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구약에 나타난 소망-(핵심 Q & A) +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4과 구약에 나타난 소망-(핵심 Q & A) +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0-18 13:18 조회3,497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제4과 구약(舊約)에 나타난 소망(所望)

                                     (10월 2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6분) 



<서언(緖言)>

성경에서 부활(復活)에 대한 가르침은 신약(新約)뿐만 아니라 구약(舊約)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즉 욥, 다윗 등의 고난(苦難)과 절망(絶望)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절정(絶頂)은 부활의 소망(所望)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부활은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忠誠)한 의인(義人)에게는 최고의 상급(賞給)이며 축복임을 이번 제4과를 통해 확신(確信)합시다.


(10월16일) (日)  <내가 하나님을 보리라>


(Q)~(욥 19:25~27) 욥이 가지고 있던 부활(復活)에 대한 확신(確信)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A)~○.우리는 예수님의 부활(復活)하셨기에 부활신앙(復活信仰)을 가지가 쉽습니다. 분명한 부활의 증거(證據)를 확실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예수님의 부활사건(復活事件)이 있기 2000년 전(前) 사람입니다. 창세기와 욥기는 같은 연대(年代)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예수님 부활전 2000년 전에 살면서도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욥은 빌닷 친구가 두 번째로 강력(强力)하게 반발(反撥)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답변하면서 부활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10월17일) (月)  <무덤의 권세(權勢)로부터>


(Q)~(시편 49편)에 기록된 어리석은 자들과 지혜(智慧)로운 자들의 차이(差異)와 영적교훈(靈的敎訓)은 무엇입니까? 


(A)~○.(시편49편1~20절)의 “고라 자손의 시(詩)”에서 전(傳)하고자 하는 영적교훈(靈的敎訓)과 차이(差異)는 근본적(根本的)인 차이(差異)가 있다. ⑴.어리석은 자들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세상(世上)의 부(富)와 명예(名譽)를 의지(依支)하고 살아가지만 ⑵.지혜(智慧)로운 자들은 세상의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확실(確實)한 약속(約束)의 소망(所望)을 바라보고 믿고 산다. 즉 근본적(根本的)인 차이(差異)는 주님의 확실(確實)한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을 믿고 살다 죽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10월18일) (火)  <“땅 깊은 곳에서”>


(Q)~(시 71:20)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려 달라는 다윗의 기도(祈禱)는 무슨 뜻 인가?


(A)~○.(시편71~24절)에서 다윗은 시련(試鍊)의 절망적(絶望的)인 상황(狀況)에서 전능자(全能者)하나님께 간구(懇求)한 기도(祈禱)가 (시편71편)으로 다윗은 원수(怨讐)들과 거짓된 고발자(告發者)들이 다윗이 고통(苦痛)과 고난(苦難)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거짓된 고발자(告發者)들에 대하여 (시편 71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안전(安全)과 소망(所望)을 찾으려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祈禱)이다. 즉 인간이 절망적(絶望的)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호(保護)하시며 우리에게 영생(永生)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記憶)하며 용기(勇氣)를 얻을 수 있도록 다윗은 기도(祈禱)하고 있다. 즉 “땅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시는” 미래(未來)의 육체적 부활(肉體的復活)의 소망(所望)으로 기도(祈禱)드리고 있다.


(10월19일) (水)  <“죽은 자(者)들은 살아나고”>


(Q)~(사 26:14, 19절)의 “영원(永遠)히 멸망(滅亡)할 자(者)들”과 “영생(永生)을 얻을 자(者)”들의 차이점(差異點)은 무엇일까요?


