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지옥 불(질문, 대답, 설명) 1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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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1-25 12:25 조회6,396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지옥 불
(12월 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4분)
연구 범위: 막 9:42~48, 말 4:1, 유 7, 딤전 2:5, 행 2:29, 34, 35, 요일 5:3~12
기억절: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21)
이탈리아 시인 단테(Dante Alighieri)의 유명한 작품 <신곡>은 사람이 죽으면 땅속 지옥이나, 인간의 영혼이 스스로를 정화해 하늘로 올라갈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중간 지점인 연옥, 혹은 하나님 앞에 있는 천국으로 향한다고 묘사한다.
단테의 글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불멸의 영혼이 지옥이나 연옥, 또는 천국으로 간다는 기본 개념이 그 시대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 많은 보수적인 개신교 종파들 역시 사람의 영혼은 죽은 후에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불멸의 존재라고 믿고 있다. 인간의 영혼이 결코 죽지 않는다면, 몸이 죽은 후에 어딘가로 가야만 할 것인 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끔찍한 신학적 오류를 초래했다.
이번 주 우리는 이러한 비성경적 이론들 중 몇 가지와 함께 죽음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지옥과 인간의 영혼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 느끼기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허락된 영생의 선물로 인해 감사한다.
- 행하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을 바탕으로 순종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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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가복음 9:48에 기록된 “벌레도 죽지 않고”라는 구절의 뜻은 무엇입니까?
※ 벌레가 더 활동할 수 없을 때까지 죽지 않고 시체를 먹어치울 것이라는 뜻이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말 4:1, 유 7)
※ 태울 것을 다 태울따까지는 어느 누구도 껄 수 없이 소임을 다 하는 불이다.
4. 연옥에 대한 교리가 비성서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전 9:10, 겔 18:20~22, 히 9:27)
※ 한번 죽은 후에는 의식이 활동할 수 없고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과 다른 주장이기 때문이다.
5. 죽은 자들의 영혼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가르침의 문제는 무엇입니까?(행 2:29, 34, 35, 고전 15:16~18)
※ 성경의 분명한 가르친과 전혀 다른 주장이기 때문이다.
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요일 5:3~12)
※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
지옥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비성서적인 영혼 불멸에 관한 가르침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옥은 악인들이 뜨거운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공의롭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탄의 조작으로 생겨난 오해들을 성경의 진리를 통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해야 합니다.
11월 27일(일) 불멸의 벌레?
마가복음 9:42~48과 이사야 66:24를 비교해 보라. “벌레도 죽지 않고”(막 9:48, 흠정역)라는 구절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막9:42~48]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66:24]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답: 이것을 먹을 것을 다 먹을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그것도 굶어죽게 된다. 왜냐하면 지옥이나 이 세상은 사망이 종국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벌레”(막 9:48)라는 단수 명사를 죽은 후 육신에서 분리된 후 지옥으로 날아가 영원히 죽지 않고 무기한으로 고통을 받는 악인의 영혼이나 그런 영적 존재에 대한 암시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죽음을 무의식 상태라고 말하는 성경적 개념과 배치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본문에 대한 구약의 배경을 무시하는 것이다. “단수로 사용되고 있는 ‘벌레’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복수의 ‘벌레들’을 의미하며, 여기서도 한 마리의 벌레가 아니라 사체를 먹는 여러 마리의 벌레들을 나타낸다”(로버트 G.브래처와 유진 A. 니다, A Translator’s Handbook on the Gospel of Mark, 304).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48에서 이사야 66장 24절을 인용하셨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이 무시무시한 구절은 하나님의 대적들이 죽어 넘어지고 멸절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불로 소멸되지 않은 사체는 벌레들의 먹이가 되거나, 먼저 벌레들의 먹이가 된 후에 불로 소멸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육체의 파괴를 피해 지옥으로 날아가는 영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절대 죽지 않는 “벌레”는 무엇인가? 마가복음 9장 48절에 인용되고 있는 이사야 66장 24절의 비유적 표현은 이 벌레들이 불멸의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벌레들에게 주어진 파괴적인 임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악한 자들의 사체를 먹이로 삼은 벌레들이 사체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중단 없이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그분을 경배한다(사 66:22, 23). 이처럼 대조적인 운명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온전한 몸을 유지하더라도 결국 벌레와 불로 소멸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체의 일부가 없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막 9:42-48).
