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우리를 위해 죽으심(질문, 대답, 설명) 11/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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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0-28 08:16 조회6,362회 댓글0건본문
제6과 우리를 위해 죽으심
(11월 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30분)
연구 범위: 계 13:8, 마 17:22, 23, 막 9:30~32, 요 19:1~30, 롬 6:23, 고전 1:18~24
기억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죽음을 잠시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결국 모두 다 죽는다. 우리는 의인과 악인 모두 결국 일단은 같은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은 더 없이 중요하다. 바울이 이야기한 대로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한(고전 15:18) 것이다.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이미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말이 되지 않는 것임을 밝혀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 또한 그렇게 되리라는 보증을 얻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에 있어 핵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 죽으셔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눈앞에 둔 겟세마네의 고통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함이었다.
이번 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이 영생의 약속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를 위해 이룬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는다.
- 느끼기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희생에 감격하며 감사한다.
- 행하기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그 사랑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TMI 위로
2.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계획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던 것입니까?(딛 1:2)
※ 영원한 때 전부터.
3.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마 16:21~23, 눅 18:31~34)
※ 이해지 못하고 그것을 말리고 깨닫지 못했다.
4.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기별은 무엇입니까(요 19:1~30)?
※ 구원을 받기 위하여 다른 일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5.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어 주셨나요?(요 3:14~18, 롬 6:23)
※ 영생을 얻게 하셨다.
6.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위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고전 1:18~24)
※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의 기별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동기가 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스스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이루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강력한 표시가 됩니다.
10월 30일(일) “창세 때부터”
요한계시록 13:8, 사도행전 2:23, 그리고 베드로전서 1:19, 20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행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벧전1:19,20]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답: 예수님은 구원을 위하여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시고 창세 대부터 죽임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한 그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계 13:8, 새번역). 이 구절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구가 창조된 지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말씀은 분명히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요한계시록은 상징들로 가득하다). 이 성경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의 계획이 창세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
디도서 1:2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심으로 하는 구원의 계획이 얼마나 오래 전에 준비되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딛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답: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22).
그 계획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먼저 공개되었으며(창 3:15, 21), 구약에서 피로 드리는 모든 제물을 통해 표상되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대신해서 바칠 제물로써 숫양을 제공하셨다(창 22:11~13). 이와 같은 제물의 대체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의 대속적 본질을 더 분명히 표상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계획의 중심에는 수 세기 동안 동물 제사로 상징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제물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했다.
<묵상>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끔찍한 일이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죄의 대가는 죽음이고 예수님이 그 죽음을 친히 당하셔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부가설명>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 이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22)라고 증언의 말씀이 가르친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구속의 계획이 들어있다. 성경에 ‘여호와를 알라’라는 내용의 표현이 아주 많다. 그 이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여러 가지 기억할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그 이름은 ‘기념칭호’이다(호12:5). 기념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거나 도구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도록 하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는 구원의 계획이 들어 있다. 사람이 이 이름의 기념을 깨달으면 영원 전부터 구원이 계획된 것이라는 말을 바르게 깨닫는다. 범죄할 것을 미리 아시고 사전에 계획을 세우셨다는 뜻이 아니다. 우주에 죄가 발생하면 그 이름이 이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뜻이다. ‘부모’라는 말은 자식이 성장하는 동안 자식의 모든 경우를 대처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자식이 무엇인가 손해를 끼치면 부모가 그것을 갚아준다. 자식이 상을 받으면 부모가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도록 계획한 것이 아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호와’시라는 이름도 이런 기능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을 창세 전부터 계획했다는 말로 성경에 계시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깨닫는다. 또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은 바로 창세 때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을 상징한다.
<교훈>
죄지은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은 창세 전부터 준비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10월 31일(월) 십자가의 서문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들의 반응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마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막9:30~32]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눅9:44,45]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눅18:31~34]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답: 제자들은 자기 위주로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우리도 성경을 자기 위주로 읽으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 태어나셨으며 죽기 위해 사셨다. 예수님의 모든 발걸음은 그분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이루실 위대한 속죄의 희생으로 이끌었다. 자신의 사명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의 사명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분의 모든 생애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일의 서문이었다”(엘렌 G. 화잇, 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382).
지상 사역의 마지막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점점 더 분명히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메시아의 역할에 관한 잘못된 개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들에게, 그들이 메시아로 여겼던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잘못된 신학이 그들을 불필요한 아픔과 고통으로 이끌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마 16:21) 말씀하셨다. 갈릴리 가운데로 조용히 지나실 때(막 9:30~32)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눅 18:31~34),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말씀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듣지 않았다. 우리도 얼마나 쉽게 같은 실수를 범하는가!
<묵상>
백성들, 특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의 초림에 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이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답: 재림의 날짜를 알려고 성경을 살피는 것이나, 사회적 징조를 강조하여 재림의 시기를 오판하게 하거나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으로 오셔서 땅을 밟고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내거나 영으로 재림했다고 하거나 이 모든 것들이 성경과 맞지 않는 인간 위주의 설명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다.
