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찬양하는 삶 - (핵심 Q &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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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8-22 03:07 조회3,339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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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찬양(讚揚)하는 삶
(08월27일 (안) / 일몰: 19시09분)
<서언(緖言)>
행복(幸福)한 삶의 원천(源泉)은 찬양(讚揚)하는 삶을 살 때 이르러 오고, 행복(幸福)을 누리게 되며, 찬양(讚揚)은 우리의 믿음을 지탱(支撑)해주는 수단(手段)이 되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變化)시키고, 그리스도인의 강력(强力)한 무기(武器)가 됨으로 찬양(讚揚)하는 삶은 참으로 중요(重要)하다
(08월 21일 (日) <찬양(讚揚)을 위한 조건(條件)>
(Q)~(빌립보서 4:4~7) 바울이 감옥(監獄)속에서도 하나님의 평강(平康)을 간직하라고 권면(勸勉)할 수 있었던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眞理)에 기초(基礎)하고 있는 것처럼 감옥(監獄)에 갇혀있는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인간(人間)들에게 어떤 약속(約束)을 하셨고 또한 준행(遵行)하시는 하나님을 확신(確信)했기 때문에 환경(環境)으로 인한 불편(不便)함 따위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감옥(監獄) 그곳에도 무소부재(無所不在)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確信)는 믿음으로 찬양(讚揚)을 할 수 있었다.
(08월 22일 (月) <기도(祈禱)로 성벽(城壁)을 무너뜨림>
(Q)~(여호수아 5:13~6:20)의 여리고 성(城)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A)~○. 여호수아의 명령(命令)에 전적(全的)으로 순종(順從)하여, 이스라엘은 침묵(沈黙)을 지키면서 제7일에 성(城)을 여섯 번째 돌았다. 명령(命令)이 떨어지자 비로소 모든 백성들이 외쳤다. 이 명령(命令)에 대한 전폭적(全幅的)인 순종(順從)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證據)였다.(참조 히 11:30). 앞에서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順從)하는 모습(模襲)을 보았는데, 이 어구(語句)에서는 약속(約束) 이행(移行)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信實)하신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실로 여리고 성(城)의 멸망(滅亡)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의한 것인 동시(同時)에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의(依)하여 성벽(城壁)이 무너져 내린지라. 즉 여리고 성벽(城壁)은 일곱째 날 나팔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라”고 하셨다. 이는 크게 외치는 진동(振動)으로 무너진게 아니라 “외치라”고 하셨을 때 (시편 66:1~2)의 외침인 “찬양(讚揚)”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讚揚)하는 순종(順從)의 결과(結果)인 것이다.
(08월 23일 (火) <찬양(讚揚)하는 삶>
(Q)~(시편 145편)에서 다윗이 제시(提示)하는 하나님을 찬양(讚揚)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榮光)과 찬양(讚揚)을 돌려야 하는가?>
하나님의 광대(廣大)하심과 그의 위대(偉大)하신 업적(業績)과 그의 인자(仁慈)하심과 그의 위엄(威嚴)과 그의 긍휼(矜恤)과 그의 자비(慈悲)하신 배려(配慮)와 관대(寬待)하심과 그의 영광(榮光)을 두신 하늘 위에 있는 저 세상에서 찬란(燦爛)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성(永遠性) 등등 하나님의 영광(榮光)은 영광(榮光)을 정한 자비(慈悲)의 그릇에서 영원(永遠)히 찬란(燦爛)하게 빛나며 다른 어떤 것에서도 그렇게 빛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을 향하여 모든 성도(聖徒)들의 영원한 할렐루야가 찬송(讚頌)되어야 될 것이다.
(08월 24일 (水) <찬양(讚揚)을 통(通)해 구원(救援)함>
(Q)~(행 16:16~34)에서 감옥(監獄)에서도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의 모습은 간수(看守)에게 어떤 영향(影響)을 끼쳤을까요?
(A)~○.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讚頌)하는 이유(理由)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創造)하셨고 운행(運行)하시며 주의 백성의 원수(怨讐)를 격파(擊破)하시고 구원(救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백성(百姓)을 거룩한 땅으로 인도(引導)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을 질병(疾病)에서 보호(保護)하고 치료(治療)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讚揚)은 누군가를 구원(救援)하는 귀한 도구(道具)로 사용(使用)될 수 있으며 핍박(逼迫)과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중에는 물론(勿論)이고 어떠한 환경(環境)에 처(處)해있어도 하나님을 찬양(讚揚)할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 훈련(訓練)해야 할 것입니다.
