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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 신약에 나타난 소망 (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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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1-14 23:40 조회3,5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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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신약(新約)에 나타난 소망(所望) 

                                       (11월19일 (안) / 日沒 : 오후 5시19분)


<서언(緖言)>


 신약(新約)에 나타난 소망(所望)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소망이며 죄인으로써 누구나 맞이할 죽음에 처한 우리 에게는 영생(永生)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秘訣)은 소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소망(所望)이 되십니다. 죄인(罪人)들에게는 용서(容恕)의 소망(所望)이, 병자(病者)들에게는 치료(治療)의 소망이, 가난한 자에게는 부요(富饒)함의 소망이, 죽음을 앞둔 자에게는 영생(永生)의 소망이 되시고 살아서 주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천국(天國)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시선(視線)을 예수님께로 고정(固定)하고 믿음으로 전진(前進)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예수님께 초점(焦點)을 맞추어 시선(視線)을 고정하라는 의미하며, 이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영생(永生)이 보장(保障)되어 있음을 인하여 감사드립시다.


(11월13일) (日)  <이 삶 너머의 소망(所望)>


(Q)~고전 15:12~19) 우리의 부활(復活)과 예수님의 부활의 연관성(聯關性)에 대해 사도(使徒)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A)~○. <“만일 죽은 자의 부활(復活)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傳播)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3~14]>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분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迎接)하여 믿는 자는 이 땅에서의 잠자는 죽음에서 살아나 영생할 것이며, 그분 예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의 부활(復活)의 보증(保證)이라고 한다. 핵심(核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소망(所望)이 있다는 것이다. 


(11월14일 (月)  <“내가 다시 오리라”>


(Q)~(요 14:1~3) 예수님의 재림(再臨)에 관한 약속(約束)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意味)가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네 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계 3:11, 22:7, 12, 20).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지 2,000여년이 지나가는데 에도 아직 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분명(分明)한 것은 그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約束)은 오늘날에도 유효(有效)하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에 “적합(適合)한” 때 오실 것이다. “주의 약속(約束)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滅亡)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悔改)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는 말씀에 깊은 뜻이 있으시다. 분명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約束)하신 예수님께서는 구원(救援)의 시간표에 따라 정(定)하신 때에 꼭 다시 오실 것이다.


(11월15일 (火)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Q)~(요 6:26~51) 예수님께서는 영생(永生)의 선물(膳物)을 의인(義人)들의 최종적(最終的)인 부활(復活)과 어떻게 연결(連結)시키셨습니까?


(A)~○.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주인(主人)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의인(義人)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는 말씀은 ⑴.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⑵.예수님 안에서 영생(永生)이 보장(保障)된다고 말씀하셨고 ⑶.마지막 날에 그분을 믿은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신다고(부활(復活)의)모든 믿는 자(者)들에게 보장(保障)의 축복의 말씀(요6:26~51)을 하시고 계십니다.


(11월16일) (水)  <하나님의 나팔(喇叭) 소리>


(Q)~(살전 4:13~18)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영생(永生)에 관한 오해(誤解)를 어떻게 수정(修正)해 주었습니까?


(A)~○.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誤解)하고 있는바 그들이 믿고 있는 그것이 바로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을 입증(立證)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므로 (살전 4:13~18)에 바울은 그 오류(誤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재림(再臨)하실 때 살아있는 의인(義人)들과 함께 죽은 자들이 부활(復活)하여 공중(空中)으로 끌어올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영원(永遠)토록 살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11월17일) (木)  <영원(永遠)한 만남>


(Q)~(고린도전서 15:51~55)에서 바울이 설명(說明)하고 있는 “비밀(秘密)”은 무엇입니까?


