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제11과-꿈꾸는 자 요셉 (짧은 Q & A -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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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6-06 05:48 조회3,37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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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1과 꿈꾸는 자(者) 요셉>
(2022년06월11일 (안) 07시53분)
(日) 06월05일 <가족(家族) 내(內)의 갈등(葛藤)>
(Q)~(창세기 37:01~11) 야곱의 가정 내(家庭內)의 갈등(葛藤)과 분란(紛亂)의 요인(要因)은 무엇이었으며 요셉이 형(兄)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야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11년째 되던 해 야곱의 나이는 108세이며 요셉은 17세의 소년이었다. 야곱의 일부다처(一夫多妻)속에서 특히 라헬로부터 노년(老年)에 얻은 아들 요셉에게 노골적(露骨的)인 편애(偏愛)와 요셉은 형(兄)들의 허물을 아버지께 고자(告者)질과 그가 꾼꿈으로 인해 형들에게 더 큰 미움을받게되었지만,그 꿈은 앞으로 요셉의 삶에서 일어날 중요(重要)한 사건(事件)을 보여주는 예언적(豫言的) 꿈이었다
(月) 06월06일 <요셉을 향(向)한 공격(攻擊)>
(Q)~(창세기 37:12~36)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을 망각(忘却)한 인간의 생각(生覺)과 행동(行動)은 끔찍한 죄악(罪惡)을 유발(誘發)하게 되며 이에 죄(罪)를 회개(悔改)하지 않는 마음이 얼마나 위험(危險)하고 악(惡)할 수가 있는지를 그리고 요셉을 향(向)한 형(兄)들의 증오(憎惡)가 어떤 악(惡)한 행동(行動)을 통해 나타났으며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중혼(重婚)(창29:16-30)과 편애(偏愛)로 인(因)한 이복형제(異腹兄弟)들 간의 시기(猜忌)와 갈등(葛藤)은 결국(結局) 형제살인(兄弟殺人)이라는 극(極)한 상황(狀況)까지 치닫고야 말았다(잠 29:10).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定)해 주신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란 건전(健全)한 결혼윤리(結婚倫理)와 그로 인한 차별(差別) 없는 자녀(子女) 사랑만이 가정(家庭)의 평화(平和)를 존속(存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절제(節制)하지 못한 말이 결국(結局) 돌이킬 수 없는 비극(悲劇)의 발단(發端)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형(兄)들의 질투(嫉妬)와 증오(憎惡)가 얼마나 악(惡)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면서 형들의 악(惡)한 계획(計劃)을 역이용(逆利用)하신 하나님은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을 통해 다가올 영광(榮光)을 위한 시작(始作)이 되게 하셨다.
(火) 06월07일 <유다와 다말>
(Q)~(창세기 38장) 유다와 다말 사이에 일어난 부도덕(不道德)한 사건(事件) 속에서 어떤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얻을 수 있습니까?
(A)~★. 유다도 부도덕(不道德)했고, 다말도 부도덕(不道德)했다. 유다와 다말의 경우(境遇)는 인간적인 도덕(道德)의 잣대로 보면 불합리(不合理) 하고 비도덕적(非道德的)이고 악(惡)한 행동(行動)들이었다. 유다는 두 아들이 죽은 후 막내아들을 주기로 약속(約束)했으나 이행(移行)치 않아 며느리 다말은 가문(家門)의 생명(生命)을 이어야한다는 책임(責任)을 이행(移行)하려고 유다에게 접근(接近)하여 부도덕(不道德)한 방법(方法)을 지절렀다. 이러한 죄인들은 구원(救援) 받을 만한 아무런 희망(希望)이 없는 인생(人生)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악(惡)을 선(善)으로 바꾸셔서 은혜(恩惠)로 죽을 수밖에 없는 다말을 구원(救援)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를 통(通)하여 구원(救援)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감사(感謝)함으로 말씀을 신뢰(信賴)하고 믿음으로 반응(反應)해야 할 것이다.
(水) 06월08일 <애굽에서 종이 된 요셉>
(Q)~(창세기 39:01~06) 애굽에 노예(奴隸)로 팔려간 요셉이 형통(亨通)하고 성공(成功)하게 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애굽에 노예(奴隸)가 된 요셉에게는 커다란 유혹(誘惑)이었다. 의심(疑心)할 나위 없이 사탄의 손이 그 속에 있었다. 그 사탄은 세상(世上)의 걱정과 고민(苦悶)을 가지고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발견(發見)했을 때(왜냐하면 그 걱정 속에서도 요셉은 아직도 자기의 정직(正直)은 유지(維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부드럽고 달콤한 쾌락(快樂)으로 공격(攻擊)했다. 이것은 전자(前者)(세상에 걱정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멸망(滅亡)시켰고 수많은 사람이 이러한 공격(攻擊) 때문에 죽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誘惑)으로 큰 악(惡)을 행(行)하여 하나님께 죄(罪)를 짓는 것보다 차리리 그의 자리와 안정적(安定的)인 삶의 환경(環境)을 잃는 편을 선택(選擇)했다. 요셉처럼 우리에게도 절망적(絶望的)인 상황(狀況)이나 환경(環境)과 조건(條件)을 탓하지 말고 매사(每事)에 성실(誠實)하게 행동(行動)하며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식(認識)하며 겸손(謙遜)과 정직(正直)함으로 매사(每事)에 성실(誠實)하게 최선(最先)을 다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木) 06월09일 <바로의 꿈>
(Q)~(창세기 41:25,~29) 요셉은 왕의 꿈을 해석(解釋)하며 그 해석(解釋)이 어디서 왔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A)~★. 요셉은 꿈으로 인(因)하여 형(兄)들로부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애굽에 노예(奴隸)로 팔려왔으나 애굽의 감옥(監獄)에서 술맡은 관원(官員)과 떡맡은 관원(官員)에게 꿈을 잘 해석(解釋) 하여 주었고 이후(以後) 바로 왕의 꿈을 잘 해석하여 줌으로 일약(一躍) 30세에 총리(總理)로 발탁(拔擢)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최악(最惡)의 상황(狀況)에서도 전적(全的)으로 하나님께 자신(自身)을 맡길 때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형통(亨通)한 결과(結果)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악(最惡)의 상황(狀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역사하시는 분임을 교훈(敎訓)하여 주신다. <아멘>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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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깊이 살펴 보기> →
(日) 06월05일 <가족(家族) 내(內)의 갈등(葛藤)>
(Q)~(창세기 37:01~11) 야곱의 가정 내(家庭內)의 갈등(葛藤)과 분란(紛亂)의 요인(要因)은 무엇이었으며 요셉이 형(兄)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창37:2) 요셉이 십칠세(拾七歲)>
여기에 설명(說明)된 사건(事件)들은 야곱이 하란으로부터 돌아온 지 약 11년 후, 곧 그의 나이가 108세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창 30:25; 27:1 SDA주석 참조).
