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이브라함과 맺은 언약 - (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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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5-11 01:10 조회3,69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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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言約) (5월14일 (안)/일몰 19시33분)
(05월08일 (日) <아브라함의 믿음>
(Q)~(창세기 15:9~17)과(로마서4:3~4, 9절, 2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행(行)하게 하신 특별(特別)한 제사의식(祭祀儀式)의 의미(意味)는 무엇이며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슨 의미(意味)이며 어떻게 드러냈는지요?
(A)~○.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세 가지 약속(約束)을 합니다. (창15:1절)에서
①내가 너의 방패(防牌)가 되어 주겠다.
②지극히 큰 상급(賞給)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約束)과
③ (창15:5절)에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子孫)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도 많고 자식(子息)이 없는데 어찌 가능(可能)한가고 물을 때에 하나님은 삼년 된 소와 양(羊)과 염소와 비둘기를 잡아서 번제(燔祭)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각(脚)을 떠서 제사(祭祀)를 드릴 때 하나님이 불로 역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단(祭壇)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약속(約束)의 제단(祭壇)>
어느 날 환상(幻像) 중에 하나님이 말씀하여 주신 약속(約束)은 놀라운 축복(祝福)입니다.
①.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後嗣)가 되리라
②.네 자손(子孫)이 하늘에 뭇별 같게 하리라
③.이 땅을 너와 네 후손(後孫)에게 주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자식(子息)에 대한 꿈을 포기(抛棄)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命令)대로 소와 염소와 수양과 비둘기를 잡아 제사(祭祀)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단(祭壇)은 약속을 믿고 쌓은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信仰)에서 본 받을만한 점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義)롭다 여기시고 축복하십니다.
아무 공로(功勞)가 없어도 믿을 때 인정(認定)해 주십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代身)지시고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 <최선(最先)의 피와 정성(精誠)의 제단(祭壇)>
아브라함이 쌓은 제단(祭壇)은(창15:9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取)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聖經)에서는 정결(淨潔)한 짐승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네 가지 짐승을 다 잡아서 동시에 드린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命令)에 따라 드린 것이지만,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은 정성(精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과 최선의 정성을,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祭物)은 모두 3년 된 것이었습니다.
모든 동물(動物)은 3년이 되었을 때가 가장 성숙(成熟)한 시기(時期)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힘이 넘치며, 가장 귀한 때입니다.
○. <아브라함의 결단(決斷)과 사단의 방해(妨害).>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에 (창15:10절)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中間)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제물(祭物)을 드리면서 비둘기는 쪼개지 않고 그냥 통째로 드렸고, 나머지는 모두 쪼개 놓았습니다. 쪼개진 짐승은 ①피 ②고통(苦痛) ③죽음이 내포된 것입니다. 쪼개진 짐승을 통하여 드리는 사람과 받으시는 하나님 사이의 굳은 언약이 세워집니다. 죽음으로 언약을 굳게 지키겠다는 아브라함의 결단이 담겨 있었습니다. 짐승이 죽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제사에는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거는 굳은 결단(決斷)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몸에서 날 아들이 상속자(相續者)가 될 것임을 재차(再次) 확인(確認)받은 아브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받아들였다.
(05월09일 (月) <아브라함의 의심(疑心)>
(Q)~(창세기 16:1~16)과 (갈라디아서4:21~31)에서 하나님의 약속(約束)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부족(不足)으로 인(因)해 불행(不幸)을 초래(招來)한 아브라함이 보였던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통해 대(代)를 잇기로 한 아브람의 선택(選擇)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하나님의 거듭된 약속(約束)(12:7, 13:15, 16, 15:4)에도 불구하고 사래가 늙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은 신앙생활(信仰生活)의 한 갈등(葛藤) 요인(要因)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身體的) 결함(缺陷)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으니(창20:17, 18) 그 갈등은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래는 이러한 갈등을 해소(解消)하기 위한 인간적(人間的) 방도(方道)를 모색(摸索)하였는데(2절) 이 역시 후사(後嗣) 문제에 대해 아브람이 범(犯)하였던 것과 동일(同一)한 실수(失手)가 아닐 수 없다(창15:3).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한 치도 어김이 없이 반드시 다 이루어지며, 그러한 성취(成就)의 때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超越)한 하나님 편의 적절한 때를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전 3:1, 2, 사 55:8, 9). (창 16:1~16, 만나주석)
○.<(출16:2)에 출산(出産)을 허락(許諾)하지 아니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태(胎)를 닫으셨다는 뜻으로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일의 책임(責任)이 근본적(根本的)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단언(斷言)한 말이다. 물론 인간의 잉태(孕胎)를 주관(主管)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29:31, 시 127:3, 사 66:9). 따라서 사래는 더욱 더 하나님만을 믿고 그 약속을 의지(依支)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信賴)하지 않고 그분의 잉태(孕胎)하게 하시는 역사를 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스스로 성급(性急)한 판단(判斷)과 섣부른 일을 감행(敢行)한 것에 사래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래의 실수(失手)는 장차(將次) 큰 비극(悲劇)의 전조(前兆)가 되었다.
