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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배경 이야기 : 서론-(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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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10-14 20:59 조회8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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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배경(背景) 이야기: 서론(序論)

                                     (10월 19일 (안) / 일몰: 오후 5시 49분)


<기억절(記憶節)>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서언(緖言)>

⑴.성경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정확하고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예수는 창조와 영원 자체보다 앞서 계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우주적 진리를 밝히기 위해 예수의 신성이라는 주제에 깊이 있게 집중합니다.


⑵.모세가 창조의 진리를 주장하면서 구약을 시작했듯이, 요한은 신약에서 같은 선포를 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인 말씀이라는 주제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통합합니다. 처음부터 창조에 복음을 고정함으로써. 요한은 다른 모든 토론에 대한 신학적 닻을 제공합니다.


⑶.요한에게 창조주로서의 예수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기꾼인 사탄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진리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1세기 말에 어두운 이단이 교회에 교묘히 들어왔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자들은 예수의 신성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육신으로의 진정한 성육신에 대한 의심을 퍼뜨렸습니다. 이 위험한 현상은 공관복음서가 쓰인 지 약 30년 후에 발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자들 사이에 낙담을 가져왔고 그들의 영적 사기를 저하시켰습니다.


⑷.요한복음서의 처음 18절은 그의 복음서 나머지 부분의 서론을 구성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간결하며 간결한 신학적 진술을 제공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항상 존재하셨습니다. 그는 창조주이시며 생명과 빛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셨으며, 창조물 앞에서 그의 사랑, 은혜, 영광을 증명하셨습니다.


(10월 13일) (일) <태초(太初)에 – 하나님의 말씀>


(Q)~(요한복음 1:1~5) 절의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句節)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밝혀줍니까?


(A)~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太初)부터 영원한 존재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영원(永遠)한 시대(時代)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一體)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形狀)’이요 하나님의 위대(偉大)하심과 위험(威嚴)하심의 모습이며 ‘그의 영광의 광채(光彩)’이셨다”(소망, 19). “이 세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創造)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요 1:3)


⑴.(창세기 1:1)은 이 세계의 “태초(太初)”[시작]를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의 “말씀”은 만물(萬物)의 창조자(創造者)이며, 따라서 그분은 (창 1:1)의 “태초(太初)”보다 먼저 계셨다. 그러므로 (요 1:1)의 “태초(太初)”는 (창 1:1)의 “태초(太初)”보다 앞선다. 시작(始作)이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말씀”은 이미 “계셨다.” (요 1:1~5, 재림교주석)


⑵.그리스도께서 만물(萬物)을 만드셨다면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 이것에 관해서 언급된 말씀들은 매우 결정적(決定的)이기 때문에 아무 사람도 의심(疑心)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본질적(本質的)으로 그리고 최고의 의미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원전(永遠前)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오, 영원(永遠)히 하나님이시다. (잠 8:22-27; 롬 9:5; 빌 2:6; 골 1:15-17; 히 1:8) (요 1:1~5, 화잇주석)


⑶.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永遠前)부터 계셨고, 명확히 독립(獨立)된 개체(個體)이시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그는 하늘의 뛰어난 영광이셨다. 그는 하늘에 있는 지성적(知性的) 존재자(存在者)들의 사령관(司令官)이셨으며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⑷.세계의 기초(基礎)가 놓이기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一體)(하나이심) 시라는 진리 속에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 진리는 어두운 곳을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 비취는 빛이다. 이 진리는 그 자체가 무한(無限)히 오묘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神祕)로운 진리들을 설명해 주지만 그 진리 자체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불가(不可)해한 빛 가운데 안치(安置)되어 있다. (리뷰 1906. 4. 5).


⑸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아울러 갖고 계신 구주(救主)(빌 2:5~8; 골 2:9; 히 1:6, 8; 2:14~17; 막 16:6 참조),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형상(形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同等) 됨을 취(取)하는 것을 절도(竊盜)라고 생각지 않으셨다(흠정역 빌 2:5).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이셨다.