(A)~○.(이사야 26장)은 최후(最後)의 날에 악인(惡人)과 의인(義人)의 확연(確然)히 구분(區分)되는 운명(運命)을 대비(對比)한다. 즉 최후(最後)의 날에 하나님을 거절(拒絶)한 악인(惡人)들은 흔적(痕迹)도 없이 소멸(燒滅)되지만 하나님께 충성한 의인(義人)들은 부활(復活)하여 하나님께서 예비(豫備)하신 축복의 상급(賞給)을 받을 것이다. 즉 한편에서 악인(惡人)들은 “둘째 사망(死亡)”(계 21:8) 이후(以後)에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죽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完全)히 멸망(滅亡)당하고, 그들의 모든 기억(記憶)은 영원(永遠)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사 26:14). 이 말씀은 죽음 후에 살아 있는 영혼(靈魂)이나 영(靈)이 없다는 가르침을 확인(確認)한다. 나중에 있을 악인(惡人)의 최종적(最終的)인 멸망(滅亡)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악인(惡人)들이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짐으로 “그 뿌리와 가지”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 4:1). 


(10월20일) (木)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者)들>


(Q)~(단 12:2절)의 다니엘서에서 보게 되는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에 관한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다니엘 12장)에서는 부활(復活)에 관하여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모두의 부활(復活)에 관해 언급(言及)하면서 그들의 최후(最後)의 운명(運命)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띠끌 가운데 자는 자 중에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이 함께 부활(復活)하여 의인(義人)은 영생(永生)으로 악인(惡人)은 영원(永遠)한 수치(羞恥)를 당하여서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

<말미부록(末尾附錄)>


        제4과 구약(舊約)에 나타난 소망(所望)

                                      (10월 2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6분) 


 

<서언(緖言)>

성경에서 부활(復活)에 대한 가르침은 신약(新約)뿐만 아니라 구약(舊約)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즉 욥, 다윗 등의 고난(苦難)과 절망(絶望)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절정(絶頂)은 부활의 소망(所望)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부활은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忠誠)한 의인(義人)에게는 최고의 상급(賞給)이며 축복임을 이번 제4과를 통해 확신(確信)합시다.


(10월16일) (日)  <내가 하나님을 보리라>


(Q)~(욥 19:25~27) 욥이 가지고 있던 부활(復活)에 대한 확신(確信)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A)~○.우리는 예수님의 부활(復活)하셨기에 부활신앙(復活信仰)을 가지가 쉽습니다. 분명한 부활의 증거(證據)를 확실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예수님의 부활사건(復活事件)이 있기 2000년 전(前) 사람입니다. 창세기와 욥기는 같은 연대(年代)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예수님 부활전 2000년 전에 살면서도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욥은 빌닷 친구가 두 번째로 강력(强力)하게 반발(反撥)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답변하면서 부활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욥 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 “욥은 질병(疾病)중에 죽음과 대면(對面)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사후(死後)의 인간 상태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욥은 죽음을 수면(睡眠)으로 생각하였으며(욥 14:12), 그 후에 부활을 내어다보았다(욥14:14~15절). 이러한 구절(句節)들은 성경 중 다른 곳의 가르침들과 온전하게 조화(調和)를 이룬다.” (욥14:12)


○.욥의 셋째 변론 : 그는 부활(復活)에 대한 자신의 신앙(信仰)을 표명(表明)함  (욥 19:1-29)


○.(욥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救贖者)가 살아 계시니 후일(後日)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은 자기의 고난(苦難)의 원인(原因)이 될 만한 죄가 없는 사실을 기록하여 전(傳)하기 원하였다(23- 24). 이제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후일에 구속자(救贖者)가 그를 신원(伸寃)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이란 말은 역설체(力說體)로서 확신을 강조한다. “구속자(救贖者)”란 말은 종을 사서 그를 자유하게 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피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을 죄에서 해방(解放)시켜 주신다. 욥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와 옴을 생각하면서 살아 계신 구속자(救贖者)가 자기 문제를 해결(解決)해 주실 것을 내다본다. (욥 19:25~27, 만나주석)


○.(욥19:25) 나의 구속자(救贖者). 