(A)~○. 옛말에 “선(서투룬) 무당(무녀(巫女). 무자(巫子). 사무(師巫)들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어설프게 해석(解釋)하여 비밀(秘密)휴거(携擧)를 믿게 하는 일이 지난날에도 있었고 지금 현재도 진행 중(進行中)인 사람들이 있다. 성경(聖經) 어디에도 이와 같은 휴거(携擧)와 재림 사이의 인위적(人爲的)인 구분(區分)을 지지(支持)하는 구절(句節)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이 언급(言及)한 “비밀(秘密)”은 재림의 때, 살아 있는 의인(義人)들이 부활한 의인들과 연합하기 위해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전15:51)예수님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復活)한다는 진리(眞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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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8과 신약(新約)에 나타난 소망(所望) 

                                    (11월19일 (안) / 日沒 : 오후 5시19분)


<서언(緖言)>


 신약(新約)에 나타난 소망(所望)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소망이며 죄인으로써 누구나 맞이할 죽음에 처한 우리 에게는 영생(永生)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秘訣)은 소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소망(所望)이 되십니다. 죄인(罪人)들에게는 용서(容恕)의 소망(所望)이, 병자(病者)들에게는 치료(治療)의 소망이, 가난한 자에게는 부요(富饒)함의 소망이, 죽음을 앞둔 자에게는 영생(永生)의 소망이 되시고 살아서 주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천국(天國)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시선(視線)을 예수님께로 고정(固定)하고 믿음으로 전진(前進)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예수님께 초점(焦點)을 맞추어 시선(視線)을 고정하라는 의미하며, 이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영생(永生)이 보장(保障)되어 있음을 인하여 감사드립시다.


(11월13일) (日)  <이 삶 너머의 소망(所望)>


(Q)~고전 15:12~19) 우리의 부활(復活)과 예수님의 부활의 연관성(聯關性)에 대해 사도(使徒)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A)~○. <“만일 죽은 자의 부활(復活)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傳播)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3~14]>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분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迎接)하여 믿는 자는 이 땅에서의 잠자는 죽음에서 살아나 영생할 것이며, 그분 예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의 부활(復活)의 보증(保證)이라고 한다. 핵심(核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소망(所望)이 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復活)이 불가능(不可能)한 것이요 그것을 믿는 신념(信念)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看做)된다면 그리스도도 무덤에서 일어나지 못하신 것이 되는데,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을 전반적(全般的)으로 반대하는 의견(意見)이 그분의 경우에도 적용(適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증된 예수의 부활을 부인(否認)하지 않고서는 보편적(普遍的)인 부활을 부인(否認)하기란 불가능(不可能)하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부활을 부인(否認)하면 이르러 오는 부득이한 결과이며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 즉 영생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소망(所望)을 앗아가는 행위(行爲)이다.

그리스도가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의 증거(證據)는 두 가지 점에서 비난(非難)받게 된다. 

(1) 예수는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고 거듭 주장(主張)하셨기에(참조 마 16:21; 17:22, 23; 20:17~19 등),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는 사기꾼이 되어 버린다. 

(2) 사도(使徒)들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근거(根據)로 전파(傳播)했으므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을 소망으로 붙드는 사기꾼 무리에 속하게 된다. (고전 15:12~19, 재림교주석)


○.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것은 일차적(一次的)으로 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아담부터 인간 역사 끝까지 죄의 고백(告白)과 구주(救主)의 속죄(贖罪)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용서(容恕)와 영생(永生)이 보장(保障)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죽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고전 15:12~19, 재림교주석)


○. 부활(復活)이 없다면, 망(亡)하였으리니 

죽은 자들은 죽은 상태로 남게 되고, 기독교에서 주장한 소망(所望)은 잔인(殘忍)한 기만(欺瞞)이 되며, 모든 죽은 의인(義人)은 무덤에서 잠자는 상태로 남아 있도록 운명(運命) 지워질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희망을 짓밟는 그런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추론(追論)을 통해 기독교교리(基督敎敎理)에서 부활(復活)의 중요한 위치(位置)가 다시 강조된다.(고전 15:12~19, 재림교주석)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다시 생명으로 회복(回復)될 수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을 것이요(고전15:16절).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復活)할 것이 구약예언(舊約豫言)에서 예언되고 그가 부활(復活)한 것을 많은 눈이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하고 지금은 의심(疑心)의 여지(餘地)가 없는 사실을 있을 수 없다고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傳播)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고전15:14) 이 가정(假定)이 인정(認定)된다면 기독교의 주요한 증거(證據)를 파괴(破壞)할 것이다. (고전 15:12~19, 매튜헨리)


