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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야곱-이스라엘(질문, 대답, 설명) 0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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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5-28 06:23 조회5,4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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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야곱-이스라엘

(6월 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9분)

 

연구 범위: 창 32:22~31, 호 12:3, 4, 렘 30:5~7, 창 33, 창 34:30~35:29

 

기억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포함한 야곱의 가족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렇지만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언약적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신실하심이 드러난다.

 이번 주 우리는 계속해서 야곱의 여정을 따라 간다.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은, 자신이 저지른 속임수의 피해자였던 에서를 마주해야 했다. 지독한 배신을 경험했던 그의 형은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런데 다행히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있던 야곱에게, 그의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훗날 있게 될 “야곱의 환난”(렘 30:5~7)을 미리 보여주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 나타나셨다. 형의 자리를 가로챘던 야곱에게 그날 밤,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 이름은 마침내 그의 후손들을 통해 세워지게 될 나라의 이름이 될 것이었다.

 부조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당신의 백성들의 부족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일을 성취하시는 데 있어 변함없이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 에서와 화해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확인한다.  

- 느끼기

 인간의 부족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 행하기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한다. 

 

TMI 위로

2. 야곱에게 하나님과 씨름했던 얍복강에서의 경험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32:22~31)  

※ 회개와 용서를 확인하도록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야곱과 에서의 화해 모습 속에서 배우게 되는 용서에 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창 33:1~17)

※ 하나님께 진정한 용서를 받으면 사람도 용서하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얻는다.

4. 에서와의 화해 이후 가나안 땅에 평화롭게 정착하려던 야곱의 계획에 문제를 일으킨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창 34장)   

※ 디나 사건이다. 그곳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가 닥친 불행이다. 불신자 교제를 아주 조심해야 한다. 

5. 야곱이 그의 가족들과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는 사건은 참된 회개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창 35:1~15)

※ 지니고 있는 모든 우상을 내어버리는 것이 급선무임을 가르친다. 

6. 야곱의 가정에 있었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나요?(창 35:16~29)

※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은 반드시 사람의 상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신다는 것을 배운다.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틈이 없다. 

 

결론

 야곱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와 에서와 화해하고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의 집안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으며 야곱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5월 29일(일) 하나님과 씨름함

 

 라반의 집을 떠난 야곱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에서가 “사백 명”(창 32:6)을 거느리고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나이다(창 32:10)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야곱은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야곱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창세기 32:22~31과 호세아 12:3, 4을 읽어 보라. 이 놀라운 이야기의 영적인 중요성은 무엇인가?

[창32:22~31]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호12:3,4]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답: 회개하면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 된다는 교훈을 배운다. 

 

 야곱은 자기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후에, 야곱은 홀로 남아 하룻밤을 보낸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사람”(창 32:24)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ish)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표현이다(참조, 사 53:3). 다니엘은 하늘 제사장 미가엘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으며(단 10:5),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수 5:13~15)을 나타내기 위해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한 야곱의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야곱은 그 사람과 씨름하는 동안 자신이 하나님과 겨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야곱이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려서 그분을 떠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용서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했던 그의 간절한 소망을 보여 준다.

 “속임수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죄가 이제 그의 앞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정하신 시간에 당신이 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실 그것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고자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97, 198). 

 야곱이 용서받았다는 증거는 그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을 통해 나타났다. 이전의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가로챘던 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으나, 새로운 이름은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천사가 말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묵상>

야곱이 용서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을 통해 나타났습니까? 

 

답: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준 사실로 나타났다.

 

<부가설명> 야곱은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산 것보다. 아버지를 속인 것이 가장 마음에 캥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에서는 두 번 야곱에게 당한 사건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어리석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야곱의 교활한 것을 생각하면 그를 죽이려고 작정했다. 그말을 성급하게 입 밖에 냈기에 어머니 리브가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아들을 다 잃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리적이다. 리브가는 두 아들을 다 살릴 방법을 찾아서 남편에서 말하고 야곱을 오라비 집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엄청나게 큰 속임을 받았다. 아내를 얻는 일이 그렇고 품삯을 자주 변경한 사실이 그렇다. 주위의 사건들이 그의 일생을 항상괴롭힌 것 같닫.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면서 과거를 청산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조치를 하고 얍복 나루터에서 회개의 무릎을 꿇었다. 사실 그는 외삼촌 집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일생 함께 할 것을 약속받았다. 이 약속은 야곱이 어려운 경우에 항상 용기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약속을 의지하고 힘을 얻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그런 약속이 풍성하다.

 

<교훈>

 야곱은 괴로움 가운데 있는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으며,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에 대한 증거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5월 30일(월) 다시 만난 형제

 

 야곱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경험을 했던 브니엘(‘하나님의 얼굴,’ 참조, 창 32:30)을 떠나 형을 만나기 위해 이동한다. 헤어진 지 20년 만에, 야곱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오는 형을 본다(창 33:1). 야곱은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신과 가족들을 준비시킨다.