   이것은 욥기에서 가장 많이 인용(引用)되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句節)은 욥이 절망(絶望)에서 확신과 소망(所望)으로 상당히 전진(前進)하고 향상(向上)했음을 나타낸다. “욥은 실망(失望)과 낙담(落膽)의 깊은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구원(救援)하시는 능력을 절대적(絶對的)으로 신뢰(信賴)하는 높은 경지(境地)로 올라갔다”(선지자와 왕, 163). “구속자(救贖者)”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고엘(go’el)은 “보수할 자”나 “보수하는 자”(민 35:12, 19, 21, 24, 25, 27) 또는 혈족이나 기업을 무를 자(룻 2:20; 3:9, 12; 4:1, 3, 6, 8, 14; 참조 룻 2:20 주석)라고도 번역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권리(權利)를 옹호(擁護)하고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救贖)하신다는 의미에서 종종 고엘 이라 불린다(사 41:14; 43:14; 44:24; 47:4 등). 욥은 이미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판결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시했다(9:32~35). 16:19에서 그는 자기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는 확신을 천명(闡明)했다. (욥16:21)에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소송(訴訟)을 진정(陳情)해 줄 대변자(代辯者)를 갈망(渴望)한다. (욥17:3)에서는 그가 하나님께 자기를 위해 보증인(保證人)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을 “판결자(判決者)”, 증인(證人), 대변자(代辯者), 보증인(保證人)으로 인정(認定)한 그가 이제 하나님을 자기의 구속자(救贖者)로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論理的)이다. 이 본문은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주(救贖主)로 나타내는 구약의 계시들 가운데 하나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使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완전히 계시된 심오(深奧)한 진리이다. (욥 19:25, 재림교주석)


○.후일(後日)에. 이 말은 욥이 아무리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다 해도, 재난(災難)이 아무리 연장(延長)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결국 자기의 결백(潔白)을 입증해 주실 것임을 온전히 확신한다는 뜻이다. (욥17:25, 26절)의 어법(語法)은, 하나님이 “땅 위에 서”시고 욥이 “하나님을 볼” 때에 그분께서 그를 옹호(擁護)해 주실 것임을 시사(示唆)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가 부활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感知)했음을 뜻한다. (욥 19:25~27, 재림교주석)


○.<실망(失望)과 낙담(落膽)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봄>

   욥은 지친 생애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그에게 장래의 가능성이 지적(指摘)되었고 희망의 기별이 전달되었다. 욥은 실망과 낙담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救援)하시는 능력에 대한 절대적(絶對的) 신뢰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의기양양(意氣揚揚)하여 선언(宣言)하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救贖者)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 화잇주석) (선지 163-164).


(10월17일) (月)  <무덤의 권세(權勢)로부터>


(Q)~(시편 49편)에 기록된 어리석은 자들과 지혜(智慧)로운 자들의 차이(差異)와 영적교훈(靈的敎訓)은 무엇입니까? 


(A)~○.(시편49편1~20절)의 “고라 자손의 시(詩)”에서 전(傳)하고자 하는 영적교훈(靈的敎訓)과 차이(差異)는 근본적(根本的)인 차이(差異)가 있다. ⑴.어리석은 자들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세상(世上)의 부(富)와 명예(名譽)를 의지(依支)하고 살아가지만 ⑵.지혜(智慧)로운 자들은 세상의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확실(確實)한 약속(約束)의 소망(所望)을 바라보고 믿고 산다. 즉 근본적(根本的)인 차이(差異)는 주님의 확실(確實)한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을 믿고 살다 죽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시편49편)은 “왜 부자(富者)가 인생 살 동안 좋은 조건(條件)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본 시편은 부요(富饒)가 죽음을 연기시키지 못함과 죽었을 때 부자들이 가난한 자와 같은 입장으로 낮춰질 것을 가르친다. (시49:4절) 이후에 이 교훈적(敎訓的)인 시편은 인생무상(人生無常)함과 세상의 부자(富者)들에게 주는 특별한 주의를 논(論)한다(시49:5-13절). 그리고 곧 악(惡)한 자들이 얻는 것과는 대조(對照)되게 의인들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인 영생으로부터 얻는 위로(慰勞)를 논한다. (시49:14-20절). 본 시편은 가족의 죽음을 바라보는 애도(哀悼)의 주간에 현대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낭송(朗誦)된다.  (시 49:1, 화잇주석)


