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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맺는 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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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12-23 20:13 조회1,3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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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맺음말 :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12월 28일 (안) / 일몰: 오후 5시 21분)


<(記憶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개요(槪要)>

⑴.요한복음의 결론(結論)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적왕국(靈的王國), 그의 대속적(代贖的) 죽음, 그리고 그의 확실한 부활(復活)에 대한 가르침을 그의 추종자(追從者)들의 마음과 정신(精神)에 각인(刻印)시켜 주시고자 하셨다. 


⑵. 우리에 초점(焦點)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맞추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 말씀을 믿을 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빛으로 받을 때 사람의 견해(見解)로 따르지 않고 그 빛을 따라 순복(順服)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選擇)에 달려있다.


⑶.베드로와 다른 제자(弟子)들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地上使役)을 하시는 동안 로마의 세력(勢力)을 물리치심으로써 이스라엘에 문자적(文字的)인 왕국(王國)을 회복(回復)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⑷.부활(復活)하신 주님과 함께한 마지막 몇 주 동안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바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믿었던 것 같다. 그분은 끝까지 그들과 함께 오래 참으셨고,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인내심(忍耐心)을 갖고 계십니다.


⑸.그분의 인내심(忍耐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생각이 우리의 정신(精神), 마음, 그리고 삶에서 더욱 충실하도록 영감을 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⑹.부활(復活)하신 주님이 베드로의 권유에 따라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후에도 그들은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갔다.


⑺.베드로는 자신(自身)이나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따르는 데 초점(焦點)을 맞추어야 하는 것을 배웠다. 


⑻.고통스럽게도 이 실수(失手) 많은 제자에게는 모든 것이 현실(現實)이었다. 그의 죄(罪)에 대한 슬픔은 그가 주님을 부인(否認)한 것만큼이나 강렬(剛烈)한 것이었다. 그가 회심(悔心)한 후에 그는 옛날의 태도(態度)와 정신(精神)으로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하지 않았다.


⑼.요한복음 공부(연구)는 예수님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理解)하는 것을 넘어 영적(靈的)으로 그분을 더 잘 알고 그분과 그의 말씀 안에 더 가까이 가는 데 도움이 될 이정표(里程標)의 역할을 할 것이다. 


⑽.하나님의 지혜(智慧)는 사람의 지혜(智慧)나 어떤 기준(基準)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알 수 있다. 인간(人間)의 견해(見解)는 하나님 말씀에 종속(從屬)되어야 하며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믿을 때 성경(聖經)을 바르게 이해(理解)할 수 있다. 


(12월 22일) (일) <갈릴리에서의 재회(再會)> 


(Q)~부활(復活)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의 재회(再會)(만남)에 관한 어떤 중요한 진리(眞理)가 나타나 있는가? (요한복음 21:1~19)


(A)~<베드로가 가르치는 법을 배움>

<베드로가 실패(失敗)하고 그리고 다시 돌이킨 후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羊)을 먹이라”고 하셨다. 베드로의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기 전에 그는 양(羊)을 먹이는 데에 요구(要求)되는 정신(精神) 곧 겸손(謙遜)의 정신(精神)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약점(弱點)에 민감(敏感)한 사람이 되고 난 후에 그는 실수(失手)하고 넘어진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바로 알게 되었다. 그는 부드러운 동정심(同情心)을 갖고 그들 곁에 가까이 갈 수가 있었고 그들을 도울 수가 있었다. (S.D.A. 선교 약사 121).>


⑴.<요한복음 21장의 기사(記事)는 사복음서 중에서 오직 요한복음만의 단독기사(單獨記事)이다..>

   제자(弟子)들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의 말씀(마 28:10)에 따라 그곳에 모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디 나타나셨다. 이에 베드로는 무료(無聊)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했고 다른 제자들도 이에 호응(呼應)했다. 


⑵.그들에게는 아직도 예수를 뵙고자 하는 간절(懇切)함이 결여(缺如)되어 있었다. (요 21:5)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요 15:5). 


⑶.부활(復活)하신 주님이 베드로의 권유에 따라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후에도 그들은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⑷.그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그들의 노고에 대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작은 어획물(漁獲物)이라도 무언가를 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실패(失敗)가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데 집중(集中)하도록 이끌기를 원(願)하셨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어떤 일에 실패(失敗)하면 종종 우리는 신(神)의 도움을 구(求)하게 됩니다.


