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창조(질문, 대답, 설명) 0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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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3-26 03:22 조회5,310회 댓글0건본문
제1과 창조
(4월 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55분)
연구 범위: 시 100:1~3, 창 1, 2, 출 20:8~11, 출 40:33, 마 25:14~30, 마 19:7~9
기억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창세기, 즉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창조는 인류의 역사, 그리고 성경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여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실은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가 인류 그리고 성경 역사 가운데 나타난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진실이라는 의미임을 보여 준다.
창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과 인류에 관한 교훈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번 주 함께 공부하면서 안식일의 깊은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자기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목적과 그 나무와 생명나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함께 연구할 것이다.
첫 시작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존재는 온전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존재하기 전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 우리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속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조와 구속의 개념이 일곱째 날 안식일 계명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심오한 진리인가!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살도록 하신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이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관리하도록 부름 받은 청지기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간다.
TMI 위로
2. 창조 기사에서는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창 1, 2장)
※ 태초에 전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소개한다. 즉 창조주의 모습이다.
3. 창조의 각 단계를 마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평가하셨으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창 1장)
※ ‘좋았더라’ 창조한 것이 완전하고 만족하다는 뜻이다.
4. 창조 주간 끝에 자리 잡은 안식일이 우리를 위한 소망의 기별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사 65:17, 계 21:1)
※ 새 하늘과 새 땅까지 또한 영원히 창조주를 기억하여 영생을 회복할 것이라는 소망이다.
5.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창 1:26~29)
※ 영적 신체적 완전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6. 피조물과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의무는 무엇입니까?(창 2:15~17)
※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결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공간을 준비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자 하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 그 완벽함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맡겨 주신 이 지구를 잘 관리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3월 27일(일) 창조의 하나님
시편 100:1~3을 읽어 보라.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은 무엇이며 왜 그런가?
[시100:1~3]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답: 즐거운 찬송을 부르고 기쁨으로 섬기며 노래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이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의 첫 번째 기별은 “하나님”이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창 1:1).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그 절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히브리인들이 예배 시간에 암송하는 찬양에서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가장 강한 어조로 암송함으로 하나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창조에 관한 기록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로 시작된다.
창세기는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첫 번째 창조 기사(창 1:1~2:4)에서는 하나님을 사람과 완전히 다른 초월적인 존재, 곧 모든 것보다 우월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인 엘로힘(Elohim)으로 나타낸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탁월성과 힘을 나타내며,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복수의 형태로 기록된 것은 위엄과 초월성의 개념을 표현한다.
두 번째 창조 기사(창 2:4~25)에서는 하나님을 더없이 친밀하고 개인적이며 우리 가까이 계신 야훼(YHWH) 하나님으로 나타낸다. 야훼라는 이름은 친밀함과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즉, 창조 기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경배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능력을 깨닫고, 동시에 그분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의 것”(시 100:3)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많은 시편이 예배와 창조를 연관 짓는 이유이다(시 95:1~6, 139:13, 14, 비교, 계 14:7).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께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존경,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친밀함과 용서, 사랑에 대한 기쁨과 확신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시 2:11).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을 나타낸 순서조차도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가까우심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한 후에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 삶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랍고 사랑스러운 임재를 감사할 수 있다.
<묵상>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신 동시에 우리와 매우 가까이 계실 수 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은 사실이 놀라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사람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능력자이시며 스스로 계시는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하지 않는 시각으로 과정공부를 시작해서 흥미롭다. 엘로힘은 능력의 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호와는 그 엘로힘은 개인적인 고유명사 이름인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생물을 창조하실 수 있고, 마지막으로 자기 형상과 같은 사람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 사람을 개인적으로 창조하신 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 형상과 같은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생명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받아서 생명이 연결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이 되지 않으면 생명을 상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존재도 없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작용하기 위하여 생명이 작용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사람의 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흙으로 만든 몸 안에서 작요하고 활동한다. 1장과 2장은 이것을 나타내고 이것은 인간 존재와 활동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계시이다. 아멘.
<교훈>
창세기에 1장과 2장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우리에게 능력 있고 위대하시며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호소한다.
3월 28일(월) 창조
창세기 1:4, 10, 12, 18, 21, 25, 31 그리고 창세기 2:1~3을 읽어 보라. 첫 번째 창조 기사에서 “좋았더라”라는 후렴구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 번째 창조 기사의 결론 부분이 암시하는 교훈은 무엇인가(창 2:1~3)?
