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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 한알의 밀처럼 죽음 -(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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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9-12 16:01 조회3,4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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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과 한 알의 밀(씨앗:Seed)처럼 죽음

                                               (09월 17일 (안) / 일몰(日沒): 18시 36분) 

 

 

<서언(緖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예수 님께서 복종(服從)의 모본(模本)을 남겨 주셨는데 그에 관한 가장 잘 이해(理解)할 수 있는 비유(譬喩)가 한 알의 씨앗(밀)에 관한 비유로 설명(說明)하시는바 저자(著者)는 이 비유에서의 가장 쉽게 설명하시는 내용으로 씨앗(밀알)의 비유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⑴.추락(墜落)=땅에 떨어진다는 것이고 ⑵.기다림이 있어야 하며(땅속에 있기 때문에 발아(發芽)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⑶.땅속에 있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며 (죽어 썩어야 새순이 나와서 한 알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씨앗:Seed)이삭이 된다. ⑷.즉 한 알(씨앗:Seed)로부터 열매 맺는 결실(結實)의 식물(植物)로 변(變)하기 위해서는 과거(過去)의 모습(模襲)을 포기(抛棄)해야 한다는 교훈(敎訓)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님께서는 우리 죄인(罪人)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寶座)를 버리시고(포기) 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마치 한 알의 밀(씨앗:Seed)처럼 우리 인간들에게 본(本)을 보여주셨다.

 

(09월 11일 (日)  <섬김을 위(爲)한 복종(服從)>

 

(Q)~(빌 2:5~9) 예수 님께서 우리를 구원(救援)하시기 위해 포기(抛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A)~○. 예수 님께서는 인류(人類)의 구원(救援)을 위해 하늘 보좌(寶座)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종으로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님의 모습(模襲)은 우리의 모본(模本)이 되므로 하늘 백성 되기를 갈망(渴望)하는 자들은 하늘의 사랑의 법칙(法則)을 따라 예수 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모본(模本)을 따라 사는 데에서 진정(眞正)한 행복(幸福)을 경험(經驗)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09월 12일 (月)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자아(自我)가 죽어야 함>

 

(Q)~(롬 12:1~2)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經驗)은 무엇입니까?

 

(A)~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먼저 자아(自我)가 희생(犧牲)해야 합니다!

○. 우리 삶의 영역(領域)이 자아(自我)에 대해 완전히 죽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도가니(시련(試鍊)가 우리의 주의를 끌도록 허락(許諾)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苦痛)은 우리가 우리의 죄(罪)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님에 대한 통찰력(洞察力)을 제공(提供)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慈悲)하심을 깨닫고 자아(自我)를 거룩한 산 제물(祭物)로 드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하는 것이다.

 

(09월 13일 (火)  <듣고자 하는 마음>

 

(Q)~(삼상 2:12~3:18)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差異點)이 있습니까?

(A)~○.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모두 마음이다. 마음이 보는 것이 눈을 통해 실현(實現)되고, 마음이 듣는 것이 귀를 통(通)해 실현되며, 마음이 말하는 것이 입을 통해 실현되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사지(四肢)를 통해 실현된다. 만약 네 마음이 없다면 이목구비(耳目口鼻)도 없다.

이른바 마음이 몸을 주재(主宰)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行動)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즉 마음은 아픔이나 가려움을 느끼는 감각 기관(感覺器官)이나 지각자체(知覺自體)가 아니라, 보고 듣는 일체감각기관(一體感覺器官)의 지각 작용(知覺作用)이 가능(可能)한 근거(根據)입니다. 이런 마음은 단순히 신체(身體)의 피와 살을 구성(構成)하는 한 덩어리의 심장(心臟)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존재(存在)하는 본성(本性)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影響)을 줍니다. 마음은 우리 육체(肉體)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行動)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은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육체(肉體)는 마음의 주재기능(主宰機能)을 통해 작용(作用)합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과 몸의 불가분적관계(不可分的關係)에 대해 “마음이 없다면 몸도 없고, 몸이 없다면 마음도 없다”라고 결론(結論)짓는 것이므로, 이처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重要)하느냐는 바로 성령(聖靈)의 세미(細微)한 음성(音聲)을 듣는 데에서부터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眞理)를 올바로 습득(習得)하게 되어 하나님의 신실(信實)한 종이 된 사무엘을 통해서 배우며 교훈(敎訓)할 수 있다.

 

(09월 14일 (水)  <자신(自身)을 의지(依支)함>

 

(Q)~(삼상 13:1~14) 사울의 어떤 행위(行爲)가 그를 몰락(沒落)의 길로 이끌었습니까?

 

(A)~○. 겸손(謙遜)하였던 사울은 왕(王)이 된 후(後) 어떻게 변(變)했을까? 그의 패망(敗亡)의 원인(原因)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자만(自慢)으로 자신을 의지(依支)함과 교만(驕慢)과 불순종(不順從)으로 인(因)한 중요(重要)한 순간(瞬間)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無視)하고 자기 생각(生覺)대로 결정(決定)하고 행(行)한 것으로 하나님을 의뢰(依賴)하는 대신 자신의 판단(判斷)을 의지(依支)하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判斷)하여 그의 삶에 비극(悲劇)이 신속(迅速)하게 찾아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대로 자기의 자만(自慢)으로 판단(判斷)하지 말고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실행(實行)해야 한다. 

