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질문, 대답, 설명) 06/25/2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6-17 17:00 조회5,612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6월 2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7분)
연구 범위: 창 46, 롬 10:12, 13, 창 47, 창 48, 행 3:25, 26, 창 49, 빌 2:10, 창 49:29~50:21
기억절: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창 47:27).
창세기는 야곱의 말년과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다룬다. 우리는 야곱(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떠나(창 46장) 애굽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창 47장). 그리고 그는 거기서 죽는다(창 49:29~50:21). 그러나, 애굽에 정착해 사는 중에도, 약속의 땅에 대한 전망이 광범위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창 50:22~26).
야곱은 애굽에 도착하자마자 바로를 축복함으로(창 47:7~10)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리라는(창 12:3)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한다(물론 부분적으로 말이다). 훗날 죽음을 앞두고는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다(창 48장). 또한, 야곱은 자기 아들들을 축복하면서(창 49:1~28) 미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한 인상 깊은 예언을 한다(창 49:1~27).
그러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타향살이를 하며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과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비록 창세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사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만, 요셉의 유언은 또 다른 곳을 가리킨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학습 목표
- 깨닫기
야곱이 후손들에게 남긴 축복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한다.
- 느끼기
현재의 평안함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던 부조들의 믿음을 본받는다.
- 행하기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사모하며 충성된 하늘백성으로 살아간다.
TMI 위로
2. 야곱의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46:7~27)
※ 아브라함에 하신 예언의 성취와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표상하는 사건으로 중요하다.
3. 야곱이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바로를 축복했다는 사실이 갖는 중요성은 무엇입니까?(창 47:7)
※ 그가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드러낸 것이다.
4. 야곱이 그의 손자들 가운데 요셉의 두 아들만을 축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48:8~22)
※ 요셉을 장자로 세운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지파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5.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의 영적인 중요성은 무엇입니까?(창 49:1~28)
※ 실로가 오셔서 온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실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6. 창세기의 결말에는 소망을 나타내는 어떤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까?(창 49:29~50:21)
※ 야곱과 요셉의 장례를 가나안 땅에 하도록 부탁한 사건이다. 그것은 약속을 땅을 소망으로 두고 살 것을 부탁한 것이다.
결론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요셉과 재회했습니다. 하지만 야곱과 요셉은 그들의 소망을 애굽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바라 보았으며 그 소망을 후손들에게까지 분명히 물려 주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월 19일(일) 요셉에게로 간 야곱
창세기 46장을 읽어 보라.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는 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답: 46장은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들어가는 내용이다. 각각 읽어보기 바란다.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 성취되도록 진행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 객이 되어 400년간 있을 것이고 4대만에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될 것이며 자손이 번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야곱이 가나안의 집을 떠났을 때, 그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더는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요셉이 살아 있다는 좋은 소식은 그가 약속의 땅을 떠나도록 동기를 부여했음이 분명하다.
야곱의 출발은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했던 아브라함의 경험을 떠오르게 한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아브라함이 들었던 것과 같은 약속을 듣는다(창 46:3, 비교, 창 12:2). 여기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나게 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창 46:3, 비교, 15:1)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영광스러운 미래에 관한 약속을 담고 있다.
딸들을 포함해 애굽으로 간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포괄적인 명단은(창 46:7), 아브라함에게 아직 자녀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기억나게 한다. “칠십”이라는 숫자는(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포함) 전체의 개념을 나타낸다. 모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간다. 칠십이라는 숫자가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나라들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사실 또한 의미 있다. 이 사실은 모든 나라의 운명이 야곱의 이동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진리는 여러 세월이 지난 뒤 아브라함의 자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십자가 사건과 더 확실한 구원의 계획이 드러나게 된 후에야 비로소 더 분명해질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이야기가 얼마만큼 흥미롭든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영적 교훈을 배우는지와 별개로, 이 이야기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구원의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는 타락한 세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묵상>
로마서 10:12, 13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여기에서 복음의 보편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의 교회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까?