○.<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1)(창세기 16:1-3)>
아브람이 하갈과 혼인(婚姻)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그의 둘째 아내가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브람의 어떤 변명(辨明)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코 그는 정당화(正當化)될 수 없다. 이는 법(法)이 "당초부터 그렇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그렇게 하여서 이 세상(世上)과 교회(敎會)에 사람들이 보다 신속(迅速)히 많아질 수 있도록 가정(家庭)을 일으켜야겠다는 불법적(不法的) 욕망(慾望)이 있어서 그리했던 것 같다. 이 일은 분명히 일어나지 아니했어야 될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첫 질서(秩序)로 삼으셨고,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맺어지도록 하셨다.
○.이런 결혼(結婚)을 성립(成立)시킨 자는(누가 그런 것을 생각해 냈겠는가?" 사래 자신이었다. 그녀는 아브람에게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同寢)하라" 고 했다(2절). 여기에 명심(銘心)할 것이 있다.
○. 우리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연고자(緣故者)를 통하거나, 우리가 신임(信任)하고 사랑하는 친구를 통하여 시험(試驗)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術策)이다. 유혹(誘惑)은 별로 의심(疑心)할 바 없는 자를 통해서 올 때가 가장 위험(危險)하다. 그러므로 이야기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는 무슨 말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분별(分別)하는 것이 지혜(智慧)로운 일이다.
○. 우리 자신들이 궁리(窮理)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명령(命令)이 우리의 위안(慰安)과 영예(榮譽)에 훨씬 더 좋은 조언(助言)이 된다. 아브람이 그녀의 어리석은 계획에 따르는 대신 하나님의 율법의 규례(規例)를 좇았더라면, 사래의 유익(有益)을 위해서라도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스스로 악(惡)을 행한다.
○.아브람과 하갈의 불행(不幸)한 결혼에서 오는 즉각적(卽刻的)인 나쁜 결과(結果)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순식간(瞬息間)에 매우 큰 해독(害毒)을 끼쳤다. 우리가 의를 행하지 않을 때, 죄와 고통이 문 앞에 이른다. 그러므로 본분의 길을 떠날 때에 죄책(罪責)과 슬픔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탓이다. (창 16:1~16, 재림교주석)
○.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언약적(言約的)인 약속(約束)을 통해 인류(人類)를 대하셨다. 그 중심(中心)에는 장차(將次) 오실 구세주(救世主)가 있었고, 다윗 언약(言約)에서 그 정점(頂點)에 이르렀다(창 12:2-3, 삼하 7:12-17, 사 11장). 바벨론 포로(捕虜)로 붙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메시아의 도래(到來)와 관련하여(겔 36:26-28, 37:22-28) 더욱 실효성(實效性)이 있는 ‘새 언약(言約)’(렘 31:31-34)을 약속(約束)하셨다”(Hans K. LaRondelle, Our Creator Redeemer, p. 4).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나누었던 언약관계(言約關係)를 시내 산(山)의 이스라엘 자손들도 공유(共有)하기 바라셨다(출 6:2-8, 19:3-6, 신 32:10-12). 창 12:1-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과 출애굽기 19장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 사이에는 유사성(類似性)이 존재(存在)한다. 두 경우(境遇)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일할 것임을 강조(强調)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축복(祝福)들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 하도록 요구(要求)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은 그러한 축복에 대한 반응(反應)으로써 순종(順從)해야 했다. (출 19:5)에서 ‘순종(順從)하다’(KJV, NIV: obey)라고 번역(飜譯)된 히브리어의 문자적(文字的) 의미(意味)는 ‘듣다’이다(개역개정판은 ‘듣고’로 번역함).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암시(暗示)하지 않았다. 역(逆)으로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대한 반응(反應)으로 특징(特徵)지어진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유(所有)하기를 바라셨다.
