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질문, 대답, 설명) 09/21/24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2과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질문, 대답, 설명) 09/21/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9-13 13:45 조회2,122회 댓글0건

본문

제12과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 

(9월 2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0분)

 

연구 범위: 막 15:, 눅 13:1, 시 22:18, 요 20:24~29, 요 1:1~3, 단 9:24~27

 

기억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마가복음 15장은 수난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 장은 예수님의 재판, 정죄, 군인들의 조롱,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을 보여준다. 저자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여 그 사실이 스스로 말하도록 의도했기 때문에 이 장은 뚜렷하고 선명하게 모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 전체에서 역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역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해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역설은 보통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1) 두 가지 중첩된 의미, (2) 그 두 가지 의미가 서로 충돌 혹은 대조됨, (3) 역설의 결과를 겪게 될 누군가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심지어 역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설정이다.

마가복음 15장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 빌라도부터 조롱하는 병사들, 십자가 위의 명패 그리고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한 종교 지도자들의 조롱에서 아리마대 요셉의 뜻밖의 등장까지, 예수님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한 강력한 진실을 드러내는 고통스러운 역설로 가득 차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지셨다. 

느끼기: 그분의 희생은 제사제도를 완성하고 그분의 부활은 인류에게 주신 새로운 구원을 확증한다. 

행하기: 인류의 어떠함에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심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며 믿음을 나눈다. 

 

TMI 위로

2.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한 질문을 통해 어떤 고통스러운 역설이 나타납니까?(막 15:9)

*답: 그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인식한 것 같고 그분을 놓아주려는 마음이 있었다.

3.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에게 한 행동은 어떤 역설을 나타내고 있습니까?(막 15:19) 

*답: 그들은 조롱으로 예수께서 왕이신 것을 드러내었다.

4.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막 15:31) 

*답: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5.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분의 침례와 어떤 유사성을 가집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막 15:39)

*답: 침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표상하고 그것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다. 

6.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은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까?(막 15:44)

*답: 숨은 제자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제자들도 신실할 수 있는 것을 드러낸다.

7. 죄인을 향한 용서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어떤 고난을 겪으셨습니까?

*답: 사망의 고통을 겪으셨다. 

 

결론: 마가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많은 역설을 담고 있다. 빌라도와 종교지도자, 조롱하는 병사들 모두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그분은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참된 왕이시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고통과 피조물에게 당하는 수치를 겪으시며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제도를 완성하시고 부활하셔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구원의 문을 여셨다. 

 

9월 15일(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가복음 15:1~15을 읽어 보라. 어떤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막15:1~15]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답: 이방인 총독은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바라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라고 한다. 주객이 거꾸로 된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서기 26년에서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다. 그는 자비로운 통치자가 아니었고 그의 여러 행동은 그 땅의 주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눅 13:1).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판결은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 아래서 유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죄인을 처형할 수 없기 때문에 처결을 얻기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예수를 고발한 죄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막 15:2)라는 빌라도의 짧은 질문을 통해 혐의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왕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어떻게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가 로마 황제에 대항하는 왕권, 그리고 그에 따른 경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헤드린에 제기된 혐의는 신성 모독이었지만 총독에게 제기된 혐의는 소요죄였는데 그 역시 사형에 해당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는 참으로 메시아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왕이셨다. 그러므로 신성 모독과 선동이라는 유죄 판결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도리어 그분은 경의와 경배를 받으셔야 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왕의 위엄으로 답하신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도다"(막 15:2, 흠정역). 그의 답은 양면적이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신다. 이는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다른 종류의 왕이신 것을 암시한 것 같다(요 18:33~38).

마가복음 15:6은 유월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관습을 이야기에 도입한다. 마가복음 15:9에서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데, 빌라도는 역설적 의미에서 질문하였지만, 역설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된다.

마가복음 15:9, 10은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것과 실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를 넘겼다는 것을 알지만, 군중에게 물어봄으로써 실제로는 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의 십자가형을 요구한다. 빌라도는 반발한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고, 특히 무죄로 여겨지는 사람이 당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교도 총독은 메시아를 풀어주길 원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길 원하는 장면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역설인가. 

