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질문, 대답, 설명) 10/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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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10-18 11:23 조회1,900회 댓글0건본문
제4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말하는 증인들
(10월 2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0분)
연구 범위: 요 1:19-23, 사 40:1-5, 요 1:29-37, 롬 5:6, 요 1:35-39, 1:43-51, 3:1-21
기억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와 같은 자신에 대한 주장들을 뒷받침할 강력한 성경적 근거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하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떡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 관원의 아들을 고치시고, 베데스다 못가의 사람을 낫게 하시고,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으며,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사도는 유대인, 이방인, 부자, 가난한 자, 남자, 여자, 지배자, 평민, 배운 자, 못 배운 자 등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증거와 성경을 가리킨다.
이번 주는 침례 요한의 강력한 증언으로 시작한다. 또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증인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안드레와 함께 있는 다른 제자’(요 1:35, 40)라고 묘사되어 있는 다른 한 명의 감춰진 증인, 사도 요한도 만나게 될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언약을 성취하실 메시아이시다.
느끼기: 요한은 증인들을 통해 그분이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행하기: 증인들이 밝힌 예수님의 신원을 이해하고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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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침례 요한은 어떻게 증언하였습니까?(요 1:22)
*답: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뒤에 오실 분의 길 예비자라고 했다.
3. 침례 요한의 선포는 성경의 예언과 제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더해 주었습니까?(요 1:29)
*답: 성소제도와 봉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깨닫도록 도왔다.
4. 두 제자가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된 후에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요 1:41)
*답: 곧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다.
5. 나다나엘은 어떻게 자신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요 1:46)
*답: 예수께서 자기를 이미 아시는 것을 확신했을 때 극복했다.
6.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질문은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하였습니까?(요 3:10)
*답: 사람은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백성의 선생된 사람은 거듭남의 진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어떤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답: 죄가 처리되어야 하며 그 죄를 처리하실 분은 피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진리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
결론: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다른 증인들을 열거한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하며 구원자로서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언약을 성취할 메시아의 사역과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다. 다른 제자들과 니고데모도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였으며, 요한복음 전체의 강조점은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고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10월 20일(일) 침례 요한의 증언
지난주 교과에서 설명했듯이 요한복음은 창조 이전부터 영원한 존재이셨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서론 안에서 침례 요한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등장한다. 예수님 당시 일부 유대인들은 두 종류의 메시아, 즉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 그리고 왕이신 메시아를 기대했다. 요한은 침례 요한이 그런 메시아가 아닌 참된 메시아의 증인이라고 분명히 기록한다.
요한복음 1:19-23절을 읽어 보라. 침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과 사명을 어떻게 설명하였는가?
[요1:19~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답: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침례 요한에게 보내 그가 누구인지 물었다. 메시아에 대한 유대의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침례 요한이 그러한 기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빛이 아니지만, 빛에 대해 증거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요 1:6-8).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요 1:26, 33).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 1:27). 그리스도께서 나보다 앞서신 것은 그가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요 1:30).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은 단지 그분을 가리킬 뿐이라고 하였다(요 1:34).
이사야 40:1-5과 요한복음 1:23을 읽어 보라. 요한은 이사야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사40:1~5]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요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답: 이사야의 예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했다.
길이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던 시절에 종들은 길의 표면을 평평하게 하고 굽어진 길을 바르게 하여 왕의 행차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왕보다 앞서 보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예언의 성취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왔다.
<교훈> 유대인들의 기대가 높았지만 침례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며 그분의 증인으로서 사람들을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메시아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시는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많은 예언이 있다. 이사야 40:1~5도 그 예언 중에 하나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13:1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4:29)라고 말씀하셔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셨다. 예언과 그 성취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도록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도구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를 기록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신약 시대에는 구약이 필요없다는 엉터리 논리를 펴는데 그것은 신약성경도 필요없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9~31). 그래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약의 말씀도 믿지 않는 것이다.
10월 21일(월) 하나님의 어린 양
히브리 민족은 로마로부터 그들을 구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복음의 목표는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로 잡아 오실 왕에 관한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는 이 땅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에 대해 기록된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9-37을 읽어 보라. 침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있는가? 그는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모습을 사용하는가? 그것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요1:29~37]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답: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했다. 그것은 그분이 희생 제물이 되어 세상 죄를 속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포한 것은 메시아의 사역과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려는 요한복음의 목적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예수님은 창세기 3:15에서 처음 주어진 구원자에 대한 약속에서 비롯된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어린양이시다.
“예수의 침례 시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가리켰을 때 새로운 빛이 메시아가 하실 일을 밝히 비추었다. 요한의 마음은 ‘그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사 53:7)이라는 이사야의 말로 이끌리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136).
마가복음 10:45, 로마서 5:6, 베드로전서 2:24를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답: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제물로 죽으셨다고 말했다.
침례 요한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많았지만, 그분이 약속된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며 오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교훈> 침례 요한이 메시아를 어린양으로 선포한 것은 구원자로서 제사 제도가 가리키는 언약을 성취할 분이신 메시아를 증거하는 요한복음의 목적을 뒷받침한다.