 

창세기 33장을 읽어 보라.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야곱의 경험과 형의 얼굴을 보게 된 야곱의 경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이 연관성이 우리가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과 맺고 사는 관계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답: 회개와 용서의 모습인데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은 형에게도 용서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며 용서하는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야곱은 에서를 여러 차례 “내 주”(창 33:8, 13, 15)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종”(창 33:5, 비교, 창 32:4, 18, 20)이라고 이야기하며, 형에게 일곱 번 절했다(창 33:3). 야곱이 일곱 번 절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일곱 가지 축복을 떠올리게 한다(창 27:27~29). 뿐만 아니라, 야곱이 형에게 절했을 때, 그는 특별히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창 27:29)라고 했던 아버지의 축복을 되돌린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그의 형에게 진 빚을 갚고, 그로부터 훔친 축복을 돌려 주려는 의도가 있는 듯 보인다(창 33:11). 그리고, 야곱을 보았을 때 에서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야곱에게로 달려가 그를 죽이는 대신 “입 맞추고 서로 울”었다(창 33:4).

 잠시 후에 야곱은 에서에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라고 말했다. 야곱이 이와 같은 특별한 말을 한 것은, 에서가 자신을 용서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라차(ratsah)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쁘시게 받음’을 입은 제사를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인데, 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의미한다(레 22:27, 암 5:22).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브니엘에서의 경험은, 형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에서 반복된다. 야곱은 이 경험을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야곱은 두 번째 브니엘을 경험했다. 첫 번째 경험은 두 번째 경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야곱은 하나님과 그의 친형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 순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히 은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묵상>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람이 그대를 용서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그 경험을 통해 은혜에 대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답: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마18:22~35). 

 

<부가설명>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다시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우리가 야곱의 환난이라고 하는 배경이 이 사건이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속이고 집을 떠나서 여기까지 온 모든 과정이 포함되겠으나 그 절정이 바로 얍복 강변의 사건이다. 이때 야곱을 압박하고 괴롭힌 것은 그의 과거이다. 그는 야곱의 좋지 않은 뜻인 속이는 자가 그의 인생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그의 현재와 미래를 강하게 압박한다.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확답을 받을 필요가 너무나 절실했다. 그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회개의 기도를 올렸고 벧엘에서 언약하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야곱에 이스라엘에 되는 은혜를 베푸셨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그 용서는 에서의 용서로 이어졌다. 야곱은 에서를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참하는 말 같지만 용서하는 얼굴 표정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야곱은 에서의 얼굴 표정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다. 우리가 허물진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나타내는 자들이 된다. 용서하지 않는 정신은 마귀의 정신이고 버리지 않으면 마귀의 궤휼에 빠진 상태에 있다(고후2:10,11). 용서는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성품이다. 

 

<교훈>

 하나님과 친형 에서로부터 용서를 경험했던 야곱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히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다. 

 

5월 31일(화) 디나가 수치를 당함

 

 형과 화해한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고자 했다. ‘평화’라는 뜻의 샬롬(shalom)에서 유래한 “평안히”(shalem, 창 33:18)라는 단어가 야곱의 여정 중 이 장면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야곱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땅을 사들인 후(창 33:19) 제단을 쌓았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물을 바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께 자신이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야곱-이스라엘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경험한다. 이삭이 그랄에서 아비멜렉과 그러했던 것처럼(창 26:1~33), 야곱은 가나안 족속 가운데서 살 곳을 찾으려 한다.   

 

창세기 34장을 읽어 보라.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기 원했던 야곱의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창34:1~31] 이것은 야곱의 딸 디나 사건을 기록한 내용이다. 찾아 읽어보라.

 

답: 디나가 그땅 여자를 만나러 나갔다가 추장의 눈에 띄어서 성폭력을 당하고 그집에 감금당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 중에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 하례 받으면 통혼하겠다고 속이고 할례 받게 한 후 그들이 아파서 움직이기 어려운 때 기습해서 세겜 사람들을 다 죽이고 약탈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야곱이 가나안 정착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야곱은 거기 땅까지 샀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비도덕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각 등장 인물의 성품과 그들의 행동의 모호함을 보여준다. 본능에 이끌려 디나를 범하는 세겜은, 디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도 묘사되며,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만회하려 한다. 심지어 그는 언약 의식인 할례를 받는 것까지도 동의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가나안 족속과의 결혼을 반대하는(레 19:29) 시므온과 레위는, 거짓말과 속임수(창 34:13)를 사용하여 살인하고 약탈하려 한다(창 34:25~27). 그들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야곱은 오직 평화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의 딸이 수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 34:5). 

