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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총리가 된 요셉 (질문, 대답, 설명) 06/1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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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6-11 02:26 조회5,5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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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총리가 된 요셉 

(6월 1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6분)

 

연구 범위: 창 41:37~46, 왕상 3:12, 창 42, 롬 5:7~11, 창 43, 창 44, 창 45

 

기억절: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창 41:41)

 

 요셉은 이제 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의 친형들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었다(창 42장).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베냐민과 함께 다시 돌아오라고 요구할 때 그들 스스로를 겸손하게 할 것이었다(창 43장). 그리고 베냐민의 안전이 위협받았을 때(창 44장), 그들은 그들이 마치 바로와 같이 여긴 이 권세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그들이 행한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선한 일을 행하셨음을 그들은 마침내 이해하게 될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요셉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져야 했을 그 시점에, 오히려 형들의 회개에 관한 내용이 더 많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셉에게서부터 그들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여정들과, 그 속에서 마주한 장애물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요셉과 아버지에게 저지른 악한 행동들을 기억하게 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죄악을 깨닫게 했다. 요셉의 형들은 그 모든 경험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 그러나 모두를 기쁨과 눈물로 가득하게 한 감동적인 결말은, 그들의 용서 받지 못할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한 용서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악을 선으로 바꾸심으로 요셉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한다.

- 느끼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고 형들을 용서한 요셉의 모습에 감동한다. 

- 행하기

 삶의 모든 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어간다. 

 

TMI 위로

2. 요셉의 성공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창 41:37~57)

※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신 것이다.

3. 오래 전 요셉이 꾸었던 예언적 꿈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창 42:1~17) 

※ 고난을 통하여 마침내 애굽 왕에게 꿈을 주셔서 요셉이 해석하게 하시므로 성취되었다. 

4. 형제들이 다시 요셉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베냐민의 존재가 어떤 효과를 가져 왔습니까?(창 43:16~34)

※ 형들이 베냐민을 사랑하는 것을 확인하고 우애를 회복하였다. 

5. 요셉이 점 치는 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 둔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44장)

※ 형들이 베냐민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확인하려는 시험이었다. 

6.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한 요셉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창 45:4~8)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닫는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와서 요셉 앞에 절하는 형들의 모습 속에서 오래 전 요셉이 꾸었던 예언적 꿈이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권력의 자리에 오른 요셉은 얼마든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의 모습입니다. 

 

6월 12일(일) 권력의 자리에 오른 요셉

 

 요셉에게 있어 바로의 꿈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하실 일”(창 41:28)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바로에게 그 즉시 자신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응답한다. 요셉은 경제 정책을 제안한다. 흥미롭게도, 바로는 요셉의 이야기 중에서 경제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두는데, 그는 꿈의 영적인 의미와 그 꿈을 주신 하나님 보다, 경제적 이익에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창세기 41:37~57을 읽어 보라. 요셉의 성공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

[창41:37~5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답: 바로에게 나라의 장래 있을 것을 꿈으로 알게 하시고 요셉에게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셨다. 또 그 꿈이 요셉의 해석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바로가 요셉을 책임자로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신의 꿈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그 땅에 닥칠 문제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는 요셉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창 41:37), 그 의견을 그의 신하들에게도 이야기했다. 바로의 선택은 종교적이었다기보다는 실용적이었다. 그럼에도 바로는 요셉이 “하나님의 영”(창 41:38)에 감동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요셉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창 41:39)라고 설명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창 41:33, 비교, 왕상 3:12).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당시 애굽의 역사적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정치적으로 볼 때, 바로가 요셉을 고관으로 임명한 것은 고대 애굽에서 낯선 모습이 아니다. 애굽에서 외국인이 고관에 임명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이어지는 칠 년의 세월은 곡식의 수확을 셀 수 없을 정도로(창 41:49) 풍요로운 시기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풍요로움이 초자연적인 섭리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다. 풍성한 수확을 “바다 모래 같이”(창 41:49)라고 설명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보여준다(창 22:17). 

