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 지옥(地獄) 불 -(핵심 Q & A)-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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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1-28 16:35 조회3,59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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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지옥(地獄) 불
(12월03일 (안) / 일몰: 오후 5시14분)
<서언(緖言)>
기독교(基督敎)의 많은 종파(宗派)들은 영혼불멸(靈魂不滅)이라는 비성경적(非聖經的) 이론(理論)을 가르치며 설교(說敎) 및 증거(證據)하고 있는바 이로 인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죽음과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하여 그릇 해석(解釋)하며 가르치고 있고, 이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믿음에서 기만(欺瞞)당하고 있으며 큰 영향(影響)을 받고 하나님의 성품(性稟)에 대한 오해(誤解)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바, 사단의 조작(造作)으로 생겨난 오해(誤解)들을 우리는 성경의 진리(眞理)를 통해 올바르게 이해(理解)하고 전(傳)해야 할 것이다.
11월 27일(일) 불멸(不滅)의 벌레?(Immortal Worms) 蛔蟲. 구더기
(Q)~(마가복음 9:48)에 기록(記錄)된 “벌레도 죽지 않고”라는 구절(句節)의 뜻은 무엇입니까?
(A)~○.마가복음9:48절에 인용된 ‘구더기’ ‘벌레’로 표현한 말의 비유(譬喩)는 불멸(不滅)이나 불사(不死)의 존재(存在)라는 의미(意味)가 아니라, 그 벌레(구더기)의 생태(生態)의 습성(習性)으로 사체(死體)를 뜯어먹는 것으로 벌레들에게 주어진 파괴적인 임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악(惡)한 자들의 사체(死體)를 먹이로 삼은 벌레들이 사체(死體)가 완전히 파괴(破壞)될 때까지 중단(中斷) 없이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즉 비유적(比喩的) 표현(表現)은 이 벌레들이 불멸(不滅)의 존재(存在)라는 뜻이 아니라,
벌레들에게 주어진 파괴적인 임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악한 자들의 사체를 먹이로 삼은 벌레들이 사체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중단 없이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영혼의 불과 같은 의미이다.)
11월 28일(월) 지옥(地獄) 불
(Q)~(말라기 4:1과 유다서1:7절)이나, (마 18: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영원한 불”이나 “꺼지지 않는 불”(막 9:43), 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A)~○.(말라기 4:1과 유다서1:7절)이나, (마 18: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영원한 불”이나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의 “영원한 불”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급(言及)은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년기 후에 있을 “불 못”에 대한 암시(暗示)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존재(存在)하고 있다거나 영원히 불타는 지옥(地獄)이 있다는 생각은 비성경적(非聖經的)이다. “영원한 불”은 악인(惡人)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狀態)로 완전히 멸절(滅絶)한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脈絡)에서 “영원하다.”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는 지옥(地獄)불은 없다.
영원의 불은 불 태우는 대상이 완전히 소멸될때까지 불이며,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졌고, 그 영원한 불은 이미 꺼지고 없다
11월 29일(화) 연옥(煉獄)에 있는 성도(聖徒)들
(Q)~(전 9:10, 겔 18:20~22, 히 9:27) 연옥(煉獄)에 대한 교리(敎理)가 비성서적(非聖書的)인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가톨릭교회(敎會)가 가르치는 연옥(煉獄)에 관한 교리(敎理)는 죽은 자들이 예수님께서 재림(再臨)하시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대신, 연옥(煉獄)에서 누군가 그들을 구(求)해낼 때까지 고통(苦痛)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연옥(煉獄)은 사탄이 만들어낸 걸작품(傑作品)으로 성경(聖經)의 가르침과 조화(調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稟性)을 심각하게 왜곡(歪曲)하는 천주교 교리로 비성서적(非聖書的)인 가르침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무의식 상태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의식 자체가 없다.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가 좋은 곳에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비성서적이며,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11월 30일(수) 육체(肉體)를 떠난 영혼(靈魂)들로 가득한 천국(天國)
(Q)~(행 2:29, 34, 35, 고전 15:16~18) 죽은 자들의 영혼(靈魂)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가르침의 문제(問題)는 무엇입니까?