○.약속(約束)의 자녀(子女)를 기다린 지 십 년이 지나도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하나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의 첩(妾)으로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理解)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사래의 계획(計劃)은 상당히 기발(奇拔)하였다. 고대(古代) 관습(慣習)에 따르면 여종은 법적(法的)으로 불임(不姙) 여주인(主人)의 대리모(代理母) 역할(役割)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 하갈 사이에 낳은 자녀는 자신의 아이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이 계획(計劃)으로 아이를 얻기는 했지만,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아이가 아니었다. (갈 4:21~31, 만나주석)
○.하나님의 약속(約束)에도 불구(不久)하고 믿음의 부족(不足)으로 인해 불행(不幸)을 초래(招來)한 아브라함이 보였던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통해 대(代)를 잇기로 한 아브람의 선택(選擇)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의 계획(計劃)과 노력(努力)으로 얻은 듯 보이는 즉각적(卽刻的)인 보상(報償)은 앞날의 문제와 불행(不幸)을 초래(招來)한다는 교훈(敎訓)을 주고 있다.
(05월10일 (火) <아브라함 언약(言約)의 표징(表徵)>
(Q)~(창세기17:1~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言約)의 표징(表徵)으로서 할례의식(割禮儀式)을 행(行)하게 하셨는데 그 속에는 어떠한 영적(靈的), 예언적(豫言的) 중요성(重要性)이 있습니까?
(A)~○.<할례(割禮)의 용어(用語)>
할례(割禮)는 히브리말로 “브릿트 밀라”, 헬라어로는 “페리토메”peritome라고 한다. 영어의 circumcision은 'cut around'의 뜻을 가진 라틴어 “키르쿰키시오”(circumcisio)에서 온 말이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계약(契約)(언약)이란 뜻이고 “밀라”는 할례(割禮)를 뜻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할례(割禮)”하고 하는 것이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이다.
○.할례는 남자 성기(性器) 귀두 위에 덮여 있는 표피(表皮)를 제거(除去)하는 행위(行爲)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상징(象徵)이었다(창 17:11).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노예(奴隸)를 포함한 그 가정에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命令)하셨다. 이 명령을 받을 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고 그 아들 이스마엘은 13세 때 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언약의식(言約儀式)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은밀(隱密)한 표식(表式)을 몸에 가지게 되었다. 이 의식(儀式)은 엄격(嚴格)히 지키도록 명령된 외적(外的) 의식(儀式)이었다(창 17:12; 출 4:24; 수 5:2).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맞은 언약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 데 첫째 안식일(安息日) 언약(言約)(출 31:16-17= 시간적(時間的) 언약)이요 둘째 무지개 언약(창 9:12-15= 공간적(空間的), 자연적(自然的) 언약), 셋째 할례(割禮) 언약(창 17:10-14= 육체적(肉體的), 영적(靈的) 언약)이다.
○.할례(割禮)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言約)의 표시(表示)로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痕迹)이었다. 할례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라!"는 징표(徵標)이며, 상징(象徵)이었고, 또한 표시(mark)였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證明書)였다. 할례는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예식(禮式)이며 증거(證據)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表示)였다. 따라서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不淨)한 자는 거룩한 성(城)에 들어갈 수 없었다(사 52: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관련(關聯)하여 이러한 의식에 특별한 종교적(宗敎的) 의미(意味)를 부여(附與)하셨는데 그것은
(1)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육신적(肉身的)인 죄와 부정(不淨)을 떨쳐 버린다는 정결의식(淨潔儀式)의 상징적(象徵的) 표현(表現)이며(Calvin)
(2) 거듭난 새 생명의 정화(淨化)를 상징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번식(繁殖) 기관(器官)인 생식기(生殖器)의 성별(聖別)과 성화(聖化)가 요청(要請)된다는 의미(意味)이다. (창 17:1~19, 만나주석)
○.<할례(割禮)는 태어 난지 8일 만에>
이 때 할례를 실시(實施)하는 이유는 먼저 생리적(生理的)으로 유아(幼兒)가 별로 통증(痛症)을 느끼지 않으며 동시에 피가 가장 빨리 응고(凝固)되는 최적기(最適期)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외(以外)에도 상징적(象徵的) 이유가 있는데
(1) 의식(儀式)상, 새로 태어난 남자 아이는 7일 동안 부정(不淨)하므로(레 12:2) 그 이전(以前)에 하나님께 구별(區別)하여 드림이 합당(合當)치 않기 때문이고
(2) 구속사적(救贖事的)으로, 제팔일은 안식일(安息日)이 지난 첫 번째 날로서 그리스도의 부활(復活)(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는 ‘새 생명’을 상징(象徵)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0, 11).