 요셉은 그와 같은 축복을 자기 자녀들의 이름에 반영한다. 요셉에게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두 아들이 있었다. 아픔의 기억을 기쁨으로 바꾸셨다는 의미의 ‘므낫세’와 이전의 고통을 풍성함으로 바꾸셨다는 의미의 ‘에브라임’이 바로 그들이다.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셨음에 관한 얼마나 훌륭한 실례인가?

 

<묵상>

 창세기 41:50~52을 읽어 보십시오.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41:50~52]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부가설명> 요셉의 일생은 하나님께서 순복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다. 요셉의 뜻은 ‘더함’이다. 라헬이 요셉을 낳고 아들을 더 낳게 해주소서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다. 벤냐민이 출생함으로 이름으로 간구한 기도가 응답받았다. 그런데 이 이름으로 요셉은 모든 형제들과 가족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되기까지 그의 삶은 고통의 삶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조상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인내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이어갔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꿈으로 예언한 그 일을 이루도록 두 관원의 꿈과 바로의 꿈으로 요셉의 꿈을 성취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사망의 세상에서 겪는 믿음의 시련을 인내로 견디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를 가르쳐주고 마침내 그날 아침에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켜 새 하늘 새 땅에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교훈>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칠 년의 풍요로움이 이어졌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가 올 흉년을 대비하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6월 13일(월) 형들을 만난 요셉

 

창세기 42장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그 일이 사람의 악함과 불법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답: 42장은 각각 찾아 일어보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는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이 악했으나 요셉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도록 이끄셨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흉년은 야곱으로 하여금 곡식을 사기 위해 그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게 한다(창 42:1, 2).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피해자였던 불행한 노인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토록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아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줄 놀라운 일을 시작한다.

 이 만남은 두 가지 특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낸다. 첫째, 이 만남은 요셉의 꿈의 성취인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의 예언적 꿈에서 예견되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 서서 절 하더이다”(창 37:7). 요셉은 “나라의 총리”(창 42:6)이자 “그 땅의 주인”(창 42:30, 33)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자리에 올라 있는 요셉의 모습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창 42:6) 있는 형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지금 요셉 앞에서 절하고 있는 열 명의 형들은 요셉의 꿈을 비웃으며 그 꿈의 성취를 의심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창 37:8).

 둘째, 이 섭리적 만남은 과거에 있었던 일과 대구(對句)를 이룬다. 두 사건의 언어적 그리고 주제적 유사성은 인과응보적 특징을 강조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창 42:21)라는 표현은 그들이 요셉을 헤치기 위해 계획할 때도 사용되었다(창 37:19). 형들이 감옥에 갇힌 모습(창 42:17)은 요셉이 감옥에 갇혔던 것을 떠오르게 한다(창 40:3, 4). 요셉의 형들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20여 년 전 그들이 자신들의 동생에게 했던 일과 연결 짓는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창 42:22)라는 르우벤의 말은, “피를 흘리지 말라”(창 37:22)고 했던 과거 르우벤의 경고를 떠오르게 한다. 이 말은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일과 그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이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해 준다.

 

<묵상>

 우리는 모두 후회스러운 일을 저지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 또한, 예수님을 통한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참조, 롬 5:7~11)?

[롬5:7~1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답: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예수님 없니는 화목을 이룰 수 없다.

 

<부가설명>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온다. 우리가 그를 죽여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라고 했다. 요셉의 꿈은 형들에게 비웃음거리였고 가당찮은 것이었다. 천진한 요셉은 자기 꿈을 그대로 형들에게 말했다. 어쩌면 자랑스럽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닥치게 할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형들은 그것이 요셉을 죽일 생각을 할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꿈은 현실이 되어 형들 앞에 드러났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꿈꾸는 자로 본다. 허황한 꿈쟁이들이라고 증오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을 때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 부활하여 생명의 세상에서 영생한다고 말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교회들까지도 사람이 죽으면 그 죽지 않는 영혼이 천국에서 영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성경 진리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사망의 세상에서 요셉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내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섭리를 기다리며 충성하는 것이 복되다는 것을 요셉 사건으로 잘 가르쳐준다. 

