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기 제3과 - 새장-(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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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7-13 16:41 조회3,81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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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3과 새 장>
(2022년 7월 16일 (안) / 일몰: 19시 53분)
<서언(緖言)>
새 조련사(調鍊師)가 새가 노래를 부르도록 가르칠 때 환경이 중요하다는 예화(例話)를 들어 온통 주위(周圍)가 볼거리 들을 거리가 산만(散漫)할 때에 절대(絶對)로 새가 노래를 배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새에게 노래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새장을 보자기로 가리고 어수선한 환경(環境)을 정리(定理)시킨 다음에 오직 가르칠 노래만 집중(集中)하게 하고 가르칠 그 노래만 반복(反復)해서 들려주면 마침내 완전(完全)한 곡(曲)을 노래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인간(人間)들도 고난(苦難)의 그늘에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 길로 인도(引導)하시는 하나님의 목적(目的)을 발견(發見)하고 잘 참고 견디면 우리를 위해 약속(約束)된 영원(永遠)한 상급(賞給)을 분명(分明)하게 받게 된다는 것이 이번 주의 교과(敎科)의 핵심(核心)이다….
(07월 10일 (日) <막다른 길을 지나 약속(約束)의 땅으로>
(Q)~(출 14장)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할 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이제 막 애굽에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洪海)로 인도(引導)하신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오묘(奧妙)했다. 그러한 상황(狀況)은 즉 시련(試鍊)과 고난(苦難)은 하나님의 귀중(貴重)함을 절감(切感)케 하는 훈련(訓練)이다
⑴.바로 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追擊)하도록 그를 유인(誘引)하기 위한 것이요
⑵.동시(同時)에 인간적(人間的)으로는 도무지 소망(所望)이 없는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에서 홍해(洪海)가 갈라지는 대 이적(異蹟)의 사건(事件)을 통하여 백성들에게는 믿음을, 바로에게는 심판(審判)을, 열 방(列邦)에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밝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설정(設定)하신 상황(狀況)이었다.
⑶.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약속(約束)의 땅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체험(體驗)하고 절대적(絶對的)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依支)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訓練)이 필요했고. 천국(天國)의 생활(生活)을 위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확신(確信)하는 하나님을 절대적(絶對的)으로 의지(依支)하는 훈련(訓鍊)이 필요했다.
(07월 11일 (月) <쓴 물>
(Q)~(출 15:22~27, 17: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라와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기 원하셨습니까?
(A)~○. 그들에게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그들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즉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존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07월 12일 (火) <광야(廣野)에서의 대쟁투(大爭鬪)>
(Q)~(눅 4:1~13) 사탄이 가져오는 죄(罪)의 유혹(誘惑)에 굴복(屈伏)하지 않고 시험(試驗)에 이기기 위한 비결(祕訣)은 무엇입니까?
(A)~○. 때때로 성령(聖靈)께서 우리를 시련(試鍊)의 장소(場所)로 이끄시는 데는 분명(分明)한 목적이 있다. 우리는 시련(試鍊) 당할 때 기록(記錄)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 오직 말씀으로 대처(對處)하여야 죄의 유혹(誘惑)에 굴복(屈伏)하지 않고 마귀(魔鬼)의 시험(試驗)을 이길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낙심(落心)하지 말아야 한다..
(07월 13일 (水) <불멸(不滅)의 유산(遺産)>
(Q)~(벧전 1:6~9) 베드로는 시련(試鍊) 중에 있는 성도(聖徒)들에게 어떤 확신(確信)과 소망(所望)을 주었습니까?
(A)~○. 우리가 세상(世上)에서 잠시(暫時) 당하는 믿음의 시련(試鍊)은 장차(將次) 받게 될 정금(正金)보다 귀한 영원(永遠)한 영광(榮光)을 맛보게 한다. 영원(永遠)한 상급(賞給)과 비교(比較)할 수 없다. 주님의 변(變)함없는 약속(約束)은 우리로 하여금 시련(試鍊)을 견디게 해 준다.
