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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질문, 대답, 설명) 0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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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12-27 11:23 조회3,0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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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1월 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6분)

 

연구 범위: 출 33:15-22; 호 14:1-4; 계 4:11; 요 17:24; 마 22:1-14; 요 10:17, 18.

 

기억절: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4).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마 26:34) 베드로는 그분을 세 번 부인했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들을 먹이라”(흠정역)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또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째로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시자 근심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결정적인 질문을 통해 베드로를 세 번 회복시키셨다.

우리 각자의 상황이 베드로의 경우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원리는 같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 질문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모든 것은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달려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죄인도 아낌없이 사랑하시며 그들을 돕기를 기뻐하신다. 

느끼기: 사랑의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신다. 

행하기: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세상에 바르게 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TMI 위로

2. 하나님이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출 33:19)

*답: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표현이다.

3.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반역을 고치시고 사랑하십니까?(호 14:4)

*답: 진노를 떠나보낸 사랑의 마음으로 고치신다. 

4. 하나님은 언제부터 사람을 사랑하셨으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요 17:24)

*답: 창세 전부터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5. 잔치에 부름을 받았음에도 택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마 22:14)

*답: 부름에 가겠다고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십자가를 택하시는 것은 사랑의 어떤 속성들을 말해줍니까?(요 10:18)

*답: 자발적인 속성을 말해준다.

7.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이사야의 외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사 40:9) 

*답: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아낌없이 사랑하시며 고쳐주신다. 그 사랑에 자유의지로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며, 하나님 사랑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깨뜨리고 바르게 알게 하는 것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12월 29일(일) 합리적 기대를 넘어선 사랑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각 사람을 사랑하시며, 기꺼이 사랑하신다. 실제로 그분은 우리 모든 사람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낌없이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그분이 행동하신 방식을 통해 이 사랑을 안다.

 

출애굽기 33:15-22을 읽고 이 구절의 문맥과 이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해 보라. 이 본문, 특별히 19절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출33:15~2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항상 동행하심으로 그들을 돌보시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은혜와 긍휼로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 노예의 속박에서 놀랍게 구원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그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기꺼이 허락하셨던 언약의 특권과 축복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그들과 언약 관계를 지속하기로 선택하셨다.

출애굽기 33:19의 “내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흠정역)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기로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뜻으로 종종 오해된다. 그러나 문맥상 의미는 하나님이 임의로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고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널리 알려진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멸망당하고 영원한 정죄를 받도록 예정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선포하시는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가장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권리와 권위가 있으시다. 

금송아지의 반역이 일어난 이 장면에서도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시고, 아무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이라 하시며 여전히 자비를 베푸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합리적 기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나타내신 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교훈> 반역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창조주로서 가장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권리와 권위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출33:19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기록한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실 권리와 자유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지구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이다. 창조주께서는 영원 전에 여호와 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다(렘23:18, 롬16:25,26). 하나님은 이 결정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성경은 이런 결정과 관련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5)라고 계시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 크신 은혜로 이 지구를 구원하기로 하셔서 은혜 베풀자로 정하신 것이다. 말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사랑을 우주에 드러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2월 30일(월) 짝사랑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예는 호세아서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라고 명령하셨다. 호세아와 그의 부정한 아내는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영적 음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물교훈이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넘치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야기에 나타난다. 

실제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역하고 또 반역했다. 그럴수록 성경은 충실하지 않은 배우자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반복해서 묘사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온전하고 신실하게 사랑하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멸시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숭배함으로 그분을 깊이 슬프게 하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를 깨뜨렸다. 

 

호세아 14:1-4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는가?

[호14:1~4]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4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답: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진노를 거두시고 반역을 고쳐주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반복되는 반역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새번역). 이 구절에서 “기꺼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네다바(nedabah)를 번역한 것으로, 자발적으로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소 제도에서 자원해서 드리는 제물을 뜻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 

호세아서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놀라운 헌신과 자비를 보여주신다. 비록 그들이 계속해서 다른 연인을 쫓아다니고 깨어진 언약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고, 그 사랑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거부하고 상실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도덕적이든 그렇지 않든 다른 어떤 강요 없이 그들을 계속 사랑하신다. 호세아서와 성경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신다. 

