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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목자의 시련(질문, 대답, 설명) 0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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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6-24 16:52 조회6,4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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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목자의 시련

(7월 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7분)

 

연구 범위: 시편 23, 롬 12:18~21

 

기억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침실 문에 기대고 있던 은정씨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침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녀는 방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늘 가깝게 느끼며 아끼고 의지하던 사람이 실제로는 그녀에 대한 험담을 퍼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성경을 펴고 친숙한 구절을 찾아 읽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3~4).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편의 목자가 양 떼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분명 사실이지만, 그 길은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굽어져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친구의 배신이라는 이 고통이, 이 어두움의 골짜기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 이끄시는 연단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그대는 어떤 때 영적으로 더 성장했는가? 편안했을 때인가 아니면 힘들었을 때인가?  각각 생각해보자.

 

*학습 목표

- 깨닫기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깨닫는다. 

- 느끼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나와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 행하기

삶의 모든 순간 속에 함께하시며 활동하고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간다.

 

2. 성경에 기록된 목자의 역할과 특성은 무엇입니까?(시 23, 사 40:11, 요 10:14~16)

※ 항상 양들을 따르며 보호하고 구원한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다.

3. 목자가 인도하는 길이 “의의 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시 23)

※ 목적지가 생명의 나라 여호와의 전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고 목자 자신이 그 길이기 때문이다. 

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마주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시 23:4)

※ 목자가 막대기와 지팡이로 지켜주시고 언제나 함께 하기 때문이다. 

5.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목자를 믿는다면 삶에서 마주하는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마 5:44, 롬 12:18~21)

※ 사랑하고 선대해야 한다.

6. 시편 23:6에서 다윗이 확신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 평생토록 목자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결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시편 23편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통해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배울 뿐만 아니라 인생의 고난과 시련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6월 26일(일) 여정의 인도자: 목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 보라고 했더니 어느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의 그림에 하트가 들어 있었다. 이유를 묻자 아이들은 한결같이 대답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잖아요.” 이 얼마나 단순한가!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는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대해 좋게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삶이 점점 힘들고 복잡해져 가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종종 바뀌고 만다. 물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약 1:17). 우리가 변할 뿐이다.

구약 시대에는 양을 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시편 23편도 하나님을 목자로, 사람을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을 목자로 상징한 것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변함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시편 23편을 살펴보기 전에, 성경 전체를 통해 성경 기자들이 목자의 역할과 특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아래 성경절들은 목자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렘 23:3~4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4: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요 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묵상>

시편 23편을 펴보십시오. 목자는 양을 돌보기 위해 어떤 일을 합니까?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부가설명> 시23편은 믿지 않는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시편이다. 창조주이시며 돌보시는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처럼 친근하게 정감 넘치도록 표현한 시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그는 막대기와 지팡이로 위험을 제거하시고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두려움이 없도록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목자이신 여호와 우리의 구주는 목사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개별적으로 기억하듯이 그의 백성을 개별적으로 이름으로 아시고 그 형편과 사정을 따라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신다. 그뿐만 아니다. 원수 사탄이 우리를 잡아가려고 호시탐탐하는 곳에서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부으시며 생명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신다. 기름을 성령님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을 우리는 다 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왕과 제사장이라는 것을 원수의 눈앞에서 선포하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왕같은 제사장이다. 이 사실을 원수 사탄 앞에서 선포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백성들을 어떻게 버리시겠는가.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보장받은 사람이다. 마음껏 감사하며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품에 안아 보호하시며 마침내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 주신다.

 

6월 27일(월) 지나는 곳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저 멀리까지 “의의 길”(시 23:3)이 펼쳐져 있다고 상상해 보라. 비록 그 길의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끝에는 본향 즉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보이는가? 어떤 곳은 분명하게 보이지만 어떤 부분은 크고 위험한 장애물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때때로 그 길은 능선 너머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어떤 곳은 걷기가 편하지만, 어떤 곳은 힘들다. 그 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까지 걸었던 여정과도 비슷하고, 시편 23편에 묘사된 길과도 흡사하다. 

 

양 떼가 의의 길을 따라 여호와의 집에 이르는 여정에서 어떤 곳을 거치게 되는지 다윗이 본 것을 시편 23편에서 확인하라.

 

답: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과 원수가 잠복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된다.

 