(07월 14일 (木) <불 시험(試驗)>
(Q)~(렘 29:13, 롬 8:28, 고후 12:9)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인도(引導)하심을 의심(疑心)하도록 하는 사단의 공격(攻擊)의 상황(狀況) 속에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성경(聖經)의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A)~○.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시험(試驗)을 통과(通過)하도록 허락(許諾)하시는데, 이는 맡기실 과업(課業)에 합당(合當)한 품성(稟性)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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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尾付祿)>
<제3과 새 장>
(07월 10일 (日) <막다른 길을 지나 약속(約束)의 땅으로>
(Q)~(출 14장)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할 줄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이제 막 애굽에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洪海)로 인도(引導)하신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오묘(奧妙)했다. 그러한 상황(狀況)은 즉 시련(試鍊)과 고난(苦難)은 하나님의 귀중(貴重)함을 절감(切感)케 하는 훈련(訓練)이다
⑴.바로 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追擊)하도록 그를 유인(誘引)하기 위한 것이요
⑵.동시(同時)에 인간적(人間的)으로는 도무지 소망(所望)이 없는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에서 홍해(洪海)가 갈라지는 대 이적(異蹟)의 사건(事件)을 통하여 백성들에게는 믿음을, 바로에게는 심판(審判)을, 열 방(列邦)에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밝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설정(設定)하신 상황(狀況)이었다.
⑶.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약속(約束)의 땅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체험(體驗)하고 절대적(絶對的)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依支)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訓練)이 필요했고. 천국(天國)의 생활(生活)을 위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확신(確信)하는 하나님을 절대적(絶對的)으로 의지(依支)하는 훈련(訓鍊)이 필요했다.
○. 홍해(洪海) 사건(事件)과 출애굽의 10대 재앙(災殃) 사건(事件)들을 비롯하여 신구약(新舊約)에 나타난 모든 이적사건은 단순(單純)히 인간의 호기심(好奇心)을 충족(充足)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이적(miracle)은 일종의 표적(sign)으로서 믿는 자들의 신앙(信仰)을 확고(確固)히 하고,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증명(證明)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사자(使者)들의 권위(權威)를 보증(保證)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기적(奇蹟)과 홍해(洪海) 기적(奇蹟)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고 모세를 믿은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목적(目的)에 부합(符合)되는 것이었다.
○. 뒤쫓아 온 애굽 군대(軍隊)를 보고 겁에 질려 모세를 원망(怨望)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홍해 사건을 경험(經驗)하고 난 후에는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전폭 신뢰(信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신뢰(信賴)는 얼마 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이어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逢着)할 때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怨望)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15:24, 16:2). (출 14:31, 만나주석)
○.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닷길을 통해 인도(引導)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敬畏心)과 믿음을 자리를 잡도록 한 하나님의 계획(計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은 그의 대표자인 모세에 대한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고, 그 이유로 기적은 모세를 통하여 행사되었다. 믿음에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적과 하나님의 현현이 요구되었다. 믿음은 본 다음에 생겼고 보는 것 위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요 20:29)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계속 의존하는 믿음은 결코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사실이었다. 만약 우리가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른다면, 그때 이후로 그들은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결코 불신을 나타내지 않고 전심으로 그들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쁘게 여행을 계속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는 그들이 지속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불신하고 그들에 대해 불평하며 그들의 권고를 멸시한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배신을 보며 놀라지만, 성급하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정죄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분의 뜻과 길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만 신뢰하는 믿음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보다 결코 낫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 14:31, 재림교주석)
(07월 11일 (月) <쓴 물>
(Q)~(출 15:22~27, 17: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라와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기 원하셨습니까?
(A)~○. 그들에게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그들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즉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존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 (출15:24) 백성이…원망하여 가로되.