<묵상>
결국, 우리는 완전히 구원받거나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답: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영생과 영벌을 대조한다(마25:46). 예수님은 영생과 멸망을 대조했다(요3:16). 영벌이나 영멸은 생명과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부가설명> 앞 답에서 간단하게 썼지만, 성경에 꺼지지 않는 불, 또는 영원한 불 등의 표현은 태울 것이 있는 한은 꺼지지도 않고 끌 수도 없다는 뜻이다. 잠언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26:20)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태울 것을 다 태우면 불도 꺼진다는 표현이다. 유다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했는데(유 7), 베드로후서에는 소돔 고모라가 재가 되었다고 기록했다(벧후2:6). 이 두 구절은 서로 보완하는데 소돔 고모라가 영원한 불의 형벌로 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태우는 불을 영원한 불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자리에 아직도 불이 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처럼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말도 그것들이 먹을 것을 다 먹는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혼불멸설과 함께 불멸하는 악인의 영혼이 불에서 고생하니까 영혼이 불멸하면 지옥불도 불멸할 수밖에 없다는 터무니 없는 논리로 이런 구절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엄청난 오류를 끌어들인 것이다.
<교훈>
마가복음 9장 48절에 인용된 비유적 표현은 이 벌레들이 불멸의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벌레들에게 주어진 파괴하는 임무가 완전히 달성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11월 28일(월) 지옥 불
‘지옥의 광경’(The Sight of Hell)이라는 제목의 어린이를 위한 책자에서 영국의 가톨릭 사제 존 퍼니스(John Furniss)는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인가에 대해 “하늘과 땅보다 더 큰 거대한 쇠구슬을 1억 년에 한 번 날아오는 새가 단 한 개의 깃털로 스쳐서 마침내 그 쇠구슬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라고 묘사했다. 퍼니스는 그 쇠구슬이 닳아 없어진 후에도 지옥에 있는 죄인은 계속해서 불에 타게 된다고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여전히 그와 유사한 것을 믿고 있다.
말라기 4:1과 유다서 7절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영원한 불”(마 18:8)이나 “꺼지지 않는 불”(막 9:43), 혹은 그와 관련된 생각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말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유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마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답: 다 태울때까지 꺼지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소돔 고모라를 태운 영원한 불은 이미 꺼지고 없다.
“영원한”(히: ‘올람’, 헬: ‘아이온’, ‘아이오니오스’)이라는 단어는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면(신 33:27), 이 단어는 그분의 영원하심을 표현한다. 인간에 대해(출 21:6) 언급할 때는 그 이야기가 말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뜻이다. 태우는 불을 묘사하면(마 18:8, 마 25:41) 불태우는 대상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라고 기록된 표현에서 보이듯 “영원한 불”은 악인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완전히 멸절한다는 뜻이고, 그런 맥락에서 “영원하다.”
악인이 영원토록 벌을 받는다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매우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만일 악인들이 영원히 벌을 받는다면, 그 말은 악이 결코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겔 33:11)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신 32:39, 시 36:9).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끝없는 고통을 겪을 악인들에게 무엇 하러 계속해서 생명을 주시겠는가? 그들의 존재를 끝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악인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계 20:12) 벌을 받는다면, 왜 인간의 유한한 생애 동안 지은 죄에 대해 무기한으로 벌을 받아야 하겠는가?