⑸.예수께서는 제자(弟子)들에게 자신이 항상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이 자신의 사역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들의 필요를 돌보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⑹.예수께서는 부활(復活)하신 직후 베드로의 이름을 구체적(具體的)으로 언급(言及)하셨고, 이제 다시 그를 골라내어 가장 중요한 주제(主題)인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적절한 질문(質問)을 하셨다.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임박(臨迫)한 십자가형(十字架刑)에 대해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그분을 위해 죽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한복음 13:37). 하지만 그 약속(約束)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대의(大義)가 무산(霧散)되었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구(求)하기 위해 도망쳤다. 후에 베드로는 예수가 예언(豫言)한 대로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否認)했다.


⑺.예수는 그의 치유(治癒)와 회복(回復)을 돕기 위해 고안(考案)된 세 가지 질문(質問)을 그에게 물었다. 예수께서는 세 번이나 그에게 이름을 부르시며 물으셨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6).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사랑을 의미(意味)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가 파오(agapao)를 사용하셨고, 베드로는 종종 친구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意味)하는 동사 필레오(phileo)로 대답했다.


⑻.<순수(純粹)한 회심(悔心)은 그 근원(根源)에까지 미침(눅 22:31, 32)> 베드로는 그가 창피(猖披)를 당하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그는 그가 주님을 부인(否認)한 것을 잊지 않았다.


⑼.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높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 베드로는 대답에서 겸손(謙遜)과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특성(特性)은 그가 "내 양(羊)을 먹이라"(요한복음 21:16) 할 자격(資格)을 갖추게 했다. 


⑽.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러한 행동은 베드로가 이제 회복(回復)되었고 그리스도의 믿는 자들의 무리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얼마나 큰 변화(變化)입니까! 충동적(衝動的)이고 과신(過信)하던 베드로가 마침내 겸손(謙遜)해지고 자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법(法)을 배웠다.


(12월 23일) (월) <오직 예수를 바라보라>


(Q)~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슨 상관(相關)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것은 어떤 뜻입니까? (요 21:22) 


(A)~<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갈릴리 해변(海邊)에서 제자들과 만나셨을 때,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7) 는 질문(質問)으로 세 번 거푸 시험(試驗)을 받은 후에,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의 지위(地位)가 회복(回復)되었다. 그는 할 일을 부여(附與)받았다. 그는 주(主)의 양(羊)을 먹여야 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개인적(個人的)인 명령(命令)으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요 21:22)라고 하셨다. (Ed 90)


⑴.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信賴)하라. 그는 나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으며 나를 구원(救援)하실 것이다…….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을 그대의 구세주(救世主)로서 붙잡아라. 그대의 연약(軟弱)한 상태에 대하여 탄식(歎息)하기를 그치라. 믿음의 주장자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대는 소망(所望)으로 고무(鼓舞)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구원(救援)을 보게 될 것이다. (HP 116) 


⑵.단순함과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라. 그대의 정신이 찬란한 빛 속에 묻혀 희미(稀微)해질 때까지 예수를 응시(凝視)하라. 우리는 어중간(於中間)한 기도(祈禱)를 해서는 안 되며 반신반의(半信半疑)해서도 안 된다. 서로 기도(祈禱)하며, 믿고, 강(强)하게 하라. 이전에 결코 그렇게 기도(祈禱)해 본 적이 없는 태도(態度)로, 주께서 당신의 손을 그대에게 얹으사 지식(知識)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充滿)하신 것으로 그대에게 충만(充滿)하게 하시도록 기도(祈禱)하라. (3 TT 193)


⑶.그대 자신에게서 시선(視線)을 돌려 예수를 바라보라.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認定)하는 한편 그리스도를 그대의 구주(救主)로 인정하는 것은 그대의 특권(特權)이다. 그분은 의인(義人)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罪人)을 불러 회개케 하려고 오셨다. 믿음을 약화시키고 용기를 깨뜨리기 위해 사단이 난관과 암시를 사람의 마음에 제시할지 모른다. 그는 사람의 마음에 잇달아 닥쳐오게 할 수 있는 수많은 유혹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감정을 면밀하게 살펴 그대의 느낌에 굴복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악한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낙망의 당혹거리들 가운데 얽혀들게 되는 것이다. (2M CP 480)