그들은 전에 홍해 서쪽 해안에서 원망한 적이 있었고(출14:11, 12), 그들의 방랑이 끝나기 전에 여러 번 더 원망하게 될 것이었다(참조 출 16:2; 민 14:2; 16:41 등). “원망”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곤란에 부닥칠 때 그들의 영혼의 쓰라림을 표출하는 삶의 일상적인 양태(樣態)였음이 드러났다. 모세는 애굽에서 그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이요 지도자였기에 그들의 원망이 일차적으로는 그에게로 향하였다. 민족을 위해 가장 훌륭히 봉사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생전에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여 기념비가 세워진다.
○. (출15:25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이 나무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쓴 물을 단물로 바꾸는 성질을 가졌다고 알려진 나무나 식물들이 세계 다른 여러 지역에 있지만, 시내 반도에서는 그중의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사실 그 근처의 유목민들도 아인 하와라와 그 주변 지역의 샘물이 맛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무엇이 그 물을 마실 수 있게 바꿀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해서는 가능한 설명이 두 가지밖에 없다. 모세가 지금은 더 이상 그 지역에서 자라지 않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꾸는 자연적 성질을 지닌 어떤 나무를 취하도록 지시를 받았든지 혹은 물이 변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였고 나무는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 지녔을 것이다.
○. 그들을 시험하실새.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여러 경우에 “시험하셨다.” 먼저는 홍해에서, 지금은 마라에서, 후에는 므리바에서(17:1~7), 시내에서(20:20), 다베라에서(민 11:1~3), 기브롯 핫다아에서(민 11:34), 가데스에서(민 13:26~33), 그리고 기타 다른 곳에서 그들을 시험하셨다. 이러한 “시험들”은 그들이 가나안에서 맞게 될 경험을 위해서, 비교적 쉬운 환경 아래서 그들을 훈련(訓鍊)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計劃) 일부였다.
○. (출15:26) 너희가…청종(聽從)하고.
여기에 놀라운 약속(約束)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모든 계명(誡命)에 엄격(嚴格)히 순종(順從)한다면 그분은 물을 고치셨던 것과 같이 그들을 “치료(治療)할” 것이며, 육체적(肉體的)인 죄악(罪惡)과 도덕적(道德的)인 죄악(罪惡)으로부터 그들을 보호(保護)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신체적(身體的)인 안녕(安寧)은 순종(順從)에 달려 있었다. 이 위대(偉大)한 원칙은 히브리인들의 시대(時代)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時代)를 통하여서도 참되다. 인류의 신체적(身體的)인 안녕(安寧)은 지금도 넓은 범위(範圍)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건강(健康)한 삶을 좌우(左右)하는 율법(律法)을 무시(無視)하는 자들은 그 결과(結果)에 대한 책임(責任)이 다름 아닌 자신에게 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관한 교훈(敎訓)에 따라 사는 자들은 질병(疾病)으로부터 놀라운 자유를 경험(經驗)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적(靈的)인 상태(狀態)뿐만 아니라 신체적(身體的)인 상태(狀態)에 관해서도 관심(關心)을 가지고 계신다(참조 요삼 2). (출 15:22~27, 재림교주석)
○. 너희를 치료(治療)하는 여호와.