 

(09월 15일 (木)  <대체물(代替物)들>

 

(Q)~(스가랴 4:6)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별(奇別)은 무엇입니까?

 

(A)~○. 범죄(犯罪)한 인간들은 수(數)많은 하나님의 대체물(代替物)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숱한 신(神)들의 이야기들, 자연만물(自然萬物)들, 영적상상물(靈的想像物)들과 같은 인간(人間)의 숭배(崇拜) 대상(對象)들이 바로 하나님의 대체물(代替物)들입니다. 원래 가졌던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던 마음이 바로 이런 인간이 만든 대체물(代替物)로 대상(對象)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현대(現代)에도 수(數)많은 하나님의 대체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묘(巧妙)한 것은 전혀 하나님의 대체물 같아 보이지 않는 대체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불리는 우리 사이에도 수(數)없이 많이 널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禮拜)하는 목적(目的)이 자신의 평안(平安)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평안을 예배(禮拜)하는 자(者)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예배하는 목적(目的)이 돈이나 명예(名譽)나, 출세(出世)나, 자녀들에게 있다면 이미 우리의 예배(禮拜)의 대상(對象)은 하나님이 아닌 그것들로 대체(代替)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世俗)의 현실을 깊이 통찰(洞察)할 때 우리가 극심(極甚)한 반대(反對)에 직면(直面)하게 될 때 그것은 소중한 연단(鍊鍛)의 기회(機會)이므로 다른 대체물(代替物)을 의지(依支)하지 말고 끝까지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聖靈)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신뢰(信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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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付祿)>



 제12과 한 알의 밀(씨앗:Seed)처럼 죽음

                                   (09월 17일 (안) / 일몰(日沒): 18시 36분) 

 

 

<서언(緖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예수 님께서 복종(服從)의 모본(模本)을 남겨 주셨는데 그에 관한 가장 잘 이해(理解)할 수 있는 비유(譬喩)가 한 알의 씨앗(밀)에 관한 비유로 설명(說明)하시는바 저자(著者)는 이 비유에서의 가장 쉽게 설명하시는 내용으로 씨앗(밀알)의 비유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⑴.추락(墜落)=땅에 떨어진다는 것이고 ⑵.기다림이 있어야 하며(땅속에 있기 때문에 발아(發芽)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⑶.땅속에 있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며 (죽어 썩어야 새순이 나와서 한 알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씨앗:Seed)이삭이 된다. ⑷.즉 한 알(씨앗:Seed)로부터 열매 맺는 결실(結實)의 식물(植物)로 변(變)하기 위해서는 과거(過去)의 모습(模襲)을 포기(抛棄)해야 한다는 교훈(敎訓)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님께서는 우리 죄인(罪人)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寶座)를 버리시고(포기) 하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마치 한 알의 밀(씨앗:Seed)처럼 우리 인간들에게 본(本)을 보여주셨다.

 

(09월 11일 (日)  <섬김을 위(爲)한 복종(服從)>

 

(Q)~(빌 2:5~9) 예수 님께서 우리를 구원(救援)하시기 위해 포기(抛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A)~○. 예수 님께서는 인류(人類)의 구원(救援)을 위해 하늘 보좌(寶座)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종으로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님의 모습(模襲)은 우리의 모본(模本)이 되므로 하늘 백성 되기를 갈망(渴望)하는 자들은 하늘의 사랑의 법칙(法則)을 따라 예수 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모본(模本)을 따라 사는 데에서 진정(眞正)한 행복(幸福)을 경험(經驗)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모든 존재(存在)들의 섬김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종이 되고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므로 모든 사람의 섬김과 영예(榮譽)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 님의 거룩한 속성(屬性)에 참여(參與)하고 구속(救贖)받은 영혼(靈魂)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예수 님과 나눌 자들은 그분의 무아(無我)의 봉사(奉仕)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소망, 651)

 

○. 그분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오셨다. 그분은 예수 님 자신을 즐겁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떤 명성(名聲)도 얻고자 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종의 형체(形體)를 취(取)하시고 선(善)을 행하는 일로 생애(生涯)를 보내셨다. 그분은 땅 위에서 안일(安逸)과 풍족(豊足) 중에 인생을 보내실 수 있었으며, 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즐기기 위해서 살지 않으셨고, 선(善)을 행(行)하며 고통(苦痛)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구출(救出)하기 위해 사셨으니 그분의 모본(模本)을 우리는 본(本)받아야 한다.”(3 증언, 54)

 

○.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애(生涯)와 성품(性稟)은 충성(忠誠)스러운 모본(模本)이다.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신뢰심(信賴心)은 무한(無限)하였다. 그는 아낌없이 완전(完全)하게 순종(順從)하고 굴복(屈伏)하였다. 그분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님을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行)하고자 오셨다. 모든 면에서 그분은 의(義)롭게 판단(判斷)하시는 분께 자신을 굴복(屈伏)시켰다. 세상의 구주(救主)의 입으로부터 이런 말씀이 흘러나왔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3 증언, 106)

 

○.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 “우리 강(强)한 자가 마땅히 연약(軟弱)한 자의 약점(弱點)을 담당(擔當)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善)을 이루고 덕(德)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記錄)된 바 주(主)를 비방(誹謗)하는 자들의 비방(誹謗)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 증언, 228)

 

○.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행(行)하신 원칙(原則)은 그의 몸 된 교회(敎會)의 교인(敎人)들이 행(行)하여야 할 원칙(原則)이다. 구원(救援)의 계획(計劃)과 기초(基礎)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예수께서 끼치신 모본(模本)을 따르고 그의 양(羊)무리의 목자(牧者)로 일하는 사람이다. (소망, 550)

 

○. (빌 2:5) 겸손(謙遜)한 자(者)를 위(爲)한 빛 (요 8:1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만약 그대가 온전히 겸손(謙遜)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깨닫기 위하여 노력(努力)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 버려둠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생명(生命)의 빛을 갖게 될 것이다. (청년 지도자 1892.10.13).