(08월 25일 (木) <적(敵)을 물리치는 무기(武器)>
(Q)~(대하 20:1~23)에서 찬양(讚揚)을 통(通)해 적(敵)을 물리친 여호사밧의 경험(經驗)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 여호사밧이 마음을 정(定)하여 크게 결심(決心)하고 그 아내와 자녀(子女)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께 도움을 구(求)하기로 하였다. 기도(祈禱)하기 위해 모인 구성원(構成員)들을 살펴 볼 때 그들의 기도는 출전(出戰)을 앞두고 하는 일반적(一般的)인 그런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穩全)히 여호와께만 맡기고 온 백성들이 합심(合心)하여 힘쓰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特異)한 사실은 여호와께 기도할 때 성인(成人)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도 여호와 앞에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큰 무리”가 공격(攻擊)하기위해 접근(接近)해오는 것을 볼 때 여호사밧은 인간의 무력(無力)함과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깨달고 노래하는 자들로 찬양(讚揚)하며 진군(進軍)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으로 전적(全的)으로 매달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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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9과 찬양(讚揚)하는 삶
<서언(緖言)>
행복(幸福)한 삶의 원천(源泉)은 찬양(讚揚)하는 삶을 살 때 이르러 오고, 행복(幸福)을 누리게 되며, 찬양(讚揚)은 우리의 믿음을 지탱(支撑)해주는 수단(手段)이 되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變化)시키고, 그리스도인의 강력(强力)한 무기(武器)가 됨으로 찬양(讚揚)하는 삶은 참으로 중요(重要)하다
(08월 21일 (日) <찬양(讚揚)을 위한 조건(條件)>
(Q)~(빌립보서 4:4~7) 바울이 감옥(監獄)속에서도 하나님의 평강(平康)을 간직하라고 권면(勸勉)할 수 있었던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眞理)에 기초(基礎)하고 있는 것처럼 감옥(監獄)에 갇혀있는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께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인간(人間)들에게 어떤 약속(約束)을 하셨고 또한 준행(遵行)하시는 하나님을 확신(確信)했기 때문에 환경(環境)으로 인한 불편(不便)함 따위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감옥(監獄) 그곳에도 무소부재(無所不在)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確信)는 믿음으로 찬양(讚揚)을 할 수 있었다.
○.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16:25-26)
땅이 진동했다. 그 진동은 바울과 실라가 부른 음향에 물리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
재하심으로 일어난 지진이다. 옥문이 열렸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모두 벗겨지는 엄청난 일이 있어났다. 갇혀 있던 죄인들과 간수와 그 가족에게 구원의 기적이 일어났다.
○. 그리스도교회 성도들의 찬송 속에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의 찬송 속에도 계신다. 그리스도들의 삶에는 항상 찬송이 있다. 두 세 사람이 모여도 하나님께 찬송이 있으며 그 찬송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아니 그들의 소곤소곤 나누는 대화 중에도 하나님께서 계셔서 귀를 기우리신다.(말 3:16) 찬송은 인생의 고달픈 나그네 길을 행복과 기쁨이 가득 찬 천국으로 변하게 해 준다.(3T 32-33) 하나님께서는 이 어둡고 고달픈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찬미의 축복 속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신다. 찬송은 우리를 하나님의 감싸 안아주시는 은혜의 품속에 머물게 하는 힘이 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할 때에 영혼은 하나님께 고정된다. 세상 모든 짐이 사라지며 지상은 천국으로 변한다.
