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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모든 민족과 바벨(질문, 대답, 설명) 4/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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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4-23 05:09 조회5,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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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모든 민족과 바벨

(4월 3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1분)

 

연구 범위: 창 9:18~11:9, 눅 10:1, 마 1:1~17, 눅 1:26~33, 시 139:7~12, 창 1:28, 창 9:1

 

기억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9). 

 

 홍수 이후, 성경은 그 초점을 노아라는 한 사람에게서 그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에게로 옮긴다. 그 중에서도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창 10:6, 15)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는(창 12:5) 개념을 소개하면서 모든 민족에게 축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의 등장을 기대하게 한다(창 12:3).

 그러나 그 계보는 바벨탑으로 인해 끊어졌다(창 11:1~9). 다시 한 번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축복이 돼야 했을 모든 민족의 탄생은 또 다른 저주의 원인이 되었다. 여러 민족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연합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심판으로 응답하셨다. 그 결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고(창 11:8), 마침내 “땅에 충만하라”라는(창 9:1) 하나님의 본래의 명령이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 결국,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결정을 하신다. 아버지의 장막에서 함에게 선고된 저주와(창 9:21, 22), 바벨탑에서의 혼돈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내려진 저주는(창 11:9), 결국 그들을 위한 축복으로 결론 맺게 될 것이었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자 하는 사람의 계획은 결국 다 무너지게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 

- 행하기

모든 계획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된 행복임을 경험한다.

 

TMI 위로

2. 창세기 9:18~27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의 사람도 실수하지만 그런 일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실상과 그분의 사랑을 배운다.

3.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족보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성경의 역사성과 인류의 연결성과 연약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4. 바벨탑을 짓고자 했던 사람들의 참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창 11:1~4)

※ 자기 이름을 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두려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으로 내려오시기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11:5~7)

※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6. 악한 계획을 가지고 연합한 자들을 흩으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창 11:8, 9)

※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결론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악한 목적을 가지고 서로 연합했습니다. 하지만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흩으심으로 악한 계획을 멈추게 하고 다시 한 번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4월 24일(일) 함에게 내려진 저주

 

 창세기 9:18~27을 읽어 보라. 이 이상한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창9:18~27]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답: 아담 안에서 육체가 된 사람들은 육체의 행위를 벗어날 수 없는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기별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포도원에서의 노아의 행동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두 이야기 속에는 과일을 먹는 것, 벌거벗게 되는 것, 가리는 것, 저주, 그리고 축복과 같은 공통된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노아는 자신의 조상 아담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역사를 이어갔다.

 과일이 발효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 아니었다. 노아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고 그 결과 자제력을 상실하여 벌거벗게 되었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라는 사실은 금지된 나무를 ‘바라본’ 하와를 떠올리게 한다(창 3:6). 이와 같은 유사성은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단순히 실수로 슬쩍 쳐다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 그는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대신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고 다녔다. 반면, 함과 달리 즉시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한 그의 형제들의 반응은 함의 행동을 분명히 책망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된다.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출 20:12, 비교, 엡 6:2). 바로 그로 인해,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 본문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향한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예언은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국한된 것이다. 성경의 기자는 가나안 민족의 타락한 관습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창 19:5~7, 31~35).

 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에게 내려진 저주는 축복의 약속 또한 포함한다. 셈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셈의 장막에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실(창 9:27) 메시아를 위해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세상을 향한 이스라엘의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모든 민족에게 확장될 것이라는 예언적 암시이다(단 9:27, 사 66:18~20, 롬 11:25). 함에게 내려진 저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함과 가나안의 후손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묵상>

 홍수 사건의 ‘영웅’이었던 노아가 술에 취했다는 사실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답: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부가설명> 아담 부부는 노아의 상태와 같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순결했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생령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창세기 6장 3절 말씀대로 육체가 된 상태였다. 그의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 아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생명만 가진 자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당대의 의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다.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방주를 만들고 홍수를 견디어서 땅에 내려왔을 때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다. 그가 농사했고 포도를 재바하고 그 열매를 먹었는데, 아마도 포도즙을 짜서 보관했다가 어느날 그것을 마셨는데 발효한 상태를 그대로 마신 것이었다. 발효한 것은 죄가 만들어 놓은 변질의 상태이다. 변질된 음식을 먹어서 그는 변질된 행동을 했다. 결과 함의 본지적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셈과 야벳의 실체도 드러났다. 아벨과 가인의 소속이(요일3:12) 달랐던 것처럼 함과 셈, 야벳의 소속이 달랐다.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했던 것처럼 함과 그 맏아들 가나안도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었다. 즉 저주의 무리에 속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노아는 함을 저주한 것이 아니고 함의 아들 가나안의 이름을 불러 저주했다. 이 저주 예언은 저주대로 되라는 것이 아니고 함의 유전자가 가나안에게 이미 나타난 사실을 지적한 사랑의 견책이었다. 그대로 발전하면 다 종의 종이 될 것이고 깨달아 회개하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것이다. 노아는 이런 기대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하였다. 셈의 후손에게서 모든 민족이 거할 구원의 장막이 일어날 것이고 야벳이 셈의 이 장막에 거하여 장막터가 넓어질 것이다. 함과 가나안이 회개하고 돌아와 이 장막에 거하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예언이다. 여기 장막은 ‘오헬’인데 성막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성소를 통하여 구원의 도리가 전해질 것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훈>

