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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질문, 대답, 설명) 05/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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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5-21 02:39 조회5,4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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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

(5월 2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5분)

 

연구 범위: 창 25:21~34, 창 28:10~22, 창 11:1~9, 창 29:1~30, 창 30:25~32

 

기억절: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 하셨나이까”(창 27:36).

 

 우리는 이어서 기적의 아들이자 약속된 씨의 조상인 이삭의 가족사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순조로움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아들 야곱의 품성적 결함이 장자권(창 25:27~34)과 이삭의 축복을 받을 권리(창 27장)를 둘러싼 경쟁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를 속이고, 그의 형에게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치게 된다. 도망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벧엘에서 만나신다(창 28:10~22). 그때로부터 속이는 자 야곱은 자기 자신도 속임을 당하게 된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 대신(창 29장) 그 언니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며, 아내들을 얻기 위해 십사 년이나 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도망가 있는 동안 열 한 명의 아들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재산을 늘려 주신다.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자주 실패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언약적 약속을 성취하시는지 볼 수 있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속임수를 통해 장자권을 가로 챈 야곱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깨닫는다.

- 느끼기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들은 삼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

 

TMI 위로

2. 야곱과 에서의 성격을 비교해 보십시오. 무엇이 이 가정에 불행을 초래했습니까?(창 25:21~34, 27장)

※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근본이다. 

3.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하늘에 닿기 위해 시도되었던 바벨탑을 비교해 볼 때 어떤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까?(창 28:10~22, 11:1~9) 

※ 사람이 스스로 하늘에 가려는 노력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마련하신 방법을 따르는 차이가 있다.

4. 삼촌에게 속임을 당한 야곱은 어떤 교훈을 배웠을까요?(창 29:1~30)

※ 속이는 것은 자기도 그대로 갚음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5. 야곱이 뿌린 대로 거두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분의 뜻을 이루고 계셨습니까?(창 29:31~30:22)

※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일을 하셨다.

6. 야곱은 삼촌의 집을 떠나기 위해 무엇이라고 설득했습니까?(창 30:25~32)

※ 자기가 일하여 받은 삯을 데리고 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동안 자기가 수고한 것을 제시하면서 요구했다.

 

결론

영적 축복이 담긴 장자권을 너무나 갖고 싶었던 야곱은 속임수를 통해 형의 장자권을 가로챘으나 그 선택은 그에게 값비싼 인생의 교훈을 치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많은 자손을 주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셨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5월 22일(일) 야곱과 에서

 

창세기 25:21~34을 읽고 야곱과 에서의 성격을 비교해 보라. 야곱의 어떤 점이 그로 하여금 이삭의 축복을 받게 했는가?

[창25:21~34]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답: 에서는 거칠고 활동적이고 대범한 모습이고, 야곱은 세심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미 출생 전부터 야곱과 에서가 다르며, 그들이 서로 대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에서가 들에서 뛰어다니는 거친 사냥꾼으로 묘사된 반면, 야곱은 장막에 앉아 명상하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조용한”으로 번역된 탐(tam)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욥과 노아를 설명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성경은 같은 단어(tam)를 사용하여 욥을 “온전”한 자라고 설명하며(욥 1:8), 노아는 “완전”한 자라고 설명한다(창 6:9).

 이와 같은 성격의 차이는 그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 분명히 나타난다(창 27:1~28:5). 에서가 지치고 배고픈 채로 집에 왔을 때 죽을 만들고 있는 야곱을 발견한다. 에서에게는 “오늘”(창 25:31) 눈 앞에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장자권과 관련된 미래의 축복보다 더 중요했다(비교, 히 12:16, 17).

 “아브라함에게 주어지고 그의 아들에게 확증된 약속은 이삭과 리브가에게는 그들의 큰 소망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이 약속을 에서와 야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장자의 명분을 매우 중대한 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것은 세속적 재산의 상속뿐 아니라 영적 탁월성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받는 사람은 가정에서 제사장이 되고 그의 후손의 가계에서 세상의 구주가 나실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177).

 형과 달리 야곱은 그 축복에 담긴 미래의 영적 중요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훗날 야곱은 어머니의 계획에 따라(창 27장) 공개적이고 의도적으로, 심지어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창 27:20)의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아버지를 속인다. 아무리 자신의 판단에 좋은 것을 위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행한 일은 정말로 나쁜 속임수였다. 