애굽의 의사(醫師)들은 고대(古代) 근동(近東)의 전 지역(地域)에서 유명(有名)하였다. 그러나 현존(現存)하는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들은 치료(治療)의 능력(能力)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신(神)들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의 의학교본(醫學敎本)에 의하면, 어떤 것들은 4,000년이나 된 것인데, 질병(疾病)이 세 가지로 분류(分類)되어 있다. (1) 치료(治療)할 수 있는 것, (2) 억제(抑制)할 수 있는 것, (3) 치료(治療)할 수 없는 것. 모세의 시대 이래로 의학(醫學)이 놀랍게 발전(發展)하긴 했지만 위의 분류(分類)는 여전히 유효(有效)하다. 외과의사(外科醫師)가 절개(切開)하고, 기관(器官)을 제거(除去)하고, 상처(傷處)를 봉합(封合)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치료(治療)할 수는 없다. 내과의사(內科醫師)는 특정(特定)한 병(病)에 특정한 효력(效力)을 지녔다고 알고 있는 약(藥)을 처방(處方)할 수는 있지만, 그의 기술(技術)은 그것이 전부이다. 실제(實際) 치유 과정(治癒過程)은 인간의 과학(科學)이 제어(制御)할 수 없는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만이 치료(治療)를 나누어 준다는 사실은 모세 시대(時代)와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사실(事實)이다. 그분은 큰 의원(醫員)이다. (출 15:22~27, 재림교주석)
(07월 12일 (火) <광야(廣野)에서의 대쟁투(大爭鬪)>
(Q)~(눅 4:1~13) 사탄이 가져오는 죄(罪)의 유혹(誘惑)에 굴복(屈伏)하지 않고 시험(試驗)에 이기기 위한 비결(祕訣)은 무엇입니까?
(A)~○. 때때로 성령(聖靈)께서 우리를 시련(試鍊)의 장소(場所)로 이끄시는 데는 분명(分明)한 목적이 있다. 우리는 시련(試鍊) 당할 때 기록(記錄)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 오직 말씀으로 대처(對處)하여야 죄의 유혹(誘惑)에 굴복(屈伏)하지 않고 마귀(魔鬼)의 시험(試驗)을 이길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낙심(落心)하지 말아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검(劍)"이다. 또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방패(防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안에서 권능(權能)을" 얻어, "그 권능 안에서 나가고" 들어오며, 우리의 영적(靈的) 상태(狀態)가 어떠하든 "기록(記錄)된바"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은 바로 우리를 "교훈(敎訓)하고" "우리를 유익(有益)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사탄은 사람을 유혹(誘惑)하여 범죄(犯罪)하게 한 후에 이 지구(地球)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主張)하고 자신을 이 세상의 임금으로 자칭(自稱)하였다. 그는 우리 인류의 시조(始祖)에게 자기의 성질(性質)을 본(本)받게 한 후에 이곳 지상(地上)에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들의 군주(君主)로 선택(選擇)하였다고 선언(宣言)했다. 그는 사람을 지배(支配)함으로 세상의 통치권(統治權)을 취(取)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주장(主張)을 반증(反證)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인자(人子)로서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忠誠)할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사탄이 인류에 대한 완전(完全)한 지배권(支配權)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과 세상이 자기의 것이라는 사탄의 주장(主張)이 허위(虛僞)였다는 것이 증명(證明)될 것이다. 사탄의 권세(權勢)에서 구원(救援)받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해방(解放)될 것이다.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통치권(統治權)은 회복(恢復)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114-115)
○. 시험(試驗).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種類)의 시험(試驗)을 구별(區別)해서 이해(理解)하는 것이 필요(必要)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境遇)를 구분(區分)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試驗)’이라는 말로 번역(飜譯)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탄은 사람들을 ‘시험(試驗)’(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탄은 사람들이 악(惡)을 행하도록 유혹(誘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方法)에 따라서 시험(試驗)을 받으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直接) 사탄에게서 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試驗)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信仰)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要求)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廣野)에서 이와 같은 실수(失手)를 범(犯)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引用)한 의도(意圖)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暗示)하고 있을 것이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廣野)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經驗)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種類)의 시험(試驗)이 포함(包含)되어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律法)의 준행(遵行) 여부(與否)’를 보시려고 광야(廣野)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試驗)하셨다(출 16:4). 한편 사탄의 시험(試驗)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라고 하신 말씀이 타당(妥當)하다는 것을 입증(立證)했다. 즉, 예수는 구약성경(舊約聖經)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試驗)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 <우리 주 예수는 이 시험(試驗)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
그는 단호하게, 크게 혐오(嫌惡)하여 거부(拒否)했다(8절).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난 참을 수가 없노라. 뭐라고! 내가 받들려고 온 그 하나님의 원수(怨讐)를 경배(敬拜)하라고! 내가 구원(救援)하러 온 인간의 원수(怨讐)를 경배(敬拜)하란 말이냐? 아니다. 난 도무지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은 유혹(誘惑)에는 이유(理由)를 따져서는 안 된다. 즉각적(卽刻的)으로 거부(拒否)해야 한다..