 

<교훈> 그분은 왕이지만 다른 종류의 왕이심을 암시하였다. 질문 앞에 그분은 왕의 위엄으로 행하셨고 빌라도는 그를 구하기 위해 힘썼으나 유대인은 죽이려 했다. 

 

<부가설명> 예수님과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빌라도의 삼각구도에서 이방인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알고 놓아주려 하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하는 것은 참 역설적이다. 오늘날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핍박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섬긴다는 교회라는 이름의 조직에서 더 핍박을 받지 않는가? 세상은 예수님에 크게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 관심을 가진 무리는 교회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이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 의하여 핍박을 받으신다. 작은 뿔로 계시된 조직인 교회가 진리를 핍박하고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을(요18:33~37) 대적한다. 우리는 진리를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신자로서 주님의 영광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께 욕을 돌리는 정신과 태도 살지 않는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정신과 태도가 나의 모습이 아닌지 두렵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 핍박이 진리를 강하게 압박하고 재림교회도 문명의 이기를 복음 전파에 이용한다는 이름으로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겔22:26)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9월 16일(월) 유대인의 왕 만세

 

마가복음 15:15~20을 읽어 보라. 군인들은 예수님께 어떤 행동을 했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막15:15~20]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답: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절했다. 그러나 그 조롱은 사실이었다. 마침내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진리의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처형을 앞둔 죄수들에게 가혹한 형태의 매질을 자행했다. 죄수는 옷 벗겨진 채로 기둥에 묶인 뒤 뼈, 유리, 돌, 못 조각이 붙어 있는 가죽 채찍으로 매질을 당했다. 

채찍질에 더해 군인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며 모욕했다. 한 대대의 군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을 수 있다. 대대는 대개 200에서 600명으로 구성된다. 

이 장면이 독자들에게 더 분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예수님은 실제로 왕이시고 병사들의 조롱하는 말이 이 진리를 역설적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가이사, 황제 폐하 만세!"라는 말로 로마 황제에게 병사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흉내낸다. 이것은 이 땅의 황제와의 암묵적인 비교이다.

병사들은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으면서’ 비꼬듯 경의를 표하여 예수를 조롱했다. 세 가지 행동은 모두 헬라어 미완료 시제를 사용했다. 본문에서 미완료 시제는 반복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 때리고, 연이어 침 뱉고, 반복해서 무릎 꿇으며 그분을 조롱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 앞에 잠잠하시고 전혀 반응하지 않으신다.

로마의 전형적인 십자가 처형 방식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그 사람을 공동체 앞에서 완전히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공개적으로 벌거벗는 것을 혐오했다. 마가복음 15:20은 그들이 자색 망토를 벗기고 그분의 옷을 다시 입혔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의 형편에 맞추어 형벌의 방식을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 나타난 모든 역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유대인만 아니라 로마인 모두의 참된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절하고 "경의를 표"한 것은 모두 조롱이었다.

 

<교훈>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절하고 "경의를 표"한 것은 모두 조롱이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유대인만 아니라 로마인 그리고 모두의 참된 왕이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내뱉는 말들에 진실이 숨어있는 것이 역설이다. 오늘날 진리 교회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설이다. 예수님은 나사렛 이단이었다(행24:5). 진리를 따라 신앙생활할 때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나사렛 이단에게 속한 것을 증거하는 역설이다.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으나 그것은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때리고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아보라고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선지자이시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역설들은 참으로 묘하게도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내용들이었다. 에수님이 참으로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기 때문에 조롱하는 말로 불러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신앙으로 불러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신비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5~18). 우리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주님의 참된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9월 17일(화) 십자가 

 

마가복음 15:21~38을 읽어 보라. 어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역설이 나타나는가?

[막15:21~38]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답: 예수께서 끌려다니시며 고난을 받으신다. 그렇게 하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참 역설적 장면이다. 사람들의 조롱하는 말 속에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진실이 드러나 있다.