○.<창세기17:13절 너희 살에 있어>
일단 할례의식(割禮儀式)을 통해 육신(肉身)의 살에 새겨진 언약(言約)의 징표(徵標)를 보고 하나님의 언약 내용(內容)을 마음 속 깊이 새기라는 말이다(롬 2:29). 이것은 마치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명(誡命)이 우리의 심비(心碑)에 새겨지지 않는 한 그 자체(自體)만으로는 아무런 소용(所用)이 없는 것과 같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에게 일방적(一方的)으로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언약은 인간의 죄 문제(問題)와 관련(關聯)되어 있고, 따라서 그것은 전적(全的)으로 인간 구속(救贖)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언약 내용을 충실(忠實)히 준수(遵守)하여야 할 책무(責務)가 있다(9절). 따라서 만일 인간이 그 책무(責務)를 게을리 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협정(協定) 내용을 위반(違反)할 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背叛)하는 일이 되어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무효화(無效化) 되고 마는 것이다. (창 17:1~19, 만나주석)
○.<계약(契約)의 표징(表徵)이 할례(割禮)이다>
그 계약(契約)을 "할례의 계약" 이라고 부른다(행 7:8).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꼭 지켜야 하는 계약 사본(寫本)이나 부본(副本)이라고 할 수 있다 (창17:9~10절). 그것은 표(sign)와 인(seal)이라 불리고 있다(롬 4:11).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이 계약은 이루어질 것이며, 때가 이르게 되면 가나안 땅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그것으로써 확증(確證)해 주기 때문이다. 가나안이 저들의 소유(所有)가 된 후에도 이 의식(儀式)을 계속(繼續)하는 것은, 이러한 약속(約束)들이 보다 미래(未來)에 있을 또 다른 가나안을 예상(豫想)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계속하여 그것을 기대(期待)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暗示)한다(히 4:8).
○. 그것은 그 계약(契約) 속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 편에서 지워지는 의무(義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계약을 수락(受諾)하고 동의(同意)하며 육체(肉體)의 더러움을 잘라버리는(할례는 이것을 보다 직접적(直接的)이고 근본적(根本的)으로 표시(表示)해 주고 있다) 의무(義務)일 뿐 아니라 일반적(一般的)으로 그들이 이후로부터 항상(恒常)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익히 알아 두어 준수(遵守)하는 것을 뜻한다. 할례(割禮)는 "율법(律法) 전체(全體)를 행할 의무(義務)" 를 인간에게 지워 주기 때문이다(갈 5:3).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될 것을 바라는 자는, 그의 백성이 되기를 동의(同意)하고 결심(決心)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할례(割禮)는 피를 흘리는 의식(儀式)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것은 피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히 9:23; 출 24:8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이제는 피를 흘리는 모든 의식(儀式)이 폐지(廢止)되었다. 따라서 할례는 침례(浸禮)로 대치(代置)된 것이다.
○.(2) 절단(切斷)해야 했던 것은 포피(包皮)의 살이었는데, 죄악(罪惡)이 만연(蔓延)되는 것은 흔히 생식(生殖)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우리들을 위하여 그 몸을 드리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의 신체(身體)의 한 부분(部分)을 드림으로써 계약(契約) 속에 들어오게 하셨다. 다른 부분을 떼어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부분은 몸의 은밀한 부분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割禮)가 진정(眞正)한 할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영예(榮譽)를 아름답지 못한 지체 위에 두셨던 것이다(고전 12:23).
○.(3) 그 의식(儀式)은 아기가 난 지 8일 만에 집례(集禮)되었다. 그보다 일찍 될 수는 없었다. 아기들이 할례에서 오는 고통(苦痛)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만큼 강(强)해지고, 또 최소(最小)한 안식일(安息日)을 한 번을 지날 수 있게 하기 위(爲)함이었다.
○.(4) 이방인(異邦人)의 자녀들도, 그 집의 주인이 그들의 진정(眞正)한 주인(主人)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게 하였다(창17:12~13절). 이것은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베푼 호의(好意)였으며, 그들도 적당한 때가 이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가정(家庭)으로 끌어들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갈 3:14 참조).
