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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질문, 대답, 설명) 0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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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5-07 10:08 조회6,150회 댓글0건

본문

제7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5월 1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3분)
 
연구 범위: 창 15-19:29, 롬 4:3, 4, 9, 22, 갈 4:21~31, 롬 4:11, 롬 9:9, 암 4:11
 
기억절: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우리는 창세기 15장에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공식화하시는 중요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아브라함 언약은 노아와 맺으셨던 언약 다음으로 등장하는 두 번째 언약이다.
노아 언약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언약 또한 다른 민족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모든 인류에게 허락된 영원한 언약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창 17:7, 히 13:20).
이번 주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아브라함의 삶은 두려움과 웃음으로 가득하다. 아브람은두려워하고 있으며(창 15:1), 사라와(창 18:15) 하갈도(창 21:17) 그렇다. 아브람은 웃고 있으며(창 17:17), 사라와(창 18:12) 이스마엘도(창 21:9) 마찬가지이다. 이 부분은 인간의 배려와 따뜻함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브람은 악한 소돔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사라와 하갈 그리고 롯을 잘 보살핀다. 또한, 그는 세 명의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푼다(창 18:2~6).
이러한 배경에서 고귀함, 존귀함을 뜻하는 아브람의 이름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 17:5)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통해 하시려고 하는 일이 온 세상을 향한 것임을 깨닫게 된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한다.
느끼기
아브라함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맺은 언약에 충실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행하기
비록 넘어질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서 믿음으로 하늘을 향한 여정을 이어간다.
 
TMI 위로
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행하게 하신 특별한 제사 의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창 15:9~17)
※ 구주의 희생으로 그의 후손이 속량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3. 하갈을 통해 대를 잇기로 한 아브람과 사래의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창 16:1~16)
※ 구원에 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룬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
4. 할례 의식의 영적, 예언적 중요성은 무엇입니까?(창 17:1~19)
※ 몸, 특히 생식기에 피 흘리는 것으로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주님이 피를 흘려 희생할 것을 나타내는 의식이고 예언이다.
5.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어떻게 대접했으며 하나님의 호의에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창 18:1~15)
※ 하나님을 모시는 정신으로 대접했고 하나님은 아들의 약속을 확실하게 했다.
6.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창 18:20, 21, 19:1~11)
※ 폭력과 동성 연애 곧 성도착이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맺은 언약에 충실하여 다시 한 번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우리도 실수할 수 있지만, 은혜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5월 8일(일) 아브라함의 믿음
 
창세기 15:1~21과 로마서 4:3, 4, 9, 22을 읽어 보라. 아브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행하게 하셨던 제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창15:1~2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롬4:3,4,9,22]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답: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때를 기다렸다. 그의 제사는 구주의 대속을 믿는 증거였다.
 
아브람이 상속자에 대한 우려를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창 15:1~3),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의 “몸에서” 날(창 15:4)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언어가 미래의 메시아 왕의 씨를 나타내기 위해 나단 선지자에 의해 사용되었다(삼하 7:12). 아브람은 재차 확인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자신의 의로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창 15:6, 비교, 롬 4:5, 6) “여호와를 믿었다”(창 15:6).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문화에서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심판은 ‘정의’의 여신 마아트(Maat)의 잣대로 사람이 행한 의로운 행위를 헤아리는 것이었다. 즉,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아브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치신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행해야 할 제사 의식을 설명해 주셨다. 그 제사는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인간은 이 제사에서 상징된 것처럼 하나님의 의의 선물인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이 특별한 의식은 아브람에게 구체적인 기별을 가르쳐 주었다. 바쳐진 제물의 사체 위에 솔개가 내려온 것은(창 15:9~11) 아브람의 후손들이 “사백 년”간(창 15:13) 또는 “사대”가(창 15:16) 노예가 되어 고통당하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대째가 되었을 때 아브람의 후손들은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었다(창 15:16).
제사 의식의 마지막 모습은 굉장히 극적이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이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적 약속을 분명히 성취하시리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의지를 나타낸다(창 15:18).
본문에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창 15:18)라고 기록된 약속의 땅의 경계(비교, 창 2:13, 14)는 에덴동산의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언은 아브람의 후손들이 출애굽 하여 고향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이 예언 너머로, 세상 끝에 마침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 보이는 듯하다.
 