 

○. 그리스도께서 몸을 낮추사 지극히 높으신 자리를 떠나셔서 인상(人性)을 쓰실 때 그는 어떤 조건(條件)을 갖춘 인간의 자리라도 마음대로 택(擇)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크게 되는 것과 높은 지위(地位)에 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장 낮고 가장 비천(卑賤)한 삶의 길을 택(擇)하였다. 그의 출생지(出生地)는 베들레헴이었고, 그의 부모님(父母 任)은 가난하였지만, 세계의 소유주(所有主)이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였다.

 

○.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은 보이는 증거(證據)에 따(依據)른 것이 아니었고, 그의 개인적(個人的)인 매력(魅力) 때문에 그를 믿었지만, 그리스도 이외(以外)의 다른 사람 속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가 없고, 발견(發見)되지도 않는 그의 탁월(卓越)한 품성(稟性) 때문이었다. (2 예언 39).

 

○. 설명(說明)할 수 없는 두 속성(屬性)의 연합(聯合)(골 1:26, 27)

만약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인성(人性)과 융합(融合)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 타락(墮落)한 인간을 구원(救援)하시는 그의 지상봉사(地上奉仕) 기간에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계(限界)가 있는 인간의 능력(能力)으로는 이 놀라운 신비(神秘)를 명확(明確)하게 밝힐 수가 없다. 그 신비(神秘)란 두 속성(屬性) 곧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융합(融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설명(說明)할 수가 없다. 인간은 경탄(敬歎)하고 그리고 침묵(沈黙)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도 신(神)의 성품(性稟)에 참여(參與)할 수 있는 특권(特權)이 주어져 있다. 이 방법으로 인간은 어느 정도(程度) 그 신비(神秘) 속으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다(편지 5, 1889).

 

○.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황금(黃金) 사슬(출 3:5)

사람을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하나님 아들의 인성(人性)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靈魂)들과 그리스도를 묶는 사슬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묶어놓는 황금(黃金) 사슬이다. 이것이 우리의 연구(硏究)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진짜 사람이었고, 그가 사람이 되셨을 때 겸손(謙遜)의 증거(證據)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체(肉體)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셨다. (빌 2:5~9, 화잇주석)

 

○.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동등성(同等性). (요 1:1-3, 14)(요 1:1-3; 계 12:10 참조)

아버지와 함께할 때 그리스도의 지위(地位)는 동등(同等)한 지위(地位)이다. 이 지위(地位)가 있기 때문에 그는 범죄자(犯罪者)들을 위한 속죄제물(贖罪祭物)이 될 수가 있었다. 그는 율법(律法)을 크게 하고 영화롭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셨다. (원고 48, 1893).  (빌 2:5~9, 화잇주석)

 

○.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예증(例證)하고 그가 회심(悔心)시킨 자들에게 주를 닮도록 자극(刺戟)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救贖事業)에 대한 자신의 영감적(靈感的)이며 정통(精通)한 이해(理解)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이 영광(榮光)스러운 자리를 떠나 가장 비천(卑賤)한 형태(形態)의 인성(人性)을 취(取)하였으며, 인간이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도록 가장 천(賤)한 임무(任務)를 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대(偉大)한 모본(模本)을 따라 그들의 삶의 구조(構造)를 꼴지어야 한다. (빌 2:5~9, 재림교주석)

 

○. 예수의 순종(順從)은 그의 생명을 버리는 정도(程度)까지 이행(移行)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 더욱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수치(羞恥)스러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굴욕(屈辱)이었다. 자신이 제단(祭壇) 위에 놓일 희생 제물(犧牲祭物)이라는 말을 듣고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기꺼이 복종(服從)했듯이, 그리스도도 십자가(十字架)에서 돌아설 수 있었지만, 기꺼이 죄인(罪人)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順從)하였다.

우리의 순종(順從)도 반드시 그리스도의 순종(順從)과 같은 성격(性格)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순종을 드린 것은 “육신(肉身)의 모양(模樣)”(롬 8:3)에 있을 때였다. 예수는 우리처럼 생명을 보존(保存)하려는 욕구(慾求)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는 사단의 유혹(誘惑)을 받았으나 성령(聖靈)의 능력(能力)으로 마귀(魔鬼)를 물리쳤으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어떤 능력도 행사(行事)하지 않았다. (시대의 소망, 119, 729, 729, 734) 참조. (빌 2:5~9, 재림교주석)

 

○.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로우신 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 되심에도 불구하고 동등 됨을 포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히 5:8).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Kent, Hawthorne). (빌 2:5~9, 만나주석)

 

(09월 12일 (月)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자아(自我)가 죽어야 함>

 

(Q)~(롬 12:1~2)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經驗)은 무엇입니까?

