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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함(질문, 대답, 설명) 10/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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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0-07 18:00 조회6,4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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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함

(10월 1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56분)

 

연구 범위: 창 1:24~27, 창 2:7, 19, 마 10:28, 전 12:1~7, 왕상 2:10, 왕상 22:40

 

기억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 17)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는 사탄의 거짓 약속 사이의 긴장은 에덴동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경고는 사라져 버릴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은 불멸하는 영혼 또는 영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법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서로 대비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말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육체의 죽음 가운데서 살아남는 무형의 영혼이 과연 존재하는가?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이 질문에 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히 알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참조, 시 139).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말씀, 곧 성경에서만 이 중요한 질문들에 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번 주 우리는 구약이 인간의 본질과 죽은 뒤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질과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 분명히 이해한다.

- 느끼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죽음을 뛰어 넘는 확실한 소망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

- 행하기

사탄이 지어낸 죽음과 사후 세계에 관한 오류에 넘어가지 않도록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선다.

 

TMI 위로

2. 창세기 2:7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 흙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살리는 기운) 불어넣었다고 했다.

3. 성경은 인간의 영혼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겔 18:4, 20, 마 10:28)

※ 영혼은 죽으며 멸한다고 했다. 

4. 창세기 2:7과 전도서 12:1~7을 비교해 보십시오. 죽은 자의 상태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죽음은 사람을 창조한 순서의 역작용이다.

5. 욥기 3:11~13, 시편 115:17, 시편 146:4, 전도서 9:5, 10에서 깨닫게 되는 죽은 자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생명작용이 끝나기 때문에 전혀 의식이 없다.

6. “조상들과 함께 누워”라는 표현은 죽음의 본질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왕하 24:6, 대하 32:33)

※ 흙으로 돌아가서 생명작용이 끝날 때 다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결론

인간은 전인적인 존재로서 몸과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짓말은 여전히 많은 사람을 사후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도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탄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10월 9일(일) “생령”

 

창세기 1:24~27과 2:7, 19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신 방법과 인간을 창조하신 방법 사이에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창세기 2:7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창1:24~27]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2:7,19]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답: 동물이나 사람을 다 흙으로 만드셨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창조주께서 친히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니 동물에게는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 주간의 여섯째 날에 육지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다고 선언한다(창 1:24~27).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말한다(창 2:19). 또한,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창 2:7).

동물과 사람 모두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사람의 창조는 두 가지 면에서 동물의 창조와 다르다. 첫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빚으신 후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사람은 생령, 즉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빚으신 육신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 27). 

창세기 2:7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그가 “생령”(nephesh chayyah)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이 없음을 의미한다. 영혼이 인간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의식적인 개체라는 주장은 성경에 배치되는 이교적 개념이다. 인간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무형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개념과 그 위에 세워진 모든 오류에서 비롯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 가운데 전인격과 분리되어 의식을 갖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놀라운 방법으로 창조하셨으며, 우리는 성경이 이 특정한 주제에 관해 실제로 말하는 것 이상의 것을 추측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본질 자체가 신비일 뿐 아니라(과학자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의식의 본질은 더더욱 신비롭다. 우리의 머리, 즉 뇌에 있는 몇 킬로의 물질 조직(세포와 화학 물질)이 어떻게 생각이나 감정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만들어 내고 저장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이야말로 이런 질문에 대해 인류가 정말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인정한다.

 

<묵상>

생명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우리가 생명보다 더 큰 기적인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가설명> 흙으로 몸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짐승이나 사람이 같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하였으나 동물은 흙으로 만들었다는 말 외에 다른 설명이 없다. 저자는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들었다고 표현했는데, 육체라는 말은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생긴 말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6:3에 사람이 범죄했기에 육체가 되었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또 시편 78:39에는 사람을 ‘육체뿐이라’라고 했다. 히브리어로 육체는 ‘바사르’인데, 몸이라는 말은 우리 말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확실한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바사르’도 ‘몸’이라고 번역하고 ‘육체’라고도 번역하였다. 헬라어는 ‘소마’를 ‘몸’으로 ‘살크스’를 ‘육체’로 번역하였다. 몸은 신체를 뜻한다고 보면 육체는 이 신체를 이루는 재료를 뜻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흙을 육체의 재료로 사용하였고 그것으로 만든 사람형상이 몸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 몸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이 사람형상의 몸이 생령이 되었는데, 육체로 구성된 몸이 생령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람을 살게 하신 기운이다. 그렇게 산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생령이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산 영이라고 했다(고전15:45). ‘생령’이나 ‘산 영’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후에 사람은 생령에서 육체가 되었다. 지금 사람은 육체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실상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날 당장 영의 생명을 잃어버렸고 구원의 기회를 위하여 주신 육체의 생명이(레17:11)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 매일을 죽어가다가 마침에 죽고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짐승과 사람이 똑같다(전3:18~20). 그러나 구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영의 생명을 회복해서 영이 된다(요3:5,6, 롬8:9).