<부가설명> 성경이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단어 뜻을 사람의 경우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의 언어에 담아 기록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깨닫는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이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보다 높은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의 생각과 경험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9,10).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것이고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다 아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분의 감동과 도움으로 성경말씀을 깨닫고 설명하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된 신학을 가졌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교과 저자는 지적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를 지배하는 신학이 잘못되어서 말씀 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기도하며 회개하며 성령님의 감동을 기다리고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깨닫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목적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11월 1일(화)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1~30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하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기별은 무엇인가?
[요19:1~30]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답: 영원 전부터 알린바 된 구원사업에 죄와 사망을 처리하는 것을 다 이루셨다는 외침이다. 즉 영원 전에 삼위일명(三位一名)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의논된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는 외침이다. 구원을 위하여 다른 일 할 것이 없다는 선포이다.
마침내 그리스도, 인류, 그리고 온 우주를 위한 결정적인 시간이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어둠의 세력들과 맞서 싸우셨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 불공정한 재판을 거쳐 갈바리 언덕에 이르셨다. 악한 천사들은 그분을 쓰러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그분을 조롱하며 말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셨는가? 물론 그렇다. 그분은 그렇게 할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포기할 수 없게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살리고자 했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 그분을 조롱하고 있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못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그분의 의지로 십자가에 달려 계셨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으셨다”(Alfred Plummer, 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 Matthew, 397).
유다의 배신을 포함하여 십자가로 이끄는 사건들을 부추긴 것은 사탄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고난을 통해 사탄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셨다(요 6:70, 요 13:2, 27). “예수님의 죽음은 사탄이 벌인 일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워 이긴 사건이다”(George E. Ladd,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192).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이 끝났음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악한 무리들과의 우주적, 역사적 쟁투에서 승리하셨음을 선언하셨다. “온 하늘은 구주의 승리에 개가를 불렀다. 사탄은 패배했다. 그는 자기의 나라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시대의 소망, 758).
이 사건에 담긴 놀라운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낮아지심을 통해 우리와 온 우주를 위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가 성취되었다.
<묵상>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기에 그 죄를 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어떻게 가르쳐 주나요?
답: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 행위로 한다면 은혜가 아니다. 그래서 진리와 은혜는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와 사망을 죽게 하는 사건이었다.
<부가설명> 의와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이다(사45:8). 우리가 노력해서 의롭게 되고 구원받으려 하다면 그것은 자신은 창조주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루시퍼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역사하기보다 하나님의 교회에 더 강하고 크게 일한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은 그대로 두어도 자기 손아귀에 이미 있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을 그 지체에서 잘라 내려고 혼신의 힘을 쏟아붓는다. 속이는 자의 달인인 사탄은 구원은 사람이 착하게 살면 이룬다고 속삭인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약속했으니 아브라함처럼 믿고 노력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라고 속삭인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다. 그것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 구원의 복음을 방해하는 거대한 세력이 되어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도 예수를 믿고 의롭게 살기 위하여 온힘을 기울여 노력하라고 부추긴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으로 흠과 티가 없도록 살면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구원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서 선택하면 된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구원과 의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라고 성경은 분명히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노력으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바른 선택을 하면 의롭게 된다고 속삭인다. 이런 신학이 마음에 가득하게 되면 창조와 생명의 복음이 귀에 들리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랬다. 우리는 이런 속삭임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통해 사탄을 물리치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을 완성하셨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다.
11월 2일(수) 우리를 위해 죽으심
요한복음 3:14~18과 로마서 6:2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어 주었다고 가르치는가?
[요3:14~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답: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주셨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도착하셨을 때, 침례 요한은 이렇게 외쳤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침례 요한의 이 말은 그리스도를 구약의 모든 참된 제물들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원형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동물로 드려진 제물들은 그 자체로서 죄를 사할 수는 없었다(히 10:4).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십자가에서 보여 주실 희생의 효력에 근거한 조건적인 용서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요한복음 3:16, 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을 통해 정죄 받아 마땅한 우리를 위한 어떤 위대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답: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세상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요 1:1~3) 정죄 받아 마땅한 우리가 각자의 죄로 인해 정죄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위대한 약속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요 3:16)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다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원하여 자신을 바치셨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히 9:14). 마틴 루터는 십자가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아 있는 거룩한 몸과 피를 간절한 중보와 큰 외침, 그리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로 바친 제단”이라고 설명한다(Luther’s Works, vol.13, 319).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해(히 10:10) 죽으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10:12). 왜냐하면, 그분의 희생은 부족함 없이 충분하며 그 능력이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만일 단 한 영혼만이 당신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수고와 굴욕의 생애, 그리고 치욕의 죽음을 택하셨을 것이다”(치료봉사, 135).