 

(A)~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먼저 자아(自我)가 희생(犧牲)해야 합니다!

○. 우리 삶의 영역(領域)이 자아(自我)에 대해 완전히 죽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도가니(시련(試鍊)가 우리의 주의를 끌도록 허락(許諾)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苦痛)은 우리가 우리의 죄(罪)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님에 대한 통찰력(洞察力)을 제공(提供)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慈悲)하심을 깨닫고 자아(自我)를 거룩한 산 제물(祭物)로 드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하는 것이다.

(1) 우리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2)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3) "소망(所望) 중에 즐거워하며"

(4) "환난(患難) 중에 참으며" 

(5) "기도(祈禱)에 항상(恒常) 힘쓰며"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祭祀)란 하나님께 전 인격적(人格的)으로 우리의 몸을, 생애(生涯) 전체(全體)를 드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繼續的)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善)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이란 말은 흠(欠)이 없이 순전(純全)하다는 의미이다(엡 1:4, 빌 2:15, 골 1:22). 그러므로 거룩한 제사(祭祀)란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6:16, 17, 엡 2:1, 5)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그가 주신 새 생명으로 그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6:4-7, 13, 14, 22, 갈 2:20). ‘산 제사(祭祀)’의 ‘산’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산’은 현재 분사로 ‘지금 살아 있는’이란 뜻을 포함한다. 이 말은 구약적(舊約的)인 제사(祭祀), 즉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드리는 제사(祭祀)와 대조(對照)된다. 또한, 당시에 이교 사회(異敎社會)에서 성행(盛行)했던, 몸을 부정(不淨)한 일에 악용(惡用)했던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산 제사’는 구약시대(舊約時代)의 동물(動物) 제사(祭祀)처럼 다른 존재(存在)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地域)이나 시간(時間)에 구애(拘礙)받지 않는 제사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믿음은 행(行)함으로 온전(穩全)케 되는 것이다(약 2:22). (롬 12:1~2, 만나주석)

 

○. 신자(信者)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하는 일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악(惡)한 세대(世代)에 제시(提示)되는 혼란(混亂)스러운 많은 행동 노선 중에서 바른 행동을 선택(選擇)할 수 있도록 일깨움을 받는다. 그는 더 이상 육신(肉身)의 마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진리(眞理)를 인지(認知)하고 이해할 수 있다(요 7:17). 성령으로 새롭게 된 마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解釋)할 수 있다.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성경은 본래 영감을 준 동일한 성령의 조명(照明)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참조 요 16:13, 14; 고전 2:10, 11; 복음 교역자, 297).  (롬 12:1~2, 재림교주석)

 

(09월 13일 (火)  <듣고자 하는 마음>

 

(Q)~(삼상 2:12~3:18)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差異點)이 있습니까?

 

(A)~○.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모두 마음이다. 마음이 보는 것이 눈을 통해 실현(實現)되고, 마음이 듣는 것이 귀를 통(通)해 실현되며, 마음이 말하는 것이 입을 통해 실현되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사지(四肢)를 통해 실현된다. 만약 네 마음이 없다면 이목구비(耳目口鼻)도 없다.

이른바 마음이 몸을 주재(主宰)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行動)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즉 마음은 아픔이나 가려움을 느끼는 감각 기관(感覺器官)이나 지각자체(知覺自體)가 아니라, 보고 듣는 일체감각기관(一體感覺器官)의 지각 작용(知覺作用)이 가능(可能)한 근거(根據)입니다. 이런 마음은 단순히 신체(身體)의 피와 살을 구성(構成)하는 한 덩어리의 심장(心臟)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존재(存在)하는 본성(本性)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影響)을 줍니다. 마음은 우리 육체(肉體)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行動)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은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육체(肉體)는 마음의 주재기능(主宰機能)을 통해 작용(作用)합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과 몸의 불가분적관계(不可分的關係)에 대해 “마음이 없다면 몸도 없고, 몸이 없다면 마음도 없다”라고 결론(結論)짓는 것이므로, 이처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重要)하느냐는 바로 성령(聖靈)의 세미(細微)한 음성(音聲)을 듣는 데에서부터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眞理)를 올바로 습득(習得)하게 되어 하나님의 신실(信實)한 종이 된 사무엘을 통해서 배우며 교훈(敎訓)할 수 있다.

 

○. <(삼상 3:18) 적은 일에 충실(忠實)한 사무엘>

사무엘이 엘리의 보호 아래 있을 때 그의 사랑스러운 품성(稟性)은 연로(年老)한 제사장(祭司長) 엘리의 뜨거운 애정(愛情)을 끌었다. 사무엘은 친절(親切)하고 아량 있고, 순종(順從) 잘하고 공손(恭遜)하였다. 마음대로 고집(固執)하는 자기 아들들로 인하여 상심(傷心)한 엘리는 그가 맡아 보호(保護)하는 이 아이에게서 안식(安息)과 위로(慰勞)와 축복(祝福)을 발견하였다. 사무엘은 유용(有用)하고 애정(愛情)이 깊었으며, 엘리가 이 젊은이를 사랑한 것보다 일찍이 자기 아이를 더 사랑한 아버지는 없었다. 국가(國家)의 정사(政事)를 맡은 자와 단순(單純)한 아이 사이에 이처럼 뜨거운 애정이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신기(神技)한 일이었다. 엘리는 고령(高齡)으로 허약(虛弱)하여졌을 때에 자기 아들들의 방탕(放蕩)한 행위(行爲)로 인하여 근심과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으로 충만(充滿)하였으며 위안(慰安)을 얻으려고 사무엘에게로 향(向)하였다. (화잇주석, 삼상 3:18)