⑷.그대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를 바라보라. 그분은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피의 공로는 가장 작은 죄도, 가장 큰 죄도 깨끗게 하실 수 있다.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대의 영혼을 신실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지키시도록 맡기라. 그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한, 그분은 결코 그대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면, 그분은 들어오셔서 그대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대가 자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면, 그대와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사이에는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3T 542)


⑸.우리 구주(救主)와 교제(交際)에 들어갈 때 우리는 평화(平和)의 영역(領域)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감정(感情)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계속적(繼續的)인 활동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信賴)에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정복(征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기운을 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苦難)을 겪을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平和)를 누릴 수 있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을 안으로부터 돌려서 그대의 유일(唯一)한 조력자(助力者)이신 예수를 바라보라. (3 SM 324) 


⑹.가장 친한 친구(親舊)조차도 때때로 우리가 하는 말을 오해(誤解)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 예수님은 우리가 하는 말과 의미(意味)를 온전히 이해(理解)하신다. 변함없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信賴)하는 측면에서 이 영감(靈感)받은 진술(陳述)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⑺.하나님은 그분의 자비(慈悲)와 충실(忠實)함으로 우리가 신뢰(信賴)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失望)시키는 것을 종종 허락(許諾)하시어 우리가 사람을 신뢰(信賴)하고 육신(肉身)을 우리의 팔로 삼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겸손(謙遜)하게, 사심 없이 신뢰(信賴)하라.


⑻.만약 그리스도께서 경건(敬虔)치 못한 사람이었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든든히 붙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신뢰(信賴)하였으므로 악(惡)한 비난자(非難者)들의 교묘(巧妙)한 모욕(侮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 SM 30.2) 


⑼.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는 말씀으로 사단을 대적(對敵)하셨다. 모든 시험(試驗)에 있어서 주님께서 쓰신 전쟁(戰爭)의 무기(武器)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단은 주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표(表)로써 이적(異蹟)을 행하기를 요구(要求)하였다. 그러나 모든 이적(異蹟), 기사(奇事)보다도 더욱 위대(偉大)한 것, 즉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에 대한 확고(確固)한 신뢰심(信賴心)은 논박(論駁)할 수 없는 하나의 표징(標徵)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위치(位置)를 확보(確保)하고 계시는 한, 유혹자(誘惑者)는 결코 주님을 넘볼 수 없었다. (1 SM 228) 


⑽.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매일(每日) 좀 더 신뢰(信賴)하기를 배우며 좀 더 예수를 온전히 의지(意志)하면서 어제의 우리보다 오늘의 우리는 전진(前進)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자라나야 한다. 완전(完全)의 자리에 단번(單番)에 뛰어오를 수는 없다. 성화(聖化)는 일생의 사업(事業)이다. (3 SM 193)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를 실망(失望)시키고 상처(傷處)를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주는 도움, 조언(助言), 인도(引導)가 아닌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과 인도자(引導者)가 되셔야 한다. 


(12월 24일) (화) <빛과 어둠>       .


(Q)~그리스도의 빛을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오류(誤謬)에 빠지기 쉬우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宗敎指導者)들이 믿음의 근거(根據)로 삼았던 거짓된 기초(基礎)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묘사(描寫)하십니까? (요한복음 1:4~10, 요 3:19~21, 요 5:35, 요 8:12, 요 9:5; 요 11:9~10; 요 12:35, 요 8:44)


(A)~<‘빛’이라는 용어(用語)는 단순히 자연 현상(自然現象)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차원(絶對的次元)에서 대치(代置)시키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종교사상(宗敎思想)을 반영(反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에 대한 개념(槪念)은 구약성경(舊約聖經)의 맥락(脈絡)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發)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顯現)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主)(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2)으로 묘사(描寫)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人類)에게 임(臨)할 참 빛이라는 사실을 피력(披瀝)하고 있다. (요 1:9)>


⑴.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고 말씀하셨다. “의인(義人)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光明)에 이” (잠 4:18) 른다. 믿음과 순종(順從)의 길은 매(每) 걸음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요일 1:5) 세상의 빛과 더욱 밀접(密接)한 관계를 맺게 해준다. 의(義)의 태양(太陽) 되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칠 때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反射)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靈)의 은혜(恩惠)와 그분의 품성(稟性)의 순결(純潔)과 성결(聖潔)은 그분의 증인(證人)들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될 것이다. (GC 475)