⑹.헬라어 로고스(logos). “발언”, “말”, “이야기”, “기사.” 표현된 사상을 조직적이고도 의미 있게 정리한 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요한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사용한다. 말이 사상의 표현인 것처럼, 그분은 아버지의 품성과 마음과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왔다. 70인 역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창조적이고(시 33:6; 참조 창 1:3, 6, 9 등) 교통하기를 좋아하는(렘 1:4; 겔 1:3; 암 3:1)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 1:1~5, 재림교주석)


⑺.영광(榮光)의 주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고민(苦悶)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부끄러운 죽임을 당하실 때, 인간(人間)을 높이고 자아(自我)에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리뷰 1900. 9. 4). (요 1:1~5, 화잇주석)


⑻..“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다. 그는 자원(自願)해서 인성(人性)을 취(取)하셨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행동이셨고, 그분의 직접적(直接的) 동의(同意)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는 그분의 신성(神性)에다 인성(人性)의 옷을 입으셨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⑼.그리스도는 그의 신성(神性)을 인성(人性)과 교환(交換)하지 않으셨고, 그의 신성(神性) 위에다 인성(人性)을 옷 입으셨다. (리뷰 1895.10. 29).


⑽.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즉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말씀이 아버지와는 완전히 구별(區別)되는 존재(存在)임을 강조하여 선언한다. 문맥(文脈)을 통해 분명해지는 사실은, 말씀이 독특하고도 유일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은 영원전(永遠前)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나,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하여 “육신(肉身)”이 되었다(시대의 소망, 23~ 26). 그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었다(참조 마 1:23).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가진 영원한 선재성(先在性)과 그분이 가졌던 하나님과의 연합관계(聯合關係)에 대한 배경(背景)을 무시하고서는 성육신(成肉身)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롬 1:20~25에 E.G 자료 참조).


(10월 14일) (월)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Q)~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깊은 의미(意味)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1:1~3, 요 1:14)


(A)~심오한 사상가(思想家)였던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말씀이요, 창조주(創造主)요,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한다. 간결(簡潔)한 문장 속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무게 있게 묘사하며 고도의 신학성(神學性)을 가미(加味)하고 있다. 특히 본 장(章)의 중심 주제에 해당하는 ‘로고스’(말씀)에 관한 사상(思想)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깔려 있고 본서를 해석함에 있어 관건(關鍵)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고 “임마누엘”이시며, 곧 성소제도(聖所制度)의 실현(實現)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지금까지도 신비(神祕)요, 앞으로도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⑴.요한은 헬라어를 말하는 로마의 한 식민지(植民地) 도시(都市)인 에베소에 살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 에베소는 헬라. 문화와 철학(哲學)에 젖어 있는 도시(都市)였다. 또한, 요한복음을 읽을 독자(讀者)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 그리스 철학(哲學)에 젖어 있는 이방인(異邦人)의 도시였다. 그런 지역에서 요한은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 자신이 바로 창조주(創造主)라는 것을 이해(理解)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이며 우주(宇宙)의 창조주(創造主)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紹介)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말씀”(헬, 로고스)이라는 헬라. 사상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그 용어(用語)를 사용한 것이지 그 사상(思想)까지 채용(採用)한 것은 아니었다.


⑵.요한이 사용한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스’(logos)는 헬라.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말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우주는 자연 발생적(自然發生的)으로 존재하고 영속(永續)된다는 우주관(宇宙觀) 및 역사관(歷史觀)에서 온 지적 능력(知的能力) 혹은 이성(理性)이다. 로고스는 사물(事物)의 배후에 있는 영원한 질서(秩序)이고 우주적법칙(宇宙的法則)이다.