○.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亡)하였으리라”고함.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믿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은 확실(確實)하다(살전 4:14).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성령(聖靈)의 은혜(恩惠)로 되나니, 성령(聖靈)을 받은 자가 부활할 것은 확실하다(롬 8:1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亡)하였으리라”는 가상(假想)은, 어디까지든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진대 이런 불가능(不可能)한 가상(假想)도 성립(成立)된다고 하는 셈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전 15:12~19, 만나주석)


(11월14일 (月)  <“내가 다시 오리라”>


(Q)~(요 14:1~3) 예수님의 재림(再臨)에 관한 약속(約束)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意味)가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네 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계 3:11, 22:7, 12, 20).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지 2,000여년이 지나가는데 에도 아직 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분명(分明)한 것은 그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約束)은 오늘날에도 유효(有效)하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에 “적합(適合)한” 때 오실 것이다. “주의 약속(約束)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滅亡)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悔改)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는 말씀에 깊은 뜻이 있으시다. 분명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約束)하신 예수님께서는 구원(救援)의 시간표에 따라 정(定)하신 때에 꼭 다시 오실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습(模襲)으로 하늘에 올라 가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영접(迎接)하는 구름을 보았다. 제자들과 같이 걷고 담화(談話)하고 기도(祈禱)하신 바로 그 예수, 그들과 함께 떡을 떼셨으며 호수(湖水) 위에 뜬 그들의 배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고 바로 그날 그들과 함께 애써 감람산에 올라오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의 보좌(寶座)에 앉으시기 위하여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로 가시는 것을 본 바로 그분이 올라 가신 그대로 다시 오리라는 것을 천사들은 그들에게 확실(確實)히 말하였다. (시대의 소망, 832).


○. 사도 바울은 서신(書信)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관하여 여러 번 언급(言及)하였다. 

신약성경(新約聖經)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진리를 매우 번번이 언급한다. 사도(使徒)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降臨)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권면(勸勉)한다(약 5:7, 8).


(1) 그리스도의 재림은 얼마나 명백(明白)한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處所)를 예비(豫備)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迎接)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히브리서 9:28; 사도행전 1:9-11을 읽으라.


(2) 그리스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의 재림(再臨)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讚頌)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9).


(3) 심문(審問) 받으실 때, 그리스도는 그의 재림에 관하여 무슨 약속(約束)을 주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後)에 인자(人子)가 권능(權能)의 우편(右便)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4) 예수는 자신의 재림에 관하여 요한에게 무슨 보증(保證)을 주셨는가?

그는 재림에 관한 진리(眞理)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賞)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이것들을 증거(證據)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7, 12, 20).


○. 그리스도의 이러한 일치(一致)된 증거(證據)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리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확신(確信) 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의문(疑問)의 여지(餘地)가 전혀 없다. 예수는 다시 오실 것이다. (마라나타)


(11월15일 (火)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Q)~(요 6:26~51) 예수님께서는 영생(永生)의 선물(膳物)을 의인(義人)들의 최종적(最終的)인 부활(復活)과 어떻게 연결(連結)시키셨습니까?


(A)~○.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주인(主人)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의인(義人)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는 말씀은 ⑴.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⑵.예수님 안에서 영생(永生)이 보장(保障)된다고 말씀하셨고 ⑶.마지막 날에 그분을 믿은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신다고(부활(復活)의)모든 믿는 자(者)들에게 보장(保障)의 축복의 말씀(요6:26~51)을 하시고 계십니다.


○. 나는 예수께서 지성소봉사(至聖所奉仕)를 거의 마쳐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暫時) 후에 그 일이 끝날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을 성경(聖經)을 상고(詳考)하는 일에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그것에 대해 심판(審判)을 받게 될 것이다. (초기, 58)


○. “그리스도가 끊임없이 중보(中保)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긍휼(矜恤)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恩惠)의 보좌(寶座)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 4:16). 그리스도의 무죄(無罪)한 생애로 말미암아 십자가(十字架)에서의 그의 죽으심은 효력을 지녔다. 지금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大祭司長)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中保)하고 계시다. 그의 승리는 회개(悔改)하는 신자(信者)들에게 충분하다. 위대(偉大)한 구원(救援)의 계획에 있어서 최종적(最終的)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單番)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救援)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罪)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우리에게 영생(永生)의 보증(保證)을 주시는 그리스도 생애의 7대 국면은 다음과 같다. ① 그의 신성(神性) ② 그의 성육신(聖肉身) ③ 그의 무죄(無罪)한 생애 ④ 그의 대속적(代贖的) 죽으심 ⑤ 그의 부활(復活) ⑥ 그의 승천(昇天)과 중보(中保) ⑦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영접(迎接)하기 위한 재림(再臨).”(핵심, 예수의 생애와 교훈>2. 예수의 중보자, 또는 제사장 사역)


(11월16일) (水)  <하나님의 나팔(喇叭) 소리>


(Q)~(살전 4:13~18)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영생(永生)에 관한 오해(誤解)를 어떻게 수정(修正)해 주었습니까?