(A)~○.보통 개신교(改新敎)에 많은 신자(信者)들은 연옥(煉獄)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의인(義人)의 영혼(靈魂)들이 이미 하나님이 계신 천국(天國)에 가 있다고 믿는다. 그 일예(一例)가 죽으면 “소천(召天)하셨다”고도 하고 소천(所天)하늘에 가셨다고도 한다. 이러한 사상(思想)이 곧 은연중(隱然中)에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을 인정(認定)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육체(肉體)와 분리(分離)된 영혼(靈魂)이 먼저 들어가는 천국(天國)은 없다.(창2:7 참조)
모든 죽은 자들은 무의식(無意識) 상태(狀態)에서 무덤에서 쉬다가 부활(復活)의 날에 비로소 의식(意識)을 회복(回復)하게 될 것이다.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2월 1일(목) 성경적(聖經的) 관점(觀點)
(Q)~(요일 5:3~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者)들에게만 “영생(永生)”이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A)~○. “너희가 성경(聖經)에서 영생(永生)을 얻는 줄 생각하고…….(요5:39)” 이 성경에서 영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分明)하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永生)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永生)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예수님은 "영생(永生)은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다.”(교리, 23)
영생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바로 오늘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의로운 자들이 부활한 후에 비로소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이다. 결론은 명백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다(요일 5:11, 12) 조건적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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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10과 지옥(地獄) 불
(12월03일 (안) / 일몰: 오후 5시14분)
<서언(緖言)>
기독교(基督敎)의 많은 종파(宗派)들은 영혼불멸(靈魂不滅)이라는 비성경적(非聖經的) 이론(理論)을 가르치며 설교(說敎) 및 증거(證據)하고 있는바 이로 인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죽음과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하여 그릇 해석(解釋)하며 가르치고 있고, 이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믿음에서 기만(欺瞞)당하고 있으며 큰 영향(影響)을 받고 하나님의 성품(性稟)에 대한 오해(誤解)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바, 사단의 조작(造作)으로 생겨난 오해(誤解)들을 우리는 성경의 진리(眞理)를 통해 올바르게 이해(理解)하고 전(傳)해야 할 것이다.
◎.(참고) = 지옥(地獄)(hell).
1.성경(聖經)상으로 볼 때 지옥(地獄)은, "하나님을 거절(拒絶)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救援)의 선물(膳物)을 거절(拒絶)하는 자들이 둘째 사망(死亡)을 당할 때 영원한 불에 의하여 형벌(刑罰)과 멸망(滅亡)을 당하는 장소(場所)와 상태(狀態)"이다.
2.성경의 영어 번역(飜譯)판들은 히브리어 "스올(sheol)과 헬라어 "하데스"(hades)를 번역하기 위하여 "지옥(地獄)"이라는 단어를 빈번(頻繁)히 사용한다. 이 용어(用語)들은 일반적으로, 죽은 의인(義人)들과 악인(惡人)들이 꼭 같이 무의식(無意識) 상태에서 부활(復活)을 기다리는 무덤을 언급(言及)하고 있다(교리 제25장 참조).
3.지옥(地獄)에 대한 오늘날의 관념(觀念)이 이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의미하는 바와는 너무도 크게 다르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개역 판들은 "지옥(地獄)"이라는 단어를 피(避)하고 그 히브리어를 "스올"로, 그 헬라어를 "하데스"로 단순히 음역(音譯)한다.
4.반대(反對)로, 신약의 영어 개역 판들이 또한 "지옥(地獄)"이라는 낱말로 번역(飜譯)하는 헬라어 게엔나(geena)는 회개(悔改)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불 형벌(刑罰)의 장소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지옥(地獄)"은 반드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특성(特性)을 깨닫지 못하므로 가끔 큰 혼란(混亂)이 야기되었다.
5. “게엔나”는 히브리어 ‘게 힌놈(Ge Hinnom)’ 즉 "힌놈 골짜기"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에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어린 아이들을 불사르는 이교(異敎)의 의식(儀式)을 행했다(대하 28:3, 33:1, 6). 예레미야는 이 죄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 골짜기를, 이스라엘의 시체(屍體)가 더 이상 묻힐 장소가 없을 때까지 묻히는 "살륙(殺戮)의 골짜기"로 만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머지 시체(屍體)들은 새들의 밥이 될 것이었다(렘 7:32, 33, 19:6; 사 30:33). 예레미야의 예언(豫言)은 의심(疑心)할 여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게 힌놈을 악인(惡人)들의 심판의 장소, 혐오(嫌惡)와 형벌(刑罰)과 수치(羞恥)의 장소로 여기게 했다.