그런데 이 길을 왜 “의의 길” 또는 ‘바른길’이라고 부르는가? 네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바른 목적지 즉 목자의 집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의로우신 목자와 조화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가 목자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훈육하기 때문이다. 넷째, 바른 증언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여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로 가는 것이 평탄하건 험난하건 간에, 그 길은 ‘바른길,’ ‘의로운 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단지 소포를 도착지에 정확히 배달하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이끄심과 보호 그 이상의 문제이다. 아브라함을 약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의로움으로 이끄시는 훈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묵상>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대의 삶을 인도하신 여정을 되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 “의의 길”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답: 각각 대답해보자. 의의 길은 생명의 길과 같은 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시련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의 시간입니다. 비록 외롭고 힘들 때도 있지만, 곁에서 함께 하시며 항상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는 축복을 경험해야겠습니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들어갈 문은 좁은 문이고 들어가서 걷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 그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길이다(마1:13,14). 그 길은 예수님 자체라고 밝히셨다(요14:6). 예수께서 생활하신 곳이 바로 사망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사망의 음침한 곳이므로 생명의 길을 좁은 길이고 사망의 길은 넓다. 좁은 길 말고는 모두 사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는 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조금만 빗나가고 사망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목자 예수님을 눈에 놓치면 안 된다. 눈을 예수께서 돌려 그분만 주목하고 주위 모든 것을 눈에서 차단하고 걸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의는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생명의 길과 의의 길을 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의 길을 걷는 것은 사망의 세력들이 대단히 싫어하여 함께 사망이 되자고 사망의 화살을 쏘고 구덩이와 골짜기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이시고 의이신 주님 예수님을 주목하고 따라가면 생명의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눈길을 예수님께로부터 잠시라도 돌리지 말자.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실 때, 때로는 평탄한 길로, 때로는 험한 길로 이끄신다. 우리는 이 모든 훈련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목자의 집에 이른다.

 

6월 28일(화) 예상치 못한 우회로 1: 골짜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의의 길이 언제나 시원한 물이 흐르고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만 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다윗이 묘사한 길은 그런 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길에는 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는 와디(wadi)라고 부르는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좁고 가파른 계곡 형태의 지형이 있는데, 그곳은 빛이 거의 들지 않고, 간혹 예상치 못한 큰물이 휩쓸고 지나가곤 한다. 그런 곳은 분명 ‘사망의 음침한 그림자’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대만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언제, 어디였는가? 목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는가? 그 순간 어떤 성경절이 가장 소중하게 와 닿았는가?

 

답: 각각 대답하자.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34:7). 시23:4 등등이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그대는 양이 어떻게 그 골짜기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양이 스스로 그곳에 갔겠는가, 아니면 목자가 데려갔겠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답: 목자가 그렇게 인도할 때도 있고, 스스로 양떼를 떠나서 그런 곳에 갈 수도 있다. 스스로 떠나는 것은 절대적으로 위험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은 자신이 잘못 인도되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다랐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어둠 속을 걸어갈 필요가 있었다. 목자는 여전히 그와 함께 있다”(Quest for Love, 1996년, 218).

 

<묵상> 

그대는 어두운 골짜기로 ‘잘못 인도받았다’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목자가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우리가 어두운 골짜기로 향하는 것을 허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위의 질문은 요셉의 일생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그 길이 요셉을 총리가 되게 하는 가장 바른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끄신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골짜기로 인도하신다면 그곳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간절함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겪는 환난은 이 세상이 사망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당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밤에 공동묘지를 찾으면 머리털이 쭈뼛 선다. 몸에 소름이 돋아난다. 공포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산 사람이 죽은 자들이 있는 곳에 가는데 왜 공포가 느껴질까? 과학적 사실은 모른다. 산 사람들의 감성과 감각이 그런 반응을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사는 것이 산 사람이 공동묘지를 지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면 비유가 될까? 세상은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거기에는 사망의 위험이 있다. 원수가 어두운데 숨어서 불화살을 쏜다. 불시에 상처를 입게 된다. 공동묘지에서 그런 일이 없겠으나 사망의 세력을 잡고 활동하는 사탄은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목자이신 주님은 언제 막대기와 지팡이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안위하시고 지키신다. 막대기는 원수를 물리치는 도구이고 지팡이는 양이 무리를 떠나려고 할 때 끌어당겨 무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도구이다. 팔레스틴 목자들은 언제 이 두 가지 물건을 가지고 다녔다. 지팡이가 긴 것은 좀 멀어도 양의 목에 걸어서 끌어 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자이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능력의 도구이다. 제자들이 목자만 바라보고 걸어가면 안전하다. 사망을 이기신 목자가 생명의 길로 잘 걸어가게 하시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교훈>

의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때때로 예상치 못한 우회로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목자는 나와 함께 하신다.

 

6월 29일(수) 예상치 못한 우회로 2: 원수의 목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살다 보면 누구나 ‘원수’라고 할 만한 상대와 마주하는 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대는 원수를 어떻게 대하는가? 밤중에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나를 해하려는 자들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궁리한 적이 있는가? 원수를 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살면서 어떤 종류의 원수를 만나 보았는가? 그대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하려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44에 하신 말씀이나 바울이 로마서 12:18~21에 한 말을 충실히 따를 수 있었는가?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롬12:18~21]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답: 예수님 안에서 가능하다. 원수를 의식하지 않는 삶을 구하라.

 

시편 23:5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원수를 대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시는 일을 바라봄으로써 원수를 의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잔치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윗이 살던 시대에는 귀한 손님이 잔치에 오면 주인은 그 손님을 연회장으로 맞아 들이면서 감람유와 향수를 섞은 기름을 머리에 발라 주었다. 그런 다음 손님은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차려진 잔칫상을 받게 된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다(엡 6:12). 우리에게는 보이는 원수와 보이지 않는 원수가 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는 포위되어 있다. 하지만 목자가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은 어떤 원수도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시편 23:5에 나오는 세 가지 물건(상, 기름, 잔)은 우리가 비록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답: 목자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굶주리지 않도록 상에 음식을 차려주신다. 또 성령의 역사를 끊지 않으시고 생명의 잔이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 

 

<묵상>

그대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셨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각각 생각하고 답을 해보자.