“영원한 불”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급은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년기 후에 있을 “불못”에 대한 암시로 봐야 한다(13과 참조). 그러므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거나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있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묵상>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고통이라는 개념과 대비해 볼 때 지옥에 대한 진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답: 사랑의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받는 악인들 보는 것이 기쁘지 않다. 성경은 악과 그 영향을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우주를 영원히 정결하고 악이 그 흔적도 없는 곳이 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부가설명> 사탄이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주장한 후에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므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 사탄은 자기 주장이 거짓임이 현실로 드러나자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육체의 영혼이 있어서 그것이 결코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만들었다.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를 호흡하는 사람들이 알 수 없다. 그것을 기회로 사탄은 영혼불멸이라는 멋지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퍼뜨려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 넣는데 대단히 성공했다. 사탄의 부하들은 귀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마치 사후에 죄인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처럼 연기를 하고 환생한 사람 노릇을 하며 호흡하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속인다. 그들은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육체가 된 사람들의 눈으로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사용하여 속이는데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속는다. 그래서 세상의 도덕적 종교들은 이 사후 영혼이 좋은 곳에 가도록 하는 매개체로 세상에 생겨났다. 참된 성경의 종교 이 외의 모든 종교가 이 사상을 기초로 생성되었다. 세상이 다 그렇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사후에 좋은 곳에 가서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말을 예사로 하고 미디어에도 당당히 표현한다. 사탄이 자기가 성공한 것을 기뻐하겠지만 하만이 모르드개를 보고 기분이 나빴던 것 같이 성경을 바르게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는가? 그래서 말세에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우리는 정신차려야 한다. 사람들은 사후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다는 교리를 심히 두려워하여 어떤 종교든지 신앙하는데 창조주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속고 있다.
<교훈>
악인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벌을 받는다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매우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는 지옥불은 없다.
11월 29일(화) 연옥에 있는 성도들
가톨릭교회는 지옥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죽은 자는 연옥에서 죄를 씻은 후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연옥에서의 그들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고행을 통해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의 교리문답에는 연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총과 우정 속에서 죽었으나 아직 완전하게 정화되지 않은 모든 사람도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정화의 과정을 겪고, 그 과정을 통해 천국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획득한다”(가톨릭교회 교리문답, 291). 또한,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거나 그들을 대신해 어떤 행위를 하면, 그들이 받는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교회는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자선, 면죄부, 그리고 고행을 요구한다”(가톨릭교회 교리문답, 291).
전도서 9:10, 에스겔 18:20~22, 히브리서 9:27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연옥설을 어떻게 반박하는가?
[전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겔18:20~22]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답: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의식 자체가 없다.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가 좋은 곳에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불타는 지옥에 대한 이교적 개념에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이교적 관습을 결합한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연옥에 대한 교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다음 성경구절들이 그 증거이다. (1) 죽은 자는 무덤에서 무의식적 상태로 휴식하고 있다(전 9:10). (2) 타락한 인간의 의는 다른 타락한 인간에게로 옮겨질 수 없다(겔 18:20~22). (3) 우리의 유일한 중재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 2:5). (4) 죽음 이후에는 회개할 다른 기회가 없고, 죽음 다음 장면은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히 9:27).
더 심각한 문제는 연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비성경적인 이론이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한다는 데 있다. “타락 이래로 사탄은 계속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오해하게 하고 있다. 사탄은 영혼 불멸의 교리를 제시했다...영원히 타오르는 지옥이라는 개념은 사탄의 작품이다.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품성을 위조해 하나님을 가혹하고 복수심이 많으며 독단적이며 용서를 베풀지 않는 분으로 오해하게 했다”(엘렌 G 화잇, 원고 51, 1890). 연옥에 대한 주장은 죽은 자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대신, 연옥에서 누군가 그들을 구해낼 때까지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
<묵상>
연옥이나 영원한 고통과 같은 오류는 우리에게 올바른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나요? 누구를 믿는가,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지 않으면 속아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부가설명> 연옥은 천주교의 교리이다. 성경의 교리가 아니다. 그들은 베드로전서 3:18,19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구절을 중심으로 이 교리를 만든 것 같다. 이 구절은 이미 앞에서 공부했다. 그들은 이 구절에 벧전 4:5,6을 보태서 설명하는 것 같다.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께서 죽은 자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자들에게도 죽기 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하시는 때에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기가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직접 고할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생명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산 자로 판결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은 죽은 자로 판결 받을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땅으로 보내고 산 자들은 산 자의 땅으로 보낸다. 산 자의 땅은 새 하늘고 새 땅이고 죽은 자의 땅은 불 못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죽은 자의 상태와 사후 상태에 관한 말씀을 성경 전체의 사상으로 이해할 때만 온해하지 않을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가 워낙 교묘하기 때문이다. 지옥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통하여 사람을 낚는 낚시다.
<교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연옥에 관한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비성서적 가르침이다.