 함에게 내려진 저주 속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약속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4월 25일(월) 창세기의 족보

 

 노아의 나이에 관한 연대기적 정보를 살펴보면 노아가 홍수 전 시대와 홍수 후 시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앞선 이야기의 마지막 두 절을 살펴보면(창 9:28, 29) 노아의 연대가 아담의 족보의 마지막 부분과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창 5:32). 아담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56세일 때 죽었으므로 노아는 분명히 아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노아는 그 이야기를 홍수 전과 후에 살았던 그의 후손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창세기 10장을 읽어 보라. 이 족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참조, 눅 3:23~28)

 

답: 아래 설명을 읽어보라. 세 가지 진실을 말했다. 그것이 목적이라고 보면 된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수명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분명히 존재했던 실제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둘째, 그것은 고대에서부터 저자가 살던 시대까지의 연속성을 보여줌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연결을 확고히 한다. 셋째,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로 인한 저주의 비극적인 효과, 그리고 그 저주가 뒤이어 등장한 세대들에게 끼친 치명적인 결과를 기억하게 한다. 

 ‘함 족속’과 ‘셈 족속’과 ‘야벳 족속’의 구분이 명확한 기준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주의해 보라.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된 칠십 민족은 야곱의 가족 칠십 명(창 46:27)과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의 칠십 인의 장로들을(출 24:9) 예시한다. 칠십 민족과 칠십 장로의 관련성은 민족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사역을 암시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하기 위해 칠십 명의 제자들을 보내신다(눅 10:1).

 이와 같은 정보는 아담과 부조들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아담 이후로 이어진 진짜 사람들이었다. 이는 또한, 부조들이 고대의 사건들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있던 증인들과 직접 교류했음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묵상>

마태복음 1:1~17을 읽어 보십시오. 이 족보가 그 속에 등장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 사람들이 실존했던 사람들임을 알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마태 1:1~17은 예수님의 족보다. 족보는 기록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실지로 살았던 사람인 것을 증명하고 마태의 이 족보는 예수님이 그런 족보를 따사 세상에 오신 실지로 살아서 일하신 분이라는 긋어르 증명한다.

 

<부가설명> 세상의 다른 종교들의 경전에는 족보가 기록되지 않았다. 혹시 기록되어도 지극히 단편적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장황하게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4장에는 가인 후손들의 족보, 5장은 아담 셋 후손들의 족보 11장은 노아 셈 후손들의 족보, 10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들 후손의 족보이다. 교과 저자는 이곳에 70민족이 기록되었다고 세었고 그것은 신명기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들어간 70인을 뜻한다고 설명했는데 신명기의 이 구절을 이해하는 합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대상에는 1장에서 9장까지가 족보다. 또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마태복음으 1절~17절까지가 족보다. 이렇게 한 것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든 것을 분명히 알게 하고(행17:26) 인류가 어떻게 존재했고 그 존재를 위한 생명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분명히 가르친다. 그렇게 족보를 기록한 것은 사람들이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족보를 바르게 깨달으면 하나님이 바로 내 옆에 계신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했다(행17:26~28). 족보는 생명과 존재를 가르치는 성경의 복음에 아주 중요한 진리를 전한다. 

 

<교훈>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의 역사성과 현재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며 인간의 연약함과 죄가 가져온 비극적인 결말을 깨닫게 해 준다.

 

 

4월 26일(화) 하나의 언어

 

창세기 11:1~4을 읽어보라. “온 땅”의 사람들이 연합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창11:1~4]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답: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결집이다. 

 

 “온 땅”이라는 표현은 홍수 후에 살아 남았던 적은 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이 함께 모인 것에 관해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들은 하늘에 닿는 탑을 건설하고자 했다(창 11:4). 그들의 의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되”(창 11:3, 4, 비교 창 1:6, 9, 14), “우리가 만들자”(창 11:3, 4, 비교, 창 1:26)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을 짓고자 했던 사람들의 의도와 행동은 창조 때의 하나님의 의도와 행동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의도가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라고도 분명히 쓰여 있는데,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던 표현이었다(사 63:12, 14).