 

○. 어린 사무엘에게는 새로운 경험(經驗)이었으므로, 자세(姿勢)히 묘사(描寫)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께서 어떤 분명(分明)한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臨在)를 우아(優雅)하게 나타냈을 것이다. 한마디의 말도 없었지만,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祭司長)이나 그의 어린 조력자(助力者) 모두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의 임재(臨在)에 대해 충분(充分)한 증거(證據)를 가지고 있었고, 부모에게 양육(養育) 받은 자녀처럼 두 사람 모두 기꺼이 말씀을 듣고 순종(順從)할 자리로 성령(聖靈)의 인도(引導)함을 받았다. 만약 여호와의 말씀이 홉니에게 임(臨)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 여호와께서 엘리에게 직접(直接) 말씀하지 않았는가? 엘리는 무엇보다도 평화(平和)와 정의(定義)를 원(願)한, 신실(信實)하고 겸손(謙遜)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사무엘을 이 일에 관여(關與)시킬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以上) 엘리나 그의 아들들과 교통(交通)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581).

 

○. 엘리의 아들들의 사역(使役)이 사무엘의 사역과 대조(對照)되고 있다.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에게 은총(恩寵)을 받으며 성장(成長)했으나,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의 교훈(敎訓)을 존중(尊重)하지 않고 아버지의 충고(忠告)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모든 인간은 도덕적(道德的)으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진 존재(存在)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신 손 아래 머물기를 선택(選擇)하면(벧전 5:6), 적당(適當)한 때에 높임을 받게 되지만, 만일 그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選擇)하면 그 행위(行爲)에 대한 열매를 반드시 거두게 된다. (성경주석, 삼상 2:25)

 

○. 요셉이 퇴폐(頹廢)한 왕가(王家)의 보호(保護) 아래 있었던 것처럼, 사무엘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빌 2:15) 타락(墮落)한 제사장(祭司長)들에 둘러싸여 성장(成長)했다. 

악(惡)한 정욕(情慾)에 굴복(屈伏)한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들이 섬겨야 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개념(槪念)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交際)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분의 목적(目的)에 전혀 공감(共感)하지 못했으며 하나님께 의무감(義務感)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이기적(利己的)이고 타락(墮落)한 목적을 위해 세습적(世襲的) 권리(權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식욕(食慾)을 만족(滿足)시키기 위해 백성의 소유(所有)를 강탈(强奪)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그분에게 속한 희생 제물(犧牲祭物)의 일부뿐만 아니라 예배자(禮拜者)의 존경(尊敬)과 사랑도 빼앗았다. 그들은 비열(卑劣)한 욕망(慾望)으로 백성들 앞에서 행하는 여호와를 위한 봉사(奉仕)를, 주변(周邊)의 숲에서 행하는 방탕(放蕩)하고 감각적(感覺的)인 우상숭배(偶像崇拜) 수준(水準)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의 운명(運命)이 악(惡)한 환경(環境)에 의해 결정(決定)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우주(宇宙) 앞에 증명(證明)하기 위해 한 영혼(靈魂)을 그런 환경 가운데 있도록 허락(許諾)한다. 유다의 탐욕적(貪慾的)인 정신(精神)을 알면서 그를 회계(會計) 담당자(擔當者)로 세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오늘날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했다(시대의 소망, 294, 295,). 그분은 유다가 훨씬 더 큰 가치(價値)를 지닌 일에 깊이 감동(感動)되어 그의 구세주(救世主)에게 전적(全的)으로 굴복(屈伏)하기를 바랐다. 예수는 유다를 사랑했고, 따라서 그를 가장 중요(重要)한 사도(使徒) 중 하나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시대의 소망, 295). 

 

○. <홉니와 비느하스 사건(事件)에서 배울 교훈(敎訓)>

성직(聖職)에 봉사(奉仕)하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게 하고 그분께 범죄(犯罪) 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감명(感銘)을 끼치는 모본(模本)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대신(代身)하여”(고후 5:20)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화평(和平)의 기별(寄別)을 전(傳)하기 위하여 선 자들이 그들의 거룩한 부르심을 이기적(利己的) 만족(滿足)이나 육욕적(肉慾的) 만족(滿足)의 가면(假面)으로 삼을 때에 그들은 스스로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사단의 대리자(代理者)가 된다. 그런 자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사람들로 “여호와의 제사(祭祀)를 멸시(蔑視)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 능력(能力)을 상실(喪失)한다. (화잇주석, 삼상 2:22-25)

 

○. 우리 시대(時代)의 젊은이들도 사무엘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貴重)하게 될 수 있다. 그들은 저희 그리스도인다운 성실(誠實)을 충실(忠實)히 유지(維持)함으로 개혁 사업(改革事業)에 큰 감화(感化)를 끼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이 시대(時代)에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인(各人)이 할 일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의 이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任務)를 충실(忠實)히 감당(堪當)할 자들이 성취(成就)할 수 있는 것보다 하나님과 인간을 위하여 큰 결과(結果)를 성취(成就)한 자는 결코 없었다(부조 573,574).