11월 30일(수) 육체를 떠난 영혼들로 가득한 천국
비록 개신교 신자들은 연옥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의인의 영혼들이 이미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그 “영혼들”이 육체를 떠난 영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육체를 떠난 영들이기는 하지만 변화된 영광의 몸을 입은 자들이라고 믿는다.
죽었으나 살아 있는 자들의 형이상학적 상태가 어떻든 간에, 이 이론들은 죽은 자의 최후의 부활과 심판에 대한 성경의 교리와 조화되지 않는다. 의인들의 영혼이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다면 부활과 심판(계 20:12~14)이 왜 존재하겠는가?
사도행전 2:29, 34, 35, 고린도전서 15:16~18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죽은 자의 상태와 부활을 기다리는 자들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행2:29,34,35]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고전15:16~18]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답: 죽은 자는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무덤에 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 믿는 것도 헛일이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예수 믿고 죽은 자들도 다 망하였다. 즉 천국 가서 행복한 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하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에녹(창 5:24)이나 엘리야(왕하 2:9~11)처럼 살아서 그곳으로 갔거나, 모세나(유 9)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던 사람들(마 27:51~53)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가르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그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큰소리로 외치는(계 6:9~11) 영혼들은 정의에 대한 비유일 뿐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제단 아래서 외치는 영혼들의 소리는 하늘의 영원한 보상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무덤은 무의식적 상태에서 마지막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죽은 자들의 안식처이고, 부활의 날에 그들의 의식이 비로소 회복될 것이다. 의로운 자들을 포함해 죽은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마지막 부활에서 그들의 육체와 재결합 되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며 하늘을 떠도는 육체를 떠난 영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각자 죽음 이래로 계속 천국을 누리고 있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 18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했다고 말했겠는가? 죽은 의인들이 죽은 직후 영원한 보상으로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신약성경의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교리와 완전히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장례식에서 늘 이 잘못된 주장을 듣게 된다.
<묵상>
고린도전서 15:16~20를 다시 한 번 읽고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답: 부활이 없으면 예수 믿는 것도 헛것이고 믿고 죽은 자도 망한 자들이다.
<부가설명> 성경에서 현재의 사람의 본질에 관하여 바르게 알려면 창세기 3장을 올바르게 읽어야 한다. 아담 부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다음에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셨다. 그 말씀이 창세기 3:19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개역). 죽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는 흙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창조되기 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창조되기 전에 영혼이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다.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실과를 먹은 후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코에 불어넣은 생기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 생기가 단독으로 인격적 활동을 하는 영혼이 아니다. 다만 살려주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다. 이것을 ‘네샤마’라고도 하고 ‘루아흐’라고도 한다. 이 진리를 전도서 12:7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라고 기록했다. 창조 순서의 역순이다. ‘영’이 ‘루아흐’이다. 여기에 몸을 떠나 단독으로 인격적 활동하는 영혼의 존재는 없다. 창3:19을 바르게 깨달으면 오해할 수 없다.
<교훈>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먼저 들어가는 천국은 없다. 모든 죽은 자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무덤에서 쉬다가 부활의 날에 비로소 의식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12월 1일(목) 성경적 관점
요한일서 5:3~12을 읽어보라.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영생”이 있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요일5:3~1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답: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증거하셨다.