 

<교훈>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 형제들은 총리가 된 요셉을 대면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과거 요셉이 꾸었던 꿈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6월 14일(화) 요셉과 베냐민

 

 야곱은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 중 유일하게 남은 베냐민이 형들과 함께 떠나는 것을 쉽게 허락할 수 없었다. 그는 요셉을 잃은 것처럼 베냐민마저 잃게 될까 두려웠다(창 43:6~8). 식량이 다 떨어지고(창 43:2), 유다가 베냐민을 꼭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맹세한 후에야(창 43:9) 비로소 야곱은 애굽으로 두 번째 내려갈 것과 베냐민이 그의 형들과 함께 갈 것을 허락했다.

 

창세기 43장을 읽어보라. 여기서 일어난 사건들에서 베냐민의 존재가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가?

 

답: 각각 찾아 읽어보자. 요셉이 베냐민으로 형들을 시험해봤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시기 질투한 것과 같은 성질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요셉을 팔고 아버지의 고통을 보며 그들의 잘못을 뉘우친 것 같다. 

 

 모든 사건 속에서 베냐민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모든 형제들이 요셉 앞에 섰을 때, 요셉의 눈에는 베냐민만 보였다(창 43:16). 오직 베냐민만이 ‘형제(동생)’라고 불린다(창 43:29). 베냐민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는 동안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이라고 불린다(43:16).

 요셉은 베냐민을 “소자여”라고 부르며 특별한 사랑을 나타낸다(창 43:29, 비교 창 22:8). 요셉은 베냐민에게 베푼 축복에서 “은혜”(창 43:29)를 언급하는데, 그 모습은 요셉이 형들에게 구했으나 받지 못했던 은혜를 떠오르게 한다(창 42:21). 요셉은 형들로부터 받지 못했던 은혜를 베냐민에게 돌려 준다. 

 요셉의 형들이 자루에 그대로 들어 있던 돈으로 인해 감옥에 던져질까 두려워하고 있는 동안, 요셉은 베냐민의 존재로 인해 그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한다. 마치 베냐민의 존재가 모든 상황 속에서 구원의 효과를 가져 오는 듯하다. 모든 형제들이 나이에 따라 앉아 정해진 순서대로 대접을 받는 동안, 가장 어린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이 대접을 받았다(창 43:33, 34). 그런데 요셉을 향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으로 인해 그들의 배다른 동생과 친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과거와 달리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편애가 형제들을 화나게 하지 않았다(창 37:3, 4). 

 

<묵상> 

 요셉이 그의 형제들 앞에서 베냐민을 더 특별하게 대우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형들의 진심을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베냐민에게 편파적인 호의를 베풀어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시기와 질투를 그 어린 막내 아우에게도 나타내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형제들은 여전히 요셉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서로 자유롭게 말했다. 이리하여 요셉은 그들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요셉은 형들을 좀 더 시험해 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떠나기 전에 자기의 은잔을 막내의 자루 속에 감추어두도록 명령하였다”(부조와 선지자, 228, 229). 

 

<부가설명> 형들을 만나서 요셉이 나타낸 행동을 보면 요셉은 팔려온 때부터 같은 어머니의 동생 베냐민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한 것 같다.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는데, 집에 혼자 남은 막내 베냐민을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그런데 형들이 양식을 사러 오면서 베냐민은 거기 없었다. 요셉은 베냐민 생각이 불현 듯 그의 뇌리를 쳤을 것이다. 형들이 자기에게 한 것처럼 베냐민도 해쳤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형들에게 집안 사정을 시시콜콜 물었고 동생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안도의 숨을 돌리고 다음에 반드시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이다. 형들은 애굽 총리가 그렇게 지시하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총리가 요셉인 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요셉은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안심했고 베냐민을 노골적으로 편애하는 모습을 형들에 보여서, 아버지가 자기를 편애할 때 자신을 미워했던 그런 성질이 아직도 있는지 시험하였다. 그러나 형들에게 그런 태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더욱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방성대곡했을 것이다. 베냐민이 무사하게 잘 있다는 사실이 요셉이 형들을 선대하는데 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형제라고 한 성도들을 위한 사랑이 이보다 더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 앞에 있어야 할 것이다. 