답: 어떤 사람에게도 복음은 차별 없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2, 13). 복음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그 어떤 차별의 장벽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사명을 가진 남은 백성으로서 온 세상을 위한 영원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가설명> 창세기 46장은 야곱 일가가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들어가는 사건을 기록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창15:13~16)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에 접어들었다.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장정만 60만명이 넘게 되어서 모세를 인도자로 출애굽했다. 창세기 46장은 이 일의 출발점이 되었다. 물론 그전에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이 실마리가 되었으니 그때를 출발점이라고 말해도 부인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케 볼 때 야곱 가족이 들어간 것이 출발점이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이 형성되었다. 그들을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를 믿는 자들이 교회를 이루고 하늘까지 가는 여정의 표상이 되게 하셨다. 출애굽 사건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늘나라까지 가는 여정을 자세히 알게 하는 역사적 자료가 된다. 또한 그것은 구원사업이 상상적 이론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이 짐작할 수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교훈>
야곱의 온 가족(칠십 명)이 가난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타락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6월 20일(월) 애굽에 정착한 야곱
하나님께서 브엘세바에서 야곱에게 “밤의 이상”(창 46:2)을 통해 떠나라는 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향한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곳이었다(신 17:16).
창세기 47장을 읽어보라.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영적 진리와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답: 창세기 47장은 야곱 가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고센 땅에 거주하게 되는 경위를 기록하였다. 애굽에 간 야곱이 바로를 축복할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가장 우대하고 높은 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자세였다. 또 형제들을 목자로 남게 한 것은 애굽의 관직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고 애굽에서 떠날 때 쉽게 떠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인과 인근 국민들을 살리고 곡식으로 애굽을 사서 바로의 소유가 되게 하고 애굽의 세금제도를 확립하는 내용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 중 다섯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고 그에게서 그들이 앞으로 살 땅에 대하여 허락을 받도록 하였다. 왕은 총리대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을 그 나라의 높은 관직에 임명하여 영화롭게 하고자 할 것이나,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는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이교의 궁정에서 당하게 될 시험에서 구원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요셉은 형제들을 권고하여 왕이 물을 때에 그들의 직업을 솔직히 말하도록 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 권고를 따르고 또한 그들이 이 땅에 얼마 동안 체류하기 위하여 온 것이지 이 곳에 영주하려고 온 것이 아님을 주의 깊게 말하여 원할 때에 떠날 권리를 확보했다. 왕은 그들에게 거할 곳을 배정하였다. 왕은 ‘땅의 좋은 곳’ 고센 땅을 제공했다”(부조와 선지자, 233).
바로는 지혜롭게 행동하여 이 체류자들이 그 땅에서 왕의 선물에 기대 구걸하여 먹는 자들이 되지 않게 했다. 그는 요셉의 형제들이 새로운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업”(창 47:3)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요셉의 형제들의 전문성을 활용하고자 했고, 심지어 그들이 그의 “가축을 관리하는 자”(창 47:6)가 되기를 제안했다.
야곱은 외국인이었으며 바로에 비해 지위도 낮은 나그네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땅의 지도자인 바로 앞에 서서 그를 “축복”했다(47:7). 나그네에 불과했던 야곱이,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통치자 바로를 축복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히브리어에서 “앞에 서다”(창 47:7, ‘amad lifney)라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제사장의 일을 나타내는 상황 속에서 사용된다(레 14:11). 애굽에서는 바로가 가장 높은 제사장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야곱이 바로를 축복했다는 사실은, 영적인 면에서 보면 야곱이 애굽의 가장 높은 제사장이었던 바로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묵상>
야곱이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바로를 축복했다는 사실이 갖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방이 신으로 여기는 모든 신보다 높고 애굽의 신으로 군림하는 바로보다 높다는 것을 행동으로 선포한 것이다.