 그런데 그의 아들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 더 큰 어려움 때문에 아들들을 공개적으로 꾸짖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

 

<묵상>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속에서 친절과 은혜의 행동만큼이나 속이는 일과 속임수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

 

답: 육신의 생명뿐인 사람은(시78:39) 옛사람이기에 썩는 상태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엡4:22). 

 

<부가설명> 야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먼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집이 있는 헤브론까지는 90km 거리이다. 그런데 세겜에 땅까지 사서 정착할 생각을 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씨름했으나 아직도 자기 꾀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세겜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는 지시를 했고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가 사는 기랼아르바(헤브론)에 가서 부모님을 만났다. 당시 교통 수단을 생각할 때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물어서 지도를 받는 것이 합당한 순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런 사건을 볼 때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만, 우리도 현실에서 막상 이런 일을 당하면 먼저 사람의 계획이 튀어나오는 것이 실상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굴복하는 삶,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야곱이 실수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바른 길로 이끄셨다. 참으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교훈>

 가나안 땅에서 평화롭게 정착하여 살고자 했던 야곱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딸의 수치와 아들들의 보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6월 1일(수) 만연한 우상숭배

 

창세기 34:30~35:15을 읽어 보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참된 예배에 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창34:30~35:15]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답: 각 사람이 마음에 있는 우상을 버려야 진정한 예배가 시작된다.

 

 가나안 족속과의 평화가 깨졌다는 야곱의 불평과 그의 두 아들을 향한 꾸짖음이 있은 직후(창 34:3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야곱에게 세겜을 떠나 벧엘로 돌아가라고 재촉하신다. 벧엘에 도착하면 야곱은 제단을 쌓아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명령 후에 가장 먼저 기록된 내용은 야곱이 자기 사람들에게 세겜에서 약탈해 온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과 라헬이 훔쳐 온 가족 수호신(창 31:19, 32)을 버리라고 말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쳤던 야곱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상들은 집안에 보관되었고 심지어 숭배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야곱이 가나안 족속의 영향을 피해 세겜을 떠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야곱은 집안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회개의 과정은 그저 몸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에서 그 우상들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무엇을 가지고도 우상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행동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심으로”(창 35:5) 아무도 야곱을 공격하지 않았다. 야곱은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창 35:6)들과 함께 예배할 준비를 마쳤는데 이는 가족의 연합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야곱은 이곳의 이름을 “엘벧엘”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표징으로 주어진 사닥다리 꿈을 떠올리게 했으며, 한동안 깨어졌던 그 표징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묵상> 

창세기 35:7에서 야곱이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창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답: 벧엘의 하나님께 경배한 것을 나타낸다.

 

 “엘벧엘”이라는 이름은 장소보다는 벧엘의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창 35:10)이라는 이름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그를 축복하신다. 야곱에게 약속된 첫 번째 축복은 그가 번성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를 통해 메시아의 씨가 이어질 것이며, 여러 민족이 나오게 될 것이었다(창 35:11). 두 번째 축복은 약속의 땅을 가리켰다(창 35:12). 

 

<부가설명> 야곱이 세겜을 떠날 때 모든 우상을 땅에 묻었다. 그것들은 다 헛것이다. 당시의 우상은 대체적으로 귀금속이었다. 크게 만드는 것은 돌이나 나무를 썼으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우상은 귀금속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목거리 귀거리 파찌 반지 등등, 장신구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장식물은 거의 새긴 우상이었다. 그 장신구를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우상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오늘날도 장신구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 거기 새기거나 달린 형상이 우상의 형상이 아니라해도 그것을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과 자기 몸치장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대로 귀금속이 아니라도 성경의 사상과 다른 사상을 성경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우상이다. 성경은 철학을 경계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이 말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 주석가들의 일치되는 견해인 것 같다.  이 말을 하기 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골2:2~4)라고 말한다. 공교한 말은 당시 철학자들의 언변이었다. 오늘날도 공교한 학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헛된 철학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된다. 아무튼, 어떤 것이라도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사상이나 학문을 숭상한다면 우상이다. 

 

<교훈>

 야곱의 가족에게 있었던 일을 통해 진정한 회개의 과정은 단순히 외부적인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6월 2일(목) 라헬의 죽음

 

창세기 35:15~29을 읽어 보라. 야곱은 그의 문제 많은 가정에서 또 다른 어떤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는가?

[창35:15~29]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답: 라헬이 베냐민이 출생해서 12아들의 수를 채운다. 베냐민을 출산하는 중에 라헬이 죽고 에브랏 길에서 장사했다. 거기 비석을 세웠고 르우벤은 라헬이 죽자 그의 여종 빌하와 동침하는 사건이 터졌다.