○.(5) 매우 엄격(嚴格)한 벌칙(罰則) 밑에서 이 제도(制度)의 경건(敬虔)한 준행(遵行)이 요구(要求)되었다(창17:14절). 할례를 멸시(蔑視)하는 것은 그 계약(契約)을 멸시(蔑視)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부모들이 그 자녀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모세의 경우처럼(출 4:24 참조) 그들은 위험(危險)에 빠지게 된다. 어릴 때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에 대해서는, 만일 그들이 성장(成長)하여서라도 이 의식(儀式)을 행하지 않았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분명히 심판(審判)하셨다. 그들이 자기들의 포피(包皮)를 잘라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의식(儀式)을 경(輕)히 여기고 소홀(疏忽)히 여기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言約)의 표징(表徵)으로서 할례의식(割禮儀式)을 행하게 하셨는데, 그 속에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救援)의 약속(約束)이 포함(包含)되어 있었다.
(05월11일 (水) <약속(約束)의 아들>
(Q)~(창세기18:1~15)과 (로마서9:9)에서 하늘의 손님을 대접(待接)한 아브라함의 행동(行動)은 손님들을 어떻게 대접(待接)했으며 아브라함의 환대(歡待)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好意)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을까요?
(A)~○.(창18:2)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이고도 진실(眞實)된 사랑으로 영접(迎接)한 행동(行動)이다. 여행(旅行)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待接)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提供)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慣例)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風習)이긴 하지만(출 22:21, 욥 31:32, 마 25:35, 딤전 5: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親切)이자 그의 삶이 항상(恒常) 나그네 대접(待接)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단수(單數)인 ‘내 주여’(my lord))를 사용한 점은 인상적(印象的)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學者)들은 이에 의거(依據)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즉시(卽時)로 깨달았다고 해석(解釋)하기도 한다. 그러나
(1) 이는 세 사람을 총칭(總稱)하는 대표 단수(單數)이며
(2) ‘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종교적(宗敎的) 의미(意味) 뿐 아니라 남편(男便)(12절)이나 상전(上典)(24:12) 또는 상대방(相對方)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의미(意味)도 함께 지닌 단어(單語)란 점
(3) 아브라함이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친히 증거(證據)하고 있는 점(히 13:1) 등에 의거(依據)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은 이후 서서히 그들의 정체(正體)를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17, 22절) 아직은 그들을 단순(單純)한 나그네로 알고 일반적(一般的) 차원(次元)에서 존칭어(尊稱語)를 사용한 것이다. (창 18:1~15, 만나주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같이 나타나신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보다도 더 소탈(疏脫)하고 절친하며 별로 장엄(莊嚴)한 위엄(威嚴)을 갖춘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것은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중의 한 인간과 같이 나타나신 때에, 곧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사에 찾아오셨던 저 놀라운 방문(訪問)과도 매우 흡사(恰似)하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을 먼저 나타낸 그 사람을 은혜(恩惠)롭게 찾아 주시며,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아브라함의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그 세 사람이 자기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세 사람을 하늘나라의 존재(存在)들이었는데 이제 인간의 육체(肉體)를 빌어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게 하고 그와 대화(對話)하기 위(爲)함이었다. 혹자(或者)는 그들 모두가 피조된 천사(天使)들이었다고 생각하며, 또 혹자(或者)는 그 중의 한 사람은 계약(契約)의 천사(天使) 곧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여호와라고 불러 그를 다른 천사들과 구별(區別)했다고 한다(3절). 바울 사도는 손님 대접(待接)을 장려(獎勵)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인용(引用)하고 있다(히 13:2). 자발적(自發的)으로 나그네들을 대접(待接)하는 자는 천사들을 대접하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영광(榮光)과 만족(滿足)함을 맛보게 된다. 신중(愼重)하고 공정(公正)히 판단(判斷)해 보아 아무런 나쁜 의심(疑心)을 품을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에게서 좋은 것을 희망(希望)하고 친절을 베풀라는 것이 사랑의 교훈(敎訓)이다.
○.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매우 공손(恭遜)하고 정중히 대하였다. 자기의 나이나 체면(體面)도 불사하고 극진히 정중한 태도(態度)로 "달려 나가 영접(迎接)하였으며" 그들은 단지 품위(品位) 있고 존경(尊敬)받을 만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었으나, 아브라함은 갖추어야 할 모든 예절(禮節)을 갖추어 "몸을 땅에 굽혔다." 신앙은 아름다운 예절(禮節)을 파괴(破壞)하는 것이 아니라 증진(增進)시키며, 모든 사람들을 예우(禮遇)하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주목(注目)하라. 정중한 예절은 경건(敬虔)을 표하는 훌륭한 장신구(裝身具)이다.
○. 그는 지극히 정성스럽게, 그리고 성가실 정도로 그들이 자기 집에 유(留)하기를 간청(懇請)했다. 그것을 큰 은혜(恩惠)로 생각하였던 때문이다(3,4절). 다음 사실을 알아두자.