 

○. 만일 자녀들이 날마다 연속(連續)되는 천(賤)한 의무(義務)들을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정해 주신 과정(過程)처럼, 그리고 저희가 충실(忠實)하고 효과적(效果的)인 봉사(奉仕)를 감당(堪當)하도록 훈련(訓練)하는 학교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면 저들의 일이 얼마나 더 즐겁고 명예(名譽)스럽게 보일 것인가! 모든 의무(義務)를 주께 하듯 수행(遂行)하는 것은 가장 천(賤)한 일에도 매력(魅力)을 주고 지상(地上)의 일꾼들을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룩한 자들과 연결(連結)시킨다. (삼상 2:12~36, 화잇주석)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품성(稟性)을 계발(啓發)시킬 기회(機會)를 주신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計劃) 속에서 하나님이 지정(指定)해 주신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사무엘을 아주 어릴 때부터 받으셨으니 이는 그가 마음이 순결(純潔)하였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헌물(獻物)로 드려진 바 되었고 주께서는 그를 아주 어릴 적부터 빛의 통로(通路)로 삼으셨다. 사무엘처럼 하나님께 헌신(獻身)한 생애(生涯)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큰 가치(價値)를 지닌 생애이다. 만일 오늘날의 청년들이 사무엘처럼 스스로를 헌신(獻身)한다면 주께서 그들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사업(事業)에 쓰실 것이다. 그들은 살면서 시편(詩篇) 기자(記者)가 말한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敎訓)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記事)를 전(傳)하였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고 51, 1900).  (삼상 2:12~36, 화잇주석)

 

○. 아들들에 대한 엘리의 책망(責望)에는 엄숙(嚴肅)하고도 무서운 말, 즉 성직(聖職)에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말이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범(犯罪)하면 하나님이 판결(判決)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죄를 범(犯罪)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懇求)하겠느냐?” 만일 그들의 범죄가 다만 그들의 이웃을 해(害)한 것이었다면 법관(法官)이 형벌(刑罰)을 명(命)하고 손해배상(損害賠償)을 요구(要求)함으로 화해(和解)할 수 있고 범죄자(犯罪者)들도 용서(容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그들이 고범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을 위하여 속죄제물(贖罪祭物)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지극(至極)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祭司長)으로서 죄를 위한 희생 제물(犧牲祭物)을 드리는 그들의 직무(職務)와 관련(關聯)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업(事業)은 백성들 앞에 크게 모독(冒瀆)과 수치(羞恥)를 당하여 그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속죄제물(贖罪祭物)도 가납(嘉納)될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신이 비록 대제사장(大祭司長)일지라도 감히 그들을 위하여 중재(仲裁)할 수 없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震怒)에서 그들을 방어(防禦)할 수 없었다. 하늘이 인류의 구속(救贖)을 위하여 준비하신 방법(方法)을 멸시(蔑視)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아 욕(辱)을 보이”(히 6:6)는 자(者)는 모든 죄인 중에 가장 중(重)한 죄인(罪人)이다. (부조 580).

 

(09월 14일 (水)  <자신(自身)을 의지(依支)함>

 

(Q)~(삼상 13:1~14) 사울의 어떤 행위(行爲)가 그를 몰락(沒落)의 길로 이끌었습니까?

 

(A)~○. 겸손(謙遜)하였던 사울은 왕(王)이 된 후(後) 어떻게 변(變)했을까? 그의 패망(敗亡)의 원인(原因)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자만(自慢)으로 자신을 의지(依支)함과 교만(驕慢)과 불순종(不順從)으로 인(因)한 중요(重要)한 순간(瞬間)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無視)하고 자기 생각(生覺)대로 결정(決定)하고 행(行)한 것으로 하나님을 의뢰(依賴)하는 대신 자신의 판단(判斷)을 의지(依支)하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判斷)하여 그의 삶에 비극(悲劇)이 신속(迅速)하게 찾아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대로 자기의 자만(自慢)으로 판단(判斷)하지 말고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실행(實行)해야 한다. 

 

○. 자만심(自慢心)은 패망(敗亡)의 근원(根源)이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을 때, 사울은 초조(焦燥)함 속에 이레(七日)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자 스스로 번제(燔祭)와 화목제(和睦祭)를 드린다. 이는 사울의 자만(自慢)에서 기인(基因)한다고 본다. 제사(祭祀)는 오직 제사장(祭司長)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고도 그는 자신도 기름 부음을 받은 왕(王)이기에 할 수 있다는 자만심(自慢心)을 가진 것이다. (삼상 13:8-12)

 

○. 사울은 사무엘이 없이도 혼자서 감히 번제를 드리고자 하였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요, 예언자도 아니지만, 왕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아무런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였다. 후에 웃시야 왕도 이런 생각 때문에 감히 잘못을 저지른 일을 볼 수 있다. (대하 26:16 이하).

 

○. (삼상11:11~12절). 본문은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제사를 드렸던 사울이 ‘왕이 행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사무엘의 질책 섞인 질문에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부분이다. 

그 변명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1) 이스라엘 군사들의 흩어짐, 

(2) 사무엘의 도착 지연, 

(3) 블레셋 군대의 공격 가능성 등이다. 

○. 결국, 사울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부득이 자신이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변명은 결국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과 사무엘과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못한 불순종의 결과였다. 진정 사울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큰 전쟁에 임하기 전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그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순종과 믿음의 시험에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말았다.