<(창37:3) 야곱의 노년(老年)에 얻은 아들 요셉>
요셉이 태어날 때 야곱의 나이는 91세였다. 바로 앞에 섰을 때 야곱의 나이가 130세였고(창47:9) 당시 (요셉은 30세)의 나이로 총리(總理)에 취임(就任)한(창41:46) 이후(以後) 7년의 풍년(豊年)(창41:47)과 2년의 흉년(凶年)(창45:6)을 겪었기 때문에 39세가 된다. 따라서 야곱의 나이 130세에서 요셉의 나이 39세를 빼면 91세란 계산(計算)이 나온다.
<(창37:3) 더 사랑하므로>
오랜 세월(歲月)을 두고 같이 지낸 결과(結果) 형제(兄弟) 중 가장 신앙적(信仰的)이고 효성(孝誠)스러웠던 요셉을 아비 야곱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외(以外)에도 야곱이 요셉을 특별(特別)히 사랑한 이유(理由)는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뒤늦게 본 아들인데다(창 30:22-24) 그나마 지금은 그 생모(生母)마저 죽고 없었기 때문이었다(창35:19, 20).
<과실(過失)을…고(告)하더라>
요셉은 개인적(個人的)으로 그의 형(兄)들에 관하여 목격(目擊)했던 것을 보고(報告)하였거나 그가 들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말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를 향한 형들의 격렬(激烈)한 증오(憎惡)를 불러왔다. 요셉은 고상(高尙)한 이상(理想)에 고무되어 그의 예민(銳敏)한 양심(良心)이 형들의 악(惡)한 행위(行爲)에 대하여 반발(反撥)했다. 야곱에게 이런 일들을 보고(報告)한 것은 아버지의 감화(感化)로 그들이 노선을 바꾸어 세겜 족속(族屬)을 학살(虐殺)했을 때처럼 그의 가족(家族)에게 미칠 불명예(不名譽)를 막기 위함이었음이 틀림없다.
<(창37:3) 이스라엘(야곱)이…그를(요셉) 깊이 사랑하여>
야곱은, 상냥함과 높은 이상 때문에 그 형제들과 매우 달랐던 요셉과의 교제(交際)에서 특별한 만족(滿足)을 얻었다. 야곱은 91세에 요셉을 낳았고 베냐민을 낳기까지는 수년(數年)이 흘렀기 때문에 그는 요셉을 “노년(老年)에 얻은 아들”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셉에게 <채색(彩色) 옷>을 입혔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는 그를 위하여 특별한 겉옷을 만들어 준 데서 절정(絶頂)을 이루었다. “채색(彩色)”에 해당하는 팟심(passim)이라는 단어(單語)의 뜻은 분명(分明)치 않다. 이것은 (삼하 13:18~19)에서 다윗왕의 딸 다말의 옷을 묘사(描寫)할 때도 사용된다. 따라서 요셉의 겉옷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소매가 있는 옷이었을 것이다. 이런 옷은 일할 때 입기에는 적합(適合)하지 않으며, 더욱이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자녀들이 입었던 종류(種類)의 옷이다. 개정표준역(RSV)에는 “소매가 있는 긴 겉옷”이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의 문법적(文法的) 구문(舊聞)은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그런 옷을 하나만이 아니라 “곧잘 만들어” 주었음을 암시한다. 어쨌든 이 옷은 야곱이 요셉의 형들을 지나쳐 버리고 그에게 장자권(長子權)을 넘겨주려 한다는 의심(疑心)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형들이 모두 그를 미워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부조와 선지자, 209,).