<부가설명>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조상들에게 약속한 내용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족들이 내려왔을 때 형제들 중에 뛰어난 자들을 추천해서 애굽의 고관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센 땅에서 목축하게 하고 왕의 부탁으로 왕의 가축 돌보는 자로 일하게 하였다. 이런 요셉의 조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급 직종과 명예로운 대우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가? 생각으로만 하늘나라를 목적지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에서 평안을 택하고 세상 문화사조에 먼저 몸을 담그고 슬그머니 교회로 그것을 끌어들이고 있는 경향이 아닌지 정직하게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 섬기는 직분을 계급화시키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투쟁하고 수단을 쓰는 삶이 교회 현실이 아닌가?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넉넉히 그런 자리에 둘 수 있는 지위와 위치게 있었으나 가나안으로 가려는 의지를 상실하지 않도록 가족들을 하나님의 약속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조치했고 자기가 죽을 때도 자기 유골을 가나안 땅에 묻도록 맹세하게 하였다. 위대하다.
<교훈>
바로의 배려로 애굽 땅에 잘 정착하게 된 야곱은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던 바로를 축복함으로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그가 가진 영적 우월성을 나타냈다.
6월 21일(화)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 야곱
야곱은 죽음의 때가 다가오자, 전에 벧엘로 돌아가서(창 35:1~15)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소유”(창 48:4)에 관한 약속을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었던 약속이 (창 17:8) 갱신된 것이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가운데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은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야곱은 애굽에서 태어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그 축복은 그의 후손에 관한 미래의 약속이라는 배경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창세기 48장을 읽어 보라. 야곱이 여기에서 그의 다른 손자들은 제외하고 요셉의 두 아들만을 축복한 이유가 무엇인가?
답: 창세기 48장은 야곱이 임종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요셉에게 그것을 전하자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께 와서 애굽 여인에게서 난 아들을 야곱의 적통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복을 원했고 야곱은 손자 둘을 아들의 반열로 높이고 요셉에게 이스라엘 두 지파를 구성하게 하는 축복을 빌었다.
손자들 가운데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만이 야곱의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이 축복을 통해 손자에서 아들로 신분이 상승된다(창 48:5). 야곱의 축복은 둘째(에브라임)가 첫째(므낫세)보다 더 큰 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사실 야곱의 축복은 근본적으로 요셉을 위한 것이었다(창 48:15).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들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이다. 야곱은 그들에게 식량과 보호를 제공하셨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창 48:15). 그 하나님이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창 48:16) 분이셨다. 또한, 야곱은 그가 함께 씨름했으며(창 32:29),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신(창 32:26~29) “벧엘의 하나님”(창 31:13)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던 모든 경험을 회상하면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요셉의 인생을 돌봐 주셨던 것처럼, 자기 손자들의 현재의 삶, 그리고 언젠가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봐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와 같은 소망은 야곱이 세겜(창 48:22)을 언급한 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세겜은 그가 사들였던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창 33:19), 요셉의 뼈가 장사 될 곳이었으며(수 24:32),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게 될 곳이었다(수 24:1).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 가운데서도, 야곱은 그의 가족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묵상>
사도행전 3:25, 26을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는 창세기 12:3에 기록된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축복을 받았습니까?
<부가설명> 야곱이나 요셉, 그 조상 아브라함 이삭의 삶을 살피면 그들은 히브리서에 기록한 대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부토 야곱까지 방랑 생활을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여정으로 후대 신자들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의 정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다(고전7:31). 요셉은 총리 지위에 있었으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충성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좋은 지위와 직업을 가지고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도 나그네요 외국인이라는 신앙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녀들에게도 그 교훈을 깊이 깨닫게 하고 각골난망하게 해야하는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그래야 자녀들이 신앙의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수아 시대가 지나면서 이 신앙을 잃어버렸다. 여호수아 세대가 지난 후에 “그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 가나안 문화에 젖은 것이다. 오늘날도 하루가 다르게 세상 문화가 변한다. 스마트폰을 들고 자녀들은 그들만 통하는 말들을 사용하며 부모의 세대를 꼰대라고 생각하고 교훈을 받지 않는다. 사사기의 이 기록을 보면 그들도 그렇게 한 것 같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교훈>
야곱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자기 후손들의 삶 또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손자들을 축복했다.
