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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 예루살렘에서의 논쟁-(요점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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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08-26 12:12 조회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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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예루살렘에서의 논쟁(論爭)

                            (8월 3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분)


<기억절(記憶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개요(槪要) 및 서론(緖論)>

(Q)~제9과의 특징(特徵)은 어떠한 내용(內容)인가요?


(A)~(마가복음 2장과 3장)에는 예수님과 종교인(지도자)들 사이의 5가지 논쟁(論爭)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번 주 제9과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셨을 때 그 종교지도자들과 6가지 논쟁(論爭)을 벌이십니다. 그 두 가지 논란(論難)은 예수님의 지상사역(地上使役)의 책갈피와 같습니다. 

이러한 논란(論難)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를 만나는 일이며, 이러한 논쟁적(論爭的)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신앙의 근본적(根本的)인 문제와 일상경험의 실제적인 문제에서 신자(信者)들을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


⑴.마가복음 2~3장(章)의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논쟁(論爭) 다섯 가지는 (교과 제3과 참조)

  <①.죄 사(罪赦)함에 대한 논쟁(論爭). ②.죄인(罪人)과 함께하심에 대한 논쟁. ③.금식(禁食)에 대한 논쟁. ④.안식일 논쟁. ⑤.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에 대한 논쟁>

⑵.마가복음 11~12장(章)의 (제9과) 는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신 예수님과 종교지도자(宗敎指導者)들 사이의 논쟁(論爭)을 6가지로 요약(要約)할 수 있다.

   <①.예수님의 권위(權威)에 대한 도전(挑戰). ②.악(惡)한 농부(農夫)들에 대한 비유(譬喩). ③.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稅金)에 대해서. ④.결혼과 부활(復活)에 대해서. ⑤.큰 계명(誡命). ⑥.헌금(獻金)(과부의 두렙돈).>

⑶.(마가복음 10장)부터 이야기는 예수님의 유대,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사역하신 일로 전환(轉換)되며.

⑷.예수님은 큰 도시(都市)로 가는 길에 제자(弟子)들에게 그곳에서 일어날 사명(使命)을 설명하시며 

⑸.전개(展開)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 장소의 변화를 알릴 뿐만 아니라 독자(讀者)들에게 예수님의 사역(使役)과 지상생애(地上生涯)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紹介)합니다. 

⑹.제9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에 대한 발표(發表)이고.

⑺.(마가복음 11장)에는 그 유명한 도시(都市) 예루살렘으로의 입성(入城)을 묘사(描寫)합니다.

⑻.(마가복음 11장과 12장)에서 대부분 논의(論議)의 장소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⑼.포도원의 비유(마가복음 12:1~11)에서 예수님은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종교지도자들의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를 정확하게 폭로하십니다.

⑽.즉 비밀(祕密)의 때는 지나가고 예수님께서는 공개적(公開的)으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십니다.


(08월 25일) (일) <승리(勝利)의 입성(入城)>


(Q)~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공개적(公開的)으로 입성(入城)하신 것은 어떤 의미(意味)입니까? (마가복음 11:1~11과 스가랴 9:9~10)


(A)~<그리스도께서 탄생(誕生)하시기 오백 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이처럼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하신 이가 이제 다윗의 보좌(寶座)의 약속(約束)된 후계자(後繼者)로서 예루살렘에 임(臨)하신다. (DA 570)>


⑴.(나 귀 새끼를 타심) : 이는 (스가랴 9:9) 예언(豫言)의 성취(成就)인바, 예수께서 겸손(謙遜)한 왕(王)이시며 공의(公義)로운 구주(救主)이심을 상징(象徵)하고 있다.

⑵.(공공연하고 당당하게 입성(入城)하심) : 이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眞正)한 왕(王)이심을 만백성에게 선포(宣布)하기 위(爲)함이다.

⑶.정해진 때가 눈앞에 박두하였으므로, 더 이상 당신의 신분을 숨기실 이유가 없었다. 