○.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한 자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손님 접대하는 일에 있어서도 도량(度量) 크고 솔직하여(인사말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친구를 환영(歡迎)한다. 우리는 즐겨 남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이나 사람은 모두 기꺼이 주는 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악(惡)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누가 먹으려 하겠는가?(잠 23:6, 7).
○.그의 접대(接待)는 참으로 아낌없는 것이었지만, 검소(儉素)하고 소박했다. 거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진수성찬(珍羞盛饌)이나 진귀(珍貴)한 음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의 식당은 나무 그늘이었고, 멋있는 식탁보도 없었으며, 식기(食器)나 찬장(饌欌)도 따로 없었다. 음식도 송아지 고기 몇 접시와 화로에 구은 과자 몇 조각이었다. 그것도 급히 서둘러 요리(料理)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부유(富裕)했고 그의 손님들도 정중한 분들이었지만, 거기에는 특별한 진미(珍味)도 없었고 요리(料理) 종류도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양념된 고기나 특히 맛 좋은 과자는 없었다. 그러나 맛있고 소박하며 위생적(衛生的)인 음식들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별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의(有意)하자. 비록 음식이 소박하고 평범(平凡)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좋은 음식으로 감사해야 하며, 꼭 진수성찬이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런 음식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에만 마음을 쏟는 사람들을 유혹(誘惑)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1) 참으로 덕 있는 자는 위엄(威嚴)을 나타낼 필요가 없으며, 그들의 신중(愼重)한 겸양(謙讓)의 태도(態度)도 그들을 경멸(輕蔑)하지는 못한다.
○.(2) 진정(眞正)한 우의(友誼)는 죄 이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몸을 굽힌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겸손(謙遜)한 사랑으로 서로의 발을 씻겨 주라고 우리에게 교훈(敎訓) 하신 바 있다. 자지 자신을 이렇게 낮추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선행(善行)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1, 26). 믿음의 조상(祖上)은 그 사랑과 관대(寬待)함, 그리고 그 훌륭한 가정 관리로 유명(有名)하였으니, 우리는 그에게서 선한 일을 행하고 전하는 것을 배워야겠다.
○.이 하늘의 손님들은(최근에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으리라는 아브라함에게 준 계약을 확증(確證)하기 위해 보내졌던) 아브라함의 친절한 접대(接待)를 받은 반면, 그들은 그의 친절에 보답(報答)을 한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맞이하였고, 천사들에게서 그 보답(報答)으로 하늘나라의 은혜(恩惠)로운 소식을 받는다(마 10:41).
○. 남들은 일반 섭리(攝理)로 얻게 되는 바로 그 축복도 믿는 사람들은 약속(約束)으로 얻으며, 이 약속이 그들을 기쁘고 확신(確信)에 차게 만들어 준다.
○. 아브라함의 영적(靈的) 자손들은 저들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所望)을 그 약속에 의하여 받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탄생(誕生)된다.(벧전 1:23).
○. 인간이 생각하는 불가능(不可能)이 흔히 하나님의 약속(約束)과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수가 있다. 감각(感覺) 세계의 난점(難點)이, 참된 신앙인이라도 믿음이 약(弱)한 자들에게는 쉽사리 방해(妨害)가 되고 방황(彷徨)하게 하기가 일쑤다. 제 2의 원인(현실 세계)이 못마땅하게 보일 때에 제 1원인(조물주(造物主))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다.