○.(시편 49편)은 “왜 부자(富者)들이 삶에서 더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答辯)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재산(財産)이 죽음을 연기시킬 수 없다는 것과 죽을 때에는 부자(富者)들도 가난한 자들과 마찬가지의 비천(卑賤)한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교훈시는 처음 네 절을 서론에 할애한 후 (시49:5절)부터 특별히 이 땅의 부유(富裕)한 자들에게 초점(焦點)을 맞추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다룬다(5~13절). 그런 후에는 악인(惡人)들의 최종적 운명(運命)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의인(義人)들의 최종적(最終的) 운명(運命), 곧 영생(永生)으로부터 얻게 될 위로(慰勞)에 관해서 이야기한다(14~20절). (시 49:1, 재림교주석)


(10월18일) (火)  <“땅 깊은 곳에서”>


(Q)~(시 71:20)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려 달라는 다윗의 기도(祈禱)는 무슨 뜻 인가?


(A)~○.(시편71~24절)에서 다윗은 시련(試鍊)의 절망적(絶望的)인 상황(狀況)에서 전능자(全能者)하나님께 간구(懇求)한 기도(祈禱)가 (시편71편)으로 다윗은 원수(怨讐)들과 거짓된 고발자(告發者)들이 다윗이 고통(苦痛)과 고난(苦難)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거짓된 고발자(告發者)들에 대하여 (시편 71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안전(安全)과 소망(所望)을 찾으려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祈禱)이다. 즉 인간이 절망적(絶望的)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호(保護)하시며 우리에게 영생(永生)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記憶)하며 용기(勇氣)를 얻을 수 있도록 다윗은 기도(祈禱)하고 있다. 즉 “땅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시는” 미래(未來)의 육체적 부활(肉體的復活)의 소망(所望)으로 기도(祈禱)드리고 있다.


○.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 이다>

바로 앞의 ‘다시 살리시며’라는 문구(文句)와 같이 마치 죽음에 이른 듯 한 위기(危機)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저자(著者)를 구출(救出)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런데 ‘깊은 곳’( 테훔)은, 70인 역에서는 ‘심연(深淵)’ 혹은 ‘무저갱(無低坑)’(계 20:1)을 뜻하는 ‘아뷔소스’로 번역되었으며, 스올 곧 죽음의 상황과 마찬가지로(9:13) 극도(極度)의 고난(苦難)과 위험(危險)을 비유적(比喩的)으로 표현한 말이다. (Delitzsch, Rawlinson).  (시 71:20, 만나주석)


○. <땅 깊은 곳에서>

고난(苦難)과 낙담(落膽)의 극심(極甚)한 상태(狀態)를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참조 시 88:6; 130:1). 다윗은 하나님이 고뇌(苦惱)의 깊음으로부터 자신을 구원(救援)하실 것이며 안전(安全)한 곳에 세울 것이라는 적극적(積極的)인 확신(確信)을 표현(表現)한다.” (시 71:20, 재림교주석)


○. “땅의 깊은 곳에서”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시편 기자의 미래의 육체적 부활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맥상(文脈上), 이 표현은 마치 땅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과 같이 깊은 절망(絶望)에 빠진 다윗의 상태를 은유적(隱喩的)으로 묘사(描寫)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이 “비유적(比喩的)이기는 하지만 육체적 부활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Andrews Study Bible, 726, 시 71:20 해설).


(10월19일) (水)  <“죽은 자(者)들은 살아나고”>


(Q)~(사 26:14, 19절)의 “영원(永遠)히 멸망(滅亡)할 자(者)들”과 “영생(永生)을 얻을 자(者)”들의 차이점(差異點)은 무엇일까요?