6. 후기(後期)의 랍비의 전통(傳統)은 그것을 시체(屍體)와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간주한다. 예수님은 흰놈의 불을, 지옥(地獄)의 불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셨다(마 5:22, 18:9 참조). 그러므로 흰놈의 불은 마지막 심판을 태우는 불을 상징(象徵)했다. 그분은 그것이 죽음 후에 경험(經驗)이며(눅 12:5) 지옥(地獄)은 몸과 영혼(靈魂)을 다 같이 파멸(破滅)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교리, 340)
11월 27일(일) 불멸(不滅)의 벌레?(Immortal Worms) 蛔蟲. 구더기
(Q)~(마가복음 9:48)에 기록(記錄)된 “벌레도 죽지 않고”라는 구절(句節)의 뜻은 무엇입니까?
(A)~○.마가복음9:48절에 인용된 ‘구더기’ ‘벌레’로 표현한 말의 비유(譬喩)는 불멸(不滅)이나 불사(不死)의 존재(存在)라는 의미(意味)가 아니라, 그 벌레(구더기)의 생태(生態)의 습성(習性)으로 사체(死體)를 뜯어먹는 것으로 벌레들에게 주어진 파괴적인 임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악(惡)한 자들의 사체(死體)를 먹이로 삼은 벌레들이 사체(死體)가 완전히 파괴(破壞)될 때까지 중단(中斷) 없이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즉 비유적(比喩的) 표현(表現)은 이 벌레들이 불멸(不滅)의 존재(存在)라는 뜻이 아니라,
벌레들에게 주어진 파괴적인 임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달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악한 자들의 사체를 먹이로 삼은 벌레들이 사체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중단 없이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영혼의 불과 같은 의미이다.)
○.<벌레>. 히브리어 ‘톨레아(tole‘ah)’ 여기서는 ‘구더기’를 의미(意味)하는 것 같다. 같은 히브리어 단어(單語)가 (출 16:20; 욥 25:6; 시 22:6; 사 14:11)에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벌레‘(구더기)가 시체(屍體)들을 파먹는 것을 묘사(描寫)한 것이다.”(성경주석, 사 66:24)
○.(막 9:48). ‘구더기’ ‘벌레’도 죽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 예수가 ‘게헨나’에 관하여 말씀하셨을 때 백성들은 그가 힌놈의 골짜기, 곧 도시 쓰레기장을 언급(言及)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理解)하였다. 그들의 초기 역사(初期 歷史) 때문에 그곳은 심판(審判)의 상징(象徵)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골짜기에서 그들의 우상(偶像)들과 그들의 우상숭배(偶像崇拜)적인 조상(祖上)들 위에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렘 7:32, 33). 불이 ‘구더기’를 삼키지 않는 일도 있었다. ‘구더기’는 영혼(靈魂)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헬라어 ‘스콜레크스’는 이 경우에 ‘구더기’를 가리킨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날마다 계속해서 오물(汚物)들을 공급(供給)함으로 불이 꺼질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오늘날 그곳에 전혀 불이 타고 있지 않다. ‘구더기’의 멸망(滅亡)이 완성(完成)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말이다.”(핵심, 인간의 상태>7. 영원한 고난)
○.<(막9:48) ‘구더기’ ‘벌레’>
헬라어 스콜렉스(sko-le-x). “구더기” 또는 “벌레.” 메이저(Major), 메이슨(Mason) 그리고 라이트(Wright)의 주석(예수의 사명과 기별[The Mission and Message of Jesus], 123)처럼 “죽지 않는 구더기는 죽을 수 없는 영혼(soul)의 표상이 아니라 제거될 수 없는 부패의 표상이다.” 43절에 “영생”이 “꺼지지 않는 불”과 대조되어 쓰였다. 롬 6:23 및 다른 많은 성경 구절에서도 “영생”은 “사망”과 대조되어 있다. (요 3:16)에서는 “영생(永生)”과 “멸망(滅亡)”을 대조시킨다. 예수는 여기서도 그와 같은 대조(對照)를 시도한 것이 분명하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와 평행되어 있어 대등한 표현이다. 하지만 구더기들이 불 속에서 그들의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모순되게 여겨진다. 스콜렉스, “벌레”란 단어에는 “벌레”를 “영혼”과 동일시하는 통속적인 설명을 어렴 풋이라도 정당화하는 의미가 없으며(참조 사 66:24 주석),
○.사람의 ‘죽은 상태’에 대하여 개인적(個人的)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간에, 이 사실은 거의 모든 주석가에게 인정(認定)되고 있다. (막 9:48, 재림교주석)
11월 28일(월) 지옥(地獄) 불
(Q)~(말라기 4:1과 유다서1:7절)이나, (마 18: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영원한 불”이나 “꺼지지 않는 불”(막 9:43), 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A)~○.(말라기 4:1과 유다서1:7절)이나, (마 18: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영원한 불”이나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의 “영원한 불”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급(言及)은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년기 후에 있을 “불 못”에 대한 암시(暗示)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존재(存在)하고 있다거나 영원히 불타는 지옥(地獄)이 있다는 생각은 비성경적(非聖經的)이다. “영원한 불”은 악인(惡人)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狀態)로 완전히 멸절(滅絶)한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脈絡)에서 “영원하다.”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는 지옥(地獄)불은 없다.