<부가설명>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선언은 성소와 제사제도를 배경으로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공식적으로 양을 잡은 것은 출애굽 할 때 유월절에 잡은 양이 처음이다. 그리고 광야에 나와서 성소제도와 제사제도를 계시하여 주실 때 속죄를 위하여 양을 제물로 드리라고 지시하셨다. 이 양들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여자의 후손, 태초에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주기 위하여 죽은 그 어린양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는 ‘창세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구역)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킹흠정역)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요한의 이 선포는 유월절 어린양, 성소 제물의 어린양, 대속죄일의 양을 함께 포함한 선포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막10:45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의 생명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이 생명 자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버리기로 하셔서 버린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요한의 선포에는 이런 구속의 모든 의미가 함축된 것이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10월 22일(화) 요한의 두 제자
두 제자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침례 요한과 함께 있었다. 요한은 선언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6). 두 제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기별을 들었다. 예수께서 침례 요한의 기별을 성취하신 분이며, 따라서 침례 요한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두 제자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 요한을 떠났다.
요한복음 1:35-39을 읽어 보라.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들은 두 제자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요1:35~39]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답: 즉시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분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바랐던 두 사람은 그분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놀라운 것들을 배우고 경험했을 것인가!
오래지 않아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것을 볼 때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 제자 중 한 명인 안드레는 즉시 그의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라고 말했다.
안드레가 형제를 예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즉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 하시며 그를 아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알고 계셨고 이해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나타나는 주제이다(요 2:24, 25 참조).
“요한과 안드레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불신의 정신을 갖고 있었더라면 예수의 발아래서 배우는 자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판단하는 비평가로서 그에게 나왔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 가장 귀한 기회의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이 첫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례 요한이 전도할 때에 성령의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그들은 이제 하늘 교사의 음성을 알아보았다. 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신선함과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의 조명(照明)이 구약성경의 교훈을 비추었다. 진리의 다방면의 주제들이 새로운 빛 속에서 솟아올랐다”(시대의 소망, 139).
요한복음 전체에서 강조되는 점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혀서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교훈> 침례 요한이 전도할 때 성령의 부르심에 반응하였던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하늘 교사의 음성을 알아보았고 그분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증언하기 시작했다.
<부가설명> 대두분의 사람들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교회에 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에 바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핍박을 받던 시대에는 핍박의 대상이었기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핍박의 대상이라는 의식을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민초들이 교회의 권세가 두려운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욕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복음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어렵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민중들에게 좋은 감화를 끼치지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침례요한을 믿고 제자가 된 두 사람은 선생이 소개하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께로 가서 함께 하루를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선생의 소개로 예수님을 따라갔으나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있으면서 그분에게 직접 교훈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안드레가 형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담대히 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재림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 자기 선입견과 자기가 배운 세상의 지식으로 거부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되었다고 할 때 내게 합리적인 이해가 안 되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요하다. 안드레의 마음으로 배우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선입견을 버리고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는 그 말씀에 기쁘게 굴복하는 믿음으로 살자.
10월 23일(수) 빌립과 나다나엘
요한복음 1:43-46을 읽어 보라. 빌립의 증언은 예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이미 어떠한 것을 나타냈는가?
[요1:43~46]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답: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으로 확인 확신하고 있었다.
베드로, 안드레와 마찬가지로 벳새다 출신이었던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했다.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다. 빌립은 그분을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분으로 소개하면서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언급했을 때 나다나엘은 거부감을 나타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조그만 마을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변방에서 결코 왕이 나올 리가 없을 것이었다.
편견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만든다. 빌립은 아마도 이런 편견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은 고상한 철학적,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를 직접 경험하도록 초대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단순하게 말했다. “와서 보라.” 나다나엘은 그대로 따랐다. 그는 가서 보았다.
요한복음 1:47-5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확신시키셨는가? 나다나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요1:47~51]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답: 나다나엘이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과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으로 확신시켰고 나다나엘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대답했다.
46절의 빌립의 초청에 대해 나다나엘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서 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편견보다 빌립에 대한 신뢰와 우정이 더 강했고, 그 이후로 그의 삶은 변화될 것이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요 1:47)는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그를 선대하셨다. 이것은 나다나엘이 예수께 대해 했던 말(요 1:46)과 큰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다나엘은 놀랐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심으로 나다나엘을 한 마디로 설득하신다. 예수님은 신성한 통찰력으로 나다나엘이 그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며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을 보셨다(시대의 소망, 140, 141 참조). 이후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랍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높여 칭하는 고백을 한다. 예수께서 자신을 알고 계신다는 사소해 보이는 사실이 어떻게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이어지는지 주목해 보라.