⑶.요한은 “로고스”를 범신론적(汎神論的)이고도 비인격적(非人格的)인 우주의 원리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조(創造)하고 우주의 법칙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설명한다. 즉 창조전(創造前)에 함께 있었고 이제는 육신(肉身)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데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⑷.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속(救贖) 뜻을 성육신(成肉身)을 통해 결정적(決定的)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로고스라 하였으며, 동시에 예수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뜻의 결정적 표현이기에 로고스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로고스 사상(思想)은 그리스 철학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구약(舊約)의 히브리 사상(思想)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⑸.그리스 철학(哲學)에서의 “말씀”과는 달리 유대 사상(思想)에 있어서 “말씀”이란, 단순한 소리나 이성(理性)이 아닌, 실제적인 능력과 개성(個性)을 가진 독립적(獨立的)이고 인격적(人格的)인 존재를 의미한다. 구약에는 어느 곳이나 이런 “말씀”이 강력하고도 충만하며 창조적인 성격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創造)하는 능력을 갖춘 분이며, 우리를 위험(危險)한 지경(地境)에서 구원(救援)하는 존재이다. 


⑹.“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시 33:6),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危險)한 지경(地境)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따라서 히브리 사상(思想)에서 말씀이란, 단순히 언어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똑같이 능력이 있으며 보내심을 받아 사람을 구원(救援)하기도 하는 하나님과 동일(同一)한 존재(存在)를 나타내는 것이다. 


⑺.복음서(福音書)와 서신(書信)의 집필(執筆)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反復的)으로 선포(宣布)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 전파(傳播)의 숭고성(崇古性)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舊約時代)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聖徒)들의 참다운 태도(態度)이다. (시 119:9, 105, 살전 2:13).


⑻.예수님은 창조전(創造前)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이제는 육신(肉身)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데 “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속(救贖) 뜻을 성육신(成肉身)을 통해 결정적(決定的)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로고스”라 하였으며, 동시에 예수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뜻의 결정적 표현(表現)이기에 “로고스”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요한의 “로고스” 사상(思想)은 그리스 철학(哲學)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구약(舊約)의 히브리 사상(思想)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⑼.“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느라”. 헬라어 본문에는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을 “하나님은 말씀이었다”라고 번역할 수 없다. 그렇게 번역(飜譯)하면 하나님을 말씀과 동등(同等)하게 보는 것이 되고, 신성(神性)을 말씀이라는 좁은 영역 속에 제한하는 셈이 된다. 

“말씀”과 “하나님”이라는 두 용어(用語)는 전혀 상호 교환적(相互交換的)으로 사용될 수 없다. 


⑽.“하나님은 곧 말씀이셨다”라는 말은, “사랑은 하나님이다”(참조 요일 4:16)라는 말이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참조 요 1:14)는 말 못지않게 부적합(不適合)하다. 비록 1절의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긴 하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이 진술을 “그 말씀은 한 하나님이었다”고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은, 그렇게 번역하면 말씀이 다른 많은 신(神) 중의 한 하나님이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헬라어에 정관사(定冠詞)가 없을 경우, 그것은 그 단어(單語)가 나타내거나 그 단어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요한이 뜻하는 것은, 말씀이 신성(神性)의 본질(本質)을 지녔으며 그분은 궁극적(窮極的)이고 절대적(絶對的)인 의미에서 신적속성(神的屬性)을 가진 분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 간결(簡潔)한 선언(宣言) 속에서, 말씀은 여러 신(神)들 중 하나인 한(a) 하나님도 아니고, 그분 홀로 하나님임을 뜻하는 그(the) 하나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말씀(로고스)은 우리의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으로 들어오셔서 말씀하시고 행동(行動)하시며 우리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맺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意味)한다. 

 

(10월 15일) (화) <말씀을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者)> 


(Q)~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참빗에 대하여 주어지지만 반응하는 사람들의 실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의 중요한 문제로 즉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로 묘사(描寫)하고 있다. 그대의 삶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요한복음 1:9~13)


(A)~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체류자(滯留者)였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늘날의 남녀들처럼 시험(試驗)과 시련(試鍊)을 받으셨지만, 죄와 상관없는 생애를 사셨다.” (8T, 286). 요한복음에서 말씀(로고스)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며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⑴.침례자 요한과 예수의 차이는 거짓과 참의 차이가 아니라, 부분적인 것과 완전한 것의 차이다(참조 고전 13:10). 요한의 증거가 금성(Venus)이나 천랑성(Sirius: 참조 사 14:12 주석. 개혁한글판에는 “계명성”이라고 되어 있음 : 역자 주)의 밝기에 비교될 수 있다면, 예수에게서는 진리의 빛이 정오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비쳐 나온다고 할 수 있다(참조 말 4:2; 벧후 1:19 주석). 요한은 예수를 “참 떡”(6:32), “참 포도나무”(15:1), 참 “문”(10:7~9) 그리고 진리 자체(14:6)로 소개한다. 