<(창37:4) 그를 미워하여>
야곱이 요셉을 좋아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는 아마도 요셉이 사랑하는 라헬의 자식(子息)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아들들의 악(惡)한 생활과 뚜렷하게 대조(對照)를 이룬 품성(稟性)의 탁월(卓越)함을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야곱처럼 다른 자녀보다 한 자녀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發見)한 많은 부모(父母)들은 어떻든 그들의 마음속으로 전적(全的)으로 무방(無妨)하다고 생각하는 그 편애심(偏愛心)을 감추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야곱은 터무니없는 노골적(露骨的) 편애(偏愛)로써 값비싸고 호화(豪華)로운 옷을 그에게 주어 라헬의 아들에 대한 편애(偏愛)를 드러냈다. 예상(豫想)했던 대로, 그러한 인정(認定)의 표시(表示)는 그의 다른 아들들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으며, 또한 근본적(根本的)으로 건전(健全)한 요셉의 품성(稟性)이 아니었다면 요셉 자신에게도 큰 해(害)가 되었을 것이다.
<(창37:5) 요셉이 꿈을 꾸고>
라헬의 큰아들을 자신의 상속자(相續者)로 삼으려는 야곱의 의도가 그 옷 속에 내포 (內包)되어 있었다. 이제 요셉의 꿈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의도(意圖)의 표시(表示)로 간주(看做)되었다. 그들이 그를 미워한 것은 단지 그의 꿈만이 아니라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는 대담(大膽)함 때문이었다(창37:8절). 요셉의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언급(言及)되지는 않았지만(20:3~7; 28:12~15), 계속(繼續)되는 그의 인생 역사(歷史)는 그 꿈이 그러했으며 자신의 개인적(個人的) 야망(野望)의 표현(表現)이 아니었음을 실제(實際)로 확실(確實)하게 보여 준다. 요셉의 꿈은 야곱이 우양(牛羊)의 사육(飼育)에만 그의 직업(職業)을 국한(局限)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 이삭처럼(26:12) 농업(農業)에도 종사(從事)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러한 활동(活動)은 아버지로서의 이삭의 축복(祝福)(27:28) 가운데 내포(內包)되어 있다.(창세기 37:05 재림교주석)
요셉의 <첫 번째 꿈>이 단지(但只) 그의 형제들에 대한 우월성(優越性)을 보여 주었다면 <두 번째 꿈>은 온 가족에게 확대(擴大)된다. 그의 형들이 첫 번째 꿈에 어떻게 반응(反應)했었는지를 알면서도 요셉이 이 꿈을 그들에게 말했다면 그것은 그의 판단(判斷) 미숙(未熟)을 결정적(決定的)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꿈은 오직 그들의 질투(嫉妬)와 분노(忿怒)만 증대(增大)시킬 뿐이었다.(창세기 37:09 재림교주석)
(月) 06월06일 <요셉을 향(向)한 공격(攻擊)>
(Q)~(창세기 37:12~36)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을 망각(忘却)한 인간의 생각(生覺)과 행동(行動)은 끔찍한 죄악(罪惡)을 유발(誘發)하게 되며 이에 죄(罪)를 회개(悔改)하지 않는 마음이 얼마나 위험(危險)하고 악(惡)할 수가 있는지를 요셉을 향(向)한 형(兄)들의 증오(憎惡)가 어떤 악(惡)한 행동(行動)을 통해 나타났으며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 잘못 저지른 일을 의심(疑心)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결백(潔白)함을 나타내려 한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죄(罪) 숨기는 것을 배웠다.(욥 31:33). 마귀(魔鬼)가 범죄(犯罪)하는 것을 가르칠 때 그 범죄(犯罪)를 감추는 방법(方法)까지 가르쳐 주며, 거짓과 위증(僞證)으로 도덕(道德)과 살인(殺人)까지 가르친다. 그러나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오래 번성(蕃盛)하지 못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얼마 후에 자기들이 서로 의논(議論)한 의견(意見)대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악(邪惡)한 행위(行爲)는 드디어 밝히 드러났다. 그들의 범죄(犯罪)는 세상(世上)에 알려지고 영원(永遠)히 계속(繼續)하여 전(傳)하여진다.
○. <여기에서 요셉에 대한 형(兄)들의 음모(陰謀)가 성취(成就)됨을 보게 된다.>
요셉의 아름다운 채색(彩色)옷을 탐내며 벗겨 빼앗다((창37:23절).
이와 같이 상상(想像)하여 본다면, 그들은 날 때부터 요셉을 깎아 내렸다. 그리하여 저들은 요셉을 괴롭히고 아버지를 모욕(侮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낙(樂)으로 삼았다는 징표(徵標)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를 놀려댔다. "자 요셉아, 아름다운 옷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님도 호지(꿰매지 않은) 않은 옷을 그렇게 벗기웠다. 또한 고난(苦難) 당하는 그의 성도(聖徒)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특권(特權)과 명예(名譽)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가장 귀찮은 쓰레기처럼 여기는 취급(取扱)을 당했던 것이다.
○. <(창37:13)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야곱은 그 아들들이 애써 숨겨왔던 사실, 즉 그들이 요셉을 얼마나 강렬(强烈)하게 미워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分明)하다. 이것은 그가 그들을 방문(訪問)하도록 요셉을 홀로 보낸 일이나 요셉이 없어졌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그의 반응(反應)을 보면 분명(分明)해진다. 그는 그들이 못된 짓을 했다고 조금도 의심(疑心)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에 대한 야곱의 염려(念慮)는 그들이 오랫동안 소식(消息)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겜의 동족(同族)들이 학살(虐殺)에 대하여 보복(報服)하거나 그들이 가축(家畜) 먹이는 일을 훼방(毁謗)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 <(창37:20) 자, 그를 죽여>
온 성읍(城邑)의 남자들을 살육(殺戮)했던 사람들에게 한 사람을 죽이는 일쯤은 심각(深刻)한 죄로 여겨질 리가 없다. 미움은 그들의 마음속에 그들의 친형제(親兄弟)를 냉혹(冷酷)하게 죽이고자 하는 지점에까지 발전(發展)되었다. 그들은 가정(家庭)과 그 통제(統制)하는 영향(影響)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요셉을 던져 넣으려 했던 그 “구덩이”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웅덩이의 하나였다. 그들이 아버지께 말하려고 계획(計劃)했던 이야기는 전적(全的)으로 믿을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BC 제2천년기에 팔레스타인은 아직 미개척지(未開拓地)여서 사자, 곰, 그리고 그 밖의 동물(動物)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지방(地方)이었다(참조 삿 14:15; 삼상 17:34).