영원(永遠)의 불은 불 태우는 대상이 완전히 소멸(燒滅)될때까지 불이며,
영원한 불의 형벌(刑罰)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히 소멸(燒滅)되어 없어졌고, 그 영원(永遠)한 불은 이미 꺼지고 없다
○.<(말 4:1) 극렬(極烈)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이제 선지자(先知者)는 악인(惡人)들에 대한 본격적(本格的)인 심판(審判)의 형벌(刑罰)을 기술한다(습 1:15). 여기서 ‘극렬한 풀무불’은 노아 당시의 심판의 물처럼 하나님의 철저(徹底)한 심판적(審判的) 도구(道具)를 지칭(指稱)하는 말인 바, ‘극렬(極烈)한 풀무불 같은 날’ 곧 전우주적(全宇宙的)인 최후 심판이 시행되는 ‘여호와의 날’이다(사 13:6, 렘 46:10, 욜 2:31, 습 1:14-2:3, 마 24:3-30, 롬 2:5, 벧후 3:10, 계 16:14, Alden). (말 4:1, 만나주석)
○.<풀무불 같은.>
악인(惡人)들에게 임(臨)하는 하나님의 최후심판(最後審判)은 불에 의한 완전한 멸망(滅亡)이다(참조 겔 28:16~19 주석; 계 20:9).
○.경건(敬虔)치 않은 자들이 당할 완전한 파멸(破滅)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이 사용될 수 없었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영원한 고통 가운데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초개”처럼 즉시 소멸될 것이다(참조 시 37:10, 20; 사 5:24).(말 4:1, 재림교주석)
○.성경에는 널리 알려진 오류(誤謬) 곧 영원히 불타는 지옥(地獄)과 같은 오류(誤謬)는 나오지 않는다. 악인(惡人)들은 끝없이 불타지 않는다. 마지막 날의 불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살라” 버릴 것이다. (참조 렘 17:27; 마 3:12; 25:41; 벧후 3:7~13; 유 7절 주석.) (말 4:1, 화잇주석)
○.<영원(永遠)한 불.>
참조 (마 25:41 주석). 어떤 주석자들은 유다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영원한 불에 대한 거울이 되어 형벌을 받느니라.” 그러나 이런 번역은 벧후 2:6과 조화(調和)되지 않으며, “영원한 불”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련된 문제를 피하려는 불필요한 노력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성읍(城邑)들을 전멸(全滅)시킨 불은 그 사명을 완수(完遂)했다. 탈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탔을 때 불은 꺼졌다. 그 불은 오래 전에 태우기를 그쳤으나, 그 결과는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성읍들은 “영원한 불의 형벌(刑罰)”을 당했다.