 

<교훈> 사랑받을 자격 없고, 권리를 거부하고 상실했지만 하나님은 자유의지로 인류의 상태와 관계없이, 다른 강요 없이 계속해서 일관되게 사랑을 베푸신다. 

 

<부가설명>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하나님의 고통을 통하여 나타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는 고통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통을 거쳐서 나타낸 그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그러니 한 사람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연결된 것을 우리는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희생으로 나타난 사랑으로 얻은 그의 자녀들을 어떻게 쉽게 버리시겠는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하나님은 이런 사랑의 줄로 그의 백성들을 자신과 엮으셨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호11:4), 이 사랑의 줄은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무궁한 사랑의 줄이다. 우리는 주님이 고통으로 나타내신 그 사랑의 줄을 스스로 끊지 않아야 할 것이다.

 

12월 31일(화) 거저 주시는 사랑

 

하나님은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사랑을 거저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결코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은 무언가 부족한 분이 아니시다(행 17:25).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그렇게 하고자 하시는 뜻에 따른 것이다. 

 

요한계시록 4:11과 시편 33:6을 비교해 보라. 이 구절들은 창조에 대한 관련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시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답: 하나님은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아무 대가 없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신격 안에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 가운데 완전하셨다. 

 

요한복음 17:24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세상이 존재하기 전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답: 창세 전에 이미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 안에 완전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피조물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기로 선택하시고 피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주심으로 이 세상을 대가 없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에덴에서 죄에 빠진 후에도,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죄를 지은 후에도 변함없이 각 사람을 기꺼이 사랑하신다. 

에덴에서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는 계속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히 1:3) 붙드시는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과 자비, 은혜로 아담과 하와의 삶을 지속하게 해 주셨고 사랑으로 그들을 자신과 다시 화목하게 하는 길을 만드셨다. 그 화목은 오늘날 우리도 포함한다. 

 

<교훈> 하나님은 넉넉한 사랑의 선물로 세상을 대가 없이 창조하셨고 에덴에서 범죄하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를 지은 후에도 변함없이 인간을 기꺼이 사랑하신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시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있게 한 자가 하나님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기 위하여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다. 사랑은 대상이 없으면 드러날 수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단독 존재일 수 없다. 단독 존재라면 그가 사랑이라는 증명이 안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복수 존재, 즉 둘 이상으로 자존하셨다. 왜냐하면, 둘만 있을 때 사랑은 서로 100% 나타낼 수 있다. 거기 하나가 더 있을 때, 셋 사이에서는 서로 100% 사랑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삼위 사이의 사랑이 온전히 100% 충만할 때 그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며 삼위 사이의 사랑은 충만한 100% 사랑이다. 그 사랑은 만족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창조로 나타나 우주가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그런데 루시퍼 때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 사랑을 우주에 온전히 회복하기를 원하셨다. 그것도 사랑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아멘.

 

1월 1일(수) 부름 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된 자는 적음 

 

하나님은 당신의 자유의지로 사람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역시 그 사랑에 자유롭게 반응해 당신을 사랑하도록 권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 

 

마태복음 22:1-14을 읽어 보라.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답: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 누구든지 초청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초청에 응답은 사람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한 왕이 아들을 위해 결혼식을 준비하고 신하들을 보내 “결혼식에 초대받은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이 오려 하지 아니”(마 22:2, 3, 흠정역)하였다. 왕이 여러 번 신하들을 보내 그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왕의 초대를 무시했고, 심지어 신하들을 죽이기까지 했다(마 22:4-6). 

신하들을 살해한 자들을 처치한 후 왕은 신하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마 22:8, 9)라고 말했다. 혼인 예복이 없는 사람이 쫓겨나는 것은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왕으로부터 예복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후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라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로 비유를 마무리한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지막에 ‘선택받은,’ 즉 '택함 받은 자'는 주님의 혼인잔치로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 비유에서 ‘부르다’와 ‘초대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칼레오(kaleo, 부르다, 초대하다)이며, 최종적으로 누가 ‘택함을 받은(에클렉토스, eklektos) 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초대를 기꺼이 수락했는지 여부이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혼인 잔치에 부르시는(초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라도 그분의 사랑을 거절할 수 있다. 