○. <(창37:21) 르우벤이 듣고>
르우벤은 결코 완전(完全)하지 않았지만(참조 35:22), 그 마음은 다른 형제들만큼 완악하지 않았다. 장자(長子)로서, 그는 자신의 동생에 대한 특별한 책임감(責任感)을 느꼈고, 가능(可能)하면 그들로부터 그를 구원(救援)하기로 결심(決心)했다. 살인(殺人)을 계획(計劃)하고 있는 이들은 르우벤의 제안(提案)을 따르는 일에 당장은 만족(滿足)했다. 아직 무력하고 머뭇거리기는 하지만, 요셉의 형제 중 오직 르우벤만이 형제에 대한 자연적인 애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는 그들의 더 강한 의지(意志)들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저항(抵抗)할 용기(勇氣)가 부족(不足)했지만, 그는 적어도 소극적(消極的)이나마 요셉의 목숨을 구(求)하려고 시도(試圖)했다. 르우벤의 계획은 그 자체로는 칭찬(稱讚)할만 한 것이었지만, 그의 결단(決斷)과 경계(警戒)심의 부족으로 실패(失敗)했다.
○. <(창37:24) 구덩이에 던지니>
요셉을 혼내주고 모욕(侮辱)한 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겨 근처(近處)의 물 없는 구덩이에 던졌다. 구덩이는 가끔 이러한 용도(用途)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참조 렘 38:6). 그가 굶주림으로 고통(苦痛)스럽게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복수심(復讐心)을 만족(滿足)시켰음이 분명(分明)하며 그들은 그의 가련한 호소(呼訴)를 돌아보지 않았다(42:21, 22).
○. <(창37:26) 유다가…이르되>
유다는 이스마엘 대상(隊商)이 나타나자 요셉을 죽이지 않고 영구(永久)히 처리(處理)할 방법(方法)을 생각해내었다. 이 방법(方法)은 장자권(長子權)을 위한 경합(競合)에서 더 이상 경쟁(競爭)하지 못하도록 그를 효과적(效果的)으로 제거(除去)해 줄 것이었다. 그 형제들은 요셉이 가족의 재산(財産)을 증진(增進)시키는 일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손이 이루어 놓은 부(富)를 상속(相續)받을 아무런 이유(理由)가 없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제서야 모든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던 본래(本來)의 충동(衝動)을 깊이 생각하고 나서 그들이 친히 그에게 손을 대는 일이 다소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유다의 제안(提案)은 그들 모두에게 매우 환영(歡迎)할만 한 것으로 판명(判明)되었다.
○. <요셉을 판 일은>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억지(抑止)로 노예(奴隸)로 삼을 권리(權利)가 없다는 원칙(原則)(레 25:39~43)에 대한 공공연한 위반(違反)이었다.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도덕적(道德的) 타락(墮落)의 정도(程度)를 분명(分明)하게 나타낸다. 요셉을 팔았던 자들은 그 일로 말미암아 그들이 모든 자연적(自然的)인 애정(愛情)을 완전히 상실(喪失)했음을 증거(證據)했다. 요셉을 노예(奴隸)로 판 일은 그러한 거래(去來)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실례(實例)이다.
○. (창37:24절). 시기(猜忌)가 있는 곳에 동정(同情)이 없어지고 인간성(人間性)이 저절로 사라진다(잠 27:4). 너무나 치명적(致命的)인 독(毒)이 가득하여 그 악의(惡意)가 더 야만(野蠻)스럽게 되면 될수록, 오히려 달라고 애걸했다(창43:21). 옷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滿足)하고 생명만은 살려달라고 하는 애처로운 표정(表情)으로 탄원(歎願)하였다. 요셉은 자기의 결백(潔白)과 형제 관계(關係), 그리고 애정(愛情)과 복종(服從)을 호소(呼訴)했다. 그는 울면서 간청(懇請)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虛事)였다. 르우벤만이 가엾게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가운데서 조정(調停)했다(창42:22). 그러나 그는 무서운 구덩이에서 요셉을 구(求)하는 데 성공(成功)할 수 없었다. 형들은 차차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죽을 것이고 거기에서 산채로 매장(埋葬)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형들이 신하(臣下)가 되기로 맹세(盟勢)하게 된 요셉이 아닌가?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돕고, 떨어져서 그 목적이 달성(達成)되도록 역사하고 있다 할지라도 가끔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목적과 모순(矛盾)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주목(注目)하자.
