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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아브라함의 뿌리 (5/7/2022) 질문 답변 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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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4-30 03:29 조회5,7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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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아브라함의 뿌리
(5월 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7분)
 
연구 범위: 창세기 12, 사 48:20, 사 36:6, 9, 렘 2:18, 창 13, 창 14, 히 7:1~10
 
기억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우리는 이제 창세기의 중심에 접어들었다. 이 중요한 부분은(창 12~22장) 아브라함의 여정을 다루게 되는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의 과거를 버리게 했던 “가라”(lekh lekha)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에서부터 시작하여(창 12:1), 또다시 “가라”는 명령으로(창 22:2), 아들을 통해 이루게 될 것 같았던 미래도 포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심까지 살펴볼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어디에 정착하지 않은 ‘나그네’였다(창 17:8).
그의 여정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과거는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미래는 오롯이 미지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믿음의 여정을 이어간다. “두려워하지 말라”(창 15:1).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아브라함의 여정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는 6, 7, 8과에서 각 부분을 함께 공부할 것이다.
믿음의 실례이며(창 15:6) 히브리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는(느 9:7, 8) 아브라함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구약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 주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기 시작할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아브람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한다.
느끼기
아브람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한다.
행하기
눈 앞의 이익을 좇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TMI 위로
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고향과 가족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12:1~9)
※ 그의 모든 과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수행하게 하신 것이다.
3.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의 선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창 12:10~20)
※ 하나님과 의논 없이 자기 판단으로 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정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4. 땅을 두고 했던 롯과 아브람의 선택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창 13:1~18)
※ 이기심으로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과 남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5. 롯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간 아브람의 마음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창 14:1~17)
※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6.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14:18~24)
※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므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만물의 주님으로 믿는 신앙이다.
 
결론
아브람은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족과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는 아브람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 가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그 과정 중에 나타난 아브람의 삶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나타내 보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5월 1일(일) 아브람의 출발
 
창세기 12:1~9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고향과 가족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아브람은 어떻게 응답했는가?
[창12:1~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답: 아브람의 과거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묵묵히 순종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람과 직접 대화하신 것은, 홍수 후에 노아에게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창 9:15~17) 또 다른 전 세계적인 홍수가 결코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재확인해 주실 때였다. 이제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 그 약속과 다시 연결된다.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었다.
그 예언의 성취는 과거를 뒤로하고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브람은 그에게 익숙했던 모든 것, 그의 가족과 그의 고향과 심지어는 자신의 일부분까지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떠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가다”라는 핵심 단어의 반복으로 나타나는데, 이 대목에서 “가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 반복된다. 아브람은 먼저 자신의 고향이었던 “갈대아인의 우르”(바벨론)를 떠나야 했다(창 11:31, 사 13:19).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르심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왔다(사 48:20, 계 18:4).
아브람의 출발은 그의 가족과도 연관되어 있다. 아브람은 그에게 익숙한 전통, 그리고 유전과 교육과 영향력을 통해 배우고 습득했던 대부분의 것들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가라”(lekh lekha)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네 자신이 가라” 또는 “네 자신을 위해 가라”이다. 바벨론으로부터 떠나는 아브람의 출발은 그가 처한 환경과 그의 가족을 떠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표현은 ‘그 자신’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아브람은 자기 안에 들어와 있던 바벨론의 영향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이처럼 버리고 가는 것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실 ‘땅’에 있었다. 같은 언어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에서 모리아 산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사용된다(창 22:2).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히 물리적인 고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약속에서 재확인된다(창 12:2, 3). ‘축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바라크(barakh)는 이 본문에서 다섯 번 등장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전 세계적인 축복은 아브람의 “씨”를 통해 올 것이었다(창 22:18, 26:4, 28:14). 본문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씨”(또는 자손)를 언급한다(행 3:25).
 