답: 1장의 모든 구절들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다. 31절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2:1~3은 일곱째날에 창조하신 일을 마치시고 안식히면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주시고 쉬셨다는 말씀이다. 창조하신 것이 완벽하게 되었기에 쉬신다는 것이다.
창조 기사의 각 단계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을 “좋았더라”(tov)라고 평가하신다. 이 형용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빛이 제대로 비추고 있었고(창 1:4), 식물들은 열매를 맺고 있었으며(창 1:12), 다른 모든 것들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단순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성경에서 토브(tov)라는 단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창 24:16). 그것은 죽음(창 2:17)과 연관된 악(창 2:9)과 대조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좋았더라”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할 뿐 아니라 그 속에 악한 것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 세상은, 죄와 죽음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지 않았다. 창조에 관한 이와 같은 묘사는 세상이 열등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우월한 것으로 발전해 가는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모양을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의 이론들과 근본적으로 대비된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 기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단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설명한다(창 1:1).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의 결과로 창조되었다(창 1:3).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번역된 ‘바라(bara’)’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그 주어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인 사건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즉시 그렇게 된 것이다.
창조 기사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마무리되었으며(창 1:31),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판단하셨다고 알려 준다. 창세기 1:1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창세기 2:1은 그 사건이 마무리 되었음을 선포한다. 안식일을 포함하여 모든 창조 사역이 이레 동안 완결되었다.
<묵상>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에 대한 개념이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진화로는 거짓이니까 진리와 거짓을 공존할 수 없다.
<부가설명> 이 세상에는 자연(自然)이 없다.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사람이 만들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위(人爲)가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자연이라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사상에 서서 생각하면 자연은 ‘여호와’라는 뜻이 된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삼위일명(三位一名) 여호와 외에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 여호와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셔서 있게 된 것들이다. 무생물이나 생물이나 천사나 사람이나 우주 천체나 만상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있으라고 하셔서 있는 것들이다. 말씀하시매 이루었고 명하시매 견고히 섰다(시33:6).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있으라고 하셔서 있게 된 존재들이다. 자기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체도 생명도 공기고 햇빛도 모래알 하나, 작은 풀잎 하나, 살랑거리는 바람 등등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것까지 다 창조주의 솜씨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경배해야 한다. 믿고 충성해야 한다. 그분으 모든 것을 심히 좋게 만드셨다. 그렇게 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게 하셨다.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창조주께서 제정하신 방법이다.
<교훈>
이 세상이 우연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과 달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당신의 계획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한다.
3월 29일(화) 안식일
창세기 2:2, 3과 출애굽기 20:8~11을 읽어 보라. 일곱째 날 안식일이 창조와 관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연관성은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는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창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답: 엿새 동안 창조를 다 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셨다. 안식일을 창조를 완성했기 때문에 쉬신 날이다. 창조 완성을 확인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셨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창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로부터 쉬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일로부터 쉴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의 몸을 포함한 하나님의 창조가 심히 좋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부의 생각과는 달리 구약과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의 몸을 악한 것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교적 개념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그들의 육신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마음껏 누리고 그것들을 잘 보살핀다.
인류 역사의 첫 번째 ‘끝’을 표시하는 안식일은 고통 중에 있는 인류와 신음하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표징이다. ‘일을...마치니’라는 표현이 복음과 구원에 관한 교훈이 가르쳐졌던 두 장소, 성소와(출 40:33) 솔로몬의 성전의(왕상 7:40, 51) 건축이 마쳐질 때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타락 이후, 한 주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안식일은 새 창조의 기적을 통해 마침내 이루어질 구원의 기적을 가리킨다(사 65:17, 계 21:1). 안식일은 이 세상의 고통과 시련들도 결국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끝에 새겨진 표징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기에 가장 적합한 날로 안식일을 선택하신 이유다(눅 13:13~16). 전통에 갇혀 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치유함을 통해 당시의 백성들과 우리들의 관심을 모든 아픔과 고통과 죽음이 끝나게 될 그때로 향하게 하셨는데, 그때 비로소 구원의 과정이 최종적으로 결론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매 안식일은 우리에게 구속의 희망을 가리켜 보여 준다.