○. 찬송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그 곳이 하늘 궁전이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 우에 있”(창 1:2)던지 상관없이 그 곳에 있었다.(욥 38:7)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시던 그 밤에도 어김없이 유대 땅 베들레헴 언덕 위에서는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다.(눅 2:13) 그리고 인자가 되신 하나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시는 모든 시간, 그의 먼지 묻은 발이 닿는 곳 어디든지 찬송이 있었다.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해변 가, 나사렛마을 그 곳에도 찬송이 있었으며(Ev 498p.) 그가 엎드린 새벽 시간에도 찬송의 기도가 있었다.(Ev 498) 십자가의 죽음을 하루 앞둔 목요일 밤 다락방의 만찬이 끝나는 시간에도 찬송이 있었으며(마 26:30) 십자가 이후 부활의 새벽에도 천사들이 부르는 힘찬 승리의 찬송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찬송은 영원한 세월동안 계속될 것이다.(계4:,5:,7:)
○.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은 현재 능동태(能動態) 명령법(命令法)으로 어떠한 상황(狀況)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것을 강조(强調)한다. (Robe-ertson).
바울은 실제로 본 서신을 쓸 당시에 로마 감옥에 투옥(投獄)되어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빌1:14,17,20-23).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도 자신이 먼저 기뻐하는 생활을 나타냈다(2:17).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Calvin). 한편 ‘주 안에서’(엔 퀴리오)는 바울의 기쁨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야말로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충만한 근거가 되신다(Cal-vin). 오직. 사도는 이제 왜 그리스도인이 이생의 문제로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보여 준다. 기도를 통해서 바울은 그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과 의논할 수 있다.
(08월 22일 (月) <기도(祈禱)로 성벽(城壁)을 무너뜨림>
(Q)~(여호수아 5:13~6:20)의 여리고 성(城)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A)~○. 여호수아의 명령(命令)에 전적(全的)으로 순종(順從)하여, 이스라엘은 침묵(沈黙)을 지키면서 제7일에 성(城)을 여섯 번째 돌았다. 명령(命令)이 떨어지자 비로소 모든 백성들이 외쳤다. 이 명령(命令)에 대한 전폭적(全幅的)인 순종(順從)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證據)였다.(참조 히 11:30). 앞에서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順從)하는 모습(模襲)을 보았는데, 이 어구(語句)에서는 약속(約束) 이행(移行)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信實)하신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실로 여리고 성(城)의 멸망(滅亡)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의한 것인 동시(同時)에 하나님의 능력(能力)에 의(依)하여 성벽(城壁)이 무너져 내린지라. 즉 여리고 성벽(城壁)은 일곱째 날 나팔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라”고 하셨다. 이는 크게 외치는 진동(振動)으로 무너진게 아니라 “외치라”고 하셨을 때 (시편 66:1~2)의 외침인 “찬양(讚揚)”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讚揚)하는 순종(順從)의 결과(結果)인 것이다.
○. <(수6:20) 순종(順從)이 장벽(障壁)을 무너뜨릴 것임>
지금껏 축적(蓄積)되어 온 편견(偏見)의 강(强)한 장벽(障壁)들은 이스라엘 군대(軍隊) 앞의 여리고 성벽(城壁)같이 틀림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우리 구원(救援)의 주를 계속적(繼續的)으로 믿고 의지(依支)해야 한다. 그분의 명령(命令)들을 순종(順從)해야 한다. 여리고 성벽(城壁)은 명령(命令)을 순종(順從)한 결과(結果)로서 무너진 것이다. (리뷰 1887. 7. 12).” (수 6:1~20, 화잇주석)
○. <인내(忍耐)와 복종(服從) (여호수아 6:6-16)>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城)을 돈 행렬(行列)과 여호수아가 이 일에 관해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바를 전달(傳達)한 명령(命令)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命令)을 엄격(嚴格)하게 지킨데 관한 이야기를 보게 된다. 우리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여호수아에게 아주 잘 순종(順從)했음을 발견(發見)하게 된다.