 

<교훈>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에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로서 몸과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은 없다. 

 

10월 10일(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에스겔 18:4, 20과 마 10:28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이 인간의 영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겔18:4,20]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답: 범죄하는 영혼은 죽는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다.

 

죄악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연약하고 일시적이다(사 40:1~8). 죄에 오염된 그 어떤 것도 본질상 영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죽음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성경적 개념이 있다. 첫째는 인간과 동물 모두가 죽는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19, 20).

둘째, 사람의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생령(nephesh)으로 존재하지 않음, 즉, 존재의 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16, 17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만일 그들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지으면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18:4, 20에서 이 경고를 반복해 강조하신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마침내 늙고 죽게 된다는 것이다(롬 3:9~18, 23).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의 이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을 무효화 한다는 것이다. 만약 영혼이 죽음 이후 어느 다른 공간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죽음이 가진 딜레마에 관한 성경적 해결책은 몸이 없는 영혼이 죽음 이후에 낙원이나 연옥 혹은 지옥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최종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묵상>

예수님의 초림으로 확인된 재림의 확실성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에 있어서 그렇게나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없다면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까요? 

 

답: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중생으로 영이 된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된 지구에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창조 당시에 생령이었던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창조하신 생령이 영생하여 창조의 목적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재림이 없으면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무산되고 구원받았다는 말이 거짓이 된다.

 

<부가설명> 범죄하는 영혼은 죽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담의 자손은 다 범죄자이다. 말을 바꾸면 죄 자체다. 이것을 바울은 고전15:22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표현했고 롬5:12에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는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사망이 모든 사람이게 이르렀다고 했다. 또 롬5:18에서는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했다. 나아가서 고후5:21에서는 예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셨으나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았다고 했다. 예수님이 죄가 되셨다는 뜻이다. 이유는 그분이 사유하고 구원해야 할 아담 자손이 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죄가 되실 이유가 없다. 어떤 사람의 빚을 갚아주기 위하여 갚아줄 사람이 빚에 시달리는 사람이 될 이유가 없다. 있는 돈으로 빚을 갚아주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풍성한 생명으로 생명 잃은 아담을 생명으로 살려주면 될 것인데 예수께서 아담 대신 죽으셨다. 죄가 사망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가 되셨다는 말과 사망하셨다는 말은 같은 사실이다. 오늘날 신학은 사람의 죄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부자 법관이나 율법의 의로는 완전했다고 하는 바울은 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을 알아야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을 바르게 안다. “사람의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생령(nephesh)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망이고 죄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과는 죽는 것이다.

 

<교훈>

죄로 인해 오염된 모든 것들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우리의 몸과 영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최후의 순간 부활할 것이다. 

 

10월 11일(화)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감

 

창세기 2:7과 전도서 12:1~7을 읽어 보라. 두 성경 구절에서 어떤 차이점을 볼 수 있는가? 이 성경절들이 죽은 자의 상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는가?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전12:1~7]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답: 창2:7에는 사람을 창조하신 순서를 잘 계시해주셨고 전12:7에는 사람이 죽는 순서를 잘 설명해주셨다. 1~6은 7절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시적으로 묘사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인간은 “살아있는” 영혼(창 2:7; nephesh chayyah, “살아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이 영혼(soul)은 몸이 죽으면 존재하기를 멈춘다고 가르친다(겔 18:4, 20).

그러나 영(spirit)은 어떠한가? 영은 몸이 죽은 후에도 의식이 있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며,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전도서 12:7을 인용하여 그런 생각을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죽은 자의 영이 하나님이 계신 곳에 의식을 가진 채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서 12:1~7은 꽤 극적인 표현들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노화 과정을 설명한다. 7절에서는 죽음을 가리켜 창세기 2:7에 기록된 창조 과정을 반대로 돌이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창조 주간의 여섯째 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그런데 전도서 12:7은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허락하신 생기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생기가 더 이상 그들의 몸에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도서 12:7이 의인과 악인의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모든 죽은 자들의 영이 의식이 있는 개체로 살아남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악한 자들의 영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인가? 