⑷.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서 사탄의 세력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영전(靈戰)을 치르기로 결심하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⑸.그동안 지키셨던 비밀의 때는 지나갔다. 그분은 예언자적 면모를 보이시면서 잘 알려진 왕을 표상하는 행동을 통해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⑹.예수님의 예언자적(豫言者的) 능력(能力)을 보여줌으로 예수님 오심의 신성(神性)함을 부각(浮刻)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연결(連結)시킨다.

⑺.왕(王)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한다는 (스가랴 9:9~10)과 연결(連結)된다..

⑻.예수님이 타신 짐승은 이스라엘 왕들이 탄 것이었던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메시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되었다

⑼.군중(群衆)들은 그분을 저희 왕 메시아로서 환호(喚呼)하였다.

⑽.승리(勝利)의 입성(入城)과 관계된 사건(事件)들은 각 사람의 화제(話題)가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소개(紹介)할 것이었다.


(08월 26일) (월) <저주(詛呪)받은 나무와 깨끗해진 성전(聖殿)>  


(Q)~무화과나무를 향(向)해서 하신 말씀과 성전(聖殿)에서 하신 일은 서로 어떻게 연결(連結)됩니까? (마가복음 11:12~26)


(A)~<이때는 특정지역(特定地域)을 제외(除外)하고는 무화과가 익을 계절이 아니었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고원(高原)에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나신 과원(果園)에는 다른 모든 나무보다 일찍 된 나무가 하나 있었다. 이 나무는 벌써 잎사귀들이 무성했다. 잎이 나기 전에 익은 열매가 나오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특성이다. 그런고로 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잘 익은 열매가 있음을 약속(約束)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외모는 기만적이었다. 제일 낮은 가지로부터 제일 높은 가지까지 다 찾아보셨으나 예수께서는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셨다. 그것은 가식적(假飾的)인 무성한 잎사귀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소망, 581)>


⑴.열매 없는 나무에 대한 그분의 선고(宣告)와 결과(結果)는 성전정결(聖殿淨潔)로 그분에 대한 음모(陰謀)를 꾸민 이스라엘 지도자(指導者)들과 성전제도(聖殿制度)의 결국과 유사점(類似點)을 보인다. 

⑵.무화과(無花果) 과원(果園)에 있던 모든 나무는 열매가 없었다. 그러나 잎사귀가 없는 나무는 기대(期待)도 주지 않으며 실망(失望)도 일으키지 않는다. 

⑶.이 나무들은 이방인(異邦人)들을 대표(代表)하였다.

⑷.이방인(異邦人)들은 경건(敬虔)한 체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열매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공언(公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善)하다고 거만(倨慢)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⑸.그들은 하나님의 일과 방법에 어두웠다. 그들에게는 무화과(無花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⑹.무화과나무에 대해 예수께서 강(强)하게 저주(詛呪)한 것은 예수께서 시장하셨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임박(臨迫)한 심판(審判)을 극적이고도 예고적(豫告的)으로 보여준 표징(標徵)이었다

⑺.잎은 많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그들의 종교(宗敎)에 대한 외적인 인상적(印象的)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불모 성을 상징한 것이었다

⑻.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목(果木) 인바(호 9:10),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곧 선민(先民)의 자격을 상실(喪失)한체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 15:18~22)

⑼.자존심(自尊心) 있고 그렇게 뽐내는 허식(虛飾)을 가졌던 유대 나라는 허식적(虛飾的)인 무화과나무로 상징되었다.

⑽.그리스도께서는 메마른 무화과나무로부터 모든 사람이 주의해야 할 비유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계명(誡命) 길에 행하는 사람들은 열매가 풍성한 풍요(豐饒)로운 무화과나무와 같을 것이다. 이 나무는 허식적(虛飾的)인 잎만 있고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詛呪)를 받았다.


(08월 27일) (화) (무슨 권위(權威)로 이런 일을 하느냐?) 