○.이 심판(審判)의 예(例)는 (창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滅亡事件)이다. 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은 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 하나님의 심판(審判)에 대한 예(例)로 자주 나타난다(신29:23, 사1:9, 13:19, 렘23:14, 49:18, 50:40, 호11: 8, 암4:11, 습2:9). 유다는 본문(本文)의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都市)들이 앞서 언급(言及)한 타락(墮落)한 천사들과 ‘같은 모양으로’, 즉 같은 종류의 범죄(犯罪)를 통하여 멸망(滅亡)당하였음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마18:9) 영원한 불.>
(마18:9절)에 의(依)하면, ‘지옥(地獄) 불’ 이다
지옥(地獄)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은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由來)되었다. 이 힌놈의 골짜기는 우상 몰렉에게 자기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쳤던 곳으로 (대하 28:3, 33:6),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宗敎改革) 때 불결(不潔)한 곳, 부정(不淨)한 곳으로 선언(宣言)되어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왕하 23:10). 그러나 영원한 형벌(刑罰)의 장소(場所)로서의 지옥(地獄)에 관한 언급은 (사 66:24)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다가 신구약(新舊約) 중간기에 이르러 묵시 문학(文學)의 등장으로 ‘지옥(地獄)’이라는 개념(槪念)이 차차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신약의 가르침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헨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除外)하고는 거의 예수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마8:12, 바깥 어두운 데, 마13:50, 풀무 불 등).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 즉 임박한 세계 종말론(終末論)과 심판사상(審判思想)에 충만(充滿)해 있던 예수는 이러한 사상(思想)을 사람들에게 고취(鼓吹)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곧 실현하기 위해 진리(眞理)와 공의(公義)로써 행동(行動)하게 하였다. 한편 지옥(地獄)에 관한 여러 표상(表象)들, 예컨데 ‘영영(永永)한 불’, ‘바깥 어두운데’ 등은 지옥(地獄)에 대한 상징(象徵)과 비유(譬喩)로서, 죄를 지은 영혼(靈魂)이 영원히 고통(苦痛)당하게 될 것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마 18:8, 만나주석)
11월 29일(화) 연옥(煉獄)에 있는 성도(聖徒)들
(Q)~(전 9:10, 겔 18:20~22, 히 9:27) 연옥(煉獄)에 대한 교리(敎理)가 비성서적(非聖書的)인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가톨릭교회(敎會)가 가르치는 연옥(煉獄)에 관한 교리(敎理)는 죽은 자들이 예수님께서 재림(再臨)하시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대신, 연옥(煉獄)에서 누군가 그들을 구(求)해낼 때까지 고통(苦痛)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연옥(煉獄)은 사탄이 만들어낸 걸작품(傑作品)으로 성경(聖經)의 가르침과 조화(調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稟性)을 심각하게 왜곡(歪曲)하는 천주교(天主敎) 교리(敎理)로 비성서적(非聖書的)인 가르침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무의식상태(無意識常態)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의식(意識) 자체(自體)가 없다.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자가 좋은 곳에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비성서적(非聖書的)이며,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審判)이 있으리라.
○.연옥(煉獄)은 사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주장(主張)은 하나님의 품성(稟性)을 위조(僞造)해 하나님을 가혹(苛酷)하고 복수심(復讐心)이 많으며 독단적(獨斷的)이며 용서(容恕)를 베풀지 않는 분으로 오해(誤解)하게 했다”(엘렌 G 화잇, 원고 51, 1890).
○.<연옥(煉獄)>
가톨릭 교리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있는 동안 지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른다고 믿는 장소이다. <두산백과> 인용
○.가톨릭 교리(敎理)에서 연옥(煉獄)은 천국(天國)으로 가기에는 자격(資格)이 부족(不足)하지만 지옥(地獄)으로 갈 정도(程度)의 큰 죄를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靈魂)이 머무르는 곳이다. 영혼들은 연옥(煉獄)에서 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이승에서의 죄를 씻고 정화(淨化)한다. 연옥(煉獄)이 정죄계(淨罪界, 깨끗함과 죄 사이의 경계)나 정화소(淨化所, 깨끗해지는 장소)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옥(煉獄) [purgatory, 煉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용
○.연옥(燃獄, 라틴어: Purgatorium)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내세관(來世觀) 중의 하나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敎理)에 따르면, 하느님(하나님)의 은총(恩寵)과 사랑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救援)을 보장(保障)받았으나 완전히 정화(淨化)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일시적(一時的)인 정화(淨化)를 거치는 상태(狀態)를 말한다. <위키백과> 인용
○.<음부(陰府).>
히브리어 셔올(s∨e’ol). 이것은 죽은 자들의 상징적인 영역을 가리킨다(참조 삼하 12:23; 잠 15:11). 전도서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만 셔올을 언급한다. 솔로몬은 셔올에서의 무의식 상태를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참조 전 3:19~21 주석). (전도서 9:10, 재림교주석)
○.<(겔18:20)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의 오류(誤謬)>
아담에게 불순종(不順從)할지라도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고 약속(約束)한 유일(唯一)의 존재(存在)는 큰 기만자(欺瞞者)(사단)뿐이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와에게 말한 뱀의 선언은 영혼불멸(靈魂不滅)에 관한 최초(最初)의 설교(說敎)였다. 그러나 오로지 사단의 권위(權威)에 기초(基礎)를 둔 이 주장(主張)이 그리스도교계의 강단(講壇)에서 반향(反響)되고 마치 우리의 첫 조상(祖上)이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과 꼭 같이 인류의 대다수(大多數)가 그것을 즐겨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犯罪)하는 그 영혼(靈魂)은 죽을지라”(겔 18:20)고 선언(宣言)하셨지마는 범죄(犯罪)한 영혼(靈魂)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뜻으로 해석(解釋)되고 있다. 사단의 말을 이처럼 쉽게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그처럼 불신(不信)하는 사람들의 이상(異常)한 반항(反抗)에 대하여 우리는 다만 놀랄 수밖에 없다.