<묵상>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에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의 선한 행실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답: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으로 의로운 행위는 구원의 공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의로운 행실에 주목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무시하게 된다.
 
<부가설명> 나는 여러 번 말했지만,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다. 죄인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영생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가 되었다’(창6:3)고도 하고 ‘육체뿐이라’(시78:39)라고도 했다. 아담 후손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이 없는 존재가 되어서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에게 삼켜지는 육체의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호흡이 끊어지는 생명이 사그라질 때까지 겪는 고통의 기간일 뿐이다. 오늘날 세상은 고통의 세상이다.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고 한다.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죄와 사망의 영역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육체의 생명이 사그라지는 기간을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오늘날 인생이다. 성경은 이런 인생을 죄인이라고 한다. 사람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롭고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어도 그는 사그라드는 생명뿐이기 때문이 성경적으로는 죄인이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생명, 평화와 행복만을 누리는 생명이 없는 존재는 다 죄의 존재이다. 루시퍼도 마찬가지다. 제물을 죽여 불사르는 것은 이 죄를 없애는 구주의 희생과 대속을 가르치는 것이다. 결과로 죄인은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미리 죽는 것이다. 오늘날 그것은 침례로 표상한다. 우리가 죽을 때 죄가 간섭하지 못한다.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 영생하는 그 생명을 주실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이 생명을 얻어서 믿음으로 의가 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가 된 것 같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후5:21).
 
<교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몸에서 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임을 재차 확인받은 아브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5월 9일(월) 아브라함의 의심
 
창세기 16:1~16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갈과 동침하기로 한 아브람의 결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여인이 믿음의 두 가지 태도를 어떻게 대표하는가(갈 4:21~31)?
[창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갈4:21~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답: 기다려도 아들을 낳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가 이루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출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아니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행함으로 이루려는 것과 약속을 믿음으로 이루는 것을 예표하는 예언적 사건이 되었다.
 
아브람이 의심했을 때(창 15:2),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확인해 주셨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지만 아브람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명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그의 믿음을 잃은 듯 보인다. 아브람은 더 이상 그의 아내 사래를 통해 아들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희망을 잃은 사래는 먼저 나서서 아브람에게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널리 실시되던 관습대로 첩을 취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사래의 여종이었던 하갈이 이 일을 위해 선택되었다. 그 계획은 성공했다. 역설적으로,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듯 보였다.
사래와 아브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본문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일을 떠올리게 한다. 두 본문은 몇 가지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하와와 마찬가지로 사래는 적극적이며, 아브람은 아담처럼 수동적이다), 공통된 동사와 표현들을 사용한다(“말을 들으니라,” “취하다,” “주다”). 두 이야기에 나타난 유사성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행함과 은혜를 대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언급한다(갈 4:23~26). 두 이야기의 결과는 같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의 노력으로 얻은 듯 보이는 즉각적인 보상은 앞날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사래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나님 또한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바로 앞장에서 충만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재는 참으로 놀랍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시지만 그때는 그녀가 이미 아브람의 집을 떠난 후였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등장은 하나님 없이 행동하려 했던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낸다. “여호와의 사자”(창 16:7)라는 표현은 자주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호칭이다(참조, 창 18:1, 13, 22).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창 16:11). ‘듣다’(shama‘)라는 개념으로 끝맺는 이 이야기는, 이야기 서두에서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었던’(shama‘)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창 16:2).
 
<묵상>
이 이야기에서 아브람이 보였던 믿음의 부족을 우리도 갖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람처럼 자신이 이루려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의 이 사건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아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대조하여 보이는 사건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 사건을 약속의 자녀와 육체의 자녀로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길이고 약속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그 약속을 사람이 이루려고 열심히 행하는 것은 육체의 자녀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오늘날 재림교회 내에서도 아브람과 사래가 하갈을 이용하여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사상이 아주 강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믿음의 삶에 기쁨이 없고 피로가 쌓인다. 소위 성경 교사들은 이런 삶을 부추긴다. 한가지 단서는 붙인다. ‘성령의 역사로’라는 말이다. 자신이 성령을 받아서 노력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 흘리는 노력으로 죄를 짓지 않고 율법을 다 지켜서 그것이 하나님께 의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람이 듣기에 아주 그럴듯하다. 사래의 제안은 아브람이 듣기에 아주 그럴듯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성취할 능력이 없는 자라는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정으로 거듭나면 그 사람을 삶을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생명이다. 갈2:20이 이것을 고백한 말씀이다. 핵심은 진정으로 거듭났는가 하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았으면 영이 된 사람이 아니며 영이 되지 않았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마음이 된 사람이고(빌2:5) 그 마음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이 되며(롬8:5,6, 고후10:5) 그 생각이 그런 삶을 이루고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잠23:7). 아브람 사래 하갈의 계획과 그 실천은 후유증만 크게 만들었을 뿐이다.
 