○. <인간의 이론(理論)은 믿음의 단순성(單純性)을 잃게 함>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신비(神秘)가 있고, 그 섭리(攝理) 가운데도 신비(神秘)가 있으며,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에도 사람이 측량(測量)할 수 없는 신비(神秘)들이 있다. 그러나 호기심(好奇心)을 만족(滿足)시키고자 하는 욕망(慾望)과 무한(無限)의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고자 하는 강(强)한 욕망(慾望)을 가진 유한(有限)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된 뜻이 가리키시는 분명(分明)한 길을 따르기를 등한(等閒)히 하고 창세(創世) 이후(以後)로 숨겨진 비밀(秘密)을 엿보려고 한다. 인간은 이론(理論)을 내세우고, 참 믿음이 갖는 단순성(單純性)을 잃고 자부심(自負心)이 너무 강(强)해져서 주께서 선포(宣布)하신 것을 믿지 못하며 자신의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스스로를 에워싸고 만다. (수 6:1~20, 화잇주석)
○. 이 행진(行進)의 엄숙(嚴肅)한 침묵(沈黙)은 하나님이 성(城)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위대(偉大)한 교훈(敎訓)을 각인(刻印)할 수 있도록 명상(冥想)과 회상(回想)을 위한 적절(適切)한 기회(機會)를 제공(提供)했다. 이 같은 교훈(敎訓)들은 쉽게 배울 수 없으며, 종종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의 요구(要求)를 즉시 들어준다면, 우리는 믿음을 활용(活用)하거나 계발(啓發)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지체(遲滯)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依存性)을 인식(認識)시키고 그분을 신뢰(信賴)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그 같은 결과는 기다리는 기간을 조용한 명상(冥想)으로 보내며 하나님의 계획(計劃)에 전적(全的)으로 굴복(屈伏)하는 경험(經驗)을 통해서만 이르러 온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축복(祝福)들을, 여호와 앞에서 침묵(沈黙)하지 못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도록 기다리지 못해 잃어버리는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 그들은 매일(每日) 한 번씩 성(城)을 돌았다. 엄숙(嚴肅)하고 소리 없는 행진(行進)은 파멸(破滅)이 운명(運命)지어진 도성(都城)의 성벽(城壁)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간담(肝膽)을 서늘케 했다. 홍해(紅海)를 갈라 길을 냈던 일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요단을 건넌 일까지,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기적(奇蹟)을 행했는지를 상기(想起)하고는 이 이상(異常)한 행진(行進)의 비밀(秘密)을 탐지(探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주는 교훈(敎訓)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성벽(城壁)을 무너뜨리기까지 이 엄숙(嚴肅)한 의식(儀式)을 7일 이상(以上) 계속해야 한다고 명령(命令)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신장(伸張)시킬 시간을 주고자 했다(부조와 선지자, 493).
○. “믿음으로…성(城)이 무너졌”다(히 11:30). 백성들은 이 전쟁(戰爭)이 자신들이 아닌 여호와의 전쟁(戰爭)임을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들이 그분과 협력(協力)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그들을 위해 위대(偉大)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계획을 단순(單純)하게 용납(容納)하고 그분의 경륜(經綸)에 전적(全的)으로 협력(協力)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거(過去)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를 위해 위대(偉大)한 일들을 성취(成就)시킬 믿음이다.
○. <40년이 지체(遲滯)된 점령(占領)>
주께서는 그 운명(運命)의 도성주위(都城周圍)에 하나님의 군대(軍隊)를 주둔(駐屯)시키셨다가 포위(包圍)하셨다. 어떤 인간의 손도 그것을 치려고 들려지지 않았고 천군(天軍)들이 그 성벽(城壁)을 허물어서 하나님의 이름에만 영광(榮光)이 돌려지게 하였다. 여리고 성(城)은 그 강력(强力)한 성채(城砦)가 믿음 없는 정탐(偵探)꾼들에게 공포심(恐怖心)을 일으켰던 그 교만(驕慢)한 도성(都城)이었다. 여리고 성(城)이 점령(占領)될 때 하나님은 선포(宣布)하시기를 “만약 우리들의 부모들이 단순히 나를 믿기만 하였더라면 그들이 40년 전에 벌써 그 도성(都城)을 점령(占領)하였을 것이라”고 하셨다(리뷰1887. 3. 15).
(08월 23일 (火) <찬양(讚揚)하는 삶>
(Q)~(시편 145편)에서 다윗이 제시(提示)하는 하나님을 찬양(讚揚)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榮光)과 찬양(讚揚)을 돌려야 하는가?>
하나님의 광대(廣大)하심과 그의 위대(偉大)하신 업적(業績)과 그의 인자(仁慈)하심과 그의 위엄(威嚴)과 그의 긍휼(矜恤)과 그의 자비(慈悲)하신 배려(配慮)와 관대(寬待)하심과 그의 영광(榮光)을 두신 하늘 위에 있는 저 세상에서 찬란(燦爛)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성(永遠性) 등등 하나님의 영광(榮光)은 영광(榮光)을 정한 자비(慈悲)의 그릇에서 영원(永遠)히 찬란(燦爛)하게 빛나며 다른 어떤 것에서도 그렇게 빛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을 향하여 모든 성도(聖徒)들의 영원한 할렐루야가 찬송(讚頌)되어야 될 것이다.