○. (창37:25절). 요셉이 고통(苦痛) 중에 있을 때도 형들은 그를 무시(無視)하고 요셉이 당하는 고통을 동정(同情)하지 않았다. 구덩이에 갇혀 불행(不幸)을 슬퍼하면서 점점 가늘어져 가는 목소리로 형들에게 동정(同情)을 구(求)할 때 "형들은 옆에 앉아서 음식(飮食)을 먹었다"
○.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가책(呵責)을 느꼈다면 음식에 대한 식욕(食慾)을 잃었을 것이고 음식의 맛을 잃었을 것이다. 양심에 가해지는 큰 힘은 일반적(一般的)으로 감격(感激)과 언어(言語)의 욕망(慾望)을 당분간(當分間) 빼앗는다. 대담(大膽)한 죄인들은 도망(逃亡)할 염려(念慮)를 안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의 양심(良心)은 지금 비록 잠들었다 하더라도 오랜 후에 불러 게워졌다(창42:21).
○. 형들은 동생(同生)이 자기들을 지배(支配)하리라고 하는 공포(恐怖)로부터 풀려났다고 생각하면 기뻐했고, 그와는 반대(反對)로 자기들이 그를 짓밟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괴롭히던 두 증인(證人)을 박해(迫害)하는 자(者)같이(계 11:10), 형들은 요셉을 괴롭히며 조롱(嘲弄)하였다. 하나님의 권고(勸告)를 거부(拒否)하는 자들은 자기의 주장(主張)이 관철(貫徹)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을 만큼 승리(勝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속고 만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火) 06월07일 <유다와 다말>
(Q)~(창세기 38장) 유다와 다말 사이에 일어난 부도덕(不道德)한 사건(事件) 속에서 어떤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얻을 수 있습니까?
(A)~○. <유다와 다말의 사건은 계대결혼(繼代結婚)제도(制度)>
계대 결혼(繼代 結婚)이란 제도(制度)에 관한 것이다. 이 제도는 상속인(相續人)이 없이 죽은 형제(兄弟)의 대(代)를 이어주기 위하여 죽은 자의 형제나 그 친척(親戚)이 죽은 형제의 처(處)와 결혼(結婚)하여 아들을 낳아주던 관습(慣習)으로 수혼(嫂婚)이라고도 불린다. 이 제도(制度)의 목적(目的)은 자식(子息) 없이 불쌍히 죽은 형제의 가문(家門)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가족(家族)과 이름을 기억(記憶)하고 보존(保存)케 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다른 형제는 긍휼(矜恤)과 희생(犧牲)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의무(義務)를 준수(遵守)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이 계대결혼(繼代結婚)을 통하여 후사(後嗣)를 보게 되면 이 아들이 법적(法的)으로 죽은 아버지의 모든 권한(權限)을 정식(正式)으로 이어받게 된다. 훗날 이 제도(制度)는 모세의 법전(法典)에도 나타난다(신 25:5, 6). 한편 만약 시동생이 과부(寡婦)인 형수(兄嫂)와 결혼(結婚)하기를 싫어할 때는 공중(公衆) 앞에서 심한 모욕(侮辱)을 주었다(신 25:6-10).
○. 다말은 과부(寡婦)의 의복(衣服) 대신 사치스러운 창녀(娼女)의 복장(服裝)으로 차려입은 후 시부(媤父) 유다를 유혹(誘惑)하기 위해 광장(廣場)에 나가 앉았다. 다말의 이런 행위(行爲)는 물론 단순(單純)한 정욕(情慾)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1) 남편의 ‘씨’를 남겨 한 가문(家門)의 여자(女子)로서 떳떳이 자신(自身)의 권리(權利)를 유지(維持)하려는 무서운 집념(執念)의 결과(結果)였고 (2) 게다가 계대결혼(繼代結婚) 규약(規約)을 준수(遵守)하지 않은데 대한 일종의 자구책(自救策)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후(後)에 유다에 의해 ‘옳은 일’(창38:26절)로 간주(看做)되었다. 그러나 당시(當時)의 관습법(慣習法)이 그러한 행위(行爲)를 정당(正當)한 일로 간주(看做)하였다 해도 기독교(基督敎) 윤리적(倫理的) 측면(側面)에서 볼 때에는 분명(分明) 엄연(奄然)한 간음죄(姦淫罪)와 근친상간(近親相姦) 죄에 해당(該當)한다.
○. (창38:24) 석 달쯤.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姙娠)하였음이 확실(確實)하여진 때를 말한다.
<끌어내어 불사르라>
고대(古代)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社會)에서 한 가문(家門)의 가장(家長)은 소속(所屬) 가족(家族)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었다(창42:37). 따라서 유다는 셀라와 정혼(定婚)한 관계(關係)(창38:11절)에 있는 며느리 다말이 그 순결(純潔)을 깨뜨림으로써 가문(家門)과 족장(族長)의 명예(名譽)를 여지없이 실추(失墜)시켰기 때문에 극도(極度)의 분노(忿怒)로 화형(火刑)을 선고(宣告)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녀가 죽고 나면 이미 약속(約束)된 막내 아들 셀라를 그녀에게 보내야 하는 의무(義務)에서 해방(解放)될 수 있다는 속마음도 작용(作用)하였을 것이다. 한편 훗날 모세 율법(律法)하에서는 다말과 같은 간음죄(姦淫罪)는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범죄(犯罪)였고(신 22:20-24) 화형(火刑)은 어미와 딸을 아울러 범(犯)하는 극악(極惡)한 근친상간(近親相姦)죄(레 20:14)나 제사장(祭司長)의 딸이 행음(行淫)한 경우(레 21:9)에만 국한(局限) 되었다(신 25:13).