<묵상>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가라”는 명령의 보다 넓은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답: 세상적인 것, 바벨론 사상에서 완전히 떠나서 오직 영적인 것 하나님 사상으로말 생활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창조하실 때 창조주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셔서 살게 하셨다. 그 동산은 영생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자만이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동산이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오직 산 자의 하나님이시므로 죽은 자와 함께 거할 수 없다. 그래서 생명에서 사망으로 타락한 아담 부부를 생명의 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에덴동산을 떠난 아담 부부는 사망의 세상, 땅이 저주받고 모든 창조질서가 변질된 세상에서 생명이 사망으로 변질 된 존재로 죽을 때까지 죽어가는 존재로 시간을 소비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그런 아담의 후손들에게 이 사망의 세상에서 나와서 생명의 세상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노아를 거치고 바벨탑을 지나서 아브람에게 이르러 이제는 바벨론이 된 사망 세상의 사상과 삶에거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 땅으로 갈 때는 바벨론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지역뿐만 아니라 사상과 생활방식도 버려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상을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홍해를 건넜을 때 다시는 애굽인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같은 사상이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아 사망에서 생명에 옮겼다면 전에 살던 옛사람, 옛터전, 옛 사상에서 완전히 나와서 새사람, 새 장소, 새 사상, 곧 하나님의 사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서 참 생명으로 생활해야 한다. 아브람에게 자기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이 모든 것이 포함된 지시였다. 그는 순종했다.

<교훈>
아브람은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그동안 그가 익숙했던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야 했다.
 
 
5월 2일(월) 애굽의 유혹
 
창세기 12:10~20을 읽어 보라. 아브람이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 아브람과 비교하여 바로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창12:10~2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답: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어서 그것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다.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 하여 자기 안전을 도모했고 바로는 그 누이를 아내로 데려갔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돌려보내고 아브람을 책망했다.
 
약속의 땅에 이제 막 도착한 아브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창 12:10)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 가기로 결정한다. 기근의 때에 가나안 사람들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증거는 고대 이집트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집트 중왕기 시대에(BC 2060-1700) 기록된 ‘메리카르의 교훈’(Teaching of Merikare)은 가나안에서 온 사람들을 “비참한 아시아인”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가엽고, 물이 부족하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음식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Ancient Egyptian Literature, Volume I: The Old and Middle Kingdoms , 103, 104).
애굽의 유혹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 문제가 되었다(민 14:3, 렘 2:18). 그렇기 때문에 애굽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신뢰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왕하 18:21, 사 36:6, 9). 날마다 풍족한 물이 눈 앞에 보이는 애굽에서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땅에 대한 약속이 즉시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에도 불구하고, 기근으로 가득한 땅과 비교해 볼 때 애굽은 지내기 좋은 곳처럼 느껴졌다.
가나안을 떠나는 아브람의 모습은 우르를 떠났던 아브람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전의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르를 떠난 믿음의 사람으로 묘사되었지만, 이 장면의 아브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약속의 땅을 떠나고 있다. 이전의 아브람은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아브람은 이제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는 영악하고 비도덕적인 정치인처럼 행동한다. “애굽에 체류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약점과 불완전함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드러냈다. 사라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그의 생애 속에서 그처럼 자주 존귀하게 예증되었던 고상한 신앙과 용기의 결핍을 나타내었다”(부조와 선지자, 130).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실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신약은 아브라함을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실례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은혜가 아니었다면 아브라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묵상>
이 이야기가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쉽게 옳은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나요? 불순종이 어떤 경우라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 위치를 확인하라고 가르친다. 불순종은 항상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리는 도구가 된다.
 
<부가설명> 아브람은 현실적 위기를 만났을 때 인간의 수단으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성은 같다. 특히 생명의 안전과 관련하여 더욱 그렇다. 생명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히2:15). 죽인다는 위협보다 더한 위협은 없다. 그만큼 사람들은 생명에 애착이 강하다. 그런데 결단코 안 죽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죽인다고 하면 그렇게 두려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좀 더 늦게 죽기를 바란다. 사람은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망하여 갈 뿐이지 생존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아브람은 이런 것을 몰랐을까? 지식으로는 알았어도 현실이 닥칠 때는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피해보려고 하는 것이 사망의 존재인 인간의 사망본능이다. 이렇게 살고 싶은데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의 생명을 받으라고 하면 거절하고 그런 것이 있지 않다는 정신을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 정신이고 애굽 사상이다. 신자들은 마땅히 성경의 계시를 현실적 진리로 믿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요 이 정신을 생활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교훈>
기근을 피하려고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의 선택은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버리지 않으셨다.
 