○.만일 사람이 타락(墮落)한 후에도 생명나무에 접근(接近)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許容)되었다면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따라서 죄도 사라지지 않고 영속(永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룹 천사와 불꽃 검이 “생명나무의 길”(창 3:24)을 지켰으므로 아담의 가족 중 한 사람도 그 장벽(障壁)을 통과하여 생명을 주는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허용(許容)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지 않을 죄인(罪人)은 한 사람도 없다(쟁투 533). (겔 18:20~22, 화잇주석)
○.가톨릭교회는 지옥(地獄)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 천국(天國)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죽은 자는 연옥(煉獄)에서 죄를 씻은 후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연옥(煉獄)에서의 그들의 고통(苦痛)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고행(苦行)을 통해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主張)한다. 가톨릭교회의 교리문답(敎理問答)에는 연옥(煉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총과 우정 속에서 죽었으나 아직 완전하게 정화(淨化)되지 않은 모든 사람도 영원한 구원(救援)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 정화(淨化)의 과정(過程)을 겪고, 그 과정을 통해 천국(天國)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획득(獲得)한다”(가톨릭교회 교리문답, 291).
○.또한, 연옥(煉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도(祈禱)를 하거나 그들을 대신해 어떤 행위를 하면, 그들이 받는 고통(苦痛)을 완화(緩和)시킬 수 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교회는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자선(慈善), 면죄부(免罪符), 그리고 고행(苦行)을 요구(要求)한다”(가톨릭교회 교리문답, 291).
11월 30일(수) 육체(肉體)를 떠난 영혼(靈魂)들로 가득한 천국(天國)
(Q)~(행 2:29, 34, 35, 고전 15:16~18) 죽은 자들의 영혼(靈魂)이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가르침의 문제(問題)는 무엇입니까?
(A)~○.보통 개신교(改新敎)에 많은 신자(信者)들은 연옥(煉獄)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의인(義人)의 영혼(靈魂)들이 이미 하나님이 계신 천국(天國)에 가 있다고 믿는다. 그 일예(一例)가 죽으면 “소천(召天)하셨다”고도 하고 소천(所天)하늘에 가셨다고도 한다. 이러한 사상(思想)이 곧 은연중(隱然中)에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을 인정(認定)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육체(肉體)와 분리(分離)된 영혼(靈魂)이 먼저 들어가는 천국(天國)은 없다.(창2:7 참조)
모든 죽은 자들은 무의식(無意識) 상태(狀態)에서 무덤에서 쉬다가 부활(復活)의 날에 비로소 의식(意識)을 회복(回復)하게 될 것이다.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영혼(靈魂)― 인간 활동의 근원(根源)으로 생각되는 정신적(精神的) 실체(實體)로 영혼은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측면(側面)에서 육체(肉體)와 대별(大別)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성경에서는 주로 통일된 인격의 전체성(全體性)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인간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며(창 2:7; 삿 5:21; 행 2:27), 목숨으로 이해(理解)되기도 한다(창 9:4; 신 4:29; 마 2:20).”(사전, 영혼)
○.인간을 창조(創造)할 때, 흙(땅의 요소)과 생기(生氣)와의 연합(聯合)이 산 사람, 혹은 영혼(네페쉬)을 만들었다. 아담은 하나의 분리(分離)된 단위로서의 영혼(네페쉬)을 받지 않고 생령(生靈)이 되었다(창 2:7; 본서 7장 참조). 그리고 죽을 때에는 반대(反對) 현상(現象)이 생긴다. 곧 땅의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서 생기(生氣)가 제거(除去)되면, 의식(意識)이 전혀 없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은 영혼(네페쉬)이 된다(시 146:4). 몸을 이루었던 요소(要素)는 본래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 영혼(네페쉬)은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意識的) 존재(存在)로 남는 것이 아니다. 성경(聖經)은 죽을 때 영혼(네페쉬)이 하나의 의식적(意識的) 존재(存在)로 생존(生存)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실로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쉬)은 죽"(겔 18:20)는다.”(교리, 326)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죽어서 장사(葬事)되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당시(當時)에 그의 무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육체(肉體)는 무덤에서 썩었고 승천(昇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인용(引用)할 이 시(詩)는 다윗 자신에 적용(適用)시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천(昇天)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었다. (주석 행 2:34)
12월 1일(목) 성경적(聖經的) 관점(觀點)
(Q)~(요일 5:3~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者)들에게만 “영생(永生)”이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A)~○. “너희가 성경(聖經)에서 영생(永生)을 얻는 줄 생각하고…….(요5:39)” 이 성경에서 영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分明)하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永生)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永生)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예수님은 "영생(永生)은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다.”(교리, 23)