○. (창38:25) 보내어.
유다는 자신(自身)의 선고(宣告)가 집행(執行)되는 그 처절(凄切)한 광경(光景)을 보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없었음이 분명(分明)하다.
○. (창38:26) 그는 나보다 옳도다.
시부(媤父)를 속여 잉태(孕胎)한 다말의 행위(行爲)가 결코 죄(罪)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유다 자신의 처신(處身)에 비해 더 낫다는 말이다. 즉 유다는 하나 남은 셀라의 생명(生命)만을 보존(保存)하기 위하여, 그를 통하여 후손(後孫)을 낳아 주기로 했던 다말과의 약조(約條)(창38:11절)를 일방적(一方的)으로 무시(無視)한 자신의 실책(失策)을 솔직히 고백(告白)한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다말의 행위(行爲)가 단순(單純)한 욕정(欲情)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후손(後孫)에 대한 갈망(渴望)에서 행해졌음을 인정(認定)하고 다말을 용서(容恕)해 주었다.
○. 유다의 수치(羞恥)(창세기 38:12-23)
여기에 유다와 관련(關聯)되어 언급(言及)된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악(惡)한 일이 없었다. 유다는 그 부인(夫人)을 매장(埋葬)하였다. 홀아비들은 모든 육체(肉體)의 욕망(慾望)을 억제(抑制)하기 위하여 상당(相當)한 주의(注意)와 결심(決心)으로 자신(自身)을 지키도록 할 필요(必要)가 있다. 그는 태만(怠慢) 또는 계략(計略)으로 며느리에게 살아있는 아들들을 주지도 않고 며느리와 불의(不義)한 관계(關係)를 맺었다. 이 사실(事實)은 다말에게 유혹(誘惑)이 되었다.
○. (창38:23) <유다는 그의 죄가 공개적(公開的)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말하지 못하게 했다>
간음(姦淫)과 부정(不貞)은 지금까지도 모욕(侮辱)과 치욕(恥辱)으로 생각된다. 불명예(不名譽), 수치(羞恥), 유죄(有罪)로 입증(立證)되는 일들을 수치(羞恥)로 받아들였다. 이런 일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은 어떠한 그들의 일에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水) 06월08일 <애굽에서 종이 된 요셉>
(Q)~(창세기 39:01~06) 애굽에 노예(奴隸)로 팔려간 요셉이 형통(亨通)하고 성공(成功)하게 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창세기 39:1-6) 보디발의 종 요셉
1. 요셉은 팔렸다(창39:1절). 그러나 어떤 값을 지불(支拂)했든, 요셉을 산사람은 매우 헐값에 산 것이다. 이 거래(去來)는 단순(單純)한 노예(奴隸) 매매(賣買) 이상의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격언(格言)이 있다. 이 세상이 훌륭한 사람의 진가(眞價)를 알아내기만, 한다면 그 훌륭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진주(珍珠)를 선사할 것이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臣下)에게 팔려 갔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를 통하여 애굽의 대신(大臣)들과 공적(公的) 일에 친숙(親熟)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원하는 직위(職位)에 승진(昇進)할 수 있는 적합(適合)한 인물(人物)이 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고자 할 때는 어떻게 해서든 그 일에 합당(合當)한 자격(資格)을 구비(具備)해 주신다.
2). 비천(卑賤)한 종을 처분(處分)하거나 그들을 정착(定着)시키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작용(作用)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일을 통하여 어떤 중대(重大)한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창39:9) 인생(人生)의 초년(初年)에 받은 선(善)한 감화(感化)가 마음을 강(强)하게 함
―요셉이 초년(初年)에 받은 감화(感化)는 그의 마음에 하늘 군대(軍隊)를 주둔시킴과 같아서 무서운 시험(試驗)이 닥쳤을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惡)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 라고 부르짖게 하였다. …
○. (창39:9) 장래(將來)의 모든 것이 한 순간(瞬間)의 선택(選擇)에 달림
―관능적(官能的) 욕망(慾望)의 유혹(誘惑)보다 젊은이들에게 더 위험(危險)하고 더 치명적(致命的)인 것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 욕망(慾望)이 의지(意志)에 굴복(屈伏)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현세와 내세(來世)를 위한 우리의 몸과 영혼(靈魂)을 결정적(決定的)으로 파멸(破滅)시키는 욕망(慾望)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의 장래(將來)의 모든 행복(幸福)이 한 순간(瞬間)의 선택(選擇)에 달려 있었다. 요셉은 잠잠(潛潛)히 눈을 하늘로 향(向)해 도움을 청(請)하고 거룩하지 못한 욕망(慾望) 대신 단호(斷乎)한 결심(決心)으로 밝아진 시선(視線)을 들어 부르짖기를 “내가 어찌 이 큰 악(惡)을 행하여 여호와께 득죄(得罪)하리이까” 라고 하였다. 승리(勝利)는 그의 것이었으며 그는 유혹자(誘惑者)의 손에서 벗어나 구원(救援)을 받았다(편지 3, 1879).