<교훈>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에 거부감을 가졌지만, 빌립의 초대를 따라 예수를 직접 만남으로 그분이 자신을 아시는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였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들이 점진적으로 아주 재미있다.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요한의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후, 안드레는 ‘메시아’라고 증언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증언한 자’라고 했다. 제자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더 발전적으로 밝혀준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가장 핵심되는 신분을 고백한다. 결과로 예수님은 야곱 사다리 위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시오 땅과 하늘을 연결하시는 분이심을 직접 밝혀주신다. 나다나엘은 요한복음에만 그 이름이 나오는 제자다. 학자들은 바돌로메가 나다나엘과 동일인이라고 말한다. 나다나엘은 그 뜻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바돌로메는 ‘돌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 제자 명단에 항상 빌립 다음에 나온다. 그래서 빌립이 불러서 예수님께 인도한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으로 요한복음은 1장에서부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이같은 고백을 할 때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 아멘.
10월 24일(목) 니고데모의 증언
요한복음 3:1-21을 읽어 보라. 니고데모의 증언은 요한복음의 주제를 어떻게 뒷받침하는가?
[요3:1~2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답: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말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이 되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교사이자 산헤드린의 부유한 회원이었다. 그의 증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그분이 행하신 표적들을 그분이 가진 신성한 사명의 증거로 말했다. 그는 부지중에 이미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적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로 보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이라고 가리키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 올 때도 그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이 시점에는 아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3:3-2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어떤 말씀으로 니고데모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심을 나타내셨는가?
[요3:3~21] 앞 문제에 올린 성경절에 있으니 다시 읽으세요.
*답: 거듭남의 진리를 말씀하셔서 니고데모의 마음을 아시는 것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대답은 갑작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분은 즉시 그의 문제를 다루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회심이 필요하다고 믿었지만, 선택받은 백성인 자신들에게도 회심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떤 민족으로 태어났거나 어떤 신앙 안에서 성장한 것이 결코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전해온 훌륭한 유산이 유대인들에게 뚜렷한 이점을 제공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롬 3:1, 2)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교사이며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가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다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 존귀한 선생으로서 어떻게 이것을 모를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책망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의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그들 편에 섰다(요한복음 19:39 참조).
<교훈> 어떤 신앙 안에서 자라거나 믿음의 유산을 가진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아셨고 그에게 거듭남이 필요하다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니고데모는 이름의 뜻이 ‘백성의 승리자’ 또는 ‘백성의 정복자’이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이었든지 그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공회 회원이 그가 아직은 무명 선생인 젊은 예수께 나와서 랍비라고 불렀다. 그는 요2장의 성전 정결하게 하는 그 장면을 보았다. 3:1의 ‘그런데-헬라어 데-δὲ’가 있다. 이것은 2장 사건과 연결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선생이 된 체면에 아직 젊은 무명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 사람들 눈에 뜨이기 싫어서 밤에 찾아간 것 같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서 구원의 진리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 곧 거듭남, 중생에 관한 진리다. 원어로 ‘아노덴 게나오’인데 ‘아노덴(ἄνωθεν)’은 ‘위로부터’라는 말이다. 거듭나는 것은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위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1장에서 하나님께로 난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고 썼다. 하나님께로 나는 것이 바로 위에서 나는 것이고 거듭나는 것이다. 아담의 자손은 예외 없이 다 아래, 곧 땅에서 났다(고전15:47~49). 저자는 회심의 경험이라는 말을 썼다. 거듭나는 것은 회심 이상의 것이다. 회심이나, 불교에서 쓰는 해탈이나 개과천선(改過遷善)이나 다 도덕적인 말이다. 중생은 도덕적 말이 아니라 생명적 표현이다. 사람은 출생해야 존재한다. 구원은 새로운 출생으로 하나님 앞에 자녀의 권세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인간의 회심이나 개과천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담에게 선고된 그 죽음이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나야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예수 이름을 부르고 믿습니다라고 골백번 고백해도 아지 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7:23)라고 말씀하신다. 거듭나는 것은 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10월 2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17장 “니고데모”를 읽어 보라.
니고데모는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복종시켰을 때에 그는 하늘나라를 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의 구주는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공로도 주지 못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죄의 치료제인 그의 공로를 힘입는 손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회개조차 할 수가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용서가 분명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처럼 회개도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린 바 되었으니 뱀에게 속고 물린 자마다 쳐다보면 살 수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십자가에서 비취는 빛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그의 사랑이 우리를 그분께 이끈다. 만일 우리가 이 이끄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못 박게 한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그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 생명을 준다. 생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심령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그분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는다. 그 때에 하나님의 율법이 심령에 쓰여지게 되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시 40:8)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시대의 소망, 175).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당신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하겠는가? 당신은 영적인 일의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답: 인간적 안목으로 침례요한은 실패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자기 사명을 온전히 마쳤다(행13:25,26).
2. 이후에 침례 요한은 예수님께 몇 가지 진지한 의문을 표명했다(마 11:2, 3; 눅 7:19). 그가 의문을 품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답: 요한도 예수님의 사명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안에 굳게 서도록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해야 한다.
3. 참된 교회의 지도자이며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영적으로 무지할 수 있었는지 토의해 보라. 그의 경험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종교의 전통에 근거한 자기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아를 포기하고 오직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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