⑵.진리(眞理)와 하나님의 영광(榮光)은 분리(分離)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聖經)을 소유(所有)하고서도 그릇된 견해(見解)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릴 수 없다. 많은 사람은 생애(生涯)만 올바르면 무엇을 믿어도 상관(相關)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애(生涯)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의 손이 미치는 범위(範圍) 안에 빛과 진리(眞理)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보고 들을 특권(特權)을 이용(利用)하기를 게을리하면 우리는 사실상 그것을 거절(拒絶)하게 되고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택(擇)하고 있다. (GC 597) 


⑶.그 안에 생명(生命)이 있었으니 이 생명(生命)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 그리스도의 생명은 빌려온 것이 아님(요 10:18; 17:3)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에 명시(明示)된 생명은 육(肉)의 생명이 아니라 유독(惟獨) 하나님만 갖고 계신 생명 곧 영원(永遠)한 생명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은 이 생명을 갖고 계신다. 육(肉)의 생명은 각 사람이 받은 것이지만 그것은 영원(永遠)하지도 않고 죽지 않는 생명도 아니다. 이는 생명의 시여자(施與者)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다시 가져가시기 때문이다. 


⑷.빛과 대조(對照)되어 나타나는 ‘어두움’(스코티아)은 앞 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勢力), 즉 사탄의 세력과 그 세력하(勢力下)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罪惡)된 세상을 상징(象徵)한다. 


⑸.어떤 사람들은 반대 증거(反對證據)를 아무리 많이 보더라도 자신의 잘못된 의견(意見)을 고수(固守)하기로 (決心) 합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自身)과 동의(同意)하는 사람들만 주변(周邊)에 모으는 경향(傾向)이 있어서, 자신의 오류(誤謬)를 강화(强化)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⑹.유대 종교 지도자(宗敎指導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과 편견(偏見)에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열정적(熱情的)으로 미워했다. 그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주장(主張)하면서도 그의 아들을 미워한 것은 너무나 이상(異常)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선(僞善)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폭로(暴露)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42)


⑺.<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은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飜譯)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는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罪惡)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成肉身)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十字架)에 처형(處刑)했다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맥락(脈絡)이다. 


⑻.사람들의 빛. 헬라어에는 “생명”과 “빛”이라는 두 단어 앞에 정관사가 있는데, 그것은 “빛”이 “생명”과 같음을 나타낸다. 영적 암흑이 오랫동안 인간의 영혼을 둘렀으나, 이제 신적인 생명과 온전함의 “참 빛”(요 1:9절)이 모든 사람의 길을 밝혀 주고자 환하게 비춘다(참조 사 9:1~2). 


⑼.하늘의 빛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출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빛이다(요 1:9). 요한은 거듭하여 예수가 이런 의미(意味)로 한 말씀을 인용(引用)한다. (참조 요 8:12; 9:5; 12:35, 46; 요일 1:5, 6; 2:8). 빛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상징(象徵)이 되어 왔다. (참조 창 3:24). 하나님이 창조(創造)의 첫 번째 행위(行爲)로서 세상을 빛으로 흘러넘치게 한 것처럼(창 1:3), 인간의 영혼(靈魂) 속에 그분의 형상(形狀)을 재창조(再創造)하는 일을 시작할 때에, 그분은 먼저 저들의 마음과 생각을 거룩한 사랑의 빛으로 밝힌다. (고후 4:6)


⑽.(참빛).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원(起源)된 “빛” 외(外)에 다른 모든 “빛”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가짜다. (참조 사 50:11; 약 1:17). 