<교훈>
사래의 계획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듯 보였지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의 계획은 앞날의 문제를 초래할 뿐이었다.
 
 
5월 10일(화)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
 
창세기 17:1~19과 로마서 4:11을 읽어 보라. 할례 의식의 영적, 그리고 예언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창17:1~19]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롬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답: 할례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생명의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예언적 예식이다.
 
앞선 이야기에서 나타난 아브람의 믿음의 부족은(창 16장), 아브람이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영적인 여정의 흐름을 중단시켰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아브람과 다시 연결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다시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맺었던 곳으로 데려오신다(창 15:18).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언약의 표징을 주신다. 할례의 의미에 관하여 학자들이 그동안 많은 연구를 했지만, 할례 의식이 피 흘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출 4:25), 그것은 희생 제사의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할례 의식은 할례를 받은 자가 의로 입혀지게 되었음을 나타낸다(비교, 롬 4:11).
할례를 통해 나타난 이 언약이, 첫 번째 메시아 예언을 가리키는 용어들로 묘사되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비교, 창 17:7과 3:15). 이 두 성경절의 유사성은 아브람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들의 육체적 출생 그 이상을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영원한 언약”(창 17:7)의 약속은 메시아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보장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타낸다(비교, 롬 6:23, 딛 1:2).
흥미롭게도, 영원한 미래에 관한 약속이 아브람과 사래의 개명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은 그들의 당시 상태를 나타냈다.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사래는 “나의 공주”(아브람의 공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로의 개명은 미래를 가리켰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며, 사라는 ‘공주’(모두를 위한)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이삭(‘그는 웃을 것이다’)의 이름은 아브라함의 웃음(성경에 기록된 첫 웃음, 창 17:17)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웃음은 회의적인 웃음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놀라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건 간에, 그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믿었지만, 그 믿음과 신뢰를 실천하면 사는 일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묵상>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의 뜻은 무엇이며 그 이름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 사라=공주, (공주보다는 왕비이다). 아브라함이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고 사라는 많은 무리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교회가 형성되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부가설명> 창15장에서 언약을 맺었지만 17장에서는 이름 바꾸어주시며 할례로 언약을 맺었다. 15장에서는 짐승을 잡아 제사하는 것으로 언약을 맺었으나 17장에서는 남자의 생식기를 베어 피를 흘리는 것으로 언약을 맺어서 짐승이 흘리는 피 대신에 사람이 피를 흘리는 예식을 행하게 하셨다. 출4:25에서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아들을 할례하고 그 포피를 모세에게 던지면서 ‘당신은 피 남편’이라고 말했다. 피 남편이라는 말은 교회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성경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라고 하여 하나님이 교회를 자기 피로 사셨다. 이 피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다. 할례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키는 예언적 예식이다. 그랬을 때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다. 이것은 사래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약속하는 개명(改名)이다. 이삭을 낳기까지 사라는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 이삭을 낳으므로 그는 열국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라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하면서 그 하늘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라고 가르쳤다(갈4:28). 할례와 개명은 이런 복음 진리를 나타낸다. 할례는 침례로 대체(代替)되었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 의식을 행하게 하셨는데, 그 속에는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약속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5월 11일(수) 약속의 아들
 
마지막에 등장한 할례의 모습은 이스마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를 포함했다(창 17:23~27). “모든”을 뜻하는 콜(kol)이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된다(창 17:23~27).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두를 포함하는 배경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나타나신다.
 
창세기 18:1~15과 로마서 9:9을 읽어 보라. 손님들을 맞이한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손님 접대에 관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아브라함의 환대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창18:1~15]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롬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답: 아브라함은 예배하는 마음으로 손님들을 대접했다. 이것은 성도들의 생활이 예배라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롬1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반응은 그의 믿음이 응답될 것을 증명하였다.
 