○. 이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취(取)하려는 자들은 모두 사탄의 노예(奴隸)가 되리라. 사탄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과 애착(愛着)과 경배(敬拜)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도 가질 수 있게 되고, 불복종(不服從)의 "자식(子息)들에게" 역사(役事)할 수 있다. 그때에는 실상(實狀) 사탄이 "그들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07월 13일 (水) <불멸(不滅)의 유산(遺産)>
(Q)~(벧전 1:6~9) 베드로는 시련(試鍊) 중에 있는 성도(聖徒)들에게 어떤 확신(確信)과 소망(所望)을 주었습니까?
(A)~○. 우리가 세상(世上)에서 잠시(暫時) 당하는 믿음의 시련(試鍊)은 장차(將次) 받게 될 정금(正金)보다 귀한 영원(永遠)한 영광(榮光)을 맛보게 한다. 영원(永遠)한 상급(賞給)과 비교(比較)할 수 없다. 주님의 변(變)함없는 약속(約束)은 우리로 하여금 시련(試鍊)을 견디게 해 준다.
○. 산 소망(所望).
소망(所望)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인생의 문제(問題)들을 극복(克服)하며 계속해서 전진(前進)하도록 하는 커다란 힘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소망(所望)이 없고(엡 2:12),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소망이 살아 있고 역동적(力動的)으로 된다. 이교(異敎)는 공허(空虛)한 망상(妄想)만 제공(提供)할 뿐이다.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여정(旅程)의 목표(目標)와 그 영원(永遠)한 미래(未來)를 응시(凝視)하도록 굳세게 붙들어 주는 그런 개인적(個人的)인 내적(內的) 소망(所望)을 의미(意味)한다. 비그리스도인의 상태(狀態)와 비교(比較)해 보라(엡 2:11, 12).
○. 믿음으로 말미암아.
문자적(文字的)으로 “믿음에 의하여.” 신자(信者)들을 전능자(全能者)의 보호(保護) 안에 있게 하는 울타리는 신자(信者) 각(各) 사람의 개인적(個人的)인 믿음이다. 믿기를 거절(拒絶)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며, 삶에 대한 그분의 방법(方法)이 영혼(靈魂)의 가장 깊은 소원(所願)을 온전(穩全)히 채운다는 것을 확신(確信)한다.
○. 하나님의 능력(能力).
성도(聖徒)들의 안전(安全), 개인(個人)의 죄에 대한 성공적(成功的)인 정복(征服)은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사람을 위해 이루시는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달려 있다(참조:시대의 소망, 466; 산상보훈, 142).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호(保護)와 지도 없이는, 구속(救贖)받은 자들을 위해 현재 하나님이 지키고 계시는 그 “기업(基業)”을 그리스도인이 결코 개인적(個人的)으로 실감(實感)할 수 없다(참조 4절 주석).
○. 여러 가지 시험(試驗)으로 인(因)하여.
곧 “다양(多樣)한 종류(種類)의 시험(試驗) 가운데.” “시험(試驗)”(헬라어 페이라스모이[peirasmoi])으로 번역(飜譯)된 단어(單語)에 대해서 (약 1:2)을 참조하라. 다양(多樣)한 방해(妨害), 문제(問題), 실망(失望), 근심에 에워싸인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묘사(描寫)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個人的)인 믿음을 파괴(破壞)하려고 사단이 사용(使用)하는 것들이다.
○. <정금(正金)>.
금. 은(金銀)은 불로 시험(試驗)하고 정련(精鍊)한다. 개인(個人)의 믿음 또한 그 가치(價値)가 온전히 드러나기 위(爲)해서는 시험 과정(試驗過程)을 거친다(참조 고전 3:13, 15 주석; 히 12:29; 계 1:14; 2:18; 19:12).