(A)~○.(이사야 26장)은 최후(最後)의 날에 악인(惡人)과 의인(義人)의 확연(確然)히 구분(區分)되는 운명(運命)을 대비(對比)한다. 즉 최후(最後)의 날에 하나님을 거절(拒絶)한 악인(惡人)들은 흔적(痕迹)도 없이 소멸(燒滅)되지만 하나님께 충성한 의인(義人)들은 부활(復活)하여 하나님께서 예비(豫備)하신 축복의 상급(賞給)을 받을 것이다. 즉 한편에서 악인(惡人)들은 “둘째 사망(死亡)”(계 21:8) 이후(以後)에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죽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完全)히 멸망(滅亡)당하고, 그들의 모든 기억(記憶)은 영원(永遠)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사 26:14). 이 말씀은 죽음 후에 살아 있는 영혼(靈魂)이나 영(靈)이 없다는 가르침을 확인(確認)한다. 나중에 있을 악인(惡人)의 최종적(最終的)인 멸망(滅亡)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악인(惡人)들이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짐으로 “그 뿌리와 가지”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 4:1). 


○.<(사26:19) 귀한 진주(珍珠)로써 보호(保護)되고 있는 잠자는 성도(聖徒)들>

  생명의 시여 자(施輿者)께서 값을 주고 사신 그의 소유(所有)된 백성들을 첫째 부활로 불러내실 것이다.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고 거대(巨大)한 군대(軍隊)가 영원한 승리(勝利)로 나아올 그 승리(勝利)의 시간 이르기까지 모든 잠자는 성도(聖徒)들은 안전하게 보존(保存)될 것이며 귀중(貴重)한 보석(寶石)으로 간수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아신다. 살아있을 때 그들 속에 거하셨던 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을 것이요, 신(神)의 성품(性稟)에 참여(參與)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편지 65a, 1894). (사 26:19, 화잇주석)


○.<(사26:14) 그들은 죽었은즉 …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일로서 두 번째로 거론된 것은 한때 강력한 나라를 일구었던 세상 군왕(群王)들을 하나님께서 징벌(懲罰)하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죽음의 심연(深淵)으로 던지신다는 것이다. 본문을 직역(直譯)하면 ‘죽은 자들(메팀), 그들은 살지 못하겠고, 망령들(레파임), 그들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이다. ‘레파임’에 대해서는 14:9 주석을 참조하라. 14:9-11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죽음이 인간의 헛된 교만(驕慢)을 비웃는 최후의 조롱(嘲弄)꾼으로 등장한다.” (사 26:14, 만나주석)


○.<(사26:19) 주의 죽은 자(者)들>

   선지자(先知者)의 관심(關心)은 현재의 불만족(不滿足)스런 경험(經驗)으로부터 다시금 미래의 영광(榮光)스러운 기쁨,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 그들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때로 향한다(살전 4:16, 17). 에스겔은 바벨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들의 회복(回復)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비유(譬喩)하였다(겔 37:1~14). 그때 원수의 세력에서 구원받은 것은 사단과 무덤의 권세(權勢)로부터 받는 더 큰 구원(救援)의 표상이었다. 실제적인 바벨론에서 유대인이 귀환(歸還)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영적(靈的) 바벨론에서 구원(救援)받게 될 것을 예표(豫表)했다. (참조 계 18:2, 4 주석).(사 26:19, 재림교주석)