영생(永生)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膳物)이다. 그 선물(膳物)은 바로 오늘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의(義)로운 자들이 부활(復活)한 후에 비로소 완전(完全)하게 누리게 될 것이다. 결론(結論)은 명백(明白)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永生)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永生)이 없다(요일 5:11, 12) 조건적(條件的)인 것을 잊지 말자.
“너희가 성경(聖經)에서 영생(永生)을 얻는 줄 생각하고…….(요5:39)” 이 성경에서 영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分明)하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永生)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永生)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예수님은 "영생(永生)은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다.”(교리, 23)
○.<인간(人間)의 소망(所望).>
비록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狀態)로 태어났을지라도 성경은 불멸성(不滅性)을 찾도록 그들에게 격려(激勵)한다(롬 2:7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불멸성(不滅性)의 근원(根源)이시다. "하나님의 은사(恩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요일 5:11 참조). 그분은, "사망(死亡)을 폐(廢)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음성(音聲)이 무덤을 열고 죽은 자를 부활(復活)시키실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5:28, 29).”(교리, 324)
○.<불멸성(不滅性)을 받음.>
바울은 불멸성(不滅性)의 선물(膳物)이 주어지는 순간(瞬間)을 이렇게 묘사(描寫)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秘密)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喇叭)에 순식간(瞬息間)에 홀연(忽然)히 다 변화(變化)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變化)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不可不)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死亡)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應)하리라"(고전 15:51-54). 이 말씀은, 하나님이 신자(信者)에게 죽을 때에 불멸(不滅)을 주시지 않으시고 부활(復活) 때, 곧 "마지막 나팔(喇叭)"이 울릴 때에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個人)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일 때에 영생의 선물을 받는 것으로 요한이 지적(指摘)하고 있는 반면(요일 5:11-13), 이 선물의 실제적(實際的) 실현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그 때에 가서야 우리는 죽음의 상태에서 불멸(不滅)의 상태로, 썩을 몸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變化)하게 될 것이다.”(교리, 325)
○.<새 땅에서의 영적(靈的) 추구(追求).>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영생(永生)도 무의미(無意味)할 것이다. 영원을 통하여 구속(救贖)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많이 알고자 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곧 그분의 생애와 사업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분과 더 많은 교제(交際)를 나누기 위하여,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타락(墮落)하지 않은 세계에 증거(證據)하기 위하여, 그분의 품성(稟性)을 반영(反映)하는 품성을 더욱 완전히 소유(所有)하기 위하여 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구속(救贖)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다. 그들은 그분 안에서 영원히 안식(安息)하고, 완전히 만족(滿足)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기기 위하여 생애(生涯)하셨고,(마 20:28),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동일한 생애를 하도록 부르셨다. 오늘날 그분과 함께 일하는 그 자체(自體)가 상급(賞給)이 된다. 흐리고 이로 말미암아 형성(形成)되는 관계는 새 땅에서 그분과 함께 일하는 더 큰 축복과 특권(特權)을 부가(附加)하여 제공한다. 그곳에서는 큰 기쁨과 만족(滿足)으로, "지금의 종들이 그를 섬기"(계 22:3)게 될 것이다.”(교리, 351)
○.<(요 17:3) 영생(永生)은 … 아는 것이니 이다.>
십자가(十字架)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復活)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永生)’에 대하여 정의(定義)를 내린다. 구원(救援)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知識)이 필요(必要)하다는 것은 선지자(先知者)들에 의해서도 주장(主張)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明哲)하여 나를 아는 것과 … 인애(仁愛)와 공평(公平)과 정직(正直)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고 했다. ‘안다’(헬, 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體驗的)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 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人格的) 하나 됨을 증거(證據)한다(Lenski). 체험적인 지식(知識)의 본질(本質)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順從)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誡命)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순종할 때 그분을 체험적(體驗的)으로 알게 된다.(주석 요17:3)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 절 상반 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강조(强調)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或者)는 영생의 근원(根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永生)을 줄 수 없음을 강조(强調)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요일 5:3~12, 만나주석)
○.<(요일5:12) 아들이 있는.>
아들이 있다는 것은, 그를 믿음으로 그가 우리에게 그 이름이 의미(意味)하는 모든 것-구세주(救世主), 주(主), 우리의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자(참조 요 1:12; 5:24 주석)-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음속에 거(居)하는 그리스도를 가장 영예(榮譽)로운 손님으로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갈 2:20; 엡 3:17; 계 3:20 주석).