 

○. (삼상 13:8) 하나님은 사울의 참 품성을 드러내고 계셨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못 가게 붙들어 두신 것은 사울의 마음을 드러내어 그가 위기에서 어떻게 행하는지를 다른 사람들로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설치된 시험의 자리였지만 사울은 명령들을 순종치 않았다. 그는 누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정력과 독선이 가득한 태도로 희생 제단에 몸소 나아갔다. (삼상 13:8, 화잇주석)

 

○.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 (사인즈 1888.6. 15).

 

○. (삼상 13:9 사울은 기도(祈禱)할 수도 있었음

그는 희생(犧牲)을 드리지 않고 겸비(謙卑)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주께서 무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탄원(歎願)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는 대신에 스스로 제사장직(祭司長職)을 대행(代行)하였다. (청년 지도자 1898.11. 17).

 

○. 사울이 만일 자신의 결점을 바로 보고 고백하였더라면 이 쓰라린 경험은 장래를 위한 보호책이 되었을 것이며, 훗날에 그는 하나님의 책망을 불러올 실수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당하게 정죄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은 죄를 다시 범하기 쉽게 되었다. (삼상 13:11, 화잇주석)

 

○. <(삼상 13:13) 사울의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배척(排斥)을 가져옴>

사울의 범죄(犯罪)는 그가 거룩한 책임(責任)을 맡을 만한 자격(資格)이 없음을 입증(立證)한다. 하나님의 요구(要求)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이 매우 적은 사람은 국가(國家)를 위한 현명(賢明)하고 안전한 지도자(指導者)가 될 수 없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시험을 참을성 있게 잘 견디어 내었더라면 그와 그의 집에는 보좌(寶座)가 든든히 섰을 것이다. 사실상 사무엘이 길갈로 온 것은 바로 이 목적에서였지만 사울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그 권위(權威)를 귀하게 여기는 한 사람을 위한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그는 제거(除去)되어야 하였다(사인즈 1882.8. 3).

 

○.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면서 사무엘은 이런 경우를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를 주었다. 즉 그는 길갈로 가서 사무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참조 10:8; 부조와 선지자, 617, 618). 그러나 제사를 지내기로 약속한 시간이 지난 후 곧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이 불순종했음을 알았다. (삼상 13:10, 재림교주석)

 

○.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분의 확신을 흔들어 놓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기울인 것은 그가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고 정신적 긴장으로 지쳐 수척해졌을 때이다. 그러나 아담이 실패하고 사울이 내리막길을 선택한 곳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했다! (삼상 13:14, 재림교주석)

 

○. 사울은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번제를 드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을 때 길갈에 먼저 내려가서 칠 일을 기다리라고 명령한 바가 있다. 으레 되는 날에 분명히 그가 사울을 찾아가서 함께 사울을 위해 번제를 드린 뒤에 사울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삼상10장 8절)에서 읽을 수 있다. 

 

○.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그처럼 장황한 변명을 한 것을 보아(삼상10:11절), 분명히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려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령을 사울은 거역하였다. 그는 이레 되는 날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 이레 되는 날이 다 지나기까지 기다리는 참을성을 가지지 못했다. 아마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며, 나라도 사랑치 않고, 또 그의 왕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무엘을 기다리기보다는, 사무엘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 더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 (삼상 13:1~14, 매튜헨리)

 

○. 사울은 그의 불순종(不順從)에 대해 책망(責望)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해 애썼으며, 조금도 이에 대해 회개(悔改)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人間)을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죄(罪)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도 회개(悔改)하지 않는 것이며, 타락(墮落)하고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 사울이 어떻게 변명(辨明)하였는지를 살펴보자. (삼상 13:11~12절).

(삼상 13:11). 그는 자기의 신중(愼重)함 때문에 이런 일을 하였다고 변명(辨明)했다. 

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져 가는데 그는 다른 방법으로는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며, 그와 함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사무엘은 나라의 일을 잊어버렸을망정 자기는 절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 (삼상 13:12 절). 그의 신앙심(信仰心)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변명(辨明)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祈禱)드리며, 번제(燔祭)를 드리기 전에는 결코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지 않겠노라는 신앙심(信仰心)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말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치러 내려오려고 하는데 나는 아직 하나님께 간구(懇求)한 바가 없다."라고 생각하여 번제(燔祭)를 드렸다는 것이다. 

 

○. 어떻게 기도(祈禱)를 드리기 전에 싸움에 나갈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명령(命令)에 대한 불순종(不順從)의 죄를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관한 관심(關心)이라는 핑계로 덮어놓으려고 하였다. 위선자(僞善者)들은 "율법(律法)의 핵심(核心)"을 경시(輕視)한 잘못을 감추기 위해, 신앙(信仰)의 외적(外的)인 행동(行動)에 대해 힘쓴다.

 

(09월 15일 (木)  <대체물(代替物)들>

 

(Q)~(스가랴 4:6)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별(奇別)은 무엇입니까?