 

<교훈>

 베냐민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그를 환대했는데, 베냐민의 존재는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 구원의 효과를 가져 온 듯 보인다. 

 

<적용>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 그대에게 어떤 용기와 확신을 줄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베냐민을 사랑한 요셉 -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여행하여 요셉 앞에 나아갔다. 요셉의 시선이 그의 어머니의 아들 베냐민에게 쏠렸을 때에 그는 깊이 감동되었다.…그의 시선이 베냐민에게 미쳤을 때에 그는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동생이냐’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는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었다”(부조와 선지자, 227, 228).

 

<기도>

 예수님의 존재가 우리를 위한 구원의 보증이 되심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많이 부족하지만,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6월 15일(수) 점치는 잔

 

창세기 44장을 읽어 보라. 요셉이 점치는 잔을 다른 형제들의 자루가 아니라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 둔 이유는 무엇인가?

 

답: 형제들이 죄인으로 발견된 동생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와 평행을 이룬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셉은 구체적인 지시를 통해 다시 한번 형제들의 자루에 식량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귀한 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으라는 이상한 명령을 추가한다.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앞선 여정에서는 형제들이 베냐민을 데려오기 위해 가나안으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 앞선 상황에서는 형제들 모두가 그들의 자루에서 같은 것을 발견했지만, 이번에는 베냐민의 자루에서만 요셉의 잔이 발견된다. 귀빈으로서 요셉의 잔에 손을 댈 수 있었던 베냐민은 이제 귀한 물건을 훔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감옥에 가야 했다. 

 점치는 잔을 이용했다고 해서 요셉이 그것의 능력을 믿었다는 뜻은 아니다. 요셉은 “점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 일은 결코 없었으나 그들로 하여금 그가 저희 생활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하고자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229).

 요셉에게 점치는 잔은 초자연적인 영역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형제들의 죄책감을 일깨우기 위한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발견하신 죄악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창 44:16), 유다가 요셉의 의도를 제대로 깨달은 것 같다. 또한, 귀한 잔을 훔친 것은 가혹한 형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 형제들의 생각을 시험하게 하였다. 

 형제들의 격렬한 감정과 행동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 모두가 베냐민이 요셉과 같이 잃은 바 되어, 아무 잘못 없이 애굽에서 노예가 될까 두려워하며 같은 아픔으로 연합되었다. 

 이것이 바로 마치 숫양이 아무 잘못 없는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졌던 것처럼(비교, 창 22:13),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창 44:33) 노예가 되기를 간청하는 이유이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미치게 될 “재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 곧 대속물로 바친다(창 44:34).

 

<묵상>

 창세기 44:18~34을 읽어 보십시오. 유다의 대답에서 보는 것과 같이 대속의 과정 속에는 어떤 사랑의 원칙이 내재 되어 있습니까? 이와 같은 사랑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 (참조, 롬 5:8) 

 

답: 유다는 요셉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가 그 죄를 담당하겠다고 했다. 구원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가설명> 유다의 모습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친히 간구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한다(롬8:33,34). 요셉은 자신을 미디안 대상들에게 팔자고 제안한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그 죄를 지고 노예가 되겠다고 하는 것을 보며 유다를 비롯한 형들이 뉘우치고 베냐민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주위를 물리치고 베냐민을 껴안고 울고 형들과 포옹하고 자기를 드러냈다. 형제들의 놀라움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얼어붙은 것 같은 시간이 한참 흘렀을 것이다. 요셉은 그들에게 그 두렵고 놀란 장면을 속히 수습했다. 자기가 애굽에 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지 형들의 죄가 아니라는 말을 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식탁을 차렸다. 베냐민을 껴안고 울고 베냐민과 대화하고 아버지 안부를 묻고... 요셉이 나타내는 태도를 보고 형들이 마음을 진정하고 담소했다. 요셉 앞에 선 형들의 모습은 조사심판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들이 요셉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죄를 묻지 않고 용서했다. 성도들이 진정으로 그리도인이면 예수께서 형제라 부르시며 자신이 대신 처리하여 용서받은 그것을 다시 죄로 정하지 않고 용서한 사실을 크게 선포할 것이다. 