 
5월 3일(화) 아브람과 롯
 
창세기 13:1~18을 읽어 보라. 품성의 중요성에 관하여 이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창13:1~18]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답: 롯은 자기를 위하여 좋아보이는 땅을 먼저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다. 그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품성을 드러내었고 롯은 인간의 욕심을 먼저 드러내었다.
 
아브람은 그가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아브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약속의 땅으로 향했던 그의 첫 여정이 멈추어 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아브람이 처음 그 땅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창 12:3~6), 그가 애굽에서 돌아와서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벧엘이었다(창 13:3). 애굽까지 이어졌던 불행한 헤매임은 끝났다. 아브람은 회개했고 예전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돌아왔다.
아브람이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나타났다.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 조카 롯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아브람은 그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것을 제안했고 롯이 먼저 선택하도록 배려했다(창 13:9). 이와 같은 너그러움과 친절함은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롯이 앞으로 그의 이웃이 될 사람들의 악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창 13:13), 물이 넉넉한(창 13:10, 11) 가장 좋은 땅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의 욕심과 성품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선택했던 홍수 전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참조, 창 6:2).
이와는 반대로 아브람의 선택은 믿음의 행동이었다. 그 땅은 아브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롯과 달리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난 뒤에야 그 땅을 바라보았다(창 13:14). 아브람이 롯과 헤어진 후에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하셨다(창 13:14).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후로 처음 그에게 다시 말씀하신 것이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 15). 그리고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 땅을 “두루 다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음을 확인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 땅을 아브람에게 주셨음을 확인시키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선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었다. 아브람은 그 선물을 순종으로 이어지는 믿음으로 받을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여기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으시다(참조, 창 13:14~17).
 
<묵상>
창세기 13장에 기록된 롯과 아브람의 선택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중요한 선택들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답: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의 말씀을 표준으로 결정해야 한다.
 
<부가설명> 롯은 아브라함의 맏형인 하란의 아들이다. 하란의 딸이 아브람의 둘째 형인 나홀의 아내가 된 것을 보면 하란은 아브람이나 나홀보다 나이 차이가 상당한 것 같다. 성경에는 아브람, 나홀, 하란의 순서로 이름이 적혔기(창11:26) 때문에 사람들이 아브람을 맏아들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데라가 205세에 죽었을 때 아브람은 75세였다(창11:32, 12:4). 그러므로 데라가 13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 하란, 나홀, 아브람 이것이 데라 아들들의 나이 순서이다. 하란의 딸 밀가가 나홀과 결혼했고, 그 아들이 브두엘이고 그 아들이 라반이고 딸이 리브가이다. 그러니 하란의 딸이 그 삼촌 나홀과 결혼할 정도였으면 하란의 나이는 나홀보다 상당히 많았다고 추측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데라가 70세에 하란을 낳았으니 아브람은 하란보다 60세가 어리다. 롯이 하란의 맏아들이라면 아브람과 나이가 비슷했을 수도 있다. 성장하면서 하란이 일찍 죽었기에 롯과 아브람은 아주 가까이 함께 자랐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으로 가는 아브람을 따라갔고 아브람은 조카 롯을 친동생처럼 대했을 것이다. 그들이 목초지 때문에 불가불 헤어져야 하게 되었을 때 롯은 삼촌에게 선택권을 먼저 행사하게 하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을 자기를 위하여 선택하여 갔다. 아브람이 먼저 선택했어도 가나안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흉년을 이유로 거기를 떠나 그는 대단히 위험한 경험을 했다. 다시 실수 하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굳게 섰을 것이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면서 현실적으로 손해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이행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아브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었다.
 