<묵상>
안식일의 쉼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통해 마침내 성취될 예수님 안에 있는 쉼과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답: 쉬는 것은 시작한 어떤 일을 충분히 다 했을 때 취하는 것이다. 창조를 다 끝내셨을 때 끝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안식일이고 출애굽이 끝났을 때 애굽에서 구원한 사실을 충분히 확인했을 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다(출 16장).
<부가설명> 안식일은 창조주께서 하시던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을 만족해하면서 친히 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430년 만에 이끌어내시고 애굽사람이 더는 추격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하신 후에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셨다. 창조와 구원이 확실하게 마쳤을 때 쉬도록 하신 것이다. 즉 창조에 관한한, 사람이 더할 일이 없고, 구원에 관하여서도 사람이 더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쉼이다. 우리는 없는 것을 있도록 할 수 없다. 있는 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구원받기 위하여 사람이 더할 일이 없다. 구원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에 들어오도록 하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래서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은 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의 날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창조사업이 완성된 것을 시인하고 믿는 신앙 고백의 날이요,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완성된 것을 시인하고 믿는 신앙 고백의 날이다. 이 날을 이런 뜻으로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이 두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창조주와 구속주가 하신 일이 무언가 미흡하다고 자신들이 더 보태려는 태도가 된다. 그것은 창조주와 구원의 주가 하신 일이 부족하다고 탓하는 것이 된다. 불경이다.
<교훈>
안식일은 고통 중에 있는 인류와 신음하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표징으로써 우리에게 이 세상의 고통과 시련들이 마침내 끝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3월 30일(수) 인간의 창조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시던 일의 마지막에 위치한다. 인간은 지구 창조의 정점이며 지구가 만들어진 목적이다.
창세기 1:26~29과 2:7을 읽어 보라. 인간 창조에 관한 두 가지의 이야기는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
[창1:26~29]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답: 1장은 사람 창조 원리와 사람에게 주신 권리를 기록하고 2장은 구체적인 방법을 기록했는데, 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생명을 주셔서 개인적 관계로 창조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가장 대담한 진술 중 하나이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지만(창 1:25), 사람은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 이 사실은 주로 사람의 영적인 본성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오직 하나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관리상의 기능을 나타내거나,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영적인 기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이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창조의 중요한 물리적 실체를 포함하지 못한다. 창세기 1:26에서 이 과정을 설명하는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단어 속에는 두 가지 차원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형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첼렘(tselem)이 실제적인 육체의 모양을 나타내는 한편, “모양”을 나타내는 데무트(demut)는 신적인 존재와 견줄만한 추상적인 자질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성경이 인간 본성을 통합된 온전한 하나의 실체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남자와 여자)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담이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의 육체와 지능과 영성(靈性)은 하나님을 매우 닮아 있었다”(교육, 15).
육체를 포함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온전한 이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가지 일을 통해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라고 기록된 다른 창조 기사에서 재확인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불어 넣는 것’은 주로 영적인 차원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또한 땅의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숨 쉬는 생물학적 능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생기”는 숨(영적)과 생명(육체적)이 합쳐진 것이다.
<묵상>
창세기 2:7의 말씀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부가설명> 하나님도 어떤 육체적 형상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다니엘 7:13에는 인자 같은 이가 계시로 보였다. 그분은 예수님이시다. 그가 사람되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다니엘에게 계시로 보일 때 사람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 모습이 우리가 말하는 이런 육체였을까? 아니다. 바울은 신령한 몸게 관하여 기록했다.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도 있다’(고전15:44)라고 했다. 하나님이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것인 이 세상 물질계를 초월하는 몸이다. 문을 닫은 방에 그냥 들어오신 것이나 부활해서 아버지께 순식간에 다녀오신 것이나, 우리의 이런 몸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신령한 몸에 관하여 자세한 계시를 기록하게 한 곳이 없다. 바울은 우리가 가진 몸을 ‘낮은 몸’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영광의 몸의 형체’라고 했다(빌3:21). 태초에 창조한 아담의 몸은 영광의 몸의 형체라고 생각한다. 죄가 없었으면 그런 몸으로 후손들이 생육했을 것이다. 물리적이라는 표현이 그때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상태였음은 확실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마가 만지고 보고 확인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이것을 계시하였다.
<교훈>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은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3월 31일(목) 인간의 의무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세 가지 선물-에덴동산(창 2:8), 음식(창 2:16), 여자(창 2:22)-을 주셨다.