 

(A)~○. 범죄(犯罪)한 인간들은 수(數)많은 하나님의 대체물(代替物)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숱한 신(神)들의 이야기들, 자연만물(自然萬物)들, 영적상상물(靈的想像物)들과 같은 인간(人間)의 숭배(崇拜) 대상(對象)들이 바로 하나님의 대체물(代替物)들입니다. 원래 가졌던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던 마음이 바로 이런 인간이 만든 대체물(代替物)로 대상(對象)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현대(現代)에도 수(數)많은 하나님의 대체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묘(巧妙)한 것은 전혀 하나님의 대체물 같아 보이지 않는 대체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불리는 우리 사이에도 수(數)없이 많이 널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禮拜)하는 목적(目的)이 자신의 평안(平安)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평안을 예배(禮拜)하는 자(者)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예배하는 목적(目的)이 돈이나 명예(名譽)나, 출세(出世)나, 자녀들에게 있다면 이미 우리의 예배(禮拜)의 대상(對象)은 하나님이 아닌 그것들로 대체(代替)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世俗)의 현실을 깊이 통찰(洞察)할 때 우리가 극심(極甚)한 반대(反對)에 직면(直面)하게 될 때 그것은 소중한 연단(鍊鍛)의 기회(機會)이므로 다른 대체물(代替物)을 의지(依支)하지 말고 끝까지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聖靈)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신뢰(信賴)해야 합니다.

 

○. 사실, 이스라엘이 금(金)송아지를 섬긴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금송아지 신(神)’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2:4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引導)하여 낸 너희 신(神)이로다. 하는지라”라고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신(神)이 있어야 하겠기에 금송아지 형상(形狀)을 만들어냅니다. 

 

○.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상관(相關)없는 다른 대상(對象)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結局) 하나님과 금송아지 숭배(崇拜)의 미묘(微妙)한 관계는 이스라엘의 역사(歷史) 가운데서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現像)이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대체물(代替物)을 섬기는 경우(境遇)가 허다합니다. 

 

○. 오늘날의 신자(信者)는 설교(說敎)와 기도(祈禱)와 예배와 일상생활(日常生活) 등 모든 영역(營域)에서 말씀 중심의 삶을 실천(實踐)해야 한다. ⑴.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우리 앞에 두어 규칙(規則)으로 삼아야 한다. ⑵.말씀이 가르치는 것 외(外)에는 아무것도 믿지 말고, ⑶.말씀이 권고(勸告)하는 것 외(外)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며, ⑷.말씀이 금지(禁止)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미워하지 말고, ⑸.말씀이 명령(命令)하는 것 외(外)에는 아무것도 행(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시대(時代)는 삶에서 말씀이 변화(變化)시키는 능력(能力)을 경험(經驗)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속(速)히 일어나기를 고대(苦待)하고 있다.

 

○. 감람나무에 의하여 공급(供給)된 기름((스가랴 4:3절)은 성령(聖靈)을 상징(象徵)했다. (실물교훈, 408). 

 

○. 하나님의 은혜(恩惠)만이 예루살렘을 중건(重建)하는 자들이 직면(直面)한 모든 장애(障礙)를 극복(克服)할 수 있었다. 스룹바벨과 그의 동료(同僚)들은 원수(怨讐)들의 반대(反對)를 무릅쓰고 일을 수행(遂行)하기에는 그들의 능력(能力)이 연약(軟弱)하고 자원(資源)이 부족(不足)함으로 인(因)해 의기소침(意氣銷沈)해 있었다. 이 이상(異象)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인간의 “힘”이나 “능(能)”으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성령과 그분 자신의 권능(權能)으로 달성(達成)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슥 4:6, 재림교주석)

 

○. <가장(假裝)된 힘은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아님>

(스가랴 4장)은 이 마지막 시대에 주의 사업에 종사(從事)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격려(激勵)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스룹바벨은 주의 전(殿)을 짓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그의 사방(四方)에는 어려운 일들뿐이었다. 그의 대적(對敵)들은 “유대 백성들의 손을 약(弱)하게 하고 건축(建築)을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힘과 권세(權勢)로 건축(建築)을 중단(中斷)케” 하였으나 주께서 개입(介入)하셔서 전(殿)이 필역(畢役)되었다. (슥 4:6, 7, 10인용).

 

○. 하나님의 전(殿)의 회복(恢復)과 건축(建築)을 방해(妨害)하기 위하여 생겼던 그 어려움과 꼭 같은 난관(難關)들, 곧 스룹바벨 앞에 나타났던 곤란(困難)의 큰 산(山)들을 오늘날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事業)에 충성(忠誠)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만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과 뜻에서 나온 계획(計劃)들을 수행(遂行)하기 위하여 사람이 생각해 낸 방법들이 많이 쓰인다. 그러나 주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과장(誇張)된 말이나 많은 의식(儀式)들이 아니다. 인간 대리자(代理者)의 과장(誇張)된 힘은 이 문제를 결정(決定)짓지 못한다. 주의 사업의 반대편(反對便)에 서는 사람들은 잠시(暫時) 동안은 그 사업을 방해(妨害)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의 사업을 내내 인도해 오신 그 꼭 같은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주의 사업을 인도하실 것이다.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能)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神)으로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 주께서 모든 사람의 영혼(靈魂)을 주의 능력으로 강(强)하게 하신다. 그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쳐다보게 하시고 그분으로부터 우리의 나아갈 방향(方向)을 알게 하신다. (리뷰 1899.5.16). (슥 4:6, 화잇주석)

 

○. 이상(以上)과 같이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依支)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服從)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代身)하는 다른 대체물(代替物)들을 의지(依支)하게도 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도움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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