 

(12월 25일) (수) <"위로부터"의 신학(神學)인가 "아래로부터"의 신학(神學)인가>


(Q)~(요 4:46~54)의 관원(官員)은 어떤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그에게 있는 근본적(根本的)인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성경을 어떻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요 4:46~54, 딤후 3:16)


(A)~<예수께서는 어느 왕의 신하(臣下)인 귀족(貴族) 아들의 임종(臨終)을 앞두고 모든 의사의 포기(抛棄)로 주님을 찾아온 동기(動機)를 알고 계셨지만, 그의 아들을 고치고자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일깨우고 온 가족에게 구원(救援)을 가져다주고자 하셨다. 예수께서는 귀족(貴族)에게 "표적(表迹)과 기사(奇事)를 보지 아니하면 결코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4:48). 이 말씀은 아버지의 양심(良心)을 찌르고 이기적(利己的)인 동기를 의심(疑心)하게 했으며, 예수를 믿는 길로 인도(引導)했다.>


⑴.하나님의 감동(感動)으로 된 계시(啓示)의 말씀으로 믿고 이해(理解)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왕의 신하(臣下)가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의 신앙(信仰)은 고쳐 준다면 믿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에 뜻에 합한” “위로부터의 신학(神學)”이 아니고 인간들의 “인간세속(人間世俗)에 욕구(慾求)를 충족(充足)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神學)”인 것이다. 


⑵.왕의 신하(臣下)는 자기가 먼저 볼 수 있다면 믿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예수는 그가 보기 전에 믿기를 요구(要求)했다. 어떤 요구 사항들을 들어주면 믿겠다는 조건적(條件的)인 신앙(信仰)은 연약(軟弱)한 기초(基礎)에 놓인 것이어서 하나님이 볼 때 청(請)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최상(最上)이라고 여길 상황하(狀況下)에서는 부족(不足)함이 드러날 것이다. 


⑶.예수는 왕의 신하(臣下)가 와서 청(請)한 것을 받을 준비(準備)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관료(官僚)의 요청(要請) 들어주기를 지연(遲延)시켰다. 현재(現在)와 같은 그의 마음 상태(常態)에서는 그가 주께로부터 무엇이든지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며(참조 약 1:5~7),


⑷.예수는 그가 절실한 필요를 깨닫고, 의심(疑心) 없는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신앙을 발휘(發揮)하고자 할 때까지는 그를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에게 가부간(可否間) 대답(對答)을 하지 않았고, 그 아버지는 자기의 요청(要請)이 수용(受容)되지도, 거절(拒絶)당하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요 4:46~54, 재림교주석)


⑸.예수님은 이 왕의 신하(臣下)와 비슷한 태도(態度)를 보인 유대 지도자(指導者)들과 다른 사람들을 염두(念頭)에 두고 있었으며, 그를 믿음 없는 동포(同胞)들과 같은 부류(部類)로 여겼다(참조 마 16:1~9; 요 2:18; 6:30; 고전 1:22). 이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최근에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단순(單純)한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그를 영접(迎接)했다(요 4:39~42). 


⑹.예수는 자기 백성들이 그렇게도 더디 믿는 것에 대하여 가슴 아파했다. (참조 요 1:10~11). 그는 왕의 신하(臣下)가 와서 구(求)한 것보다 더 큰 선물(膳物), 곧 구원(救援)의 선물(膳物)하고 있었는바, 이것 없이는 작은 선물(膳物)인 아들을 치료(治療)해 줄 수가 없었다. (소망, 198).


⑺.내 아이가 죽기 전에. 필요한 변화(變化)가 일순간(一瞬間)에 일어났다. 예수가 마음을 읽고 있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자기의 동기가 이기적(利己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唯一)한 소망(所望)은 의심(疑心)하지 않는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믿음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지체(遲滯) 없이 불신(不信)과 거짓된 자만심(自慢心)을 굴복(屈伏)시켰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아들을 “아이”라고 애정(愛情) 깊은 표현으로 지칭(指稱)하는데, 이것은(요 4:46) 절에서 “아들”이라고 번역(飜譯)된 단어(單語)와는 다른 말이다.


⑻.가라. 이제 필요한 변화(變化)가 일어나자, 비록 아버지가 기대(期待)했던 방법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 요청(要請)은 지체(遲滯) 없이 수락(受諾)되었다. 그는 예수에게 가버나움으로 “내려오”라고 청(請)했으나 예수는 그에게 “가라”고 간단하게 말했다. 이리하여 왕의 신하는 자기의 요구 사항이 수락(受諾)되었다는 증거(證據)도 없이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참조 요 4:48) 절. 그의 믿음은 시험(試驗)에 처(處)했다. 그는 확인할 수 없는 선물(膳物)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자기가 청(請)한 것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믿음으로 행동(行動)해야 했다.