○. (창39:20) 악(惡)이 번성(蕃盛)하여 보이는 것이 큰 시험(試驗)거리가 됨(애 3:27; 마 23:12)
요셉은 그의 신실(信實)하고 흠(欠) 없는 인격(人格) 때문에 좋은 평판(評判)도 자유(自由)도 다 잃었다. 악(惡)이 승(勝)하고 선(善)이 티끌 가운데 짓밟히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은 덕이 높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가장 혹독(酷毒)한 시험(試驗)이다. 유혹자(誘惑者)는 고상(高尙)한 인격(人格)의 표본(標本)으로서 번영(繁榮) 가운데 살고 있는 반면(半面)에 요셉은 신의(信義)를 저버린 가장 배반(背叛)적인 죄(罪)를 지은 사람으로 벌(罰)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시련(試鍊)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신앙(信仰)은 그의 성품(性稟)을 부드럽게, 인간에 대한 그의 동정심(同情心)을 강(强)하고 따뜻하게 해 주었다. 정당(正當)한 취급(取扱)을 받지 못하면 언어(言語)와 행동(行動)이 심술궂고, 편협(偏狹)하고, 괴팍하게 변(變)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용기(勇氣)가 꺾이어 증오심(憎惡心)을 마음에 품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러나 요셉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감옥(監獄) 생활에 들어가자마자 곧 요셉은 밝은 그리스도인 생활(生活) 원칙(原則)을 능동적(能動的)으로 실천(實踐)하였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그는 같은 죄수(罪囚)들의 어려움에 동참(同參)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신사(紳士)였기 때문에 명랑(明朗)·쾌활(快活)하였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책임이 크고, 명예(名譽)로운 지위, 유능(有能)한 사람이 앉아야 될 지위(地位)에 오르도록 그를 준비(準備)시키고 계셨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배웠고, 주께서 그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교훈(敎訓)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그는 젊을 때에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다. 그는 겸비(謙卑)히 행(行)하였고 주께서는 특별(特別)한 영예(榮譽)로써 그를 높이셨다(편지 3 1879).
○. (창39:20)역경이 요셉을 높은 지위(地位)에 오르도록 준비시킴
암울(暗鬱)한 감옥(監獄) 속에서 요셉이 해낸 그 역(役)이 마침내 그에게 성공(成功)과 영예(榮譽)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를 높은 지위(地位)에 오르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유혹(誘惑)과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의 경험(經驗)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3영적 146).
○. (창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은 이국(異國) 땅에서, 부유(富裕)한 가정의 사랑받는 아들의 위치(位置)에서 사회적(社會的)으로 노예(奴隸) 신분(身分)으로 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보았지만 여호와는 여전히 그의 편에 계셔서 그의 손으로 하는 일을 축복(祝福)하시고 번영(繁榮)케 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상(地上)에서 그분의 신실(信實)한 종들에게서 나타나는 부지런함, 돌보는 마음, 그리고 능력(能力)에 매료(魅了)됨으로써 그분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計劃)이다. 보디발은 요셉의 하나님이 자신의 가산(家産)과 전답(田畓) 위에 내리는 축복을 목도(目睹)하고 요셉을 더욱 신임(信任)하게 되었으며 결국 그의 모든 개인적(個人的)인 업무(業務)의 경영(經營)을 그에게 맡겼다.
○. 요셉은 그의 주인의 권익(權益)에 대하여 충실(忠實)하고 헌신적(獻身的)이었으며, 또한 그의 가사(家事)의 임무(任務)를 실행(實行)하는 데 부지런하고 사려(思慮)가 깊고 양심적(良心的)이었다. 성공(成功)은 나태(懶怠)하고 게으르고 원칙(原則)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요셉은 여호와가 자기를 주목(注目)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意識)하고 있었지만(39:9; 45:5), 땅에 있는 그의 주인이 그의 신실(信實)한 봉사(奉仕)를 인정(認定)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에게 만족(滿足)을 주는 근거(根據)였음이 틀림없다.
○. (창39:20) <그를(요셉)…옥(獄)에 넣으니>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편에게 되풀이하면서, 요셉을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17절)이라고 언급(言及)함으로써 상상(想像)할 수 있는 모욕(侮辱)에 대한 책임(責任)을 간접적(間接的)으로 그에게 돌렸다. 보디발이 요셉을 정치범(政治犯)들과 함께 가두어 놓은 것은 그가 고발(告發)당한 범죄(犯罪)에 관례적(慣例的)으로 가해진 형벌(刑罰)에 비춰 볼 때 극진(極盡)한 아량으로 여겨질 수 있다.
○. 보디발의 너그러움은 필시 요셉의 정직성(正直性)에 대한 그의 신뢰(信賴)를 보여 주었으며, 그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그 사건(事件)에 대한 그 아내의 설명은 거의 존중(尊重)하지 않았음을 반영(反映)하였다. 그럼에도 요셉의 형벌(刑罰)은, 창세기 이야기가 암시(暗示)하는 것보다 그에게 더 많은 일이 일어났었기에, 처음에는 혹독(酷毒)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 105:17~18)에 의하면 그의 “발이 착고에 상하였으며”, 그는 “쇠사슬에 매였”다.