 

<교훈>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둔 점치는 잔을 통해 형제들의 마음을 시험했고, 형제들은 베냐민을 향한 연합된 마음을 통해 그들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증명했다.

 

6월 16일(목)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

 

창세기 45장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 속에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소망에 관한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답: 각각 45장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유다가 “내 아버지”(창 44:34)에게 미칠 “재해”에 대해 말하는 순간, 요셉이 “소리 질러”(창 45:1) 그의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렸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이 표현은(출 6:3, 겔 20:9),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음을 가르쳐 준다. 이 말은, 인간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임을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이 보고, 듣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요셉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그들은 요셉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믿게 된다.

 그리고서 요셉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창 45:5). 여기서 하나님을 언급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의 말은 형제들에게 그가 형들을 원망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매우 심오한 믿음의 고백이며 소망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한 일은 “큰 구원”과 “후손”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창 45:7).

 그 후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를 애굽으로 모셔올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그들이 애굽에 와서 “머물며” 살게 될 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그곳은 풍부한 목초지로 유명한 “애굽의 좋은 땅,” 고센이었다(창 45:10, 18). 요셉은 또한, 그들의 교통 수단까지 제공한다. 그들을 위해 수레가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줄 것이었다(창 45:27). 야곱은 그 수레를 요셉이 살아 있음에 대한 증거로 받아 들이고, 그것으로 인해 기운이 소생하였다(비교, 창 37:35, 44:29).

    

<묵상>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그런 넉넉한 마음을 품게 했을까요?      

 

답: 자기가 겪은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 8). 요셉은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증오와 분노를 품고 살기보다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언제나 최고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살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가설명> 요셉 사건은 결국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겪으실 길을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 8). 이 말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야곱 가족에게 행명과 후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겪으신 모든 사건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과정이었다. 요한복음은 특히 이 생명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생명이다. 예수님이 있는 사람이라야 생명이 있다(요일5:11,12).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는 생명이 없는 존재이다. 생명이 없는 존재는 죽은 자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참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생명없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으라고 강권하신다. 생명을 보존하는 정도가 아니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죽은 자들을 살려서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려고 생명이신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그것들은 죽은 상태에서 썩는 모습인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투지 않고 사랑으로 하나되어 아버지 기쁨이 되어야 한다.

        

<교훈>

 요셉은 진심으로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악한 행동마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음을 고백하고 온 가족을 애굽으로 초청하였다. 

 

6월 1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213~223, “애굽에서의 요셉,” 224~232,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읽어 보라.

 

 “갇혀있던 삼일간의 시간은 야곱의 아들들에게 쓰라린 슬픔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했던 잘못된 일, 특별히 요셉을 잔인하게 대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들은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쓰고 갇히게 되었는데, 만일 자신들의 결백함을 증명할 증거를 가져 오지 못한다면 거기서 모두 죽든지 노예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노력을 할지라도, 요셉이 참혹하게 죽었다고 믿고 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노예가 되게 하심으로 그들을 벌하고 계신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의 가족들이 식량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형들이 자신에게 잔인하게 행동한 것을 회개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베냐민에게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엘렌 G. 화잇, Spiritual Gifts, book 3, 155, 156).         

 

“요셉은 만족했다. 그는 형들의 진심을 확인했으며, 형들로부터 자신들의 죄에 대한 참된 회개의 열매를 보았다”(엘렌 G. 화잇, Spiritual Gifts, book 3, 1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요셉의 삶이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형통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형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요셉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실이 요셉의 자비로움을 설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으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그는 형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2. 요셉의 삶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이 당하신 고통의 예표가 되는가?

※ 그가 총리가 되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3.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시험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하시는가?

※ 전적으로 말씀을 따라 믿고 순종하는지 달아보신다. 예수님의 정신이 신자들의 정신인지를 검증하신 것이다. 

 

4.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일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죄책감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후에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 죄책감은 삶을 무기력하게 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믿으면 자신을 용서하는 믿음도 나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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