○.<(요일5:12)생명이 있고.>
문자적(文字的)으로는 “그 생명을 가졌고.” 11절에 언급(言及)된 영생을 말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탄생(誕生)과 함께 시작하며, 다가오는 세상에서도 계속(繼續)된다(참조 요 8:51; 10:10 주석). 예수와의 우정(友情)을 돈독(敦篤)히 하는 자들은 그의 품성을 함께 나누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아들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다함이 없는 생명을 소유(所有)함을 보증(保證)한다.
○.<(요일5:12)(아들이) 없는.>
아버지가 오직 아들을 통(通)해서만 영생이 가능(可能)하도록 선택(選擇)했기에(요 1:4; 3:16; 17:2), 아들을 거절(拒絶)하는 자들은 참된 생명의 유일한 근원(根源)을 거절(拒絶)하는 것이 된다. 이 부정적(否定的) 진술(陳述)에 요한이 그리스도의 칭호(稱號)를 덧붙이되, 그를 “아들”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描寫)함으로 아들이 주는 생명의 궁극적(窮極的)인 근원(根源), 즉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옴(참조 요 5:26 주석)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注目)할만 하다. (요일 5:3~12, 재림교주석)
○.<(마1: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直接)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法的)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를 히브리어 ‘여호수아’ 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救援)이시라’는 의미(意味)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目的),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言約)하신 종말론적(終末論的) 구원(救援)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舊約)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提示)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後繼者)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約束)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引導)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祖上) 스룹바벨(스2:2, 느7:7)과 (3) 동시대(同時代)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殿)을 건축하는 자(者)’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模倣)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天使)가 (시 130:8)을 인용(引用)한 뒤의 구절(句節)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本質的) 의미(意味)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確認)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아와 연결(連結)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人類)의 죄를 속량(贖良)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告白)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百姓)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統治者)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王的) 권위(權威)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限定的)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침례(浸禮) 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敬虔)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異邦人)들도 제자(弟子)로 삼았으며(마 3:9, 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아의 백성’을 의미한다.
○.<저희 죄에서 구원(救援)할 자.>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由來)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依支)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 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軟弱)함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치유(治癒)(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 구절(句節)은 독자(讀者)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繼承)하여 메시아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로마의 속박(束縛)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救援)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救援)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아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束縛)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救援)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救援)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句節)에서의 ‘구원(救援)’은 보다 본질적(本質的)인 구원(救援), 즉 죄악(罪惡)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救援)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罪惡)은, 비록 항상(恒常) 직접적(直接的)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災難)들의 근본적(根本的)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新約)에서 주로 소개(紹介)하고 있는 ‘구원(救援)’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完成)시키게 될 포괄적(包括的)이고도 궁극적(窮極的)인 구원(救援)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마 1:21, 만나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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