 
5월 4일(수) 바벨의 연합군
 
창세기 14:1~17을 읽어 보라. 약속의 땅을 선물로 받은 직후에 일어난 이 전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브람에 관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
[창14:1~17]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답: 이 역사적 사건은 땅의 주인, 곧 영토에 관한 전쟁이다. 그러나 땅은 창조주께서 누구에게 주시든지 그가 그 땅의 주인이 된다. 바벨론 연합군이 하나님의 종에게 준 땅을 자기것으로 착각하고 차지하려고 전쟁한 것이다.
 
이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전쟁이다(창 14:2).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의 네 왕이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가나안의 다섯 왕과 맞선 것은(창 14:8) 이것이 큰 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창 14:9). 이와 같은 군사 작전이 일어난 것은 가나안 민족들이 바벨론의 종주국들에게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이다(창 14: 4, 5). 비록 이 이야기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와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신 직후에 일어난 것은 이 사건에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이 있음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관련되었다는 것은 이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가 땅의 주권에 관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땅의 참된 주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당사자였던 아브람의 진영만이 이 전쟁에서 제외된 유일한 군대였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아브람이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있어 약속의 땅은 군대의 힘이나 정치적인 전략을 통해 얻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브람의 왕국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아브람이 이 전쟁에 개입한 유일한 이유는 전쟁 중에 사로 잡혀간 그의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함이었다(창 14:12, 13).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브라함은 도망병 한 사람에게서 전쟁 이야기와 그의 조카에게 닥친 재난에 대하여 들었다. 그는 롯의 배은망덕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품고 있지 않았다. 롯에 대한 그의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났으며 그는 조카를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권고를 구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35).
아브람은 연합군 전체를 상대하지 않는다. 야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됐을 특수 작전에서 그는 오직 롯이 잡혀 있던 진영만 공격했다. 그렇게 롯은 구출됐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 아브람은 위대한 용기와 굳센 의지를 보여 주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지역에서 아브람의 영향력은 증가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통해 그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묵상>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의 믿음에 관한 어떤 기별을 전하고 있습니까?
 
<부가설명>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에는 항상 땅이 보상으로 제시된다. 아담과 노아에게는 지구가,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는 가나안 땅이,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마5:5). 그런데 사탄은 시험의 광야에서 이 땅은 자기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땅의 주인이 자기라고 나타낸다(눅4:5,6). 가나안 땅에 아브람이 제대로 정착하는 단계에서, 즉 기근으로 애굽으로 나갔다고 돌아와서 가나안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는 단계에서 바벨론 연합군이 그 땅의 주권을 강화하려고 이탈한 봉신국을 치러 온 것이다. 여기서 아브람의 조카 롯이 포로가 된 사건은 아브람에게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 롯을 찾아왔다. 롯이 소돔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그렇게 포로 한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베드로는 롯을 ‘의인’(벧후2:7,8)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에 굳게 서서 바른 길을 걷지 않으면 그렇게 사탄에게 포로가 될 수 있다. 아브람이 그를 구원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롯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때도 롯은 자기의 선택과 거주지에 관하여 다시 생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소돔이 불로 소멸될 때까지 거기 살았다. 참 미련한 삶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아브람의 간구가 아니었으면 롯도 소돔에서 불탔을 것이다. 이 사건을 우리는 늘 마음에 새기면 이 위중한 때에 언제나 주님께 꼭 붙어서 생명을 잘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닥친 재난의 소식을 듣고 용감하게 나아가 그를 구해냈으며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5월 5일(목)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
 
창세기 14:18~24과 히브리서 7:1~10을 읽어 보라. 멜기세덱은 누구였는가? 아브람은 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렸는가?
[창14:18~24]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히7:1~10]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답: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아브람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천지의 주재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드린 것으로 곧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피조물의 주권자임을 선포하는 믿음의 행위였다.
 