(A)~○.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誤解)하고 있는바 그들이 믿고 있는 그것이 바로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을 입증(立證)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므로 (살전 4:13~18)에 바울은 그 오류(誤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재림(再臨)하실 때 살아있는 의인(義人)들과 함께 죽은 자들이 부활(復活)하여 공중(空中)으로 끌어올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영원(永遠)토록 살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바울은 신자(信者)들의 죽음에 대하여 ‘코이마스다이’(’자다’)라는 말을 사용한 반면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직접적(直接的)으로 ‘죽다’는 의미를 지닌 ‘아포드네스케인’을 사용한다. 이에 관해 혹자(或者)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죄를 지는 대속적의미(代贖的意味)를 갖기 때문이라고 하며(Thomas) 혹자는 그의 죽음의 실제성(reality)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한다(Bruce).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包含)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실제적(實際的)인 죽음은 그의 부활이 기적적(奇蹟的)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명하는것이며, 신자(信者)들의 부활을 가능케 한 것이다(고전 15:20).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예수 안에서’의 헬라어 ‘디아 투 예수’을 직역(直譯)하면 ‘예수를 통하여’, ‘예수로 말미암아’이다. 

따라서 본 구절(句節)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이란 의미이다. 이에 대한 해석이 용이하지 않다.

(1) 혹자는 예수를 통하여 신자들의 죽음이 잠으로 변하였다고 하며(Morris), 

(2)혹자는 이 말이 죽은 신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주장한다(Askwith). 후자(後者)의 견해(見解)는 전자(前者)의 견해(見解)를 보다 구체적(具體的)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다 포괄적(包括的)인 후자(後者)의 견해를 택(擇)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살전 4:13~18, 만나주석)


○.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혹자(或者)는 ‘저와 함께’에 대하여 단순(單純)히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에 참여(參與)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Frame).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서 ‘파루시아’때 예수와 함께 죽은 성도(聖徒)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으로 해석(解釋)하는 것이 유력하다(Morris). (살전 4:13~18, 만나주석)


○. 하나님의 나팔(喇叭)로. 

본 절은 사 27:13에 ‘그날에 큰 나팔 소리가 울려’라는 구절(句節)을 비롯하여 구약성경(舊約聖經)의 여러 곳에서 나온다(욜 2:1, 15, 슥 9:14). 또한 신약성경(新約聖經)에서도 이와 유사(類似)한 구절이 (고전 15: 51)에 ‘마지막 나팔 소리’와 마 24:31에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리고 계 11:15에 ‘천사가 나팔을 불매’등이 있다. 이상의 구절(句節)들을 종합(綜合)해 볼 때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은 같은 역할(役割)을 하는 두 가지 표현(表現)임을 알 수 있다. (살전 4:13~18, 만나주석)


○. 헬라어 코이마오(koimao-), “자다”, “죽다.” 중요한 본문(本文)상의 증거(證據)는 “잠들고 있다”라는 독법(讀法)을 지지(支持)한다(참조 20쪽).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땅에 묻혀 쉬고 있었다. 죽음의 비유(譬喩)로서의 잠에 관해서는 (요 11:11 주석)을 참조하라. 헬라어의 비문들은 매장지(埋葬地)가 때때로 기숙사(寄宿舍) 혹은 침실(寢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單語)인 코이메테리온(koime-te-rion)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 용어(用語)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면서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살전 4:13~18, 재림교주석)