○. <감사(感謝)의 고백(告白)(시편 145:1-9)>
이 시편에 "다윗의 찬송시(讚頌詩)"라고 표제(表題)를 붙인 것은 다윗이 이 시편(詩篇)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거기에서 특별한 기쁨을 취(取)했고 자주 이 시편을 노래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그의 친구(親舊)였다. 이 시편의 전반부(前半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로운 속성(屬性)이 찬양(讚揚)되고 후반부(後半部)에서는 그의 나라와 통치가 찬송되고 있다.
○. 다윗의 찬양(讚揚)은 간헐적(間歇的)이지 않았으며 날마다 찬양하였다.
그는 이레 중 하루가 아니라 매일 찬양하였고, 잠시 동안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찬양은 매일의 일이 되어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은 무수(無數)한 축복을 그의 자녀들에게 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每日) 그를 찬양해야 할 이유(理由)가 충분(充分)하다.
○. 모든 세기(世紀)의 모든 위대(偉大)한 지성(知性)도 측량(測量)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영광(榮光)과 능력(能力)의 부요(富饒)함의 깊이를 통찰(洞察)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威嚴)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의 선(善)하심과 자비(慈悲)는 광범위(廣範圍)하고 풍성하다.
○.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인의 노래의 주제(主題)가 되어야 한다.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적절한 방법이다. 우리의 마음과 음성(音聲)은 때때로 거룩한 찬미로 하늘의 왕께로 고양(高揚)되어야 한다. 음악의 가장 고상(高尙)하고 가장 아름다운 선율(旋律)들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해 준다.
☞ 구약시대(舊約時代) : 이스라엘의 찬송(讚頌)중에 거(居)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찬송(讚頌)중에 거(居)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 이다.”(시 22:3)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성전 헌당예배(獻堂禮拜)의 많은 순서(順序) 중, 찬송이 고조(高調)되는 순간에 임(臨)하셨다.
여호와의 전(殿)에 구름이 가득한지라.”(대하 5:1-13)
황송하게도 인간이 만들어 내는 찬송 중에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이다. 하늘 찬양대(讚揚隊)의 완전한 찬송 속에 거(居)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한(制限)된 음성(音聲)과 보잘 것 없는 악기(樂器)로 연주(演奏)하는 찬송 중에 임(臨)하신 것이다. 레위지파의 족장(族長)들로 구성(構成)된 찬양대(讚揚隊)와 각종 악기(樂器)로 편성(編成)된 대(大)관현악(管絃樂)의 찬송이 최고에 달했을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히 나타났다.
시내산의 나팔소리 가운데(출 19:13,16,19) 미디안과의 전쟁의 나팔소리에도,(민 31:6) 여리고성을 함락(陷落)하는 나팔소리(수 6:)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셨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廣野生活) 모든 시간에 계셨는데(MYP 291),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舊約)의 이스라엘의 역사(歷史)가운데 그들이 부르는 찬송 중에 함께 하셨다. 기드온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중에(삿 7:20) 선지자(先知者) 학교 생도(生徒)들의 거문고 찬송 중에도 하나님께서 계셨다.(삼상 10:5) 여호사밧 군대(軍隊)의 진군(進軍) 나팔소리에도(대하 20:22-23) 하나님께서 계셨다.
☞ 신약시대(新約時代) : 성도(聖徒)들의 찬송(讚頌)중(中)에 계시는 하나님
새로운 시대, 복음(福音)의 활기(活氣)가 온 세계로 밀물처럼 휩쓰는 그 시대(時代)에 성도(聖徒)들이 모이는 곳마다 찬송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다.