(07월 14일 (木) <불 시험(試驗)>
(Q)~(렘 29:13, 롬 8:28, 고후 12:9)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인도(引導)하심을 의심(疑心)하도록 하는 사단의 공격(攻擊)의 상황(狀況) 속에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성경(聖經)의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A)~○.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시험(試驗)을 통과(通過)하도록 허락(許諾)하시는데, 이는 맡기실 과업(課業)에 합당(合當)한 품성(稟性)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다.
○. (렘 29:13), <너희가 전심(全心)으로 나(하나님)를 찾고 찾으면>
여기서 ‘전심(全心)으로’(베칼레바브켐)라는 말은 ‘네 마음을 다하여’란 뜻으로서 감정적(感情的)인 면보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側面)에 더 강조점(强調點)이 주어져 있다. (렘 29:13, 만나주석)
○. (렘 29:13)의 이 놀라운 약속(約束)은 (신 4:29)의 반향(反響)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진실(眞實)한 목적(目的)을 가지고 당신을 찾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음을 분명(分明)히 하신다. (렘 29:13, 재림교주석)
○. “그가 시험(試驗)을 받아 고난(苦難)을 당(當)하셨은즉 시험(試驗)받는 자(者)들을 능(能)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 고난(苦難)과 시련((試鍊> 가운데서는 그들이 서로 화합(和合)하고 같이 살았으나 번영(繁榮) 가운데서는 그들 사이에 분쟁(紛爭)의 위험(危險)이 있었다. (부조, 132)
○. “작은 일은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보다 높은 직분(職分)을 맡기에 부적합(不適合)하다는 것을 증거(證據) 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는 큰 의무(義務)
를 수행(遂行)하기에 충분(充分)한 능력(能力)이 있다고 생각(生覺)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외모(外貌)보다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신다. 시험(試驗)과 시련((試鍊) 후에 “저울에 달려서 부족(不足)함이 뵈었다”라는 선고(宣告)가 그에 대하여 기록(記錄)된다. 자기의 불충실(不充實)은 자신(自身)에게 돌아간다. 그는 전적(全的)인 복종(服從)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은혜(恩惠)와 능력(能力)과 품성(稟性)의 힘을 받지 못한다.”(선지, 218)
○. “하나님의 교회(敎會)는 악(惡)과 오랜 투쟁(鬪爭) 중 가장 불우한 시대(時代)에 여호와의 영원(永遠)한 목적(目的)에 대한 계시(啓示)를 받았다. 당신의 백성들은 현재(現在)의 시련((試鍊) 저편의 승리(勝利), 곧 투쟁(鬪爭)이 끝나고 구속(救贖)받은 이들이 약속(約束)의 땅을 차지할 미래(未來)의 승리(勝利)를 바라볼 허락(許諾)을 받았다. 하나님의 손으로 묘사(描寫)된 장면(場面) 곧 미래(未來)의 영광(榮光)에 대한 계시(啓示)는 각 시대(時代)의 투쟁(鬪爭)이 신속(迅速)히 끝나고 약속(約束)된 축복(祝福)들이 모두 완전(完全)히 실현(實現)되려고 하는 오늘날 당신의 교회(敎會)에게 매우 귀중(貴重)한 것이다.”(선지, 722)
○. <예(例)>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욥 16:1-5]
제목: 고난(苦難)에 처(處)한 이들을 위로(慰勞)하라.
◉고난(苦難)당하는 이들은 징벌적(懲罰的) 책임(責任)이 있다고 생각(生覺)하십니까?