○. “호령(號令)”과 “천사장(天使長)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에 뒤이어 즉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소리가 울리는 것은 의인(義人)들의 부활(復活)의 예비단계(豫備段階)로 간주(看做)될 수 있다(참조 요 5:25, 28, 29; 11:43). 그리스도는 승리를 선포(宣布)하면서 하늘에서 온다. 그는 죽음과 무덤을 정복(征服)했다(계 1:18). 원수(怨讐)인 죽음은 구속(救贖)받은 자들 중 어떤 사람도 그의 비정(非情)한 손아귀에 더 이상 쥐고 있을 수 없다. 죽은 의인(義人)들은 주의 명령(命令)에 반응(反應)하여 무덤에서 일어난다. (살전 4:13~18, 재림교주석)


○. 하나님의 나팔(喇叭).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어떤 특정(特定)한 나팔을 반드시 가리키지는 않으며,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데 사용하는 악기(樂器)를 가리킨다. 구약(舊約)은 실제이거나 예언(豫言)이거나 간(間)에 하나님의 주목(注目)할만 한 개입(介入)들과 관련하여 나팔을 빈번(頻繁)하게 언급한다(출 19:13, 16, 19; 시 47:5; 사 27:13; 욜 2:1; 습 1:16; 슥 9:14). 나팔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소집(召集)할 때(민 10:2~4), 전쟁(戰爭)의 경고(警告)를 발(發)할 때(5~9절), 국가적(國家的)인 절기(節氣) 때(10절) 사용했다. 신약에서는 나팔 소리가 택(擇)하신 자들을 모으는 일과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일과 연관(聯關)되어 있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3~18, 재림교주석)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접속사(接續詞) “그리고”(and)는 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동반(同伴)되는 결과, 즉 죽은 의인(義人)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聖徒)들을 포함(包含)하여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이다(참조 롬 4:3; 고전 15:18 주석; 계 14:13). 그들은 예수가 “부활(復活)의 자녀”(눅 20:36)로 묘사(描寫)한 자들 가운데 포함(包含)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들을 “그리스도 강림(降臨)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라고 부른다(고전 15:23).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첫째 부활”에 해당한다(참조 계 20:5, 6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구절(句節)은 다른 두 부류(部類)의 사람들과 자고 있는 성도들을 구분(區分)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용되는데, 그 두 부류(部類)는 (1) 그리스도 재림(再臨) 때에 육체(肉體)로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죽은 악인(惡人)들과 (2) 자신이 사랑하는 죽은 자들이 예수가 올 때에 불리한 상태에 처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살아남으로 더 먼저 배려(配慮)받고, 살아 있는 성도(聖徒)들과 동등(同等)한 입장에 설 것을 확신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살전 4:13~18, 재림교주석)


○.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관한 오류(誤謬)들

데살로니가 형제들에게 바울이 편지(便紙)를 보내는 또 다른 이유(理由)가 여기에 있다. 새로이 믿음에 들어온 이들이 회심(悔心)하고 죽은 사람들에 관한 오류(誤謬)에 빠졌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을 볼 것이라는 희망(希望)을 갖고 있었지만 믿는 신자(信者)들이 차례로 하나씩 둘씩 죽음의 권세(權勢)에 굴복(屈伏)하여 그들이 소망(所望)하던 사건, 곧 하늘 구름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강림(降臨)하시는 그 사건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時代)에 올 것이라는 신념(信念)에 어떤 이들은 모든 사업(事業)을 포기(抛棄)하고, 모든 것을 단념(斷念)하고 그들이 가깝다고 생각한 큰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칭찬(稱讚)할만 한 일이라는 광신적(狂信的)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바울의 생애 110). (살전 4:13~18, 화잇주석)


(11월17일) (木)  <영원(永遠)한 만남>


(Q)~(고린도전서 15:51~55)에서 바울이 설명(說明)하고 있는 “비밀(秘密)”은 무엇입니까?


(A)~○. 옛말에 “선(서투룬) 무당(무녀(巫女). 무자(巫子). 사무(師巫)들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어설프게 해석(解釋)하여 비밀(秘密)휴거(携擧)를 믿게 하는 일이 지난날에도 있었고 지금 현재도 진행 중(進行中)인 사람들이 있다. 성경(聖經) 어디에도 이와 같은 휴거(携擧)와 재림 사이의 인위적(人爲的)인 구분(區分)을 지지(支持)하는 구절(句節)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이 언급(言及)한 “비밀(秘密)”은 재림의 때, 살아 있는 의인(義人)들이 부활한 의인들과 연합하기 위해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전15:51)예수님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復活)한다는 진리(眞理)이다. 