신비로운 존재인 멜기세덱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가나안의 왕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은 후에, 아브람은 자신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침으로 이 제사장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멜기세덱은 전쟁이라는 혼란 후에 적합한 기별이었던 ‘평화’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살렘이라는 도시에서 왔다. 멜기세덱의 이름에 포함된 ‘정의’(tsedek)라는 단어는 소돔왕 베라(뜻: 악의 아들)와 고모라의 왕 비르사(뜻: 사악함)의(창 14:2) 이름과 대조되어 나타난다.
멜기세덱은 이들 가나안 왕들이 대표하는 폭력과 악이 제압된 후에 등장한다. 이 본문은 성경에서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소개되는 곳이기도 하다(창 14:18). 멜기세덱을 아브람이 섬기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창 14:18)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아브람이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동일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참조, 화잇 주석, 창 14:18~20).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제공했는데, 이것은 주로 발효되지 않은 신선한 포도즙의 사용을 나타내며(신 7:13, 대하 31:5), 이 행위는 십일조를 드리는 맥락에서 다시 나타난다(신 14:23).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했다(창 14:19).
아브람은 “천지의 주재”(창 14:19)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창 14:20)을 드렸다. 하나님을 향한 이 호칭은 “하늘과 땅”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 창조 이야기의 서론을 떠오르게 한다(창 1:1).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히 7:2~6, 비교, 창 28:22). 역설적으로, 십일조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묵상>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믿음에 대한 강력한 표시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키우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생활의 증명이다. 이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불신자와 같다.
 
<부가설명> 멜기세덱은 당시에 근방에는 알려진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살렘왕이었으니까 14장에 기록된 여러 왕들과 같은 살렘 지역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람도 아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가 시편에 110편에 등장하고 히브리서에 등장하여 예수님의 표상적 인물이라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학자들이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존재처럼 여겨지게 된 것 같다. 아브람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십일조를 드린 것을 보면 구면이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이해아닌가? 히브리서가 그를 아주 신비한 인물처럼 표현했기 때문이지만, 다른 왕들도 족보도 없고 아비도 어미도 없고 난 날과 죽은 날의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14장에 나오는 그돌라오멜과 벨라와 비르사 등의 왕들도 이런 사정은 똑같다. 그들은 악의 세력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표상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그런 말을 성경에 기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표상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기록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시작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바르게 표상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바울에게 그런 묘사를 허락하신 것일 뿐이다. 너무 신비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사실을 오해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제사장이고 아브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십일조 드리는 것으로 소돔 왕을 비롯한 다섯 왕들에게 드러낸 것이다.
 
<교훈>
아브람은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5월 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134~136, “가나안의 아브라함”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축복이 되어야 하며 그 교회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축복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단지 그들을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세상에 거룩한 깨달음의 유익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는 단지 그를 하나님의 특별한 친구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시고자 하는 귀하고 특별한 특권을 전달하는 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는 도덕적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서 빛이 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로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실 때마다,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소금으로 만드실 때, 그것은 단지 그들을 보존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 또한 보존하시기 위함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건물 안에서 살아 있는 돌로서 빛을 내고 있는가?…우리가 가진 종교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영향력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인 경건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은혜를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자아를 죽이고 예수님을 더 많이 품어야 한다”(엘렌 G. 화잇, Reflecting Christ, 20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내가...네게 복을 주고...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복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람이 섬겼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가?
※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별을 전하여 그들도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얻도록 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2. 자기의 누이이자 아내였던 사라에 관련하여 아브람이 했던 절반의 거짓말은 무엇이 문제였는가(사라는 실재로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다, 참조, 창 20:12)?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 것과 진실을 섞어 교묘하게 거짓을 말하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쁜가?
※ 진실을 섞어 거짓말하는 것이 더 나쁘다. 속이는 지혜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3. 소돔 왕이 준 것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기록된 창세기 14:21~23을 다시 읽어 보라. 아브람은 왜 그렇게 반응했으며,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 아브람은 그들이 아브람을 부자되게 했다는 소문을 미연에 차단했고 오직 사람이 살기에 필요한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드러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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