○.아브라함을 방문(訪問)한 천상(天上)의 방문객(訪問客)들은 그가 준비한 음식을 실제로 먹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부활(復活)하여 영광스런 형상(形狀)으로 자신의 부활의 사실성(事實性)을 증명(證明)하기 위해 그랬던 것과 같다(눅 24:21~43). 그리스도와 천사(天使) 편에서 아브라함의 환대(歡待)를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마므레에 있는 그의 장막(帳幕)에 임한 그들의 방문(訪問)이 꿈이나 이상이 아니라 실제적 경험임을 아브라함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창 18:1~15, 재림교주석)
○.<(창18:9)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은 서서(창18:8절), 그들이 먹는 동안 시중을 들었다. 다 먹은 후 그들은 사라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이런 요청(要請)은 확실히 동양 풍습(風習)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낯선 이들이 부인의 이름을 알거나 부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을 통해 아브라함은 그의 방문(訪問)자들이 아마도 인간 이상의 존재(存在)이며, 그들의 요청(要請)을 통해 방문(訪問)이 그녀와 관계(關係) 있음을 암시(暗示)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대화(對話)를 계속하면서 그들의 정체(正體)는 분명(分明)해졌고, 반복된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은 전에 그에게 다섯 번 나타났던 그분을 분명히 알아보게 되었다. 이것은 사라가 남편에게 허용(許容)되었던 신적 현시(顯視) 중 하나를 직접(直接) 목격(目擊)한 첫 번째 경우(境遇)였다. 아브라함은 이미 알고 믿었다(롬 4:19, 20). 이런 사실과 창 18:9~15를 살펴볼 때, 이 방문(訪問)은 사라의 일생에서 최상(最上)의 경험(經驗)(그녀의 처음이자 유일(唯一)한 아들의 탄생(誕生))을 위해 그녀를 준비(準備)시키고자 계획(計劃)되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 사랑 실천(實踐)이 얼마나 귀한 교훈(敎訓)이 되는지를 깨닫게 해주시며 이웃을 위한 친절(親切)한 행위(行爲)는 하나님께서 보상(報償)해주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특히 아브라함의 모본(模本)을 통하여 이 땅에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대(期待)하게 한다.
(05월12일 (木) <소돔의 롯>
(Q)~(창세기18:16~19:29)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사역이 롯을 향한 그의 책임을 어떻게 행동하였으며 하나님을 끝까지 거절(拒絶)한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最後)의 모습과 교훈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실상(實狀)의 공통점(共通點)은 무엇이며 지금 이 순간(瞬間) 우리에게 필요한 삶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A)~○.<(창18:17)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멸(滅)하시려는 계획(計劃)을 알려 주신 이유(理由)는 이어 나오는(창18:18~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택(擇)한 민족 이스라엘의 조상(祖上)이 될 뿐 아니라 만민의 복의 근원(根源)이 될 아브라함(18절)에게는 ‘여호와의 도(道)를 지켜 행하는 것’(19절)이 진정(眞正)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자식(子息)과 후손(後孫)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使命)과 책임(責任)이 있었기 때문이다.
(2) 구속(救贖)의 원리(原理)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심판(審判)이 없는 구속(救贖)은 의미(意味)가 없으며, 구속(救贖)이 없는 심판(審判)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요 5:29, 롬 5:9) 하나님께서는 구속(救贖)과 심판(審判), 축복(祝福)과 저주(詛呪)의 두 길을 아브라함에게 제시(提示)함으로써(요 3:18) 이어지는 그 모든 후손(後孫)들이 소돔의 멸망(滅亡)을 경고(警告)로 삼아 축복(祝福)받는 구속(救贖)의 길을 택(擇)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아브라함에 관한 하나님의 친절(親切)한 생각(17-19절)>
소돔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그 이유(理由)와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결의(決意)가 거기에 나타나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餞送)하려 함께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그런 은혜(恩惠)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지혜(智慧)로운 자와 동행(同行)하는 자는 지혜를 얻게 된다(잠 13:20). 하나님께서 기쁘게 스스로에게 의논(議論)하심을 보라.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 숨기겠느냐?" (또는 혹자가 보듯이. "…것을 내가 아브라함에게 숨기고 있는가?")고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말하지 아니하고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하는 방식을 따라서 그의 뜻을 친히 나타내신다. 그러나 왜 아브라함이(하늘나라의) 국무회의(國務會議)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허락(許諾)하신 바 있으므로 그가 알고 동의(同意)하지 않고는 허락된 땅의 일부(一部)부인 그 도성(都城)들을 멸(滅)하시지 않으려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두 가지 이유를 여기에 제시(提示)하셨다.
○. 아브람함의 성격(性格)과 모범(模範)의 매우 밝은 측면으로 그는 자기 가족과 함께 기도(祈禱)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식(學識) 있는 사람이어서 그들을 가르쳤으며, 또한 능력의 사람이어서 그들을 명령(命令)하셨고, 가정(家庭)에서는 제사장(祭司長)이었을 뿐 아니라 예언자(豫言者)요 왕이었다. 여기서 다음 것을 살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그와 그 자손에게 약속(約束)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 약속에 준하여 그 권속(眷屬)들도 할례(割禮)를 받았고, 그는 그들을 가르치고 잘 다스리는 일에 지극히 유의(有意)하였다는 것이다. 가정의 축복을 기대하는 자는 가정의 의무(義務)를 깨닫고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여호와의 것이라면, 사역자(使役者)들이라면, 그의 역사(役事) 가운데서 그들을 훈육(訓育)해야 한다.