(Q)~종교지도자(宗敎指導者)들은 예수님께 어떤 도전(挑戰)을 제기(提起)했으며, 그분은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마가복음 11:27~33)


(A)~<본 논쟁(論爭)의 성격(性格)은 본문의 산헤드린 회원들이 제기한 질문은 예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공개하신 바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죄 사(赦)함의 권세를 지녔노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 이에 대적(對敵)들은 이것을 빌미로 예수께 신성 모독(blasphemy)의 죄명을 뒤집어씌우고자 계교(計巧)를 부렸다.>


⑴.예수님은 종교지도자(宗敎指導者)들의 함정(陷穽)에 빠지지 않고 지혜롭게 반문(反問)하시며 가르침을 주셨다.

⑵.유대교가 가진 배타적(排他的) 요소를 설명하되, 또한 죄지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分離)되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强調)한다.

⑶.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성 모독(神聖冒瀆)은 극형(capital punishment)을 의미하였다. 진실로 예수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문제는 인생이 풀어야 할 가장 중차대(重且大)한 과업(課業)이다.

⑷.예수 살해방침(殺害方針)을 기정사실(旣定事實)로 굳혀둔 채 단지 유대 군중(群衆)들이 납득(納得)할 만한 증거 자료(證據資料)를 찾는 일에 몰두(沒頭)하고 있었다. 요컨대, 본 논쟁은 여타 논쟁(餘他論爭)들과는 달리 예수의 신분자체(身分自體)와 직결(直結)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가오는 위기(危機)의 절정(絶頂)을 암시(暗示)하고 있는 셈이다.

⑸.(대적(對敵)들의 자기모순(自己矛盾). ☞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께서 정식교육절차(定式敎育節次)를 받은 적도 없고 유대교 내에서 지도자로 공인(公認)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에 마치 예수께서 기존의 유대교를 훼파(毁破)하고 새로운 이단적(異端的) 당파(黨派)를 결집(結集)시키려 하는 도전 세력(挑戰勢力)으로 여겨졌고, 그뿐만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것처럼 가장(假裝)하는 참람(blasphemy)한 종교 사기극(宗敎詐欺劇)을 행하는 자(者)로 여겨졌다.>

⑹.그러나 예수를 향한 그들의 비방(誹謗)은 그들 자신에게 되돌아가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당시 산헤드린 회원들이야말로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동족(同族)인 유대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부패(腐敗)와 타락(墮落)의 온상(溫床)이었기 때문이다

⑺.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교적(宗敎的). 정치적(政治的) 임무를 수행(遂行)하노라고 자처(自處)했지만, 실상은 교권주의(敎權主義) 내지는 세속주의(世俗主義)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정면(正面)으로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⑻.이처럼 껍질만 남은 종교적(宗敎的) 타이틀을 내세워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과 그 권세를 이 땅에 드러내는 참 목자(牧者)들을 훼방(毁謗)하고 억누르는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의 횡포(橫暴)와 허세(虛勢)는 오늘날에도 존재(存在)한다.

⑼.모든 진리(眞理)의 빛을 거절(拒絶)한 것, 모든 경고(警告)를 멸시(蔑視)하고 유의(留意)하지 않은 것, 온갖 정욕(情欲)에 빠진 것, 하나님의 율법을 범(犯)한 것 등은 틀림없이 뿌린 대로 수확(收穫)하게 될 씨이다.

⑽.예수께서 주신 비유(譬喩)는 그가 말씀하시는 대상(對象)과 어떻게 적합(適合)한지 사랑으로 주신 사전 경고(事前警告)기에 듣고 돌이키는 자는 기회(機會)가 있었다. 


(08월 28일) (수) <이 땅의 의무(義務)와 하늘의 상급(賞給)>


(Q)~예수께 제기(提起)한 사두개인의 교묘(巧妙)한 질문(質問)은 어떤 문제가 있으며 예수님은 어떤 진리(眞理)를 가르치십니까?. (마가복음 12:13~27)


(A)~<논쟁(論爭) 앞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부(政府)와 하늘나라에 대해 어떻게 충성(忠誠)할 것을 말씀하시고, 부활(復活)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능력과 부활(復活)의 하나님이심을 들어 가르쳐 주셨다.>


⑴.그리스도의 피에 목마른 그리스도의 대적자(對敵者)들은 그가 그들에게 한 말에서 책(責)잡을 기회를 찾지 못하자 그에게 나와 질문(質問)을 함으로써 그를 올무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⑵.예수님께 질문(質問)하는 그들의 전제(前提)는 잘못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誤解)하였도다’라고 부언(附言)하셨다. (마가 12:24)

⑶.전제(前提)가 잘못된 질문(質問)에 예수님께서 먼저 부활(復活) 때 하나님의 권능(權能)을 설명하시며 천국(天國)에서는 혼인(婚姻)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⑷.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출애굽기 3:1~22)을 인용(引用)하여 부활교리(復活敎理)를 옹호(擁護)하셨다. 