○.<(사26:19) 주의 죽은 자들은 … 일어나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失敗)가 하나님의 실패(失敗)일 수 없으며, 그들의 헛됨이 하나님의 헛됨이 될 수 없다. 인생의 최대 비극인 죽음마저도 정복(征服)하시는 생명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다. 이 믿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침울(沈鬱)한 절망의 애가가 부활의 환호(歡呼)로 돌변(突變)한다. 거듭되는 환난과 징벌(懲罰)에 눌려 사망의 그늘 가운데 누워 있던 신실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부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실한 성도들이 마지막 날 부활의 영광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참예할 것이다. 본문은 부활(復活) 교리를 가르쳐주는 구약의 몇 안 되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25:8, 겔 37:1-14, 호 6:2).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 내어 놓으리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이슬’로 비유(譬喩)된다(시 133:3, 잠 19:12, 호 14:5).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乾期)에 밤에 흡족히 내려 땅을 적시는 이슬은 팔레스타인 땅의 농작(農作)을 위하여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었다(창 27:28, 삼하 1:21, 왕상 17:1, 슥 8:12). ‘빛난 이슬’(탈 오로트)은 문자적으로는 ‘빛의 이슬’(Targum, Vulgate, Ewald, Grotius, Gesenius)이다. ‘빛’과 ‘이슬’은 공히 팔레스타인에서 생명의 상징(象徵)으로 여겨졌다.  (사 26:19, 만나주석)


(10월20일) (木)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者)들>


(Q)~(단 12:2절)의 다니엘서에서 보게 되는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에 관한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다니엘 12장)에서는 부활(復活)에 관하여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모두의 부활(復活)에 관해 언급(言及)하면서 그들의 최후(最後)의 운명(運命)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띠끌 가운데 자는 자 중에 의인(義人)과 악인(惡人)이 함께 부활(復活)하여 의인(義人)은 영생(永生)으로 악인(惡人)은 영원(永遠)한 수치(羞恥)를 당하여서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단12:2)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이 부활은 특별하다. 이 때 깨어난 사람들 중에는 영생(永生)을 받는 자도 있고, 수치(羞恥)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부활(復活)은 어떤 부활인가?


○.<부활(復活)에는 일반적으로 두 종류의 부활(復活)이 있다.>

(1) 첫째 부활: 이것은 모든 의인들 즉 구원 받을 자들의 부활이며, 예수께서 오셨을 때 일어난다. 

   (계 20:6, 살전 4:16-17, 요 5:29, 고전 15:52).

(2) 둘째 부활: 이것은 천년기 후에 있을 악인(惡人)들의 부활이다(계 20:5, 요 5:29).

   그러나 이 구절(句節)의 부활은 첫째 부활도, 둘째 부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에서 살아나는 사람들 중에는 구원(救援)받을 자도 있고 멸망(滅亡)받을 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부활을 ‘특별 부활’이라고 한다.

(3) 특별 부활: 이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直前)에 있을 부활이다. 

    (첫째 부활은 예수의 재림 직후에 일어나는 부활이었다.) 

    이 때 부활할 악인(惡人)들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 1:7)라고 하였다.


○. 예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에게 재림 전에 부활해서 예수께서 오시는 광경을 볼 것이라고 하셨다(마 26:64). 그렇다면 이때 부활하는 의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한 설명이 없으나 화잇 선지자의 글에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 “그의 이름이 붙은 책 (단7장에서 12장)까지에 그가 기록한 그의 놀라운 예언(豫言)들은 선지자(先知者) 자신까지도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으나 “마지막 때” 곧 이 세상 역사(歷史)의 종말(終末)에 그는 그의 몫을 담당하고 그의 업을 누리도록 허락(許諾)하시겠다는 복(福)된 보증(保證)을 그의 필생(畢生)의 사업이 마치기 전에 받았다.”(화잇주석, 단 12)


○. “무덤은 열리고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永生)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치(羞恥)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단 12:2)다.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고 죽은 사람들은 모두 영화롭게 된 몸으로 무덤에서 나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言約)을 듣는다. ‘그를 찌른 자’(계 1:7)들,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통을 조소(嘲笑)하고 조롱(嘲弄)한 자들, 그리스도의 진리(眞理)와 그분의 백성들을 몹시 핍박(逼迫)한 자들도 또한 일어나서 영광(榮光) 중에 계신 그분을 쳐다보고 충성되고 온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보게 된다.” (각 시대의 대쟁투, 637)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