 그와 같은 행동의 결과는 참으로 비참했다. 그의 행동은 이미 문제 많은 가정에 더 큰 문제를 더하게 되었다.

 

<묵상>

 창세기 27장을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야곱이 저지른 실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는 하나님이 한 약속을 하나님께서 성취해주시도록 기다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더 좋은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원했던 야곱의 마음은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썼습니다. 그 목적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불행을 초래합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면 아마 창세기의 이야기는 더 아름답게 전개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에 앞서 행동하기보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겸손히 순종하는 삶이 행복으로 향하는 지름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가설명>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가장 강하고 현실적으로 느끼고 챙긴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없다. 말로는 인내하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계획과 행위로 이루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렇게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도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주역이고 하나님은 도우미일 뿐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현실이다. 필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탄은 이 틈을 파고든다. 오늘날 재림교인들의 사고방식이 이렇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행할 때 하나님께서 잘 성취하도록 도우실 것이다’라는 이론이다.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말이다. 이런 모든 말은 하나님을 도우미로 밀어내는 사상의 발로가 아닐까? 그렇다고 아무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으면 될까?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성취하려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인간의 계획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현실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신앙은 이것을 뛰어넘는 것인데 쉽지 않다. 인간의 죄가 그렇게 끌고가기 때문이다. 약속이 성취될 동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도록 기도하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사람의 계획으로 하려는 정신을 벗겨주시고 오직 생명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지도록 복 주시기를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야곱과 에서는 성격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다. 하지만 그 중요한 것을 차지하기 위해 사용한 야곱의 잘못된 방법은 큰 문제를 초래했다.

 

5월 23일(월) 야곱의 사닥다리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마자, 에서는 자신이 속았으며 동생이 자기 것을 가로챘음을 알게 되었다(창 27:36).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다(창 27:42). 이 사실을 알게 된 리브가는 걱정이 되었고 두 아들 모두에게 치명적인 일이 될 그 범죄를 막고자 했다(창 27:45). 리브가는 이삭의 도움을 받아(창 28:5) 야곱을 자기 친정으로 도망시켰다(창 27:43). 그렇게 도망가는 길에 야곱은 그가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짓게 될 한 장소에서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했다. 

 

창세기 28:10~22과 창세기 11:1~9을 비교해 보라. 벧엘은 바벨과 어떻게 다른가? 바벨에서 일어난 사건과 벧엘에서 있었던 야곱의 경험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맺어야 하는 관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창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답: 바벨은 사람이 스스로 하늘에 가려고 높은 탑을 쌓았고, 벧엘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려고 하늘에서 땅에 닿은 사다리를 놓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부르시는 부름에 응답할 하늘에 갈 수 있는 믿음을 얻는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특별한 사닥다리를 본다. 마치 사닥다리와 하나님이 같은 존재인 양, 같은 히브리어 동사 나차브(natsav)가 땅 위에 “서 있는” 사닥다리(창 28:12)와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신’ 여호와 하나님(창 28:13)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닥다리는 하늘에 닿기 위해 바벨에서 시도되었던 일과 연결된다. 바벨탑과 마찬가지로 사닥다리는 “하늘의 문”에 닿도록 세워졌다. 그러나 바벨탑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나타낸다면, 벧엘의 사닥다리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야곱이 베고 자면서 꿈을 꾸었던 “돌”은 벧엘, 곧 “하나님의 집”(창 28:17, 비교, 창 28:22)의 상징이 된다. 이 “돌”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중심이 되는 성전, 성소를 나타낸다. 

 야곱은 벧엘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 단지 영적인 경험에 그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보다 더 분명한 외적인 표현으로 반응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나라로 세워지기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십일조의 개념을 보게 된다.

 

<묵상>

 창세기 28:22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주신 모든 것”에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십일조에 관해 야곱이 한 말을 통해 우리가 십일조에 대해 배워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무엇일까요?     

 

답: 십일조는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의 모든 것이 창조주께서 주신 것임을 시인하는 믿음을 나타내는 표이다.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주인의 허락없이 주인의 물건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도둑질이 된다.