○. “비밀”이란 말은, 전에 감추었다가 지금은 계시(啓示)된 진리를 이름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진리를 염두에 둔 말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곧,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때 전에 모두 다 별세하고 없을 것이 아니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을 자들도 있겠다는 뜻이다.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그 때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하여 몸이 변화된다. “마지막 나팔”은 비유니, 주께서 재림하시어 성도들을 모으심을 가리킨다(마 24:31). 사 27:13, 살전 4:16 참조.” (고전 15:51, 만나주석)


○. 바울은 그때까지 감추어져 있고 알려지지 않은 것 즉 모든 성도(聖徒)들이 다 죽은 것이 아니고 변화되리라는 것을 여기서 말한다. 주님이 오실 때에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이 없이 구름 위로 들리워진다(살전 4:11). 그러나 이 구절(句節)은 변화가 없으리라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과 같이 산 자들의 육체도 변화(變化)된다. 이것도 "순식간(瞬息間)에 홀연(忽然)히"(52절) 일어난다. 전능(全能)의 능력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없을까? 죽은 자들을 소생(蘇生)시키는 능력이 이와 같이 순식간에 산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혈(血)과 육(肉)은 하늘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산 자들도 죽은 자과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인 바울의 비밀(秘密)이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秘密)을 말하노니" 즉 전에 어둡고 알지 못하던 것을 밝힌다. 다음을 주목(注目)하자. 복음 안에는 많은 비밀들이 우리에게 보여진다. 전에 알려지지 않은 진리가 알리어지고 전에 어둡고 애매한 진리가 밝혀지고 충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부분적(部分的)으로 계시(啓示)된다. 바울은 여기에서 주민의 재림시(再臨時)에 살아있는 성도(聖徒)는 죽지 아니하고 변화되어 이 변화(變化)는 순식간(瞬息間)에 마지막 나팔(喇叭)에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나는 알려지지 않은 진리를 밝힌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호령(號令)과 천사장(天使長)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喇叭)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降臨)하시리니"(살전 4:16)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審判臺) 앞에 오라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큰 부름의 소리이다. 이 소리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聖徒)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일어나며 산 성도(聖徒)들도 썩지 아니할 상태(狀態)로 된다(고전 15:52절).(고전 15:51, 매튜헨리)


○.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변화를 받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알린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應)하리라." 혹(或)은 "주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滅)하실 것이라"(사 25:8).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그리고 사망이 완전히 정복(征服)되고 성도(聖徒)들은 그 권세(權勢)에서 해방(解放)된다. 우리의 주님이 일어난 성도를 인도(引導)할 곳은 사망이 정복된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승리의 찬양(e,pinikion)을 부를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사망은 영원히 삼킨바 된다. (ei;j ni/koj).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죽을 때에 사망이 삼키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살 때에 사망이 영원히 삼키어버린다. 이 사망의 멸망(滅亡)에 대하여 성도들은 승리의 "노래를 터뜨릴 것"이다. (고전 15:51, 매튜헨리)


○. 성도(聖徒)들은 정복(征服)된 사망에 대하여 개가(凱歌)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 크고도 무서운 파괴자(破壞者)를 경멸(輕蔑)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 너의 해치는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 얼마나 많은 비참(悲慘)함을 우리에게 행하였는가? 우리는 죽었다. 보라. 우리는 다시 살았다. 그리고 다시 죽지 않는다. 너는 정복(征服)되었고 무기(武器)를 빼앗기고 공격(攻擊)할 힘이 없어졌다. 너의 운명적(運命的)인 대포(大砲)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창고(倉庫)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너의 재난(災難)을 무서워하지 어떠고 너의 능력에 반항(反抗)하며 너의 분노(忿怒)를 조롱(嘲弄)한다.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어떻게 되었느냐? 너의 파괴(破壞)와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어디에 있느냐? 한 때에 우리는 너의 포로(捕虜)가 되었다. 옥문(獄門)이 파괴되고 자물쇠와 빗이 제거(除去)되었다. 쇠사슬이 끊어지고 우리는 영원히 자유하게 되었다. 포로(捕虜)가 석방(釋放)되었다. 상상되던 승리자는 정복(征服)되고 노예(奴隸)는 석방(釋放)되었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종말(終末)이 되었구나. 사망의 끈이 풀리고 우리도 자유롭게 되었다. 죽음으로 상처(傷處)받지 않고 무덤에 갇히지 않는다." 순식간(瞬息間)에 사망의 능력이 정복되고 무덤의 파괴(破壞)가 사라졌다. 성도(聖徒)에게는 그들의 자취가 없어졌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성도가 영생(永生)으로 일어날 때에 그들의 주님에게 찬양(讚揚)하며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송축(頌祝)하리라. 사망을 정복한 영광(榮光)이여! (고전 15:51, 매튜헨리)