 요약하자면, 바벨탑의 건축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잘못된 야망을 품었다. 누가 이런 생각을 불어 넣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사 14:14). 홍수에 관한 기억은 그들이 이런 계획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홍수가 찾아 왔을 때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높은 탑을 건설하였다. 홍수에 관한 왜곡된 기억은 바벨이라는 도시(바벨론)의 건설과 연관되어 바벨론의 전통 속에 남아 있다. 하늘에 닿아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던 그들의 노력이 바벨론의 정신의 특징이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 이야기가 다니엘서에서 중요한 모티브(motif)가 되는 이유이다. 바벨탑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날 평지에 관한 언급은(창 11:2), 다니엘서 서두에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놓아두기 위한 장소를 지정하는 부분에서 다시 등장한다(단 1:2). 다니엘서에 기록된 다른 여러 말씀 가운데,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세우는 이야기는(아마도 바벨탑이 세워졌던 같은 ‘평지’에 세워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가장 확실히 묘사하는 말씀이다. 

 세상 끝에 관한 이상 중에서, 다니엘은 세상의 나라들이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해 하나로 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단 2:43, 11:43~45, 비교, 계 16:14~16).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바벨탑이 그러했던 것처럼 실패하게 된다.

 

<묵상>

어느 유명한 프랑스 작가는 인류가 가졌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덴동산의 하와에서부터 시작하여(창 3:5) 우리가 이와 같은 위험한 거짓말에 솔깃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하와는 하나님께 속해 있었어도 유혹에 넘어갔다. 아담의 자손들은 아 사탄에게 속했기 때문에 더 솔깃하다. 

 

<부가설명> 바벨탑을 쌓아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언어가 하나여서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었다. 그들은 홍수를 생각하면서 창조주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들이 탑 쌓을 명분을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에서 찾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꼬투리로 삼았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계시록에 나타난 아마겟돈에 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아마겟돈에 모이는 사람들은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영이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 이것은 그들이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게 될 것을 상징하는 계시적 표현일 수도 있다. 오순절 때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방언하여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 방언으로 복음을 들었던 것처럼 이 세 더러운 영이 온 천하의 통치자들을 유혹해서 아마겟돈으로 모으는데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가 될 것이다. 바벨탑은 아마겟돈 사건의 역사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일된 사상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해야 한다(고전1:10). 세 천사의 기별이 이렇게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바벨탑을 건설하기 위해 연합했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잘못된 야망을 품었는데 이는 오래전 하늘에서 사탄이 품었던 마음이었다.

 

 

4월 27일(수) “우리가 내려가자”

 

창세기 11:5~7 그리고 시편 139:7~12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지구로 내려오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도록 한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창11:5~7]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시139:7~12]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답: 사람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는데서 돌이켜 구원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로 내려오셨다. 하나님의 내려오심은 그분의 높으심을 확증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신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올라가 그분을 만나려고 하는 어떠한 노력도 무의미하며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내려오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바벨탑 사건에서 나타나는 위대한 역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창 11:5) 내려오실 필요가 없으셨지만(시 139:7~12, 비교, 시 2:4) 그렇게 하셨다. 이와 같은 개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일에 친히 개입하심을 확실히 설명한다.

 

눅 1:26~33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눅1:26~33]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답: 세상을 구원하여 다윗으로 상징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내려오심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칙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과정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그분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만나기 위해 내려오셔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우리를 하나님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향해 오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것에 관해 두 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보여 준다.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상태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더 깊은 죄악으로 빠져들게 하는 뿌리 깊은 연합을 끊어버리고자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셔서 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그들의 연합된 계획을 멈추게 하셨다.

 

<묵상>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벨탑 사건을 통해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요?

 

답: 바벨탑은 혼잡한 언어로 실패하고 마침내 사람들은 온 세상에 흩어졌고 탑은 무너졌다.

 

<부가설명>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한 세상과 사람들을 포기하시지 않으신다. 어떻게 하든지 구원해서 창조의 처음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사람의 사망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사망하셔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셨다(히2:14). 이제 누구든지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사람들이 모여서 악을 계획하는 것을 막고 관심을 생명과 구원에 두도록 권고하시려고 내려오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다리가 되셨기에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 예수님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길이 절대로 없다. 바벨탑을 쌓는 반역하는 사람들에게도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일을 중지시키시고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연장해주시고 오늘까지 이르렀다. 우리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계획을 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 

 

 

4월 28일(목) 포로 된 자를 구원하심

 

창세기 11:8, 9과 9:1을 읽고 창세기 1:28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의 흩으심의 목적이 구원인 이유는 무엇인가?