욥이라고 하는 인류(人類) 역사상(歷史上) 가장 고된 고난(苦難)을 겪은 사람의 기록(記錄)이 성경(聖經)에 씌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으로서 전혀 흠(欠)잡을 데 없는 의(義)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욥에게 인간(人間)으로서는 도저히 이해(理解)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고난(苦難)이 닥쳐 왔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아들딸이 하루아침에 건물(建物)이 무너지며 압사(壓死)를 당하고, 모든 재산(財産)이 하루에 모두 탈취(奪取)를 당해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욥 2:7]에 보면“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악창(惡瘡)이) 나서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게 되었다.”라고 기록(記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칠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욥기서의 기록 목적(記錄目的)이 무엇입니까?
욥과 같은 의인(義人)도 극한(極限)의 고난(苦難)을 겪을 수 있다는 것과 그러니 고난(苦難)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無條件) 죄와 악(惡)의 귀결(歸結)로 치부(置簿)해서 질책(質責)하거나 정죄(定罪)하고 비난(非難)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고난(苦難)을 겪게 되지만 자칫 그들을 향(向)해 위로(慰勞)하고 격려(激勵)하고 욥의 말과 같이 그들을 강(强)하게 하여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기보다 상처(傷處)에 소금을 뿌리듯 정죄(定罪)하고 돌을 던지듯 괴롭히고 짓밟는 질책(質責)에 대해서 그대들이 하나님이냐?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책망(責望)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욥의 고난(苦難)을 큰 주제(主題)로 정(定)하셨을까요?
인류최초(人類最初) 불순종(不順從)의 범죄(犯罪)로 인하여 인류(人類)에게 들어온 저주(詛呪)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고통(苦痛)이었습니다. 고통(苦痛)과 역경(逆境), 그리고 난해(難解)한 괴로움과 두려움과 근심·걱정 같은 것이었습니다. 악(惡)한 마귀(魔鬼)는 이를 통해서 사람들을 이간(離間)시키고 나누고 분리(分離)하면서 갈등(葛藤)하고 싸우고 쟁투(爭鬪)하고 시기(猜忌)하고 분란(紛亂)을 일으켜 불행(不幸)을 증폭(增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人類)에게 가장 귀(貴)한 처방(處方)을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현(實現)하는 매개체(媒介體)로 위로(慰勞)와 격려(激勵), 칭찬(稱讚)과 이해(理解), 친절(親切)과 관심(關心) 같은 사랑의 실천(實踐)을 통해서 악(惡)한 마귀(魔鬼)를 대적(對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욥의 고난(苦難)이 예표(豫表)하고 있는 우리 중에 함께 있는 모든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에 처(處)한 이들에게 욥의 친구(親舊)같이 격동(激動)시키거나 번뇌(煩惱)하게 하는 것이 아닌 진실(眞實)로 그의 관점(觀點)에서 얼마나 고통(苦痛)스러운가를 이해(理解)하고 위로(慰勞)하고 힘을 북돋아 주고 성실(誠實)한 도움을 통해서 그가 고난(苦難)을 이기고자 하는 의기(意氣)를 높여 주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의 실천(實踐)을 통해서 희망(希望)을 주라는 것입니다.
위로(慰勞)하고 위문(慰問)한다고 찾아와서 견딜 수 없는 고통(苦痛)을 더해주는 친구(親舊)라는 이들에게 욥은 넌더리를 칩니다. [욥 19:29]에“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忿怒)는 칼의 형벌(刑罰)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審判長)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라는 극한(極限)의 분노(忿怒)를 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겠습니까?
○. 사도 바울이 마개도냐에서 감당(堪當)할 수 없는 고난(苦難) 속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에서 디도를 통해 보내 준 위로(慰勞)에 대해 [고후 7:7]에“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慰勞)로 나를 위로(慰勞)하고 너희의 사모(思慕)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報告)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라고 전(傳)하는 것을 보십시오.
※힘들어하고 고통(苦痛)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이웃에게 정죄(定罪)와 질책(質責)을 할 것이 아니라, 들어 주고 함께 아파하고 위로(慰勞)와 격려(激勵)가 될만한 도움을 주고 함께 울고 웃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위로자(慰勞者)들이 되시기를 예수 님의 이름으로 기원(祈願)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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