⑵.사람이 가진 모든 빛은 그리스도에게서 온다(소망, 464~465,). 예수가 만민(萬民)을 위하여 죽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이 그분에 대하여 알게 된다거나, 그들이 구원(救援)을 받을 것이라는 뜻은 아닌 것과 같은 맥락(脈絡)에서 참 빛이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 요한은 여기서 성자(聖者)나 죄인(罪人)이나 이교도(異敎徒)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영혼(靈魂) 속에 있는 모호(模糊)한 불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救援)을 주는 지식(知識)의 빛에 대하여 말한다. (참조 소망, 317). 


⑶.요한은 (요한복음 1:10~12)에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백성이 영접(迎接)지 아니하였”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참 빛”을 받지 못한 것이다. 요한이 급히 부언(附言)한 것처럼, “영접(迎接)하는 자(者)”들과 그분을 믿는 자들만을 여기서는 특별히 지칭(指稱)한다. (요 1:12 절) (소망, 317 참조). 


⑷.그분을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부른다. 그 빛은 세상을 비추어 그것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한다. “세상”이 “참 빛”인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認識)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세상은 그를 거절(拒絶)하고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았다. 


⑸.이스라엘의 지도자(指導者)들이 메시아를 거절(拒絶)한 과정(過程)을 다른 복음에서(福音書)보다도 더 상세(詳細)하게 추적(追跡)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11; 5:43; 6:66; 8:13; 9:29; 10:25; 12:37 절, 42절; 19:15 등등 참조). 하지만 분명히 신실한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서 그분을 “영접(迎接)”하였다. (요한복음 1:12; 참조 2:11; 3:2; 4:29, 39, 42, 53; 6:14; 7:31, 40, 41, 43; 8:30; 10:19, 42; 11:45 등).


⑹.영접(迎接)하는 자란, 단지 착한 사람이나 심지어 선지자(先知者)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아로 영접함을 뜻한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모두가 구원(救援)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신조(信條)를 오류(誤謬)로 낙인(烙印)찍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救援)받고 어떤 사람은 저주(詛呪)받도록 예정(豫定)했다는 신조(信條) 역시 거짓으로 낙인(烙印)찍는다. 요한은, 결정적인 요인(要因)은 사람들 자신에게 놓여 있는바, 영접하고 믿는 “자마다” 자녀가 되는 권세(權勢)를 얻는다고 역설(逆說)한다. 예정론(豫定論)에 대해서는 사 55:1; 엡 1:5; 계 22:17을 참조)


⑺.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대책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용서를 약속하시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조건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는 무슨 공로가 믿음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은 죄를 위하여 준비된 치료제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RH 1980. 11. 4.).


⑻.영적출생(靈的出生)은 인간의 주도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창조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행위에 의존(依存)된다. 그분은 우리 속에서 역사(役事)하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所願)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 신다. 요한은 회심(悔心)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유 선택권을 배제(排除)하지도 않고(참조 12절 주석),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연합해야 하는 필요성을 부인(否認)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주도권(主導權)과 능력(能力)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증(確證)한다. (요 1:9~13, 재림교주석)


⑼.영접하는 자.(받아들이는 자)란, 원문상으로는 영접(迎接)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 때문에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⑽.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취지만 모두가 그 빛을 환영(歡迎)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지 혹은 거부(拒否)하는지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바로 빛을 받는 것에서 시작된다. 메시아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왔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10월 16일) (수) <계속(繼續) 나타나는 주제(主題)–신뢰(信賴)/불신(不信)> 


(Q)~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지적(知的)으로 동의(同意)하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떤 차이(差異)가 있으며, 그 둘 사이의 차이(差異)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하며, 예수님을 지적(知的)으로 인정(認定)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방식(方式)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실천(實踐)하고 있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요한복음 3:16-21, 9:35-41, 12:36-46)


(A)~요한복음에서 인류(人類)는 예수를 믿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믿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두 개의 큰 집단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두 집단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 있다. 믿는 사람 또는 믿게 된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이거나 꾸짖으실 때도 그분을 향해 열려 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며 피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들을 비추는 빛이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은 사람들은)- 11명의 제자, 니고데모, 우물가의 여인,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不信者)들은) -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서도 한 사람 유다가 있다. 