 

<부가설명>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이다(요1:50,51). 야곱이 비록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하는 길이었으나 그가 모태에 있을 때 모친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그를 벧엘에서 만났다. 거기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시 약속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속임수를 썼지만 그것을 책망하시는 대신 그에게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하셨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사람은 그 약속을 믿고 굴복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 우리의 구원도 같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용납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한 것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주신 구원을 거두시는 것은 아니다.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구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것이 은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그 은혜가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사업을 성취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성소에서 역사적으로 훗날에 출생하고 사는 사람들도 그 구원에 참여하도록 봉사하신다.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열차에 싣고 가는 것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훈>

 야곱은 도망하는 길에 꿈 속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는 보았는데, 이는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5월 24일(화) 속이는 자, 속임을 당하다

 

창세기 29:1~30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리고 왜 라반의 속임수를 허락하시는가? 야곱은 어떤 교훈을 배웠는가?

[창29:1~30] 본문이 너무 길어서 여러분이 찾아 읽기 바란다. 내용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라헬과 레아 사이에서 라헬을 사랑했으나 결혼식날 라반이 야곱을 속이고 레아를 들여보내 속이는 사건이다. 

 

답: 여곱은 라반의 속임을 당할 때 자기가 아버지를 속인 사실을 깜짝 놀라도록 깨달았을 것이다. 

 

 야곱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로 돌이었다. 그 돌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벧엘의 돌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창 28:18, 19). 야곱은 이 돌을 통해 라헬과 소통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었다. 야곱이 모여 있는 목자들을 통해 라헬이 그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양을 몰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목자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재촉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는데 그것은 야곱에게 혼자서 돌을 옮길 기회를 주었고, 야곱은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을 라헬에게 소개하게 되었다(창 29:11).

 라헬은 그녀의 가족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알린다. 야곱과 라헬의 이 첫 만남은 의미가 있었다. 야곱이 라헬을 매우 사랑했기에(창 29:18), 그녀를 얻기 위해 라반의 집에서 일한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다(창 29:20).

 하지만 칠 년이 지난 후에 야곱은 속임을 당한다. 결혼식이 있던 날 밤, 야곱이 그의 침실에서 발견한 것은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다. 잔치의 혼란과 라헬에 대한 야곱의 강렬한 감정과 그에 비례하는 심리적 약점을 이용하여 라반은 속임수를 썼다.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와 형에게 한 행동(창 27:35)을 가리킬 때 이삭이 사용했던 “속이다”(창 29:25)라는 단어를 사용해 라반에게 묻는다.

 같은 생각이 범인으로 하여금 피해자가 겪은 것을 똑같이 경험하게 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 21:24, 비교, 창 9:6)와 같은 ‘보복법’에 담겨 있음을 주목해 보라. 비슷한 방법으로, 야곱이 누군가에게 한 일이 이제 그에게 행해진 것이다.

 야곱은 이제 속임수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속임수를 통해 야곱 자신의 속임수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야곱은 “속이는 자”(창 27:12)로서 속임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속임수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깜짝 놀라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한다.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창 29:25) 이 질문은 야곱도 속임수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묵상>

 야곱은 속이는 자였지만, 그 역시 속임을 당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처벌을 피하거나,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과 같은 ‘정의’롭지 않은 상황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답: 오늘날은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므로 말씀의 답을 찾는 것이 가장 바르고 빠른 길이다. 말씀을 깨닫는대로 속히 실행하면 될 것이다. 

 

<부가설명>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지은 이름이다. 야곱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아버지 아들 이름을 ‘속이는 자(야곱)’라고 지었겠는가? 그 이름에는 ‘뒤에서 붙들더.’라는 뜻도 있다. 아마도 이삭은 야곱의 성질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뒤에서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성장하면서 기록된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뒤에서 붙들어 보호하기를 바라는 뜻은 숨겨졌고 속이는 자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머니와 합작해서 아버지를 속인 것은 정말 속인 사건이다. 그러나 에서를 속여서 장자 명분을 가져갔다는 에서의 주장은 정직한 이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에서가 야곱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야곱이 음식을 제공하는 값으로 장자 명분을 요구했고 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정당한 거래로 장자 명분을 팔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야곱기 자기를 속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에서가 스스로 속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인 것은 진짜 속였는데, 그렇더라도 장자 축복을 받은 것은 장자 명분을 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야곱이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한 것이 낳은 결과다. 우리도 인내로 소망을 이루는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믿음에는 역사(役事)가 따르고 소망에는 인내가 따르고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살전1:3).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그냥 믿음 소망 사랑만 외우고 있지 않는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롬8:24). 그런데 소망에는 인내가 따르는 것이다. 야곱이 인내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인간의 현실이 그렇지 않아서 걸려넘어졌다. 그러나 벧엘에서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셨다. 

 

<교훈>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속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경험을 통해 야곱에게 속이는 일은 옳지 않은 것임을 가르치셨다.