⑼.그 사람이…믿고. 그의 의도(意圖)는 믿기 전에 보는 것이었으나, 이제 그는 예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믿음으로 행동(行動)했으며, 그 결과 그의 가슴은 화평(和平)과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소망, 198~200).


⑽.내려가는. 그 거리는 25킬로미터가량 되었다. 집으로 가는 여행(旅行)은 보통 네다섯 시간쯤 걸렸을 것이고, 아마 그날 오후에 떠났을 것이다.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의 생명이 걱정되었겠지만, 그는 새로 발견(發見)한 믿음으로 자기가 받은 귀중(貴重)한 선물(膳物)의 실체(實體)를 굳게 붙잡았고, 따라서 그는 공연히 서둘러 돌아가지 않았다.

인간(人間)의 견해(見解)는 하나님 말씀에 종속(從屬)되어야 하며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행(行)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表現)이다.


(12월 26일) (목) <예수 안에 거(居)함> 


(Q)~잘못된 신학(神學)이 미혹(迷惑)하는 때에 어떻게 하면 영적(靈的)으로 바르게 성장(成長)할 수 있으며, 또한 영적성장(靈的成長)과 건강(健康)의 비결(祕訣)은 무엇입니까? (요 12:32, 요 15:1~11) 


(A)~<예수께서 "땅에서 들리우심"(요한복음 12:32)을 받으셨을 때, 그분은 많은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계신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은 그분과의 구원관계(救援關係)에서 첫 단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분과 계속 함께 걷고 그분 안에 거(居)해야 하며, 그러려면 영적여정(靈的旅程)에서 결단(決斷)과 안정(安定)이 필요하다.>

◯.예수님께 꼭 붙어서 오직 말씀으로 말씀을 설명해주는 성령(聖靈)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⑴.예수께서는 그분 안에 거(居)하는 것의 중요성(重要性)을 강조(强調)하기 위해 (요한복음 15:4~7) 절에서 단 네 구절(句節)에서 일곱 번이나 언급(言及)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거(居)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5). 


⑵.(요 15:1~17) 절의 구절(句節) 의미(意味)는 포도나무에 가지를 접(接)붙이는 실제사례(實際事例)를 생각해 보면 매우 분명(分明)해진다. 접(接)붙이는 가지가 모(母) 줄기에 달라붙지 않으면 말라 버립니다. 따라서 모 줄기가 없다면 접붙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⑶.거(居)하는 특성(特性)은 친밀감(親密感)과 영속성(永續性)이라는 개념(槪念)을 전달(傳達)합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포도나무와 살아 있는 연결(連結)하고 있습니다. "(접(接)붙이는 가지와 가지가) 섬유질(纖維質)과 가지와 가지가 되어 포도나무의 생명에 참여(參與)합니다…. 접(接)붙이가 포도나무에 결합(結合)되면 생명을 받는 것처럼 죄인(罪人)은 그리스도와 결합(結合)되면 신성(神性)한 본성(本性)에 참여(參與)한다. 


⑷.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無限)하신 하나님과 결합(結合)된다. 이렇게 결합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居)하고 우리는 경련성(痙攣性) 감정(感情)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살아 있고 거(居)하는 원리(原理)에 의해 움직인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11쪽) 291.


⑸.요한복음은 우리를 예수께로 이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願)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경우(境遇)에만 가능(可能)하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각각 빛을 받아들이고 성장(成長)하거나, 빛을 거부(拒否)하고 소경이 된다. 


⑹.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12:32)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높이 달리시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 (요 3:14). 이렇게 그가 속죄(贖罪)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만국(萬國)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곧, 만국에서 그를 믿을 자들이 생긴다. 희생(犧牲)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아들의 속죄(贖罪)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⑺.예수님은, 그 죽으심으로 신자(信者)들의 숭배(崇拜) 대상이 되실 뿐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그 안에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聖靈)에 의하여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신다. (요 6:44).(요 12:32, 만나주석)


⑻.들리면. 즉 “십자가(十字架)에 달리면.” 같은 동사가 (요 3:14) 절에 나타나는데 그 구절(句節)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들림을 광야(廣野)에서 뱀이 들린 것과 비교했다. (요 8:28) 절에서 예수는 들림을 다시 언급(言及)하면서 유대인들에 의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했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승천(昇天)을 언급한 것이 아님을 분명(分明)히 보여주는 구절(句節)이다.