 

수난 이야기의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계획한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말없는 희생양이다. 체포되시기 전까지 복음서 전체에서 그분은 활동을 주도하는 분이셨지만 이제 끌려 다니신다. 건장한 순회 설교자였던 그분이 매 맞고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이방인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할 만큼 기진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옷은 벗겨지고 군인들은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될 것인지 제비를 뽑아 정했다(시 22:18). 십자가 형벌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는 처형 방식이었다. 십자가에 사람을 고정하는 목적으로 사용된 못(요 20:24~29)은 주요 혈관이 없는 손바닥 아래 손목에 박혔을 것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손”은 손과 팔뚝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손바닥은 구조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팔뚝 한 가운데를 지나는 정중 신경이 못에 짓눌리면 팔에 극심한 통증을 일으킨다. 숨쉬기가 어렵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못 박힌 발을 밀어 올리고 팔을 구부려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이것은 다시 극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에서 탈진 질식사에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엄청난 조롱과 굴욕을 받으셨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것처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계시/비밀 주제가 나타난다. 그래서 "주님,"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와 같은 기독론적 칭호는 지금까지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서 바뀐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더 이상 숨겨질 수 없으며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 칭호를 사용하는 점은 더욱 역설적이다. 이들은 얼마나 자신의 말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가!

그들의 조롱하는 말 중 하나가 두드러진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31). 

십자가에서 그분의 무력함을 조롱하기 위해 그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도우셨다고 말한다. 이 헬라어 동사는 "구원하다," "치유하다," "구출하다"로 사용될 수 있다. 그들은 이 말로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역설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역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거나 구원하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교훈> 유대인들의 말과 조롱은 역설적 진리를 나타낸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극도의 고통과 수치를 겪으셨지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부가설명> 예수님 십자가 사건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정황은 조롱과 고난의 과정에서도 예수님이 구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참 희한한 현상이다. 예수께서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구원했으면 인류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분이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고통 속에 죽으셔서 인류는 구주를 얻게 되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것이 예수님 사건의 역설이다. 그분은 태초에 계시는 말씀 하나님이셨고 그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다. 그런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력한 희생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다. 조롱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이것은 이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으로 드러나고 증명 되었다(롬5:8,10). 

 

9월 18일(수)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음

  

마가복음 15:33~41을 읽어 보라.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유일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막15:33~41]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답: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예수께서 예언된 모든 것을 성취하시므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마가복음은 십자가를 영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매우 어두운 장소로 묘사한다. 금요일 정오부터 오후 3시경까지 초자연적인 어둠이 갈보리를 덮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막 15:3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는지를 부르짖으며 기도하실 때 하신 말은 '버림받음의 외침'이라고 불린다. 예수께서는 시편 22:1을 인용하였는데 마가복음 15:24, 29에도 같은 시편이 인용되어 있다. 이는 성경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알려준다. 인간의 악한 음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번역과 함께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단어 엘리, 엘리는 아람어 '엘라히'(’elahi)를 음역한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르는 것처럼 들리기 쉽다. 이것은 일부 구경꾼들이 저지른 실수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마가복음 1:9~11에 기록된 예수님의 침례와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침례: 마가복음 1:9~11

십자가: 마가복음 15:34~39

요한이 예수에게 침례를 주다

예수의 침례(막 10:38)

요한(먼저 온 엘리야; 막 9:11~13)

엘리야를 부름

하늘이 열림

성전 휘장이 찢어짐(열림)

pneuma(프뉴마, 성령이 임함, 생명)

ekpneō(에크프네오, 죽음, 숨이 떠남)

하나님의 음성, “사랑하는 아들”

백부장의 소리, "하나님의 아들"

 

 

이러한 구조가 시사하는 바는 마가복음 1장의 예수님의 침례가 다니엘서 9:24~27에 예언된대로 그분의 사역의 시작인 것처럼, 마가복음 15장의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죽으시는(막 10:45) 그분의 사역이 향하는 정점 또는 목표 지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다니엘서 9장 24~27절의 예언의 일부를 성취한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막 15:38)은 제사 제도의 완성을 가리키며, 모형이 원형을 만나고 구원 역사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훈> 십자가는 그분의 침례와 유사성을 가진다. 이는 예고된 그분의 사역의 정점이며 새로운 구원 역사의 시작이다. 인간의 음모 가운데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침례 받으실 때 요한에게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다(마3:15). 침례가 모든 의를 이루는 예식이었다.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이제 마가 15장에서 침례로 드러낸 그 진실이 실현되려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분은 죄 자체가 되셨다(고후5:21, 소망755). 예수께서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를 외치신 것, 곧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을 외치신 것이다. 그것은 사망이요 죄 자체이다. 예수님은 아담에게 선고된 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것은 둘째 사망이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둘째 사망 선고를 받은 아담의 모든 자손들이 마지막 아담 예수께서 아담의 그 사망을 대신 당하셔서 그 사망을 폐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예수님의 엘리엘리 외침은 이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공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호흡이 멈추고 사망이 되셨다. 그래서 아담 자손들은 예수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멘.