 이와 같은 이해는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죽음의 과정이 인간과 동물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전 3:19, 20). 죽음은 그저 생명체로서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일 뿐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묵상>

우리는 종종 죽음은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음은 생명의 반대이며 생명의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라는 말씀에서 어떤 위대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죽음은 생명의 반대 현상이기 때문에 죽으면 생명을 잃는다. 죽음은 최종 멸망한다는 말은 생명이 영원한 승리한다는 보증의 말씀이다. 생명은 예수님이시다. 

 

<부가설명> 현재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현상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사람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고 있어서 현재의 삶이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거기에 영혼불멸설을 교리로 믿고 가르침으로 본질적인 죽음 자체는 없다고 믿게 하였다. 뱀이 말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의 기초교리다.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탄의 말이 에덴동산에서부터 대결하고 있다. 그런데 영혼 불멸이라는 사탄의 속임이 교회의 교리로 자리잡게 해서 사탄은 온 세상을 속이고 있다. 성경은 범죄하는 영혼이 죽는다고 했다. 범죄하면 생령은 육체가 된다(창6:3, 시78:39). 창조주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으므로 사람은 일단 생육해야 하는데 아담 부부가 그 금지한 열매를 먹는 그날 생명과 존재를 잃어버리면 이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조주께서는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의 생명을 거두셨으나 수명을 주시고 생육하게 하셨으며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셔서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므로 여자의 후손을 믿음으로 다시 생령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시고 육체의 생명이 있는 동안 구주를 믿도록 은혜의 조치를 하셨다. 육체의 생명이 있는 기간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6:1,2). 이것은 육체의 수명이 있을 때까지가 한계다. 수명이 끝나도록 구주를 믿지 않으면 심판의 부활에 일어나서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 소멸된다. 

 

<교훈>

죽음은 생명체로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호흡은 죽음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10월 12일(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욥기 3:11~13, 시편 115:17, 시편 146:4, 그리고 전도서 9:5, 10을 읽어 보라. 이 성경 구절들을 통해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욥3:11~13]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시115:17]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시146: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전9:5,10]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답: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문학적 표현일 뿐(욥 3:11~13, 시 115:17, 시 146:4, 전 9:5, 10) 죽은 자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때로 시가 모호하며 쉽게 오해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성경절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매우 분명하며, 사용된 개념들 또한 이 주제에 관한 구약의 전반적인 가르침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첫째, 욥기 3장에서 욥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출생을 한탄한다.(극심한 고난의 때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만일 그가 출생의 때에 죽었다면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욥 3:11, 13).

시편 115편은 죽은 자들이 내려가게 될 적막한 곳을 설명한다.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기(시 115:17) 때문에 그곳은 적막한 곳이다. 이 말씀은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늘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시편 146편에 의하면 죽음과 함께 개인의 지적 활동도 멈춘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 구절은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완벽하게 보여준다.

전도서 9장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무덤 속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고(전 9:5, 10) 덧붙인다. 이 말씀들은 죽은 자들에게 아무런 의식이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해 준다.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혼란도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 구원받지 못한 채로 죽은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나 잠시 머무르는 연옥은 없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놀라운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란 잠자는 것이며 한 순간의 침묵과 어두움에 불과한 것이다.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요 8:51, 52; 골 3:4)”(시대의 소망, 787).

 

<묵상>

죽음을 “사소한 문제”로 표현한 시대의 소망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어떤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까?

 

답: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룻밤 잠자는 것이고 아침이면 잠을 깨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소망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셨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요일2:25). 창조주께서는 아담과 생명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 생명은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이다. 즉 생명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창조 과정에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와 맺은 생명 언약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조건이다. 언약을 어기지 않는 표로 주신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것이다. 아주 쉬운 조건이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실과를 먹어서 언약을 어겼다. 그러자 창조주는 그에게 주기로 한 영생을 계속 줄 수 없게 되었다. 생명의 공급이 끊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죽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이기보다는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한 그 약속을 취소하신 것이다. 그러니 생명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명이 없어지면 사람은 생령이 아니다. 그냥 흙인 몸만 남는다. 생명이 떠나 생령이 아니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명한 결과이다. 이렇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흙뿐이기 때문이다.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78:39 개역). 흙으로만 있는 육체는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다. 

 

<교훈>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잠들어 있게 된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10월 13일(목) 조상들과 함께 누움

 

창세기 25:8, 사무엘하 7:12, 열왕기상 2:10, 그리고 열왕기상 22:40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그대가 죽음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에 무엇을 더해 주는가?

[창25: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왕상2:10]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왕상22:40] 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답: 조상들에게 돌아간다고 표현하고 또 누워 잔다고 표현했다.

