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전력을 다해 싸움(질문, 대답, 설명) 08/-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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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7-29 19:22 조회5,481회 댓글0건본문
제6과 전력을 다해 싸움
(8월 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6분)
연구 범위: 요 16:5~15, 골 1:28, 29, 벧전 1:13, 마 5:29, 창 32
기억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남녀 두 사람이 함께 토크쇼에 출연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비극적으로 잃은 사람들이었다. 여자 출연자는 20년 전에 아들이 살해되는 일을 겪은 후로 지금까지 마음 속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 출연자는 전혀 달랐다. 그 사람은 몇 해 전 자신의 딸을 죽인 테러리스트를 용서했던 경험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상처를 치유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남자는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치유를 가져다주실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르게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극심한 시련을 통과하면서도 거기에 완전히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성숙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영적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죄 그리고 자아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의지와 의지력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떻게 하면 감정이 우리의 결정을 지배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시련을 당할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하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시련을 견디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단호한 결심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로 시련을 견뎌낸다.
TMI 위로
2.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요 16:5~15)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3.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노력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골 1:28, 29)
※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했다.
4.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했던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창 3:6, 삼하 11:3,4)
※ 태초의 여자와 다윗이 밧세바를 봤을 때의 경험.
5. 마태복음 5:29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 죄의 유혹은 지체를 자르는 것과 같은 결단으로 베어버리라는 의미.
6. 예수님과 씨름했던 야곱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요?(창 32장)
※ 인내로 주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인정받는 것이다.
결론
성령님께서는 죄를 보여주실 수는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회개하도록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에 힘입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단호한 선택과 인내를 통해 시련을 극복한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7월 31일(일) 진리의 영
“하나님, 저를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변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우리 삶에 역사하기를 기도하지만, 우리의 삶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인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그리고 값없이 주시기 원하시는 무한한 초자연적 자원들을 가지고 계심을 안다. 우리는 그 모든 축복을 누리기 원하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능력만큼 변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계시지만,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6:5~15을 읽어보라.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요 16:13)이라고 부르신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는가?
[요16:5~1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답: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실 수는 있지만, 우리를 회개 시키실 수는 없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보여주실 수는 있지만, 그 진리를 믿고 순종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으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주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강요하셨다면 우리는 자유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조종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비난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대쟁투에서 부정행위를 하셨다고 고발했을 것이다. 하늘에서 대쟁투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탄 또는 어떤 천사에게도 당신의 선하고 의로우심을 믿도록 강제하거나, 회개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대쟁투가 에덴동산으로 옮겨왔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에 관한 진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을 뿐,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하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죄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보여준 것을 바탕으로, 너는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
우리가 시련 가운데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때때로 순종하지 않았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련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런 상황들 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의식적으로 회개와 순종의 문을 열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
<묵상>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시련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도록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답: 회개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 와 자유선택에 관한 신앙이 대단한 것 같다. 이런 신앙에 맹점이 있다는 것이 나의 깨달음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와 자유 선택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우리의 자유의지 자유선택은 창조주의 선택 안에 있다. 창조주의 선택을 떠나서 우리는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할 것도 없다. 창조주의 의지를 떠나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있게 하신 범위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자유선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미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무의식은 창조주께서 선택해 놓은 것 안에서 선택과 의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잠재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서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을 두시고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다. 이 두 가지 제시하신 것을 벗어나는 선택이나 의지 행사를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과 생명을 두신 것을 숙고 하고 우리에게 주신 사고를 활용해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은 창조주께서 선택해 놓은 것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아주 제한된 선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도 성령께서 역사하심에 힘입어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인 인간의 한계다.
<교훈>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회개와 순종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적용>
그대는 성령님의 음성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대의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8월 1일(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
그대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태한 생활 속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인생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하기 원한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골로새서 1:28, 29을 읽어보라. 비록 바울이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인간의 노력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참조, 신 4:4, 눅 13:24, 고전 9:25, 히 12:4).
[골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신4: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히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답: 바울 자신도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고백했다.