[창11:8,9]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답: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사실을 이루는 것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은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었다(창 9:1, 비교, 창 1:28).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달리 바벨의 건축자들은 함께 모여 있고자 했다. 그들이 성을 지으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었다(창 11:4). 헤어져 흩어지는 것보다 함께 모여 있는 것이 그들을 더 강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흩어지기를 거부했다. 그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는 그럴 듯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그들의 연합된 힘을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자만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반항하여 “이름을 내고”자 한다면 그 계획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노골적인 반항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창 11:9)셨는데 이는 그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일이었다.

 ‘하나님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바벨이라는 이름은 ‘혼돈’이라는 뜻을 가진 발랄(balal)이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다(창 11:9). 그들이 하나님의 문에 닿기 원했기 때문에, 또한,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이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게 되었으며 약하게 되었다.         

 “바벨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불신자들의 주장에 속아 그들의 술책에 말려든 사람들도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있는 충성스러운 자들을 위하여 그분의 심판을 지체하시고, 그들의 참된 품성을 나타내도록 백성들에게 시간을 주셨다. 백성들의 참된 본성이 드러나게 되자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에게 그들의 목적을 단념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의 대담한 사업에 완전히 연합되었다. 저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 두었더라면 그들은 세계를 그 여명기에 타락시켰을 것이다. 그들의 동맹은 반역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영광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높이고자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23).

 

<묵상> 

 성경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사람의 계획을 멈추게 하시거나 심판하신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그분이 창조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부가설명> 세상은 아담의 범죄 후에 격변했다. 영생이 사망으로 격변하고 땅은 저주를 받아 격변했다, 홍수로 또 격변을 겪고 바벨탑 사건으로 또 격변을 겪게 되었다. 격변을 겪을 때마다 인류는 수명을 단축시켰다. 아담의 범죄는 영원한 생명을 사망으로 대체하는 격변을 겪게 하여 수명이 생겼다. 그래도 홍수까지는 평균 900세쯤 생존했다. 그러나 홍수 후에는 평균 400세 좀 넘게 살았다. 절반 이상 수명이 줄었다. 그런데 바벨탑 후에는 평균 200세가 좀 넘게 살았다. 역시 절반 이상 줄었다. 성경은 이런 격변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수명을 기록하게 하여 격변의 실상을 실감하게 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사실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기록을 신화나 설화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사실이고 진실이다. 족보에 그러게 많은 이름을 기록한 것은 만들어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성경에 기록한 족보는 성경 기록의 사실성과 역사적인 것을 잘 드러낸다. 수명이 급감한 사실로 격변을 넌지시 가르쳐주셨다. 사람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은 죄의 세상에 고통을 오래 겪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그 기간에 구원받도록 하라는 하나님 사랑의 조바심이다. 인류가 속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충만한 수가 차기를 기대하신다. 

 

<교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흩어지는 대신 함께 연합하여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했던 계획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실패했다.

 

 

4월 2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117~124, “바벨탑”을 읽어 보라.

 

 “그들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안에 세계의 경이가 될 굉장히 높은 탑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업은 백성들이 각지에 널리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계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온 땅에 흩어져서 땅에 충만하고 그것을 정복하도록 지시하셨었다. 그러나 이 바벨탑 건설자들은 그들의 공동 사회를 한 단체로 연합시켜서 결국 온 세계를 포함할 한 왕국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면 그들의 도시는 세계적 제국의 수도가 될 것이며, 그 영광은 온 세계의 칭찬과 존경을 자아낼 것이며 건설자들은 명성을 얻을 것이었다. 하늘에까지 닿을 굉장한 탑은 이 탑 건설자들의 명성을 후대에 길이 보존시키면서, 저들의 능력과 지혜의 기념비로써 서 있게 하고자 의도되었다. 

 시날 평야의 거민들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홍수를 자연적 원인의 결과로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지존자가 계심을 믿고, 홍수 전 세상을 멸망시키신 분이 바로 그분임을 믿었으나 가인처럼 그들의 마음은 그분께 대한 반역으로 일어섰다. 탑 건축에 있어서 그들이 염두에 둔 한 목적은,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날 경우에 그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홍수의 물결이 닿은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건축물을 만듦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름이 있는 층에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면 홍수의 원인을 규명해 보기를 소망했다. 이 전체적인 사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계획 입안자들의 이름을 높이고,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저들을 우상 숭배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계획되었다”(부조와 선지자, 118, 1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역사 속에서 또는 현시대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노력으로 세상에 고통을 가져온 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 독재 군주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다. 독일 황제 빌헤름 2세, 히틀러, 등등.

 

2.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가 우리만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애쓰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라도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경우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자기를 주님께 굴복하고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전15:31). 헌금을 많이 했다든지, 교회 사업에 봉사를 많이 한 경우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나타나게 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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