○. 마지막 나팔(喇叭)에.

 이 영화(榮華)로운 변화가 일어날 때는 다음에 지적돼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있을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나팔(喇叭)”이 울리고 죽었던 신실한 신자(信者)들이 죄의 모든 영향(影響)에서 완전히 벗어난 몸으로 살아날 때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골 3:4; 참조 살전 4:16 주석). 그때에 살아서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懇切)히 기다렸던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운 변화를 입으며, 그들의 몸에서 타락(墮落)과 불완전(不完全)의 모든 흔적(痕迹)이 벗겨져서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될 것이다(참조 빌 3:20, 21; 요일 3:2).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살아 있을 진실한 모든 신자(信者)의 표상(表象)이었던 엘리야처럼 죽지 않고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놀라운 경험을 할 것이다(참조 왕하 2:11; 선지자와 왕, 227).


○. 순식간(瞬息間)에. 

헬라어 엔 아토모(en atomo-), “나눌 수 없는 시점에”, “즉시.” 신약에서 아트모스(atomos)는 여기에만 나온다. 이 단어에서 “atom”(원자)이 파생(派生)된 것이다. “홀연(忽然)히”라는 표현과 함께 이 구절(句節)은 살아 있는 성도(聖徒)의 몸에 일어날 변화의 엄청난 속도를 가리킨다.(고전 15:51, 재림교주석)


○. 다 변화(變化)하리니. 

이 “다”에는 예수가 오실 때 살아 있는 자들과 죽었던 자들이 다 포함(包含)된다. 전자(前者)는 죽을 몸이 불멸(不滅)의 몸으로 순식간(瞬息間)에 변하고, 후자(後者)는 불멸(不滅)의 몸을 입고 살아난다.” (고전 15:51, 재림교주석)


○. 불멸(不滅)을 위한 마지막 손질(사 65:17; 마 25:21; 살전 4:16, 17; 계 5:12; 21:4)

우리에게는 부활(復活)하시고 항상 살아계신 구주가 있다. 그는 사흘 동안 무덤에 누워 계신 후에 그 착고(着錮)를 깨뜨리셨다. 그리고 승리하신 가운데 그는 요셉의 빈 무덤을 향하여 선포(宣布)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분이 지금 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잠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생명을 주시는 분이 곧 오실 것이다. 생명의 시여자(施與者)께서 무덤의 착고(着錮)를 깨뜨리시려고 오고 계신다. 포로(捕虜)들을 데리고 오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포고(布告)하실 것이다. 거기에 부활한 무리들이 서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졌던 마지막 생각들은 죽음과 그 고통, 무덤과 묘지(墓地) 등에 관한 것이었으나, 이제 그들은 “오 사망(死亡)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선언(宣言)할 것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사망의 고통이었지만 그들이 깨었을 때는 고통은 모두 다 사라졌다.…(고전 15:51, 화잇주석)


○. 불사불멸(不死不滅)을 위한 마지막 손질이 가해지고 공중(空中)에서 주를 영접(迎接)하기 위하여 올라간다. 하나님의 도성(都城)의 문이 활짝 열리고 진리를 굳게 지킨 열국의 백성들이 안으로 들어간다. 양편(兩便)에는 천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하나님의 속량(贖良)함을 입은 자들이 스랍들과 그룹들이 있는 곳을 지나서 걸어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이 천사들에게 명(命)하여 환영사(歡迎辭)와 축복의 말을 하라고 하신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參預)할지어다.” 그 즐거움은 무엇인가? 그분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滿足)히 여기신다. (고전 15:51, 화잇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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