⑴.요한복음에서 두 집단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이 예수와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믿는 자, 즉 믿게 된 자들은 예수가 그들을 대면하거나 꾸짖을 때도 그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와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⑵. 반면에 불신자(不信者)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과 싸우기(논쟁하기(論諍) 위해 찾아옵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거나, 그분이 오래된 전통(傳統)을 깨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副應)하지 않는 것이라 봅니다.


⑶.유대 지도자(指導者)들의 최종적(最終的) 배척(排斥)은 그들의 믿음을 이적(異蹟)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 12:37~38, 재림교주석)


⑷.“당국자(當局者)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 7:48)라고 전에 그들이 한 질문의 대답이 여기에 주어지고 있다. 얼마 후에 니로데모(요 19:39; 참조 요 3:1)나 아리마대 요셉(참조 마 27:57)과 같이 어떤 이들은 공개적(公開的)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⑸.유대인은 교만과 외식으로 눈이 멀고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이 오셔도 영접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예수님의 배척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⑹.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섬기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높이는데, 율법을 사용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이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높이는 데 사용하면, 그것이 바로 교만이요, 외식(外飾)이 아니겠습니까?


⑺.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섬기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자존심(自尊心)을 높이는데, 율법을 사용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이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자신의 의(義)를 자랑하고 높이는 데 사용하면, 그것이 바로 교만(驕慢)이요, 외식(外飾)이 아니겠습니까?


⑻.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向)하여 시험(試驗)하며 불신앙(不信仰)으로 행한 여러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오신 증거와 표적을 보이라고, 열심히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외(表迹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아무 표적(表迹)도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무슨 기사나, 표적이나, 기적을 행하시면, 그것을 보고 믿겠다고 시험을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기사나, 표적이나, 기적(奇蹟)도 행하시지 않습니다. 


⑼.그들에게는 율법이 ‘오시리라’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가장 기본적인 율법의 지식조차 없었다. 예수께서 자신이 율법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수많은 기적과 생명의 말씀으로 보여주시고 들려주셨음에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은 막상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니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누명을 씌워서 끝내는 십자가의 죽음에 내몰았다. 이는 그들이 율법에 대해 시각장애인(盲人) 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증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말씀하셨다.


⑽.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罪)는 자신이 죄인(罪人)이 아니라 의인(義人)이라고 착각(錯覺)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悔改)할 줄도, 또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迎接)할 기회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이다. 우리도 자신의 영적상태(靈的常態)를 늘 점검(點檢)해야 한다. 영적맹인(靈的盲人)의 가장 눈에 띄는 점(特徵)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아주 잘 알고 있다”라는 자만(自慢)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성도(聖徒)는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자신의 무지(無知)를 더욱 깨닫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자랄수록 더욱 겸손(謙遜)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려는 간절한 소망이 더욱 커집니다.


(10월 17일) (목) <계속(繼續) 나타나는 주제(主題) – 영광(榮光)>


(Q)~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榮光)은 어떤 것을 통해 나타나고 있으며, 예수께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榮華)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榮華)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意味)하는가? (요한복음 1:3, 14절, 요한복음 17:1~5절)


(A)~(요한복음 17장)에는 그리스도께서 수난(受難)을 당하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기 직전에 아버지께 올리신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仲保祈禱)가 실려 있다. 인류를 위한 그분의 크신 희생(犧牲) 곧 친히 자기 몸을 바치는 사업을 끝마치려 할 때 드린 이 기도는 구주(救主)께서 휘장(揮帳) 안으로 가져가시는 중보(仲保)에 관한 교훈이다. 우리의 중보자(仲保者)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 성소(聖所)에서 봉사(奉仕)하시는 그의 봉사의 모습을 이와 같은 예증(例證)으로 보여주셨다. 이 봉사(奉仕)는 모든 이기심(利己心)을 비우고, 구원(救援)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으면서 온유와 겸손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봉사(奉仕)이다. (원고 29, 1906).