 

5월 25일(수) 가족을 이루는 축복

 

 야곱에게 있어 도망하여 살던 때의 마지막 칠 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가장 생산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야곱은 그 기간 동안 훗날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될 열두 명의 자녀 중 열한 명을 낳게 된다.

 이 부분은 야곱의 이야기에(창 25:19~35:26) 있어 핵심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태를 여셨다”는 핵심 문구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그 표현은 레아(창 29:31)와 라헬(창 30:22)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이 표현 후에는 항상 출생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이는 이 출생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창세기 29:31~30:22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창29:31~30:22] 이 부분도 직접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레아가 네 아들을 낳고 라헬은 아들이 없자, 자기 몸종 빌하를 야곱의 첩으로 주고 거기서 두 아들을 낳는 이야기와 질세라 레아도 자기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고 거기서 두 아들을 낳는 사실과 마침내 라헬이 요셉을 낳는 사건이다. 

 

답: 사람이 자기 의지와 선택과 계획으로 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모든 것이 창조주께서 이루시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술책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행하는 과정일 뿐이다. 라헬이나 레아가 올바를 선택을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뜻을 이루는데 쓰셨다.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여심으로 아들 르우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이름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라아(ra’ah)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창 29:31), 이 아들을 그녀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주셨다.

 다음으로 그녀는 ‘듣다’라는 뜻을 가진 샤마(shama‘)라는 동사가 포함된 시므온이라는 이름을 둘째 아들에게 주었다. 레아는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던 것처럼 자기의 깊은 아픔을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사 아들을 주셨다고 믿었다(창 29:33, 16:11). 

 레아가 자신의 마지막 아들을 낳게 되었을 때, 그 아들에게 ‘찬송’이라는 뜻을 가진 유다라는 이름을 주었다. 레아는 더 이상 그녀의 아픔이나 축복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하나님께 집중하여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이상하게도, 레아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주신다(창 30:22). 야곱의 사랑을 받은 아내 라헬은 결혼 후 칠 년, 약혼 후 십사 년을 기다린 후에야 첫 번째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창 29:18, 27, 비교, 창 30:25). 그녀는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으며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의미에서 그 아들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창 30:23, 24). 비록 앞서 언급된 상황들 가운데 잘못된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셨다.

 

<묵상>

 야곱이 자녀를 갖게 되는 이 이야기는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 질 것임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답: 라헬이나 레아가 몸종을 드려 자녀 수를 늘인 것은 마치 사라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과 비슷하지만 이는 약속의 아들 야곱에게서 나왔으므로 하나님의 계획에 쓰셨다.

 

<부가설명> 야곱이 객지에서 오래 고생했으나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낳음으로 가정에서 위로를 경험할 수 있게 하셨다. 가정은 평화롭고 행복한 보금자리여야 하는데 야곱 가정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다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야곱의 가정사정을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데 사용하셨다. 나는 야곱의 아내들이 자녀 낳기 경쟁하는 사건에서 교회가 영혼 구원하는 경쟁을 해야 한다는 기별을 읽는다. 교회는 크게 하나다. 하늘 예루살렘은 하나의 교회의 표상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다(계21:9,10). 그 성은 열 두 성문이 있고 문마다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기초석은 열 두 보석인데 12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이라는 뜻이다.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라고 한 그 성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생산하는 수고를 한다. 교회 수가 많아도 그것은 하늘 예루살렘이라는 한 교회를 대표되는 한 교회다. 예수님이 그 머리고 지상의 역사적으로 이어온 모든 진리 교회는 다 지체들이고 교인들도 지체들이다. 교회는 자녀 낳기 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아질 것이다. 야곱에게 여러 아내가 자녀 낳기 경쟁한 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기별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성경적 진리를 그래도 따르지 않았으나 알지 못하는 시대에 허물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섭리로 많은 신자들이 출생한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그들 중에서 남은 자를 불러내셨다. 

 

<교훈>

 야곱이 열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 과정에서도 보듯이, 비록 문제가 많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그분의 계획을 차질 없이 이루어 가신다.  