인간의 조건적 불멸에 대한 성경적 교리는 요한일서 5:11, 12에 명시되어 있다. 이 교리는 분명 영혼 불멸에 대한 비성경적 이론과 대조된다. 이 중요한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우리는 오직 삼위 하나님만이 “죽지 아니”하시며(딤전 6:15, 16)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시 36:9, 골 1:15~17, 히 1:2).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창 3장), 그들과 그들의 모든 자손(우리를 포함)은 육체적 죽음을 선고받고 영생의 선물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처음부터 그들의 것이어야 했던 영원한 생명을 되찾을 수 있도록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셨다. 바울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고 그 계획을 설명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이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모든 사람(롬 5:12~21)에게 허락되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죄와 죽음을 이 세상에 가져온 문자 그대로의 한 사람 아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불순종으로 죄와 죽음을 이 세상에 가져온 그 한 사람 아담 없이는 성경에 있는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 12).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전체적인 그림은 더욱 분명해진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영생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바로 오늘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의로운 자들이 부활한 후에 비로소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이다. 결론은 명백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다(요일 5:11, 12).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혼 불멸의 이론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모든 인간,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도 영생을 부여한다. 이 가르침이 아무리 인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묵상>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남아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그래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주신 영생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나는 성경을 생명경전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세상 종교의 경전들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전제로 권선징악을 가르치며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라고 권한다. 그래서 죽은 후에 들어가는 내세에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행하는 도덕적인 선행이 그에게 영생의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이미 영생의 생명을 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선행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들은 옛사람이 되어 썩어져가는 옛 습관만 생활에 나온다(엡4:22, 벧전1:23). 그들이 도덕적으로 천하에 없는 선을 행해도 그것이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 못한다. 오직 사망을 폐지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믿을 때만 아담 안에서 죽은(고전15:22) 사람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생명의 실상을 드러내셨다. 참된 생명 자체는 사망이 전혀 간섭할 수 없는 상태의 생명이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한다(엡4:18, 요3:16). 이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안에 있다. 그분이 생명이요 부활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이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그것이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을 영생으로 살려내지 못한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책이 성경이요 성경을 연구하여 바르게 깨달으면 이 생명을 얻는다. 성경은 생명을 주는 경전이다. 모든 선행은 이 생명의 열매로 드러나게 된다.
<교훈>
영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다.
12월 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각 시대의 대쟁투> 531~550, “최초의 큰 기만,” 551~562, “죽은 사람들이 우리와 교통할 수 있는가?”를 읽어보라.
“영혼 불멸설의 근본적 오류는 죽은 후에 의식이 있다는 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교리는 영원 지옥에 관한 교리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며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도 반대된다. 일반적 신앙에 의하면 구속함을 받아 하늘에 있는 자들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특별히 그들이 남겨 두고 간 친구들의 생애를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산 자가 당하는 어려움을 아는 것, 그의 사랑하는 자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는 것과, 그들이 당하는 생애의 모든 슬픔, 실망, 고통 등을 보는 것이 어찌 행복이 될 수 있겠는가? 지상에 있는 그들의 친구들 위를 배회하는 자들이 누리는 하늘의 축복이 어느 정도로 즐거움이 되겠는가? 회개하지 않은 자의 영혼은 그 숨이 끊어지자마자 지옥불에 던짐을 받는다는 믿음은 얼마나 역겨운 것인가? 그들의 친구들이 준비되지 못한 채 죽어서 영원히 죄와 저주를 받는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인가!”(각 시대의 대쟁투, 54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다른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은 자들은 즉시 하늘로 가고 멸망 받은 자들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 속에 있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 “주님과 함께”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멸망 받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고 있다는 끔찍한 생각을 왜 그렇게 강하게 믿는 것인가? 이 사실은 전통이 우리 믿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함께 토론 해보라.
※ 사람은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미화(美化)하여 두려움을 없애려는 본능이 있으므로 그런 교리를 믿기를 좋아한다. 사탄은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거짓으로 사람들이 믿도록 속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믿지 않을까? 그리고 이기심에 정복당한 사람들이 자기는 지옥에 가지 않으면 된다는 무의식의 작용도 있을 것이다.
2.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은 영혼 불멸이라는 비성경적 이론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있다.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교회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자신이 성경을 분명히 깨닫고 확실이 설명해주도록 준비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줘야 할 것이다.
3. 단테의 <신곡>은 단순한 허구였지만, 죽은 후에 “영혼”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고정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 신학이 외부의 가르침에 의해 얼마나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한 가지 사례이다.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어떤 사상이 기독교 사상에 얼마나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가?
※ 영혼불멸설은 피타고라스 학파를 거치고 소크라테스와 풀라톤을 통하여 헬라 철학에 깊이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신풀라톤 학파에 속하는 저스틴 말터에 의하여 기독교로 들어와 교리로 자리 잡았다. 카톨릭은 이것을 중요한 교리로 확정했고 온 세상을 영혼불멸 사상으로 포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은 이런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영화, 드라마, 게임 등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계문명과 사상이 강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강신술을 보편화시키는 매개체 노릇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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