(둘째), 아브라함은 그 자녀들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권속(眷屬)들까지 돌보았다.
그의 종들도 교리(敎理) 문답(問答)의 교육을 받은 종들이었다. 가장들은 자기 지붕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실(行實)을 가르치고 보살펴야 한다. 가장 비천(卑賤)한 종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돌보아 주어야 할 귀중한 영혼(靈魂)의 소유자(所有者)들이다.
(셋째), 아브라함은 그의 가정의 실제적(實際的) 신앙을 향상(向上)시키는 일은 자기 관심사(關心事)요 임무(任務)로 삼았다. 그는 기묘(奇妙)한 사색(思索)이나 회의적(懷疑的)인 논쟁(論爭)으로 그들의 머리를 채워 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道)를 지켜 정의(定義)와 공도(公道)를 행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곧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일에 성실(誠實)하고 헌신(獻身)하며, 모든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정직(正直)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넷째), 그 중에서도 특히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後孫)들을 유의(有意)하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와 같이 살고 있는 권속들 뿐 아니라, 자기 후대(後代)에올 권속들이 자기가 후에도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신앙이 그 가정에서 융성(隆盛)해질 것을 염두(念頭)에 두었었다.
(다섯째), 그가 이런 일을 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약속 조건의 이행이었다. 자기 의무(義務)를 깨닫고 있는 자만이 약속된 혜택(惠澤)을 기대(期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無條件) 그 성읍(城邑)을 용서(容恕)해달라고 하지 않고, 어떤 조건(條件)하에 그곳의 보존(保存)을 요청(要請)했다. 만약 그가 계속하여 수치(數値)를 10보다 더 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추측(推測)하는 것은 분별(分別)없는 짓이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 수치(數値)가 거기서 머문 것에 안도감(安堵感)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롯과 집에 있는 그의 아내와 두 딸 외에도 롯의 결혼한 딸들과 그들의 가족이 또한 있지 않았을까?(참조 19:14, 15). 호의적(好意的)인 응답(應答)을 이끌어 낼만 한 숫자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호의적(好意的)인 응답을 얻어낼 희망(希望)이 보이는 데까지 그 수치(數値)를 감소(減少)해 나가려고 원래부터 의도(意圖)했을지도 모른다. 신령한 자비는 주저함 없이 아브라함의 간구(懇求)를 충족(充足)시켰다.(창 18:16~33, 재림교주석)
○.아브라함이 가진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인을 위한 큰 중재자(仲裁者)이시다. 그의 구원(救援)을 위하여 값을 치르신 그분은 인간 영혼(靈魂)의 가치(價値)를 아신다. 티 없이 순결(純潔)한 성질(性質)에만 있을 수 있는 그런 악(惡)에 대한 적개심(敵愾心)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무한(無限)한 선(善)만이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죄인에 대하여 나타내셨다. 온 세계의죄의 무거운 짐을 몸소 지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히는 고통(苦痛) 중에서도 그분은 자기의 능욕(凌辱)자들과 살해자(殺害者)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赦)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눅 23:34)라고 기도(祈禱)하셨다(부조 140).
○.부도덕(不道德)한 사람들에게서 결정적(決定的)으로 분리(分離)하여 생명을 위한 한 탈출(脫出)구가 있었다. 노아의 날에도 그러하였으며 롯의 때에도 그러하였고 예루살렘이 멸망(滅亡)하기 전에도 그러하였으며, 역시 말세에도 그러할 것이다. 경고(警告)의 기별(寄別)에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音聲)이 들려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널리 퍼진 부정(不淨)에서 떠나라고 명(命)하신다.
○.말세(末世)에 종교계(宗敎界)에 있을 부패(腐敗)와 배도(背道)의 상태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城)”(계 17:18) 바벨론의 계시(啓示)를 통하여 예언자(豫言者) 요한에게 보여졌다. 바벨론이 멸망(滅亡)하기 전 하늘로부터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參預)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災殃)들을 받지 말라”(계 18:4)는 초청(招請)이 하늘로부터 주어질 것이다. 노아와 롯의 시대(時代)처럼 죄와 죄인(罪人)들로부터 뚜렷한 분리(分離)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은 타협(妥協)할 수 없으며, 세상의 재물(財物)을 확보(確保)하기 위하여 돌아설 수는 없다(부조 165-167).
○.결국 멸망(滅亡)한 소돔의 운명(運命)은 하나님을 끝까지 거절(拒絶)한 이 세상(世上)의 최후(最後)의 운명(運命)을 보여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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