 

<부가설명> 에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그분은 먼저 그렇게 하신 사실을 나타낸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된 아담이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져서 사망의 존재인 마귀의 아들이 되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버렸다. 그때 사랑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를 비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사망이 되어버린 아들의 사망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 원수, 곧 사망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나누어주라고 하신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다. 세상에서 인간관계에 원수가 되었다해도 그르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그에게 이 생명을 얻도록 기도하고 애를 쓰면 원수를 사랑하고 부활의 아침에 생명으로 만나는 기쁨을 함께 누릴 것이다. 그에게 상과 기름과 잔을 채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교훈>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하게 원수들에게 둘러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선하신 목자가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우리에겐 두려울 것이 없다.

 

6월 30일(목) 확실한 약속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우리는 종종 골짜기에 머물거나 원수에게 포위되었을 때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면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편 23:6에서 다윗이 확신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참조, 엡 1:4, 벧후 1:10, 히 11:13~15).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히11:13~15]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답: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평생 나를 따른다는 확신이다. 

 

어떤 번역본에서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나를 “따르리니”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훨씬 더 강하다. 원문에는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계속해서 쫓아온다, 추격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계속해서 쫓는다는 개념이 명확히 드러난 창 14:14, 수 10:19, 삼상 25:29을 참조하라.)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대를 ‘계속해서 쫓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 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이런 묘사를 통해 다윗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답: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결단코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것을 그릴 수 있다. 양떼와 항상 함께 있는 목자의 상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골짜기가 아무리 깊고 우리의 원수가 아무리 집요하게 공격해 올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우리의 여정을 끝까지 이끄시는 그분의 인도하심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이러한 생각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갈바리 언덕을 오르시도록 했다면, 우리도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

 때때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수많은 질문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그런 염려에 반응하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에 관해 신학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시편 23:6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그들을 격려하며,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과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나누는 것이다.

 

<묵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까?

 

<부가설명>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에 관한 비유를 하실 때 사실을 그 양이 양떼를 떠나서 도망한 상태였을지라도 목자가 양을 잃었다고 하셔서 책임을 목자가 지는 것으로 묘사하셨다. 아담이 창조주와 맺은 언약을 어기고 사탄을 따라갔다. 그런데 창조주 말씀 하나님께서는 목자가 양을 잃어버렸다고 하셔서 당신께서 친히 책임을 지셨다. 그래서 도망간 양을 찾았을 때 양을 꾸짖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때렸다고 하지도 않으셨다. 양우리로 돌아올 때도 양을 앞세우고 뒤에서 몰아붙이지 않고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오셨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내는 비유이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 스스로가 두려워하여 목자이신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엄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넘어진다. 성경은 이런 정신을 버리라고 간곡히 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롬11:22 개역).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주하면 그분에게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믿음으로 굳게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교훈>

비록 우리의 여정에서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원수에게 둘러싸인다고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끝까지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7월 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4권> 143, ‘가정에서의 선교사들’, <시대의 소망> 476~484, “거룩한 목자”를 읽어보라.

 

“최후의 승리를 얻을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당혹과 시련의 시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담대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단련의 일부이며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는 데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원수의 공격과 그의 극악한 능욕을 끈기 있게 견디고 사단이 앞길에 놓아둔 장애물들을 정복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의 눈이 항상 위로 향하고 문제들을 내려다보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도중에서 지치지 않을 것이며 곧 예수께서 그대들을 도우시려고 손을 뻗치시는 것을 볼 것이다. 그대들은 다만 단순한 믿음으로 손을 그에게 드리고 주께서 인도하시도록 허락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들이 그분을 신뢰하는 만큼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강하고 균형 잡히고, 아름다운 품성을 이룰 수 있는 도움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사단은 이러한 품성에서 비쳐 나오는 빛을 무익하게 만들 수 없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최선의 선물 곧 그분의 독생자를 주시사 당신의 완전하신 품성을 우리에게 입혀주심으로 우리를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하시며 또한 주의 나라에 있는 하늘 가정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하셨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63, 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대에게 닥쳐왔던 두렵고 극심한 시련이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거쳐야 하는 훈련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는가?

※ 각각 답을 적어보자. 기도와 말씀으로 항상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다(딤전4:5).

 

2. 우리의 도움과 위로와 격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사람을 향한 목자의 손길이 될 수 있겠는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더 잘 쓰임 받기 위해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 그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의 방문과 말의 위로와 권고와 당장의 필요를 가능한 돌보는 도움의 손길이 아니겠는가?

 

3.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셨던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 보라. 성경 또는 엘렌 G. 화잇의 저서(특히 시대의 소망)를 통해 살펴볼 때, 인성을 쓰신 예수님께서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디셨는가? 예수님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그분은 피땀 흘리는 기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견디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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