비록 아브라함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행동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이 그 나그네들이 누구였는지 알았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히 13:2). 아브라함은 “날이 뜨거울 때에...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창 18:1). 사막에서 손님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는 손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99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을 향해 뛰어갔다(창 18:2). 아브라함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여”(창 18:3)라고 불렀는데, 그 호칭은 주로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이었다(창 20:4, 출 15:17). 그는 그들을 앉힌 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급히 움직였다(창 18:6, 7). 그는 그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즉시 돕기 위해 그들 옆에 서 있었다(창 18:8).
하늘에서 온 손님들을 향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손님 접대를 위한 훌륭한 모본이 된다(히 13:2). 아브라함의 공손한 태도는 손님 접대의 철학을 나타내 보여준다. 나그네에게 존중과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저 보기 좋은 예의 바른 행동이 아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행동이 마치 하나님께 행하듯이 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임을 강조한다(비교, 마 25:35~40).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성경에서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배고프고 가난한 외국인으로 묘사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은, 인류를 향한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 보여 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류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람의 종이 되어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한다(빌 2:7, 8). 이곳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그분의 약속의 확실성을 보장한다(창 18:10).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숨어 있는 사라를 보시며(창 18:10), 그녀의 가장 깊은 생각까지 아신다(창 18:12).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웃었음을 아셨고, ‘웃음’이라는 단어가 그분께서 하신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회의적인 태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자리가 된다.
 
<묵상>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과 행인(히11:13)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가설명>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나 롯이 손님 대접한 것을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이라고 표현했다(히13:2).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 중에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창18:13~33). 두 사람은 천사인데 소돔으로 가서 롯의 대접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그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천사들인 줄 몰랐다. 롯도 그 두 사람이 천사인 줄 몰랐다. 그러나 손님 대접하는 그들의 삶이 그들을 강권하여 대접했는데 그분들이 하나님의 일행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수님 이름으로 대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마25:40). 그러므로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초대교회 관례였다. 요한 3서를 읽으면 디오드레베는 교회를 방문하는 손들을 내어쫓았다. 사도 요한은 그런 디오드레베를 대단히 나무라는 말을 썼다(9,10절). 요즘은 사기꾼들이 많아서 에베소 교회처럼 이런 누구든지 접대하는 미풍이 거의 사라진 시대가 되었고 가정에서도 아무나 불러들여 대접할 수 없는 사랑이 식어버린 세태가 되었다. 그래도 신분이 확실한 나그네는 접대할 수 있는 대로 접대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로마서 12:1절이 말하는 영적 예배가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런데 쉽지 않은 사회환경이 되어서 이런 미풍을 강권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아버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교훈>
나그네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손님 접대를 위한 모본이 되며,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한다.
 
 
5월 12일(목) 소돔의 롯
 
창세기 18:16~19:29을 읽어 보라.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사역이 롯을 향한 그의 책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창18:16~19:29] 이 본문은 너무 길어서 여기 옮길 수 없다. 각자가 찾아 읽기를 바란다.
 
답: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하고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알았으나 거기는 롯만 의인이었다(벧후2:7,8).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하셨다(창19:2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에 관한 약속이 이제 막 재확인되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 기쁜 소식에 감격하기 보다는, 소돔에 있는 롯의 운명에 관해 하나님과 간절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선지자일 뿐 아니라, 악한 자들을 위해 중보하는 선지자이기도 하다. “여호와 앞에...섰더니”(창 18:22)라는 히브리 표현은 기도했다는 의미의 관용구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가 사는 소돔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협상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요구는 오십 명에서 열 명까지 내려왔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에 열 명의 의인만 있더라도 소돔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었다.
두 명의 천사가 다가올 일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롯에게 찾아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창 19:1~10) 당시 소돔의 사람들이 얼마나 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주변에 있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은 참으로 악한 곳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마침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였다(참조, 창 15:16).
“이제 소돔의 마지막 밤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구름이 이 운명이 다 된 도시에 그늘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천사들이 그들을 멸망시킬 사명을 띠고 가까이 오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번영과 향락을 꿈꾸고 있었다. 마지막 날도 이전의 모든 날과 다름이 없었다.” (부조와 선지자, 157).
결국 하나님께서는 오직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두 딸만을 구원하셨다(창 19:15). 이는 아브라함이 요청한 최소 인원의 절반 정도가 되는 숫자였다. 롯의 경고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던 사위들은 도시 안에 머물렀다(창 19:14).
마침내 사람의 눈에 아름다워 보였던 소돔은 멸망당했다. 본문에서 ‘뒤집어 엎다’라는 뜻의 하파크(hafakh)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창 19:21, 25, 29) 이는 소돔의 멸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신 29:23, 암 4:11). 홍수가 본래의 창조를 ‘뒤엎어 버린’ 것처럼(창 6:7), 소돔의 멸망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뒤엎은’ 것이었다(창 13:10). 소돔의 멸망은 세상 끝에 있을 멸망을 예표하기도 한다(유 7).
 