골로새서 1:29에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 바울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이해가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고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수고”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피곤하여지다,’ 혹은 ‘지칠 때까지 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특별히 운동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한편, 어떤 언어에서 “수고”라는 단어는 ‘고통당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운동 선수가 승리를 위해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 새로운 개념을 추가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능력으로 힘써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사역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비록 그의 사역이 바울 본인의 노력과 정진을 분명 요구했지만,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말한 이 관계는 더 적게 노력하고 더 많이 얻기 원하는 사고 방식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있기 때문에 특히 의미심장하다. 교회 안의 어떤 전도자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절반의 진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은 그저 편히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것이라는 식의 결론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
참된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믿고 구하는 자의 삶에 꼭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답: 믿음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이 활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믿음은 신자 속에 생명의 동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가 말한 대로 바울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역사에 거역하지 않고 주시는 힘을 다하여 수고했다고 고백한다. 이것을 갈라디아 2:20에는 좀더 구체적을 표현했다. 바울이 사는 것은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 삶이 자기의 삶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이 그의 활동의 동력이라는 말이다. 에스겔 37장에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심히 마른 뼈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뼈들을 향하여 예언하라고 명하셨고 에스겔은 순종하자 뼈들이 움직여서 제자리를 찾아 맞추어지고 살이 차고 가죽이 입혀져서 온전한 사람 모양이 되었으나 동력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 일어선다. 그들이 사람 모양을 완전히 갖추었지만 동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냥 시체일 뿐이다. 생명의 성령께서 신자의 동력이 되지 않으면 환상의 골짜기의 뼈들이 사람 모양을 다 이루어 그대로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활동할 수 없다. 힘을 다하여 수고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가 노력해서 무엇을 이룬다고 믿는다. 맞는 말인데 틀린 말이다. 이런 경우가 가장 어렵고 스스로 속는 길이다. 우리에게 동력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생명이다. 이 생명이 날로 더 풍성하게 되는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교훈>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계발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품성은 아무런 노력 없이 계발되는 것이 아니다.
8월 2일(화) 훈련된 의지
인간 의지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느낌(feeling)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감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사진과 음악의 홍수 속에,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정욕과 같은 느낌을 유도하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기분이지?” “오늘 뭐하고 싶은 기분이지?” “이 물건 사고 싶은 기분인가?” 즉, 어느덧 ‘기분’이 우리의 의사 결정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다. 감정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무언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올바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감정은 우리를 속일 수 있으며(렘 17:9), 사실에 대한 그릇된 심상을 일으킬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이끈다. 또한,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혹독한 시련에 빠질 수도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신 감정에 휘둘린 선택을 한 사람들의 예를 찾아보라. 그런 선택의 결과는 어떠했는가?(참조, 창 3:6, 삼하 11:3, 4, 갈 2:11, 12).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삼하11:3,4]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갈2:11,12]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답: 태초의 여자는 감각에 의하여 선악과를 먹었다. 결과는 남편을 유혹하는 도구가 되었다. 다윗은 눈의 감각을 따라 밧세바를 범했고,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은 눈을 의식하고 외식(外飾)했다.
베드로전서 1:13을 읽어보라. 베드로는 무엇을 염려하고 있으며, 그의 독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답: 마음을 다스려 근신하라고 당부한다.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이 배의 키와 같이 우리의 몸을 제어한다고 이해했다. 마음의 통제력을 제해버리면,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치는 감정에 이끌리게 된다.
좁은 길을 따라 목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생각해 보라. 길을 따라 걷다보면 각기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여러 길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길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또 어떤 길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과 욕망에 호소하고 유혹한다. 만약 그러한 길들 중 하나를 택한다면 우리는 정로(正路)에서 벗어나게 되고 다시 돌이키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묵상>
잠언 4:23, 16:32, 25:28, 28:26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기별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지키라고 권고하였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라고 교훈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할 때 올바른 선택을 통해 우리 앞에 닥친 시련들 또한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감정대로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증언에도 이런 교훈이 많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은 아는 대로 해는 것보다 느끼는 대로 하는 것이 쉽다. 뜨겁다고 느끼면 거기 손을 대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의 아홉가지 성질,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다 감성에 관한 말이다. 이것은 지성에 관한 표현이 아니다. 인간의 뇌 구조도 중추 뇌가 감성 뇌이다. 노의 중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전두엽이 지성을 주장하는 부위라고 한다. 중앙에 자리 잡은 것이 감성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감성 자체가 변화되어야 한다. 치매를 앓게 되면 지성은 활동을 못한다. 그는 감성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건전할 때는 지성으로 감성과 의지를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면 지성은 쓸모없는 것이다. 성품 변화라는 것은 감성이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역사로 감성이 바뀌어야 한다. 지성이 마비되어도 감성 자체가 성령의 열매의 성질이 나타나도록 되었을 때 성품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더욱 굴복하고 더욱 말씀에 굳게서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 대신 훈련된 의지를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바른 선택을 통해 정로를 따라가야 한다.
8월 3일(수) 단호한 선택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위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생각해 보라. 그 말씀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답: 악한 것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교훈이다.
단호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생애를 힘들게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깜짝 놀라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도 멀리 떠나 왔을까?”하고 묻는다.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한 걸음 한걸음 나도 모르게 떠나온 것이다.
마태복음 5:29, 30을 읽어보라. 예수님께서는 성적인 죄악이라는 문맥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칙은 다른 죄에도 적용된다. 그 원칙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점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문자 그대로 행동하라는 말인가?
답: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교훈이다(살전5:22). 악한 것은 지체를 잘라내는 결단으로 물리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신체를 해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마음을 제어함으로써 우리의 몸도 제어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우리 삶에서 죄 된 성향을 제거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역사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을 포기하게 하는 단호한 선택을 요구하신다. 이 얼마나 극심한 시련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유혹의 힘은 더 약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주변의 수많은 잡음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시기 위해 시련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시련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계획으로 되돌아가는, 단호한 결정을 하도록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묵상>
우리 주변에 가득한 죄와의 싸움에서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답: 죄의 유혹과 악한 생각은 지체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결단으로 끊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지경까지 갈 수 있다. 이런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시련을 허락해서 자기가 있는 자리를 알게 하신다.