“시(詩)와 찬미(讚美)와 신령(神靈)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和答)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凡事)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恒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9) 교회(敎會)의 모든 집회(集會)마다 거기에는 영생(永生)의 기쁨이 있었다. 그 기쁨은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되돌아갔다. 억제(抑制)할 수 없는 감동(感動)이 일어나면 절규(絶叫)한다. 절규(絶叫)는 노래로 승화(昇華)된다. 그 노래 속에 하나님께서 계셨다.(엡 5:19. 골 3:16.) 찬송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를 하나님께서 계셨다.
(08월 24일 (水) <찬양(讚揚)을 통(通)해 구원(救援)함>
(Q)~(행 16:16~34)에서 감옥(監獄)에서도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의 모습은 간수(看守)에게 어떤 영향(影響)을 끼쳤을까요?
(A)~○.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讚頌)하는 이유(理由)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創造)하셨고 운행(運行)하시며 주의 백성의 원수(怨讐)를 격파(擊破)하시고 구원(救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백성(百姓)을 거룩한 땅으로 인도(引導)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을 질병(疾病)에서 보호(保護)하고 치료(治療)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讚揚)은 누군가를 구원(救援)하는 귀한 도구(道具)로 사용(使用)될 수 있으며 핍박(逼迫)과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중에는 물론(勿論)이고 어떠한 환경(環境)에 처(處)해있어도 하나님을 찬양(讚揚)할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 훈련(訓練)해야 할 것입니다.
○. <(행16:25) 밤중쯤 되어 … 찬미(讚美)하매.>
고난(苦難) 중에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극적(極的)으로 묘사(描寫)되고 있다(롬5:3, 약1:2, 벧전5:6,7). 이 내용은 기적적(奇蹟的)인 구출(救出)을 바라는 간구(懇求)보다는 고난(苦難)에 대한 신앙(信仰)의 승리(勝利)를 보여주는 전형(全形)으로서 기록된 것이다(Neil). 그러나 결과적(結果的)으로 이적적(異蹟的)인 방법으로 풀려나게 됨으로써, 간수(看守)들은 바울 일행(一行)의 찬송과 기도(祈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이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悔改)하기에 이른 것이다.
1. 그들은 놀라울 정도(程度)로 열심(熱心)을 내었다.
그들은 불쌍한 죄수(罪囚)들의 모습과는 달리 아주 유쾌(愉快)한 모습이었고 그들이 받은 심한 학대(虐待)를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들의 정황(情況)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로마인들 중 집정관(執政官)들은 그들을 매질하였으며 이제는 단두대(斷頭臺)에다 그들을 참수(斬首)하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채찍자리가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등은 쟁기질을 하여 길다란 도랑을 만들어 놓은 형국(形局)이었다. "그들에게 가(加)해진 매는 매우 쓰라린 것이었다. 그러기에 누구나가 그들이 그들의 어깨와 등에 난 상처(傷處)에 대해 불평(不平)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豫想)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매질이 전부(全部)가 아니었다. 다음에 그들은 참수형(斬首刑)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할 입장에 있었다. 그들의 주님도 처음에 채찍을 당하고 다음에 십자가(十字架)에 처형(處刑)되었던 것이다. 그들도 그와 같은 결과를 예상(豫想)하고 있어야 했다. 지금 그들은 깊은 감옥(監獄)에서 착고(着錮)를 차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 착고(着錮)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상처(傷處)를 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可能)한 한 조금이라도 휴식(休息)을 취(取)하려고 시도(試圖)해 볼 수 있는 "한밤중에"도 그들은 "기도(祈禱)하고 하나님을 찬미(讚美)하였다."
(1) 그들은 함께 기도(祈禱)하였다.