<묵상>
죄에 빠진 소돔의 최후의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교해 볼 때 지구의 최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답: 예수께서 마지막 때 징조로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예로 드셨다(눅17:26~30). 오늘날 사회 현상이 바로 그때와 같다.
 
<부가설명>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아. 아브라함의 큰 형 하란의 아들이다. 하란이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자 데라의 막대 아들인 삼촌 아브람과 함께 성장하며 한 식구 같은 상태로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 가는 곳에 늘 같이 갔다. 가나안에도 같이 들어왔다. 그러나 축산이 생업인 그들은 목초지 때문에 갈라지게 되었고 롯도 장성한 사람으로 가족과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독립한 것이다. 그는 눈에 좋게 보이는 곳을 삼촌보다 먼저 선택했다. 소돔이 있는 그 지역의 온 들이 에덴 같이 보였다. 그만큼 비옥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돔은 죄가 관영한 도시였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16:49,50). 소돔은 교만하고 음식물이 풍족해서 태평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거만하고 가증한 일을 행했다. 롯은 그런 소돔으로 들어간 것이다. 증언은 마지막 때 하나님 백성들은 이런 도시의 죄악에서 멀리하라고 당부했다. 오늘날은 도시의 죄의 조류가 손바닥에 있다. 스마트폰이 그것이다. 재림성도들은 정신차리고 가증한 것을 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신7:26).

<교훈>
소돔을 구원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멸망한 소돔의 운명은 하나님을 끝까지 거절한 이 세상의 최후의 운명을 보여준다.
 
 
5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70~373, “율법과 언약”을 읽어 보라.
 
소돔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인내심 있고 결연한 간구는(창 18:22~33) 비록 죄로 인해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악한 자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열 명의 의인만으로도 소돔을 용서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하젤 박사(Gerhard Hasel)가 언급한 대로 단연코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비록 죄 없는 자라 할지라도 죄 지은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함께 처벌했던 오래된 집단적 사고 방식이 굉장히 혁신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변화했다. 의로운 남은 자의 존재가 전체를 보존하기 위한 기능을 했다. 의로운 남은 자로 인해 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한 성읍을 용서하실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예언에서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The Remnant, 1980, 150, 151).
 
“우리 주위에는 소돔에 임했던 것과 같은 무섭고도 절망적인 파멸로 달려가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날마다 누군가의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있다. 시간마다 누군가는 자비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죄인을 이 무서운 운명에서 피하도록 하는 경고와 간청의 음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려고 뻗친 손은 어디에 있는가? 겸비와 끈기 있는 믿음을 가지고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브라함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죄인을 위한 크신 중재자이시다.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값을 치르신 그분은 인간의 영혼의 가치를 아신다”(부조와 선지자, 1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오직 무지개와 할례만이 “언약의 표징”이라고 불린다. 이 두 언약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 고통점은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무지개는 노아가 번제 드렸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고, 할례는 언약의 표를 사람 몸에 피 흘리는 것을 맺은 것이다.
 
2.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신약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의 예로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그 또한 넘어질 때가 있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이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 불확실한 일인데도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확실한 것으로 굳게 믿은 것이고 의심으로 실패한 것들은 배우지 않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절한 악인들을 벌하신다는 개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하나님을 거절한 악인들을 벌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로서 그런 주장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 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분이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결정을 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확실한 설명이 있어도 길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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