6월 22일(수) 그의 아들들을 축복한 야곱
창세기 49:1~28을 읽어 보라.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의 영적인 중요성은 무엇인가?
답: 위의 기록은 야곱이 12아들들의 장래를 예언하는 내용이다. 성령께서 야곱에게 그들의 장래를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그것을 가감 없이 말했다. 내용의 핵심은 메시아(실로)가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야곱이 축복의 말을 할 당시의 가까운 미래였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관한 예언을 넘어서, 야곱은 메시아와 최종적인 구원의 소망을 본다. 이와 같은 소망은 서두에서 야곱이 사용한 “후일에”(창 49:1)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나는데, “후일에”라는 말은 메시아로 오실 왕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사 2:2, 단 10:14).
성경 본문은 이어서 야곱의 아들들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훗날 그들 각자가 마주하게 될 일을 미리 결정해 두셨다는 것과 같은 예정된 운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 각자의 품성의 특징과 그들의 자손들의 특징이 불러올 결과를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인자가 그렇게 하도록 예정하시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창세기 49:8~12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어떤 예언이 허락되었으며,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창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답: 유다지파를 통하여 실로(메시아)가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통치하실 것을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아가 오도록 준비해 두셨다. 사자(창 49:9)로 대표되는 유다 지파는 왕족과 찬양을 나타낸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오게 될 뿐 아니라, “평화”(사 9:6, 7)를 가져오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창 49:10) 할 실로 또한 유다에서 나올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메시아 예언으로 여겼으며,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는 말씀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0)라는 신약의 약속을 예표한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삼림의 왕, 사자는 이 지파의 적절한 상징이다. 그 지파로부터 다윗과 다윗의 자손이신 실로 곧 참 ‘유다 지파의 사자’가 나실 것이며 마침내 그에게 모든 권세가 주어질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충성을 표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236).
<묵상>
다른 모든 나라들이 예수님께 충성을 표하기 전에, 우리가 지금 예수님께 충성을 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는 이미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의 12 아들에 관한 미래를 예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했다고 하는데,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서는 저주를 받는 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였다. 그 저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축복이 담긴 저주였다. 이런 저주 예언은 저주대로 되라는 예언이 아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는 예언이다. 그들이 나타내는 당시의 성질을 고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 예언이다. 레위의 자손들은 그 저주가 축복이 되도록 성질을 고쳤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 지파가 되었고 성소봉사를 맡은 지파가 되었다. 모세는 그들이 이렇게 변한 것을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33:8~11)라고 축복했다. 그들은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것에게 절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 편에 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편에 서도록 자신을 처서 복종하는 나날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전9:27)?
<교훈>
죽음을 앞둔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유다 지파를 통해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 보았고 그 속에서 구원의 소망을 발견하였다.
6월 23일(목)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
창세기 49:29~50:21을 읽어 보라. 창세기의 결말에서 소망을 주는 어떤 위대한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답: 이 구절은 창세기 50장 끝 절까지 내용이다. 그것은 야곱의 장례에 관한 부탁고 장례와 요셉을 입관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두 사건은 다 소망을 미래에 성취될 가나안 회복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의 결말은 소망으로 가득한 세 개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소망이 나타난다.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과 장사를 약속의 땅을 가리키는 사건들로 묘사한다. 아들들을 향한 축복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창 49:28)에 관한 예언에 연이어,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사라가 장사 된 가나안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부탁한다(창 49:29~31). 가나안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을 묘사하는 이야기는 몇 세기 후에 있을 출애굽 사건의 예표가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리라는 소망이 나타난다. 야곱의 장례를 마친 후,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염려한다. 그들은 요셉이 이제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은 요셉에게 와서 그의 앞에 엎드리고 그의 종이 될 준비를 한다(창 50:18). 형들의 이 행동은 요셉의 예언적 꿈을 떠올리게 한다. 요셉은 그들을 안심시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창 50:19). 왜냐하면, 형들은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그 사건들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창 50:19~21, 비교 창 45:5, 7~9). 사람의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승리할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리라는 소망이 나타난다. 창세기의 마지막 절에 기록된 요셉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그의 죽음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상하게도 요셉은 그의 뼈를 장사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 50:25)라는 말이 이루어질 때를 가리킨다. 그의 후손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말에 순종하여 그의 유골을 메고 올라 갔다(참조, 출 13:19).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소망은 최종적인 구원과 회복의 소망에 대한 상징이요 예표이며,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실로(예수님)의 죽음으로 확실하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 대한 상징이다.