(木) 06월09일 <바로의 꿈>
(Q)~(창세기 41:25,~29) 요셉은 왕의 꿈을 해석(解釋)하며 그 해석(解釋)이 어디서 왔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A)~○. <해석(解釋)은 하나님께>
일찍이 하나님이 주신 꿈(창37:5-9)을 소중(所重)히 간직하고 있는 요셉은 두 관원장(官員長)의 꿈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기인(起因)한 초자연적(超自然的) 성격(性格)의 꿈이라는 것을 신앙(信仰)의 내적(內的) 확신(確信)을 통해 분명(分明)히 믿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주장(主張)은 다신론자인 애굽인들에게도 꿈을 주관(主管)하는 어떤 신(神)을 의미(意味)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공감(共感)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 당시(當時) 애굽에서 꿈 해석(解釋)은 고도(高度)의 학문적(學問的) 기술(記述)을 요(要)하는 난해(難解)한 분야(分野)로 간주(看做)되었다. 그런데 일개 비천(卑賤)한 외국인 종의 입에서 이처럼 확신(確信)에 찬 질문(質問)이 나왔다는 사실은 화려(華麗)한 경력(經歷)과 학식(學識)을 가졌을 관원장(官員長)들에게 분명(分明)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 (창41:8) 해석(解釋)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요셉은 자신의 두 꿈을 생각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곤경(困境)에 빠져 낙심(落心)한 두 사람을 돕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이 열망(熱望)은 그를 감옥(監獄)으로부터 석방(釋放)하는 열쇠로 후일 판명(判明)되었다. 예기치 않았던 불행(不幸)들을 꿋꿋한 인내(忍耐)와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精神)으로 감내(堪耐)하므로, 요셉은 자신에게 기운(氣運)을 내게 했던 그러한 내적(內的) 힘이 부족(不足)한 다른 불행(不幸)한 사람들을 그의 친절(親切)한 성품(性稟)으로 동정(同情)하게 되었다. 요셉이 곤경(困境)에 처한 이 사람들을 도운 것은 호기심(好奇心)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진지한 마음으로 한 것이다. 그와 동시(同時)에 그는 자신의 힘과 위로(慰勞)의 원천(源泉)이신 하나님을 그들 앞에 소개(紹介)했다.
○. (창41:25 하나님이…바로에게 보이심이니 이다.
요셉은 우선(于先) 두 꿈이 동일(同一)한 의미(意味)가 있다는 것을 주장(主張)한 다음, 그것으로 바로와 그의 신하(臣下)들에게 다가오는 사건(事件)들에 관하여 경고(警告)하고자 하시는 그 꿈들의 창시자(創始者), 곧 하나님을 가리켜 보였다. 이 꿈들에서 그처럼 두드러진 역할(役割)을 한 일곱이라는 숫자는 각각 7년으로 이뤄진 두 기간을 가리켰다. 살찐 소들과 충실(充實)한 이삭들은 7년의 풍년(豊年)을 나타내고, 야윈 소들은 7년의 흉년(凶年)을 나타냈다. 애굽 전역(全域)에 걸쳐 풍년(豊年) 후에 흉년(凶年)이 올 것인데 기근(饑饉)의 해들은 7년 풍년의 흔적(痕迹)도 남기지 않을 것이었다. 요셉은 꿈이 반복(反復)된 것은 지적(指摘)된 사건들의 확실성(確實性)과 비상사태(非常事態)에 대처(對處)하기 위해 취(取)해야 할 긴급(緊急)한 조치(措置)를 강조(强調)하기 위한 것임을 부언(附言)했다. 애굽의 박사(博士)들의 당혹(當惑)감과는 달리, 14 년간의 미래(未來)를 투시(透視)한 요셉의 해석(解釋)에 나타난 그의 확신(確信)은 왕을 감동(感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셉의 석방(釋放)의 지연(遲延).
그것은 "만 2년" 이 마칠 때까지였다(1절). 그가 자기 일을 술 만드는 관원장(官員長)에게 부탁(付託)하고 석방(釋放)에 대한 약간의 전망(展望)을 갖기 시작한 후 그렇게 오랫동안 그는 기다렸다. 우리는 인내(忍耐)할 필요가 있다. 참을 뿐 아니라 기다리고 인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그의 말씀이 응(應)할 때까지 감옥(監獄) 속에 있었다(시 105:19).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解放)을 위해 정해진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비록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긴 할지라도, 꼭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면 그것은 가장 좋은 시기(時期)이었음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다려야 하며(합 2:3), 만 2년 걸리는 것을 기다리기에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 여기서 사용(使用)된 요셉의 석방(釋放) 방법(方法),
바로의 이 꿈들은 그 술객(術客)들의 능력(能力)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의 해석에 기여(寄與)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聖靈)에 의한 요셉의 행위(行爲)를 보다 찬양(讚揚)하게 하기 위(爲)함이었다. 인간의 이성(異性)과 사려(思慮)와 예견(豫見)이 보태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救援)하려는 계획(計劃)에 있어서 신적(神的)인 계시(啓示)가 보다 영광(榮光)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爲)해서이다(고전 2:13, 14). 이 이야기를 (다니엘 2장 27절, 4장 7절, 5장 8절)과 비교하라. 요셉 자신의 꿈은 그에게 근심의 기회가 됐지만, 이제 바로의 꿈은 그의 석방(釋放)의 계기(繼起)였다.
○. 그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한다.
"그것은 내 속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주셔야 하옵니다." 위대(偉大)한 천부(天父)의 재질(才質)은 그것을 가진 자들이 겸손(謙遜)하게 사용(使用)하고 그 찬사(讚辭)를 자기들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릴 때 가장 은혜(恩惠)스럽고 찬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恩惠)를 주신다.
○. 그는 그 해석(解釋)이 평화(平和)스런 대답(對答)이 될 것임을 암시(暗示)함으로써 바로에 대한 존경심(尊敬心)과 그와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을 보여 준다. 하나님과 의논(議論)하는 자들은 평화(平和)의 응답(應答)을 기대(期待)해도 좋다. 만약 요셉이 해석(解釋)가가 된다면 최선(最先)의 것을 기대(期待)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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