 

 야곱이 벧엘을 떠나자마자, 서로 연관된 세 개의 사건들이 약속의 땅을 향한 그의 여정 가운데 일어난다. 야곱의 막내아들의 탄생, 라헬의 죽음, 그리고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동침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은 왜 이 젊은 청년이 그렇게 악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가 야곱의 막내 아들의 탄생을 더럽히고, 라헬에 대한 기억에 수치심을 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야곱의 막내 아들의 탄생은 약속의 땅 범위 안에 있는 베들레헴과 연결되어 있다(창 35:19). 그렇다면 이 탄생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의 첫 번째 성취이다. 산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셨던 것과 같은 말로 라헬에게 이야기한다. “두려워하지 말라”(창 35:17, 비교, 창 15:1). 

 야곱은 라헬이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주었던 이름 베노니(‘슬픔의 아들’)를 베냐민으로 바꾼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약속의 땅이 있는 남쪽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땅과 그 땅에 정착한 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실 일들을 향한 야곱의 소망을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이 시기에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이자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와 동침한다(창 35:25, 30:3). 타락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 그가 왜 이런 가증스러운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다.

 놀랍게도, 야곱은 이런 끔찍한 범죄에 대해 알게 된 이후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창 35:22). 아마 야곱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자기 주변에 만연한 죄와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리라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믿음의 교훈이 훗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야곱의 열두 아들의 목록에 나타나 있다(창 35:22~26).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결코 가장 사랑스럽거나 친절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든 문제들과 빌하를 범한 르우벤의 죄와 같은 분명한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야곱의 가족을 통해 성취될 것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형편없을지라도 말이다.

 

<묵상>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께 협력하여 순종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더 쉽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까요? 

 

답: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롬11:12). 이스라엘이 충성했으면 세상에 복음은 더욱 풍성하게 전파되었을 것이다. 

 

<부가설명> 라헬은 야곱의 첫사랑이다. 야곱이 자기 집을 떠날 때 나이는 70이었다.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 130세(창47:9), 요셉에 출생했을 때 야곱이 91세, 라반 집에 있었던 기간이 20년, 이것을 계산하면 70세에 집에서 떠나서 라반의 집에 간 계산이 나온다. 에서가 40세에 결혼했는데 그로부터 30년간 총각으로 있다가 외삼촌 집에 가서 만난 첫사랑이다. 그가 길에서 죽었다. 막내 베냐민의 출생과 사랑하는 아내의 사별이라는 희비가 함께 있는 사건이다. 저자의 말대로 가나안 땅에 와서 낳은 첫아들로서 약속에 땅에서 이룰 열매들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이다. 라헬이 죽은 것은 야곱이 사람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끊으라는 하나님의 교훈이 되었다. 마치 이삭을 바치게 한 것으로 아브라함의 첫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인 것을 깊이 깨닫게 한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라헬이 죽자 르우벤이 라헬의 몸종이며 아버지 첩이 빌하와 간통하는 사건이 생겼다. 르우벤은 아버지가 라헬을 지나치게 사랑했고 자기 생모를 안중에 없는 것을 봐왔다. 요셉을 편애하는데 베냐민까지 났으니 아버지의 편애가 더 심할 것을 생각하며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르우벤을 포함해서 열 두 아들로 이스라엘 12지파를 형성하셨다. 조상과 하신 언약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사람이 형편없이 부족해도 기어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나타낸다. 야곱의 아들들이 선민의 조상이 된 것은 그들의 인간적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의 은혜이다(신9:5).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의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의 성취이다. 우리는 의이신 예수님 안에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 

 

<교훈>

 우리의 눈에 보기에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수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선택한 백성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6월 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195~203, “씨름하던 밤”을 읽어 보라.

 

 “야곱이 씨름하고 고민하던 밤에 겪은 경험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야 할 시련을 나타낸다.…악의 세력과의 마지막 투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할 경험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인내와 그들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시험하실 것이다. 사단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으며 그들의 죄는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점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그들의 생애를 회고할 때에 그들의 희망은 꺼져갈 것이다. …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는, 죄에 빠졌다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내어 쫓지 않으시리라는 보증이 된다. 야곱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얻으려고 하다가 놓쳤던 그것을 얻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서였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능력만이 그가 갈망하던 축복을 그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종에게 가르치셨다. 말세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위험이 그들을 둘러 싸고 절망이 영혼을 억압할 때에 그들은 오직 속죄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부조와 선지자, 201~2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야곱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기회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야곱의 경험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고 이야기했던 바울의 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 인간이 약해질 때 전능하신 분을 찾고 자기를 맡겨 그분 안에서 자기를 지키려고 한다. 자기가 약할 때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구하는데 그것이 강한 것이다.

 

2.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추악한 모습들이 가감 없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 아담 안에서 죄인, 곧 사망의 존재가 된 사람들의 실상을 보게 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다. 

 

3.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우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경배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고후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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