⑸.그들은 현시점에서 대단히 중대한 양심의 사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고귀한 견해를 갖는 것처럼 하였다(마가 12:14 절). 

⑹.그들이 던진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義務)를 알고자 하는 것같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느 편(便)을 취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알고자 하였고 그리스도를 고소(告訴)할 기회를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⑺.전통적(傳統的)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의 개별적인 율법(365가지는 부정적인 것이요 248가지는 긍정적인 것이다. )에 대해 말했다

⑻.그들은 분명히 질문하기를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일까?"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태도에 따라 자기들의 입장을 취(取)하려고 하였다.

⑼.이 교만(驕慢)한 사람들같이 많은 사람이 결코 이행할 마음이 없으면서도 자기들의 의무를 알기를 바라는 척한다. (렘 42:20).

⑽.그리스도께서 그 질문(質問)의 취지(趣旨)를 아시고 그들의 나라에서 이미 규정한 바를 그들에게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므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물러난 것이다. (마가복음 12:15~17절).


(08월 29일) (목) <가장 큰 계명(誡命)>  


(Q)~<가장 큰 계명(誡命)이 무엇이냐는 질문(質問)은 무엇을 묻는 말(質問)이었습니까? (마가복음 12:28~34)>


(A)~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들의 마지막 음모를 이행하도록 선택된 서기관(참조 마 22:34, 35 주석)은 마음이 정직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예수가 “대답을 잘하신” 것을 인정할 만큼 공정하였다. 그가 예수에게 묻기를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였다(28절). 그는 계명의 차례에 있어서 첫째를 의미하지 않고 그 계명의 중요(重要)함과 위엄(威嚴)에 있어서 첫째를 의미(意味)한 것이다. 


⑴.모든 계명(誡命) 중에 가장 크고 모든 계명(誡命)을 함축(含蓄)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⑵.영혼(靈魂) 안에 이 계명(誡命)이 지배적(支配的)인 원칙(原則)이 될 때 다른 모든 의무(義務)에 있어서도 그 영향을 받는다. 사랑이 그 사람을 주도(主導)하는 감정(感情)이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신생(信生)한 영혼을 주도(主導)하는 은혜(恩惠)가 된다.

⑶.이 사랑의 계명(誡命)이 없는 그곳에는 아주 선(善)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거나 올바로 되지 않거나, 영접(迎接)하지 않거나, 더디 이루어진다.

⑷.서기관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종교의 핵심(核心)을 파고든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6:4~5)의 유대교의 신앙고백(信仰告白)인 셰마를 인용하여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답하신다.

⑸.그분이 유일한 분이시니 우리의 심령도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 외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보좌에서 그분의 적수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⑹.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진실하고 신실하게 그리고 동일한 실증으로 우리가 이웃에게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들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⑺.그리스도께서는 그 서기관이 한 말을 인정하였고 자기의 질문에 있어서 그토록 대답함을 칭찬하여 주시었다. (마가 12:34 절).

⑻.예수의 대답은 어느 것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전체 율법을 요약해 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가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인격적(人格的)으로, 포괄적(包括的)으로, 그리고 전심(全心)으로 하나님께 자발적(自發的)으로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⑼.지혜(智慧)를 다하고. 우리의 이성적(理性的)인 능력이나 기능(機能)은 전부 우리의 영혼의 애정이 하나님을 향(向)하도록 인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誡命)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시였다

⑽.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이는 명령이 아니며 고대(古代) 조약(條約)에서 유래(由來)한 충성이라는 개념에서 더 확대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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