그들은 고통(苦痛)을 당하고 있는 그들을 위로(慰勞)하고 떠받쳐 주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요셉이 감옥(監獄)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행하셨듯이 그들을 찾아와 그들과 함께 있어 주기를 기원(祈願)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고난(苦難)이 풍성(豊盛)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위로(慰勞)도 풍성해지기를 기원했다. 또한 그들의 갇힘과 매 맞음이 복음(福音)의 진보(進步)를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을 박해(迫害)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容恕)하시고 회개(悔改)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당시(當時)는 정(定)한 기도(祈禱)의 시간이 아니라 "한밤중"이었다. 또한 그곳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지하(地下) 감옥(監獄)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열납(悅納)되었다. 어둠 속에서는 물론 깊은 절망(絶望)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들의 심정(心情)이 하나님에게까지 드리워진다면 기도하기에 나쁜 장소(場所)나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고통(苦痛)을 함께 받고 있는 자들은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고난(苦難)이 있는가? 기도(祈禱)하도록 하라"고 기록(記錄)되었다. 아무리 극심(極甚)한 고난이라도 우리에게서 기도할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讚美)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讚揚)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찬양할 마음만 있으면 찬양(讚揚)할 조건(條件)은 얼마든지 있다. 지하 감옥(監獄)과 두 발에 채어진 착고(着錮)가 그들이 찬양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는데 그 어떤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심정(心情)에서 찬양의 의무(義務)를 제거(除去)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값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을 찬양했다.
○.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고난(苦難)을 놀라울 정도(程度)로 참고 이겨낼 수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한 그들은 성령(聖靈)의 위로(慰勞)를 그들의 영혼(靈魂)에 그렇게 달콤하고 강(强)하게 느낄 수 있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讚揚)했을 뿐 아니라 노래로 그를 찬양(讚揚)했다." 그들은 시편(詩篇)이나 찬미가(讚美歌) 혹은 영가(靈歌)로 찬양(讚揚)했으며 다윗의 시(詩)나 혹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즉흥적(卽興的)으로 찬양했다. 성경(聖經)의 고난(苦難)당하는 자가 있으면 기도(祈禱)하라는 말씀에 따라 그들은 고난에 처(處)해 있기에 기도했다. 또한 성경에 즐거운 일이 있으면 시편을 노래하라는 말씀에 따라(약 5:13)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즐거웠으므로 그들의 경건(敬虔)한 기쁨을 찬미하였다.
○. 이 사실은 시편(詩篇)에 대한 노래가 복음(福音)의 규례(規例)임을 입증(立證)해 준다. 따라서 찬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行)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찬양은 그들의 승리(勝利)의 날에 기쁨을 표현(表現)하기 위해서만 부를 것이 아니라 고난(苦難)의 날에 그들의 슬픔을 위무(慰撫)하고 평정(平靜)하기 위해서 제정(制定)된 것임을 입증(立證)해 준다. 그들이 시편을 찬송한 것은 한밤중이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시편 찬미자의 본을 따른 것이다(시 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規例)를 인(因)하여 밤중에 일어나주께 감사(感謝)하리이다."
(3) 여기서 우리는 주위(周圍)에 있던 "죄수(罪囚)들이 그것을 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죄수(罪囚)들은 그들이 기도(祈禱)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찬송(讚頌)하는 소리는 들었다."
①. 이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찬송하였느냐 하는 사실을 암시(暗示)해 준다. 비록 그들은 지하(地下) 감옥(監獄)에 갇혀 있었지만 모든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차게 불렀다. 사실 그렇게 힘차게 불렀기 때문에 그들은 죄수(罪囚)들을 깨우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밤중이었으므로 그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상상(想像)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심정(心情)을 다해 찬송해야 한다.
②. 비록 사도(使徒)들은 다른 죄수(罪囚)들이 그들의 노래를 들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크게 찬양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과 또 그를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③. 죄수(罪囚)들은 바울과 실라가 옥중(獄中)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인(因)하여 "감옥문(監獄門)이 열리게 되는" 기적적(奇蹟的)인 은총(恩寵)을 볼 수 있는 태세(態勢)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받은 이 특별한 위로(慰勞)에 의하여 그들이 전(傳)한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위로자(慰勞者)"이심이 알려지게 되었다. (행 16:21~34, 매튜헨리)
(08월 25일 (木) <적(敵)을 물리치는 무기(武器)>
(Q)~(대하 20:1~23)에서 찬양(讚揚)을 통(通)해 적(敵)을 물리친 여호사밧의 경험(經驗)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 여호사밧이 마음을 정(定)하여 크게 결심(決心)하고 그 아내와 자녀(子女)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께 도움을 구(求)하기로 하였다. 기도(祈禱)하기 위해 모인 구성원(構成員)들을 살펴 볼 때 그들의 기도는 출전(出戰)을 앞두고 하는 일반적(一般的)인 그런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穩全)히 여호와께만 맡기고 온 백성들이 합심(合心)하여 힘쓰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特異)한 사실은 여호와께 기도할 때 성인(成人)만 모인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도 여호와 앞에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큰 무리”가 공격(攻擊)하기위해 접근(接近)해오는 것을 볼 때 여호사밧은 인간의 무력(無力)함과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깨달고 노래하는 자들로 찬양(讚揚)하며 진군(進軍)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으로 전적(全的)으로 매달리었다.