 

9월 19일(목) 무덤에 장사되심 

 

마가복음 15:42~47절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개입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막15:42~47]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답: 제자들은 자기들의 출세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랐으나 아리마대 요셉은 예언의 성취를 보고 확신을 얻었다. 

 

이 모든 엄청난 일의 뒤에 지극히 현실적인 일이 일어난다. 먼저, 죽은 사람을 장사해야 한다. 이런 일 중에서도 몇 가지 요소는 영적으로 매우 감동적이며, 어떤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 장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그는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회원이자 상류 특권층이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요구한 것은 그가 부유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총독과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한다. 공의회 의원이 예수님의 장례에 그토록 열심을 가졌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런 때에 예수께서 신뢰하셨던 제자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이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5:43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요청한다. 빌라도는 예수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막 15:44). 그래서 그는 처형을 담당한 백부장을 불러 예수가 정말 죽었는지 물었고 백부장은 그렇다고 확인했다.

이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이들 때문에라도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백부장이 로마 총독에게 한 증언은 그런 억측을 직접 반박한다. 로마인들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범죄자를 처형했다. 

요셉은 세마포 수의를 가져와 예수를 감싸고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그분의 시신을 안치했다. 이 무덤은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다(막 16:5). 복음서 기자는 요셉과 함께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두 여인이 이곳을 목격했다고 기록한다. 

살로메와 이 두 사람은 십자가 형벌을 멀리서 지켜보았으며, 세 사람이 함께 예수님의 방부 처리 작업을 마치기 위해 일요일 아침에 무덤으로 갈 것이었다(막 16:1). 세 여자의 이름이 기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마가복음 16장의 빈 무덤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할 중요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교훈>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요청함으로 빌라도와 백부장에 의해 그분의 죽음은 확인되었다. 세 여인은 무덤을 확인함으로 이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가설명>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확신으로 나타나 행동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을 부지런히 연구하였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이 무슨 일인가?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19:33~38). ‘이 일’은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시라고 한 예언이 응한 바로 그 일이다. 아리마데 요셈은 이 일을 보고 그분이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라는 확신을 얻고 제자들이 다 도망간 그때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자기 무덤에 모셨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죽었는지 백부장에게 묻고 백부장이 확인한 기록은 예수께서 정말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도장이다. 

 

9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77장 “빌라도의 법정에서,” 78장 “갈보리,” 79장 “다 끝났다”를 읽어 보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구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이 일을 한다면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세상의 권력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편을 선택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실과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칙을 희생하는가! 양심과 의무는 이 길을 가리키지만 사리사욕은 다른 길을 가리킨다. 세상의 조류는 강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므로 악과 타협하는 자는 죄악의 짙은 어둠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시대의 소망, 738).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여김을 당하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끔찍한 불쾌하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의 아들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하여 타락한 세상에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했다. 죄인 중의 괴수를 위한 구원이 그분의 주제였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지신 엄청난 죄의 무게로 인하여 그분은 아버지의 화해하시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극심한 고뇌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그분에게서 거두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이러한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시대의 소망, 753).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대속의 신학이 성경과 엘렌 화잇의 글에서 얼마나 중심이 되는지 살펴보라(사 53장 참조). 대속의 중심 역할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 죄의 형벌을 몸소 지불하신 것을 경시하는 신학은 왜 거짓 신학인가?

*답: 대속이 없으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대속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다.

2. 오늘날 세상이 예수님 대신 요청하는 '바라바'는 누구 또는 무엇인가?

*답: 세상의 명예와 부와 자랑이며, 자기 자신이 아니겠는가?

3.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답: 우리는 사람의 실상을 바르게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4. 다니엘 9:24~27을 다시 보라. 누가 묻더라도 당신이 이 부분의 성경공부를 이끌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답: 예수님의 대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예언되었기 때문인데 성소봉사로 가르치신 것이 완전히 성취된 것을 확인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