著者)는 본문(本文)에서 수신자(受信者)들에게 다른 교훈(敎訓)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勸勉)하고 있다. 즉(卽) ‘식물(食物)’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로마신’은 (히9:10)에서 사용(使用)된 ‘먹는 것’과 동일(同一)한 단어(單語)로 이상(異常)한 교훈(敎訓)을 전(傳)하는 자(者)들은 이러한 식물(食物)을 통(通)한 의식(儀式)이나 규례(規例)에 의(依)해서 온전(穩全)하여지고 유익(有益)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敎訓)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宗派)와 연관(聯關)된 혼합주의적(混合主義的)인 영지주의(靈知主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食物)’은 육체(肉體)에 제한(制限)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穩全)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許諾)된 예법(禮法)에 불과(不過)한 것이었다(히9:10). 

그러기에 식물(食物)과 의식(儀式)을 통(通)해서는 전(全)혀 어떠한 유익(有益)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穩全)히 깨끗케 할 수 없고 단지(但只) 외적(外的)인 것만을 정결(淨潔)케 할 뿐 양심(良心)을 정결(淨潔)케 할 수 없다(히9:13,14).


(03월24일) (木) <영문(營門) 밖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자>


(Q)~(히브리서13:10~14절)에서 말씀하는 영문(營門)밖은 어떤 곳이었으며 그 곳으로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意味)일까요?


(A)~⑴.<(히 13:11) 그는 영문(營門) 밖에서 고난(苦難)을 당하셨음(갈 3:13)>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범(凡)했기 때문에 에덴에서 추방(追放)을 당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거룩한 장소(場所)의 경계선(境界線) 밖에서 고난(苦難)을 당(當)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영문(營門) 밖에서 죽으셨으니 그곳은 중죄인(重罪人)들과 살인자(殺人者)들이 처형(處刑)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분은 죄인(罪人)이 받아야 할 벌(罰)을 담당(擔當)하시고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爲)하여 저주(詛呪)를 받은바 되사 율법(律法)의 저주(詛呪)에서 우리 죄(罪)를 속량(贖良)하셨으니”라고 하신 말씀들은 그 의미(意味)가 얼마나 깊고 완전(完全)한 말씀인가? 그분은 영문(營門)밖으로 나가셨다. 이것은 그분이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전세계(全世界)를 위(爲)해서 그분의 생명(生命)을 주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EG주석, 히13:11~13).


⑵.<그리스도의 죽음은 전 인류(人類)를 위한 것>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는 갈바리가 도성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분의 죽음이 히브리 민족(民族) 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전 인류(全人類)를 위(爲)한 것이라는 사실(事實)이다. 그분은 타락(墮落)한 세계(世界)를 향(向)하여 내가 그대들의 구속주(救贖主)이다. 내가 주는 구원(救援)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EG주석 히13:11~13).(안교 1906. 9. 4).


⑶.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영구(永久)한 도성(都城)”으로 바라보았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떼어질 수 없을 정도(程度)로 그 성(性)과 밀접(密接)하게 묶여 있으며, 그래서 그 도성(都城)은 영구(永久)히 서 있을 운명(運命)이라고 생각(生覺)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품 안에서 안정감(安定感)을 느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그런 “영구(永久)한 도성(都城)”이 없다. 그들의 소망(所望)과 염원(念願)은 이 땅의 도성(都城)이나 종교제도(宗敎制度)와 관련(關聯)이 없다. 시간(時間)이 조금 지나면 예루살렘의 파멸(破滅)을 목도(目睹)할 것이었던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의미심장(意味深長)한가!


⑷.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以上) 유대 종교(宗敎)의 의식(儀式)이나 예식(禮式)에서 구원(救援)을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족속(族屬)이었으며, 비유(譬喩)해서 말한다면 예루살렘 도성(都城)의 거민(居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를 따른다면 그와 함께 유대교의 경계(境界)를 넘어 가야만 한다. 히브리서의 배경(背景)에서 이런 상황(狀況)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의 의식(儀式)과 예식(禮式)에서 눈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 성소(聖所)에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大祭司長)으로 봉사(奉仕)하는 그의 사역(使役)에 눈을 고정(固定)하라는 호소(呼訴)인 것이다.


⑸.그 능욕(凌辱)을 지고. 본문(本文)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營門)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必要)한 조건(條件)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當)하신 ‘능욕(凌辱)을 지는 일’ 즉(卽)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聯合)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同一)한 고난(苦難)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當)하신 고난(苦難) 곧 십자가(十字架) 상의 죽음은 이방인(異邦人)들에게 수치(羞恥)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詛呪) 아래 있는 것으로 이해(理解)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⑹.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同一)하게 수치(羞恥)와 치욕(恥辱)으로 이해(理解)된 십자가(十字架)를 짐으로 그의 고난(苦難)에 동참(同參)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제자(弟子)는 자기(自己) 자신(自身)을 부인(否認)하고 십자가(十字架)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福音書)의 제자도(弟子道)와 동일(同一)하다. (마10:37,38, 막 8:34-38).(히 13:10~14, 만나주석) <아멘>


<2022년 제1기 동안 부족(不足)한 글 읽어 주심에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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