<묵상>
요한계시록 21:1~4을 읽어 보십시오. 이 성경절들이 우리가 가진 가장 위대한 소망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이 약속이 없다면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을 죽음으로 끝내는 것 외에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답: 예수님 재림하시고 재창조로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 영생할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언제나 영원한 나라가 실로(구주)로 말미암아 건설될 것을 예언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종결한다. 선지서들도 결론에 가면 회복된 세상에 관한 것을 직접 말하거나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이다. 창세기 마지막도 그와 같은 기록이다. 애굽에 정착할 것이 아니다.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야곱의 죽음이나 요셉의 죽음으로 표상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 번 죽어야 한다(히9:27).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 꼭 그래야 한다. 지금 우리가 호흡이 끊어져 죽는 날을 맞이하지 않아도 예수님 안에서 자아가 죽어야 한다.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계14:13). 이것은 호흡이 끊어지는 죽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날마나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도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괜찮다. 그러면 쉼이 있다. 야곱과 요셉은 세상적 수고를 끝내고 주님 안에서 쉼에 들어갔다. 그들이 눈을 뜰 때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야곱이 오시겠다고 한 그 ‘실로’를 볼 것이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기를 소망한다.
<교훈>
창세기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소망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6월 2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233~240,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읽어 보라.
“요셉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시한다. 요셉의 형제들을 움직여 그를 노예로 팔게 한 것은 시기심이었다. 그들은 요셉이 그들보다 더 크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에 그들은 그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을 모두 제거했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그의 꿈 때문에 번민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우쭐해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일을 통해 그들이 방해하고자 계획한 바로 그 사건을 실현시키셨다. 그와 같이 유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질투하고 그분께서 그들에 대한 백성의 관심을 앗아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왕이 되시는 것을 방해하고자 그분을 죽였으나 그들은 그와 같이 함으로 그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 신세를 통하여 그의 아버지의 가족을 구원한 구주가 되었다.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타락한 인류의 구속자와 구주가 되시고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셨다.…
요셉이 그의 친형들에 의하여 이방인에게 팔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제자들 중 한 사람에 의하여 가장 극악한 원수들에게 팔리셨다. 요셉이 그의 결백 때문에 거짓으로 고소당하여 투옥당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의로운 극기의 생애가 죄에 대하여 견책이 되었기 때문에 멸시와 거절을 당하셨다.…요셉이 불공평과 압제 하에서도 참고 온유하게 행한 일과 인륜을 어긴 그의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주고 고상한 자비심을 베푼 일은 구주께서 악인들의 악행과 능욕을 불평 없이 참으시고 당신을 살해한 자들뿐 아니라 당신께 나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해 주실 것을 예표한다”(부조와 선지자, 239, 24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 사실이 그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던 죄책감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요셉의 행동이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것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 용서를 100%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책감에 눌려 쉼이 없는 고통을 겪은 것을 나타낸다. 죄는 양심 있는 사람들에게 늘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주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어야 한다.
2. 요셉의 삶과 예수님의 삶 가운데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 형제들에게 팔려간 것, 고난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 형제들을 완전히 용서한 것, 백성들을 살린 것 등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