 

구약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과 장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조상들에게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아브라함에 관하여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 25:8)라고 기록한다. 아론과 모세 또한 그들의 조상에게로 돌아갔다(신 32:50).

 

선한 왕과 악한 왕 모두 죽은 후에 같은 곳으로 갔다는 사실이 죽음의 본질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왕하 24:6, 대하 32:33)

[왕하24:6]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대하32:3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그를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그의 죽음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더라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답: 죽음의 본질은 흙으로 돌아가서 사람으로서의 그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같다.

 

죽음을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은 어떤 이가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rested)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다윗 왕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왕상 2:10). 같은 표현이 이스라엘의 몇몇 선한 왕 그리고 악한 왕의 죽음을 기록하는 구절에도 사용되었다.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는 표현을 통해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우리의 힘든 일들과 고통으로부터 쉬게 될 때가 온다는 사실이다. 둘째, 조상들이 이미 앞서 갔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되는 첫 번째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셋째, 그들 가까이에 매장됨으로 우리는 죽음의 무의식 상태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현대의 개인주의적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 가까이에 묻힐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소통도 없다. 그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될 영광의 날이 이를 때까지 의식 없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묵상>

죽은 자들이 여전히 의식을 가지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는 진리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죽은 자들은 아직도 호흡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을 전혀 모른다.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사람의 호흡이 멈추고 생명 작용이 끝나면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그 몸이 부패하기 시작할 뿐이다. 결과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산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그 사람에게 있는 생명의 작용이다. 호흡은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작용이다. 호흡이 멎으면 생명 작용이 끝난다. 생명 작용이 끝나면 의식이 없어지고 활동이 멈춘다. 그리고 몸은 흙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산 사람들이 호흡이 끝난 사람을 흙에 묻는다. 성경은 이것을 조상에게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모든 조상들이 다 흙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 후손도 흙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을 잔다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망 자체를 폐하셨기에(딤후1:10) 아담 후손이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으로 죽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이나 악인이나 다 부활한다. 다만 부활하는 때가 다를 뿐이다. 의인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로 무덤에서 나오고 악인은 일천 년 후 심판의 부활로 나와서 그들이 예수께서 주신 생명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 부활한 생명을 반납하게 되고 화장(火葬)된다. 그들은 영원히 없어진다. 이것을 성경은 영멸(永滅), 또는 영벌(永罰)이라고 한다. 영벌은 영생의 반대 표현이다. 영생이 영원히 사는 것이고 영벌은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지옥불에서 영원토록 살아어 불의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사탄이 만든 교리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교리의 잔인한 결과적 표현이다. 영벌은 영멸과 같은 말이다. 오해하지 말자. 

 

<교훈>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우리보다 앞서 잠든 조상들의 뒤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10월 1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각 시대의 대쟁투> 531~550, ‘최초의 큰 기만’을 읽어 보라. 

 

수술을 받기 위해 마취를 해본 적이 있다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마취 상태 중에도 뇌는 계속해서 활동한다. 사람이 죽어서 뇌 기능을 포함한 모든 것이 멈추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죽은 자들이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보게 될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 또는 천년 기가 지난 후에 다시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일 것이다(계 20:7~15). 그때까지 의인이건 악인이건 모든 죽은 자들은 쉬게 될 것인데 그 순간은 매우 짧게 느껴질 것이다. 여전히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죽음은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그러할지 모르지만, 죽은 자들에게는 그 시간이 매우 짧은 순간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죽는 시간에 하늘로 직접 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신조에 의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게 되었다. 곤란과 번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눌릴 때 자기의 가냘픈 생명의 줄을 끊어 버리고 영원한 세계의 복락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각 시대의 대쟁투, 539).

“사람이 죽을 때 의인은 상급을 받고 악인은 형벌을 받는다는 말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부조들과 선지자들도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그런 일에 대하여 암시조차 하지 않았다. 성경은 사람들이 죽는 즉시 승천하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부활할 때까지 자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549, 55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영혼과 몸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을 전인적인 존재로 설명하는 성경의 개념이 죽음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 당연하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명이 전인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죽으면 생명작용이 전인적으로 끝난다.

 

2. 이 세상은 영혼 불멸이라는 거짓말과 그 영향으로 뒤덮여 있다. 이러한 때 우리가 가진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기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놀라운 가르침이 극심한 반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 죽음은 의식이 없이 잠자는 것이며 깰 때는 예수께서 깨울 때이다. 그리스도인이 영혼불멸설을 진리로 믿기 때문이다. 

 

3.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죽은 자의 영혼을 보는 것과 같은 거짓 현상들로부터 우리를 어떻게 보호해 주는가?

※ 속지 않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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