 

5월 26일(목) 야곱이 떠나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큰 아들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 준비했던 이삭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어째서인지 외삼촌 라반에게는 소극적으로 행동하며 그를 위해 성실하게 일했다. 야곱은 그가 장인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야곱의 기질을 고려했을 때 이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야곱은 반항할 수도 있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라반에게 저항하거나 조건을 변경해 달라고 제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라반의 명령이 얼마나 불공정하든지와 상관없이, 그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라헬의 첫 번째 아들 요셉이 태어났을 때, 야곱은 마침내 라반에게 약속한 십사 년을 채우게 되었고(창 30:26), 드디어 라반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창세기 30:25~32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야곱은 어떻게 외삼촌을 설득하고 있는가? 라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창30:25~32]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27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28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29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31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32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답: 야곱이 고향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처자들을 데리고 가게 허락해달라고 했다. 그것은 야곱의 품삯이기 때문에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나 라반은 성실한 야곱을 붙잡아서 일 시키려고 품삯을 주겠다고 설득했고 야곱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집을 떠난 야곱은 긴 시간을 돌아와야 했다. 그가 처음 고향을 떠났을 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떠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건들로 인해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 그에게는 이제 큰 가족이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모습과 다른 야곱의 순종적인 모습은 야곱이 그사이 많이 변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그가 믿음에 대한 교훈을 깨달은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출발 명령을 기다린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후에야 그는 움직이기로 결심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라반의 집을 떠나 네 “출생지”로(창 31:13) 돌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야곱에게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또 다른 것은 바로 라반과 그의 아들들의 태도이다(창 31:1, 2). “야곱이 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오래 전에 그의 교활한 친척을 떠났을 것이었다. 이제 그는 라반의 아들들이 자신의 재산을 그들의 소유인 것처럼 넘겨다보고 폭력으로라도 그것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느꼈다”(부조와 선지자, 193). 마침내 야곱은 그의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위대한 이야기의 또 다른 국면을 시작하게 되었다.

 

<묵상> 

창세기 31:1~3을 읽어 보십시오. 야곱은 무엇을 통해 자신이 삼촌 집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답: 라반의 아들들의 부당한 불만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떠나라고 했을 때이다. 

 

<부가설명> 야곱은 인내라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의 계획대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를 기다리는 소망의 인내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라반에게 속으면서 그의 인생에 속인 모든 것이 자기에게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의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때가 이르기까지 인내하면서 소망을 즐거움으로 성실하게 생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변하는 것과 함께 가족이 형성되고 비록 올바르지 않게 첩들을 얻게 되었으나 그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방법이 있을 것을 믿은 것으로 보인다. 때가 되었을 때 외부적 신호가 왔다. 라반의 아들들의 태도와 말을 퍼뜨리는 일로 깨달은 것이다. 떠나라하는 징조가 온 것이다. 그는 마음으로 준비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친히 떠나라고 하셨다. 그때 그는 아내들과 의논하고 함께 떠났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깝다는 여러 징조를 본다. 우리의 수명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본향으로 아버지 집으로 갈 마음을 다질 때가 된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가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야곱을 그렇게 했다. 

 

<교훈>

 고향을 떠나 도망하여 지내면서 믿음에 대한 교훈을 배운 야곱은, 이제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행동을 취했다.   

 

5월 2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선택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은혜로 그를 선택하셨다. 그럼에도 야곱은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 자체가 모순이었다. 만약 그가 은혜를 받을 만하기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삯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야곱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야곱의 경험은 야망을 품은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을 높이려 하지 말라!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실망으로 끝났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곧 하나님과 그의 연합, 그의 집, 게다가 이제는 절망에 찬 도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그분은 희망 잃은 야곱의 상태를 보셨다. 그의 절망을 보셨다. 그분이 야곱의 이같은 상태를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그 신비한 사다리를 보여 주셨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보시고 죄가 만들어 놓은 심연 위에다 그리스도께서 사다리를 놓게 하신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지만 내가 어떻게 그곳에 이를 수가 있는가? 길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다리의 계시를 보여 주신 것이다. 인간은 그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 그 사다리의 밑은 땅이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화잇 주석, 창 28:12, 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거룩한 역사의 사건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삭, 리브가, 야곱, 에서, 라반, 라헬, 레아)의 성격을 들여다 보라. 얼마나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가 포함되어 있는가? 이 사실은 사람의 일반적인 본성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 아담 자손으로 사람은 자체가 썩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이다(엡4:22).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늘로 이끄신다. 야곱과 그 가족의 일은 이것을 가르쳐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2.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성품이 성숙하고 성장했다는 어떤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 고향으로 돌아올 때를 인내로 기다릴 줄 알게 되었고 라반의 태도에 같은 자세로 온유와 인내로 일관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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