창세기 2:15~17을 읽어 보라. 피조물과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 두 의무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창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답: 에덴동산에서 경작, 곧 관리하는 것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께서 그가 살도록 놓아 두신 자연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경작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바드(‘avad)라는 동사는 일을 가리킨다. 그저 선물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훗날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 25:14~30) 우리는 열심히 일해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샤마르(shamar)라는 동사는 받은 것을 잘 보존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무는 음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음식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창 1:29).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말씀하셨다(창 2:16). 하지만 이곳에도 계명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종류의 나무를 통해 풍성하게 주신 선물을 받고 누리도록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은혜의 일부로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제한을 두셨다. 그들은 구별된 한 나무의 열매는 결코 먹지 말아야 했다. 아무런 제한 없이 마음대로 즐기는 것은 죽음으로 이끌 것이었다. 이 원칙은 에덴동산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고, 오늘날에도 같은 원칙이 존재한다.
사람에게 부여된 세 번째 의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 번째 선물이었던 여자와 관련된 것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구절은 부부 사이에 맺은 언약과 하나 됨(비교, 마 19:7~9)에 대한 책임을 확고히 선언한다.
부모를 떠나야 했던 대상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언급된 것은 남성 중심으로 기록된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 방식을 따른 것으로, 같은 계명이 여자에게도 적용된다. 부모로부터 떠나야 하는 대상이 어느 쪽이건 간에 결혼으로 맺어진 결합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선물을 받는 즉시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른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선물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묵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받은 것들에 대한 그대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은 천연계를 관리하고 보존할 책임이 있다. 또 주신 명령대로 먹고 마셔야할 의무가 있다.
<부가설명> 사람은 생명과 존재를 창조주로부터 받았다. 자기 것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에게 자기 것은 없다. 다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이다(고전4:7). 재물도 창조주가 마련해놓은 것들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근원은 다 창조주의 것이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존재를 잃게 되고 자기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증명하며 자기 자체도 없어진다. 생명은 생명의 원천이신 분, 곧 창조주께로 돌아간다. 생명은 생기(生氣)인데 살게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매개체가 있어야 능력을 행사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몸을 만들어서 생기가 작용할 매체를 바련하셨다. 그 몸은 신령한 몸이다. 죽으면 매체가 없어지므로 생기는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그 몸은 영생하는 몸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기에 그는 흙으로 돌아가서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다. 창조주의 말씀을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말씀에 순응해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의무들 또한 허락하심으로 참된 행복을 위한 질서를 마련하셨다.
4월 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육> 128, 129 ‘과학과 성경’, <살아남는 이들> 21, 22 ‘창조’를 읽어 보라.
“천연계라는 책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둘 다 같은 창조주의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서로 일치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법들과 다른 언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위대한 진리를 증거한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다. 과학의 탐구로 발견되는 것은 그것이 바르게 이해되는 한 거룩한 계시인 성경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천연계의 책과 성경은 서로 빛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천연계에서 관찰되는 여러 가지 사실들에서 잘못 끌어낸 추론들은 과학과 성경이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또 이 둘의 조화를 도모하는 중에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훼손하고 파괴시키는 성경 해석 방법이 받아들여져 왔다. 창조에 관한 모세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 것과 지질학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지질학은 지구가 혼돈된 상태로부터 진화하는 데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주장한다. 이 과학의 상상적인 가설에 성경의 사실을 맞추기 위해, 창조의 기간은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이라는 실로 어마어마하고 막연한 기간이 있었다고 추정되었다. 이런 결론은 전혀 부당한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그 자체와 천연계의 가르침에 일치되는 것이다”(교육, 128, 1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만일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지구의 첫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을 그저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일 뿐 아무런 역사적 실체가 없는 단순히 신화 같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가? 성경은 창세기에 기록된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첫 시작에 관한 이야기 역시 역사적 사실임에 대한 어떤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면 구원에 관한 기록도 허구가 된다. 인간의 실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하고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역사적 사실과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기록의 일치가 창조부터 홍수까지의 기록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친히 말씀하셨다.
2.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지구에 대한 우리의 청지기 직분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잘 보살피는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는가?
※ 다스리며 지키라는 말씀으로 청지기 직분을 주셨고 우리는 천연계를 잘 보살펴야 한다.
3.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죄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보여 주는 창조 세계 본래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 해와 달과 별들과 땅과 나무와 동물들과 잘 배치된 환경들이 창조 세계의 경이로움을 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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