자유는 사랑에 필수적이며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거부할 수 있다.

“택함을 입은 자"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과 사랑의 속성인 자유의 문제로 귀결된다. 

 

<교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혼인 잔치에 초대하지만 택함을 입은 자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우며 그것을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부가설명> 인류는 아담 안에서 다 사망이 되었다(고전15:22), 그러나 또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인류 각 개인이 자기 자유의지로 사망을 택한 일이 없다. 아담은 자유선택권을 받았는가? 글쎄?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과를 먹든지 선악과를 먹든지 자유라고 하셨는가? 아니다.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담에게 자유선택권을 준 것인가? 오늘날 자유선택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담 안에서 인류가 이미 사망이 되어버린 사실을 간과해버린다. 철학이나 신학이 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중하게 여긴다.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다는 발상이 아닌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선택을 주시지 않았다. 분명히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먹으면 죽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담이 그것을 먹었다. 그는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선택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으로 나타났다. 사망이 된 사람은 이 사랑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이미 사망인 상태에 그대로 머물다가 죽든지 하는 것이다. 사망은 사람의 자유 선택이 아니다. 그것을 상식적인 말로 하면 필연이다. 자유선택이라는 말을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깊이 생각해보자.

 

1월 2일(목)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로 초대하시지만,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관계에 들어간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보듯이, 왕이 초대했던 많은 사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마 22:3, 쉬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얼마 전 그리스도는 이렇게 탄식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주님은 그들을 모으기 원했지만 그들은 원하지 않았다. “원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델로(thelo)는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표현과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음을 나타낼 때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거역한 사람들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놀라운 사랑이여! 인간의 죄의 합당한 결과는 죽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대가를 치르시고 하늘과 땅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길을 마련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렇게 하셔야 할 어떠한 의무도 없으시지만 우리에게 기꺼이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

 

요한복음 10:17, 18을 읽고 갈라디아서 2:20과 비교하고 의미를 살펴보라. 

[요10:17,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답: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의지로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걸으셨다. 바울은 예수께서 마련해놓은 그 구원의 길을 걸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인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누구도 그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으며, 그분은 창세 전에 하늘에서 계획된 구속의 경륜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셨다.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이 경륜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 알게 하신 그 비밀’(롬 16:25)의 계시였다.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탄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를 통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 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를 언약하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3:16) 었다"(시대의 소망, 22).

 

<교훈>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 인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로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가설명> 나는 자유의지와 자유선택은 자존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피조물)의 자유와 선택은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은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 선택으로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겠다고 자유로운 생각을 창조로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이 선택해 놓은 것 중에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 제한적이다. 존재와 생명은 더욱 그렇다. 자유 선택으로 존재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오직 예수님뿐이다. 모든 인류는 부모의 자유의지로 출생했다. 엄격히 말하면 부모의 의지도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생육한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출생하는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출생한다. 자기 선택이 없다. 이런 상태의 사람에게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어(딤후1:10)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시고 ‘죽음에 머물러 있지말고 생명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신다. 거절하면 자기 현재 위치에 그냥 머무는 것밖에 없다. 거기는 생명 없는 사망만 있다.

 

1월 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실물교훈 29장 “열 처녀”를 읽어 보라.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두움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을 잃고 있다. 그분의 성품은 잘못 이해되고 그릇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이 전해져야 한다. 이 기별은 광범위한 감화력과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분의 성품이 널리 알려지게 해야 한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 곧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진리의 빛을 비춰야 한다.

이 사업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다음의 말씀 중에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 40:9, 10).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야 한다. 세상에 비칠 마지막 자비의 빛 곧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들은 저희의 생애와 성품을 통하여 저희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야 한다. 의의 태양 광선이 선행 곧 진실한 말과 거룩한 행실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실물교훈, 415, 41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2. 오늘날 세상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가 많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사람들이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 토의해 보라. 

*답: 첫째는 사탄의 거짓이 세상을 주장하기 때문이고 다음은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오늘날 선포되어야 할 기별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 기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어떤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와 그분의 놀라운 성품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답: 먼저 사람들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설명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좀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이나 언제나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전할 것이다.

4.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그 사랑을 우리 삶에서 드러내고 반영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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