<부가설명>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은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일 수 있다. 성도들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손을 거두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자체가 안전하고 평안한 세상이 아니다. 위험하고 고통이 있는 환경이다. 사람이 이런 정도로 살아가는 것은 아직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로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거역하면 그 손기를 조금씩 거두신다. 환난과 고통이 조금씩 나타난다. 아마도 코로나 19 같는 것도 세상이 그런 것이 생기도록 걸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내리는 재앙은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이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6:19). 신자가 시험과 시련과 환난에 빠지는 것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받는 것이 유익이라고 고백하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으로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사는 길에 돌아온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단호한 실천을 요구하시는데 이러한 때는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깨달아야 한다.
8월 4일(목) 인내가 필요함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한 이야기를 읽어보라(창 32장). 이 이야기는 우리가 큰 낙담 중에서도 인내해야 함에 대해 어떻게 말해 주고 있는가?(질문에 답하기 전에 야곱이 처해 있던 전체적인 상황을 떠올려 보라.)
답: 야곱은 부모 집을 떠날 때부터 20년 세월을 주님의 받아주심을 바라면서 고통의 세월을 인내로 견디었다. 이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깨닫고 그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의지를 발휘한다. 하지만 곤궁에 처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붙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힘 중에 하나는 바로 인내이다. 인내는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능력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인내의 가장 훌륭한 표본 중 하나는 야곱이다. 야곱은 여러 해 전 장자권을 취하기 위해 형 에서와 아버지를 속였다(창 27장). 그 후로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는 에서를 피해 도망 다녔다. 비록 그는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지만(창 28장), 여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야곱은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바 되었다는 확신을 갖기 원했으며, 수년 전에 그에게 주어진 약속이 여전히 참됨을 확인하고 싶었다. 야곱이 사실 예수님이었던 존재와 씨름하는 동안 환도뼈가 탈구(脫臼)되고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싸우는 대신에 무조건 매달렸다. 야곱은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 축복에 대한 보증을 받을 때까지 예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창 32:26).
야곱은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께 끝까지 매달렸고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환도뼈’를 탈구시키시고, 고통 중에서도 그분께 매달리라고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고통스러운 상처가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하셨다. 야곱은 형을 만났을 때 여전히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약점처럼 보였으나, 야곱에게 그 상처는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묵상>
히브리서 10:36과 요한계시록 14:12을 읽어보십시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재림 성도들에게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답: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는 고통이 따를 수 있다. 그것을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부가설명> 인내는 소망을 이루는 수단이다.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전13:13). 그런데 데살로니가전 1:3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이 생활에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설명했다. 믿음에는 역사 곧 행함이 있고 사랑에는 봉사의 수고가 있으며 소망에는 이루기까지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우리의 소망인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때까지 이 세상 고통스러운 생활을 인내로 이겨야 한다. 인내가 없이는 기다리는 지루함과 또 그 기간에 닥치는 환난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소망을 버리게 된다. 예수께서 하신 약속은 비록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6~39). 인내하는 기간에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봉사하며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복스러운 소망이 현실이 될 때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온 몸을 휩쌀 것이다. 아멘.
<교훈>
야곱은 고통 중에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림으로써 그분의 복을 받을 수 있었다. 고통의 순간 우리에게도 야곱의 인내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8월 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195~203, ‘씨름하던 밤’, <정로의 계단> 43~48, ‘헌신’을 읽어보라.
“사람의 품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의지력은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탄은 언제나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역사함으로 사람의 완전한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교회증언, 5권, 515).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아야 하고 자기 속에 이룩될 큰 변화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열렬하고 꾸준한 기도와 노력으로 분기해야 한다. 그릇된 습관과 행습은 떨쳐버려야 한다. 이 같은 잘못들을 시정하고 바른 원칙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결정적인 노력만이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 하도록 능력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까닭에 그들이 마땅히 차지할 수 있는 지위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엄격한 정신적 및 도덕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그들의 노력과 결합시키심으로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24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의지력이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는가? 예수님의 품성에 집중함으로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고 잘 이해할 때 조금 가능할 것이다.
2.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보라(마 26:36~42).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예수님 자신의 감정과 바람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주신 잔을 면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하나니의 뜻대로 되라고 기도했다. 그분은 그 잔을 마셨다.
3. 우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도록 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위험을 보다 잘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
※ 사회에 일상이 된 생활습관과 사회적 불문율들이다. 또 문화적 유행도 한몫한다. 온 사회가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면 왕따가 되기에 참기가 쉽지 않다.
4.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간 사람이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다시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격려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가?
※ 방문과 그들의 필요를 대가 없이 공급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친하게 지내는 방법을 모색해서 함께 친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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