◎.예수님은 우주(宇宙)의 창조주(創造主)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 존재하지 않았으나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오직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創造)된 것이다. “만물(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성육신(成肉身)을 통해 사람이 되신 그분의 영광(榮光)에 대해 기록한다. (요 1:14). 요한은 ‘영광’(doxsa, 밝음, 찬란함, 명예)과 ‘영화롭게 하다’(doxsazō, 찬양하다, 존경하다, 영화롭게 하다)라는 용어(用語) 모두를 인간으로부터 영광(榮光)을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화(榮華)롭게 해주시는 것을 묘사(描寫)하는 데 사용한다. 


⑴.아들이 영화(榮華)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永生)을 제공(提供)한다.


⑵.(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는 자기의 영광(榮光)을 구(求)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요한복음 8:50). 예수께서 스스로 구(求)하는 영광(榮光)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절(節)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祈禱)라기보다는 차라리 성부(聖父) 하나님을 위한 기도(祈禱)이다. (L. Morris). 


⑶.영광’(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낼 때 반복 사용되었다(7:39, 12:16, 23, 13:31, 32 등).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사 명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곧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늘 성부의 영광에 고정(固定)되어 있다(12:28).


⑷.(요한복음 17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각각 독립(獨立)된 개성(個性)을 가지신 존재이심과 그들 상호간(相互間)의 관계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榮華)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23, 33; 5-11인용). 이 말씀 속에는 그분들 각자(各自)의 개성(個性)과 개체(個體)가 각각(各各)임이 나타나 있다. (원고 124, 1903).


⑸.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手段)은 단지 그리스도를 앎으로써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분은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누구나 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 말씀으로 심판(審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구주(救主)로 안다는 것은 영적지식(靈的知識)으로 활력(活力)을 얻어서 그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것이 없이는 아무 가치(價値)가 없다. (사인즈 1898.1. 27).


⑹.(믿는 자들로 말미암아 영광(榮光)을 받으심) 그는 아버지께 의무(義務)를 지고 있던 조건들 곧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하늘에서 맺은 언약 가운데 그분이 이행해야 할 몫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었”나이다. 그것은 그가 지상(地上)에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본(模本)으로 한 의(義)로운 품성(稟性)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⑺.“아버지여, 창세전(創世前)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다. 그는 이 기도에서 그가 성취(成就)한 일로 인하여 그가 깨달은 그것과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을 주신 것에 관하여 좀 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그는 이 보상(報償)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타락(墮落)한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해서 그가 치러야 할 고통(苦痛)을 잊으셨다. 그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선포하셨다. 교회는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이 시작한 그 일을 영광스럽게 마무리 지을 것이며, 그 교회가 마침내 하나님의 낙원(樂園)으로 속량(贖良)함을 입을 때에 그는 자기의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실 것이다. 무궁한 세월을 통하여 구속(救贖)함을 입은 무리들은 그분의 주된 영광이 될 것이다. (3 예언 260~261).


⑻.“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모든 천사들이여, 그에게 경배할지어다”하고 선포하신다. 천군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기쁨의 노래, 승리의 노래를 소리높여 부른다. 영광이 하늘 왕을 두르고 하늘의 모든 지적 존재자들이 그것을 본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실 때 자원해서 떠나셨던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공적으로 복귀하실 때 있었던 그 광경을 말로써는 묘사할 수가 없다. (요 17:1~5, 화잇주석)


⑼.오늘날 그리스도는 영광중(榮光中)에 계시지만 그는 그들의 형제시오, 하늘 궁정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仲保者)시다. (사인즈 1899.5. 10).


⑽.아버지를…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사업이 완결됨으로써 영화롭게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榮光)은 십자가(十字架)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神祕)한 역설(逆說)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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