<묵상>
요한복음 3:16에 “세상”과 “누구든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매일 매 순간, 특별히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놀라운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답: 말씀 명상과 기도와 찬송과 감사가 넘치면 성령의 역사로 약속을 이룰 것이다.
<부가설명> 인류를 구원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 창조주의 한 위이신 말씀 하나님 여호와의 희생은 우리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영원히 연구할 교과이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말씀 하나님의 자원이었다. 삼위 여호와 중에 누군가가 이 일을 담당하고 사망을 폐지해야 하는데 그것을 말씀 하나님께서 자원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라고 계시하였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루시퍼는 피조물인데 하나님과 동등하려고 했으나(사14:12~14),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은(요1:1~3) 하나님과 동등인데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 즉 자아를 비우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래서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시고 누구든지 이것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영생에 이른다고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딤후1:10,11).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인 영생을 얻는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예수님께서는 정죄 받아 마땅한 우리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정죄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자원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
11월 3일(목) 십자가의 의미
고린도전서 1:18~24을 읽어 보라. 바울은 십자가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세상의 지혜”와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물질주의가 “세상의 지혜”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전1:18~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답: 십자가의 도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 깨달은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있다. “영원이라는 시간도 갈바리에서 드러난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바로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사탄의 끝없는 이기심이 마주했다”(Stephen N. Haskell, The Cross and Its Shadow, 10).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서 겸손히 자신을 바치고 계시던 바로 그때, 사탄은 이기적으로 그분을 괴로움과 고통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이 마주쳐야 하는 일반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 둘째 사망을 당하셨다.
십자가의 의미와 관련하여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가장 확실히 보여준다(롬 3:21~26). 둘째, 십자가는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다(롬 5:8). 셋째, 십자가는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한 능력의 근원이다(롬 6:22, 23, 고전 1:17~24). 넷째, 십자가는 영생을 위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빌 3:9~11, 요 3:14~16, 요일 5:11, 12). 다섯째, 십자가는 우주에 반역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계 7:13~17, 22:3).
십자가에 대한 이와 같은 중요한 진리는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진리조차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지혜” 앞에서, 십자가에 관한 기별을 전하는 것은 “미련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참조, 롬 1:18~20).
“미련함”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바보”라는 영어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관한 기별을 전하는 것은 “세상의 지혜”에 따르면 “바보 같은 짓”일 수 있다. 세상의 지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구원을 알 수 없다.
<묵상>
“세상의 지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 1:21)을 통해 갖게 된 소망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방해하면 구원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깨닫는 것을 방해하여 오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세상의 사상은 루시퍼에게 지배된다. 사탄은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복음을 알 수 없도록 자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래서 세상 지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도록 세상을 속이며 감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지혜 있다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 앞장선다. 그래서 철학이나 문학이나 대부분 사탄의 사상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발전시킨다. 그래서 성경은 일찍 이런 학문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경고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세상의 철학은 기독교의 신학에 학문적 방법론을 제공했다. 기독교 교리를 집대성했다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어떤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기초로 조직집필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경 교리가 헬라 사상의 기초로 논리를 쌓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친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까’(창40:8)라는 방법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오류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주류를 이루었다. 결과로 영혼불멸설은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사탄의 주장이 성경의 주장으로 둔갑해서 교회가 사람을 속이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 성경대로 주장하는 것은 미련하게 보인다. 조심해야 한다. 사람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교훈>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믿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강력한 구원의 표시이다.
11월 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685~697, “겟세마네,” 741~758, “갈바리,” <정로의 계단> 27, “회개”를 읽어 보라.
“나는 온 하늘이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구원을 얻느냐 잃어버린바 되느냐 하는 것이 사소한 일처럼 부주의할 것인가! 우리를 위하여 치러진 희생을 경하게 여길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받은 바 자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쾌히 여기신다.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못할 것이다. 조금만 더 근심시키면, 그분께서는 떠나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로 예수님께서 제공해 주신 자비를 등한히 할 것 같으면 죽음이 그들의 몫이 될 것인데, 그 죽음은 참으로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죽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거절한 구속의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느끼신 그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영생과 불멸의 유업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불된 놀라운 희생은 영혼들의 가치가 어떤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귀중한 영혼을 일단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된다”(교회증언 1권, 1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히브리서 10:4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카드로 물건을 구매하지만, 나중에 청구서에 따라 돈을 지불해야 하는 신용 카드에 관한 예화가 이 주제를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 구약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제사로 확증했다. 그것은 보증수표 같은 것이라 주님이 구원사업을 이루실 것을 전제로 실제적인 효과를 받는다.
2. 고린도후서 5:18~21을 읽어 보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든지 아니면 그들을 위해 주어진 위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멸망 당하든지, 구원에 있어 개인의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예수께서는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16:9).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으나 그들이 그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버린 것일 뿐이다.
3.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계획인 십자가와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은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개념을 무가치하며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되는 것으로 만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면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자기 노력을 하나님이 하신 일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 참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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