⑼.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犧牲)으로 인류만을 이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을 증명(證明)해 보임으로써 천사(天使)들과 다른 세계의 거민(居民)들까지도 주님께로 다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골 1:20).


⑽.수많은 사람의 생애(生涯)에서 십자가(十字架)는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강(强)하게 끄는 힘이 있다는 것이 입증(立證)되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이론(理論)에는 이론으로 맞섰으나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 못하자 고린도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신 것 외(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作定)하였음이라”(고전 2:2; 참조 사도행적, 244)라고 하였다. 그 결과 그의 수고는 큰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십자가(十字架)의 이끄는 힘은 수(數) 세기(世紀)가 지났어도 절대 감소(減少)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여전히 “영혼(靈魂)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능력(能力)과 지혜(智慧)이다.”(교회증언, Ⅵ,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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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 예언의 신 약자(略字)>


1BC ( 화잇 주석 1권 )

1MCP (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1 )

1 SAT ( 설교와 강연 1 )

1 SM ( 가려 뽑은 기별 1 )

1T ( 교회증언 1권 )

1 TT ( 증언 보감 1 )

2BC ( 화잇 주석 2권 )

2M CP (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2 )

2 SAT ( 설교와 강연 2 )

2 SM ( 가려 뽑은 기별 2 )

2T ( 교회증언 2권 )

2 TT ( 증언 보감 2 )

3BC ( 화잇 주석 3권 )

3 SM ( 가려 뽑은 기별 3 )

3T ( 교회증언 3권 )

3 TT ( 증언 보감 3 )

4BC ( 화잇 주석 4권 )

4T ( 교회증언 4권 )

5BC ( 화잇 주석 5권 )

5T ( 교회증언 5권 )

6BC ( 화잇 주석 6권 )

6T ( 교회증언 6권 )

7BC ( 화잇 주석 7권 )

7T ( 교회증언 7권 )

8T ( 교회증언 8권 )

9T ( 교회증언 9권 )

AA ( 사도 행적 )

AG (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

AH ( 재림 신도의 가정 )

BLJ ( 예수님처럼 )

CC ( 투쟁과 용기 )

CCh ( 교회에 보내는 권면 )

CD ( 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

CG ( 새자녀 지도법 )

ChL ( 그리스도인 리더십 )

CHS ( 그리스도인 선교 봉사 )

CHIS ( 성소에 계신 그리스도 )

CM ( 문서 전도 봉사 )

COL ( 실물교훈 )

Con ( 대결 )

CS ( 청지기에게 보내는 기별 )

CSW ( 안식일학교 사업에 관한 권면 )

CT (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

CTR ( 승리하시는 그리스도 )

DA ( 시대의 소망 )

Ed ( 교육 )

Ev ( 복음 전도 )

EW ( 초기문집 )

FLB ( 말씀과 능력 )

FW ( 믿음과 행함 )

GC ( 각 시대의 대쟁투 )

GW ( 복음 교역자 )

HP ( 하늘에 )

Hvn ( 하늘 )

LDE ( 마지막 날의 사건들 )

LHU ( 주님을 첫째로 높이자 )

LP ( 바울의 생애 )

LS ( 엘렌 지 화잇 자서전 )

Mar ( 마라나타 )

MB ( 산상보훈 )

MH ( 치료 봉사 )

MM ( 의료봉사 )

MTC ( 도시선교 )

MYP (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

OHC ( 높은 부르심 )

PaM ( 목회 봉사 )

PK ( 선지자와 왕 )

PM ( 그리스도인 문서선교 )

PP ( 부조와 선지자 )

Pr ( 기도 )

RC ( 그리스도를 나타내자 )

SC ( 정로의 계단 )

SD (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

SJ ( 인류의 빛 )

SL ( 성화된 생애 )

SR ( 살아남는 이들 )

Te ( 절제 생활 )

TM (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

TMK ( 그분을 알기 위하여 )

TSB ( 성적 행실과 간음과 이혼에 관한 권면 )

UL ( 하늘을 향하여 )

VSS ( 말과 노래에 관한 권면 )

WM ( 구호 봉사 )

YHH ( 가정과 건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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