○. 그래서 당시(當時)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에 대해 온 백성이 신앙적(信仰的)으로 대처(對處)했었음을 본서(本書) 저자(著者)는 나타내려 했던 듯하다. (대하 20:3~12, 만나주석)
○. <여호와께로 낯을 향(向)하여.>
여호사밧은 여러 해 동안 군대(軍隊)를 준비(準備)하고 성읍(城邑)들을 강화(强化)함으로써 국력(國力)을 증진(增進)해 왔다(17:12~19). 그러나 이 위기(危機)에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다.
○. 여호사밧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직 “주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구(求)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완전(完全)히 무력(無力)하고 우리 원수(怨讐)의 수중(手中)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도움을 위해 어디로 향(向)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주(主)만 바라봅니다.”(참조 시 25:15; 123:2; 141:8). (대하 20:3~12, 재림교주석)
○. “유다왕 여호사밧은 비탄(悲嘆)에 빠졌다. 원수(怨讐)의 군대(軍隊)가 접근(接近)해오고 있었고 전망(展望)은 절망적(絶望的)으로 보였다. "여호사밧이……. 여호와께로 낯을 향(向)하여 간구(懇求)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禁食)하라 공포(公布)하매"(대하 20:3).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구원(救援)을 간청(懇請)하기 위해 성전(聖殿)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교리, 205)
○. “여호사밧은 기도회(祈禱會)를 인도(引導)하면서 하나님께 상황(狀況)을 일변(一變)시켜 달라고 탄원(歎願)했다. 그는 "주(主)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나이까. 이방(異邦)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權勢)와 능력(能力)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20:6)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과거(過去)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특별히 보호(保護)해 주지 않으셨던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택(選擇)된 백성에게 이 땅을 주지 않으셨던가? 그 와같이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탄원(歎願)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懲罰)하지 아니 하시니이까... 우리가 대적(對敵)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교리, 205)
○.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向)하여 간구(懇求)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禁食)하라 공포(公布)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求)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城邑)에서 모여 와서 여호와께 간구(懇求)하”였다. 여호사밧은 성전(聖殿) 뜰 안에 모인 백성들 앞에 서서 기도로 그의 마음을 토로하고 이스라엘의 무력(無力)함을 자복(自服)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主張)하였다. …”(투쟁, 217)
○. “여호사밧은 확신(確信)을 가지고 “오직 주(主)만 바라보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민(選民)들을 철저(徹底)한 파멸(破滅)에서 구원(救援)하기 위하여 과거(過去)에 매우 자주 개입(介入)하셨던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도록 가르쳤었다. 이제 나라가 위기(危機)를 당한 때에 여호사밧은 홀로 서지 아니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대하 20:13)었다. 그들은 연합(聯合)하여 금식(禁食)하고 기도(祈禱)하였다. 그들은 연합(聯合)하여 주께서 그들의 원수(怨讐)들을 혼란(混亂)시키심으로 여호와의 성호(聖號)가 영화롭게 되기를 탄원(歎願)하였다. …”(투쟁, 217)
○. “여호사밧이 인솔(引率)하던 이스라엘의 군대(軍隊)는 찬양의 노래와 함께 전진(前進)하여 큰 구원(救援)을 받았다. 여호사밧은 이미 전투(戰鬪)의 위협(威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대하 20:2),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대하 20:1) 온다는 것이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向)하여 간구(懇求)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公布)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求)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懇求)하더라”(대하 20:3, 4). 그리고 여호사밧은 성전(聖殿) 뜰 백성들 앞에 서서 심혼(心魂)을 쏟으며 기도(祈禱)하고, 이스라엘의 무력(無力)함을 고백(告白)하고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탄원(歎願)하였다. 그는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對敵)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라고 말하였다.”(교육, 1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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