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극심한 시련(질문, 대답, 설명) 07/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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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7-22 14:08 조회5,654회 댓글0건본문
제5과 극심한 시련
(7월 3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3분)
연구 범위: 창 22, 호 2:1~12, 욥 1:6~2:10, 고후 11:23~29, 사 43:1~7.
기억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저명한 그리스도인 작가 루이스(C. S. Lewis)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닥친 큰 위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론은 ‘결국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하고 오해하는 것이다”(C. S. 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6, 7).
상황들이 참으로 고통스럽게 전개될 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해 버린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관한 견해를 바꾸고자 하는 유혹을 받으며 그분에 관한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얼마만큼의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 아들의 형상”(롬 8:29)으로 ‘꼴짓는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련을 감당하게 하실 것인가?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시는가?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 대로 ‘꼴짓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오해를 감당하실 것인가?
*학습 목표
- 깨닫기
극심한 시련 가운데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는다.
- 느끼기
시련 가운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감사한다.
- 행하기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의 이유와 목적을 온전히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간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22:1, 2)
※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확고한 믿음에 서게 하고 구주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께로 되돌리시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호 2:1~12)
※ 가시로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길을 막고 생활고를 겪도록 하신다.
4. 욥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욥 1:20, 21)
※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경배하였다.
5. 바울이 시련 중에도 끝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고후 1:10, 11)
※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고 과거에 이끄신 경험으로 신뢰했다.
6. 이사야 43:1~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 물과 불길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건지시면 구원하신다는 약속.
결론
극심한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더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늘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시련을 허락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7월 24일(일) 아브라함의 시련
창세기 22장을 읽어보라.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느꼈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가? 그리고 설령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아들이기로 한다고 할지라도 그 아들이 없어진다면 그를 후사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아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희생을 요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면, 이와 같은 명령의 목적은 무엇이었겠는가?
답: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인데, 그 복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지를 믿음의 조상 되는 아브라함이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나 그 시점은 무계획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시점은 아브라함이 가장 깊은 번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노령의 짐이 그를 짓눌러서 그가 걱정과 수고에서 쉬기를 바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혹독한 시험이었던 당신의 마지막 시험을 보류하셨다”(부조와 선지자, 147). 이것은 하나님의 잔인한 시험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무서운 시련의 날 동안 그가 겪은 고통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허락되었다”(부조와 선지자, 154).
이것은 하나의 시험이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마무리 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시는 어떤 일을 우리에게 명령할 때가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결코 도착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어떤 곳으로 가라고 명령할 때가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결과가 아니라 새롭게 꼴지어 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경험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지시를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여기고 무시해 버렸다면 이와 같은 깨달음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생존하고 배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묵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히11:17~19).
<부가설명> 아브라함이 이 지시를 받았을 때 심정을 우리는 짐작할 수도 없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상에서 늘 하나님과 친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잘 알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분의 말씀을 의심할 수 없었다. 22:2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 의하면 여기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씀을 강조적으로 하셨다. 아브라함의 애정이 독자 이삭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그런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의 실제적으로 또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종하였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롬4:17, 히11:17~19).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마친 후에 22:12에서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셔서 아브라함의 애정이 이삭보다 하나님께 초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여기에는 2절에 ‘네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빠졌다. 우리도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예수님께 집중된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일까?
<교훈>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아브라함에게 가혹하게 들렸을지 모르나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을 미리 보았다.
7월 25일(월) 제멋대로인 이스라엘
호세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호세아가 처한 상황은 매우 당황스럽다. 그의 아내 고멜은 집을 나가 다른 남자들과 더불어 자식들을 낳았다. 비록 그녀가 혼인 관계에 불충실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아내를 다시 데려와서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 주라고 하신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관한 비유로 주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범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들을 보라!
호세아 2:1~12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께로 되돌리시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가? 이와 같은 경험들이 어떻게 느껴졌겠는가?
[호세아2:2,3]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 논쟁하시겟다고 하셨다. 즉 논리로 설득시키는 방법이다.
[호세아 2:5~7]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 가시로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모하게 하실 것이다.
[호세아2:8,9]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빼앗아서 그들이 우상숭배할 물건이 없도록 하신다.
[호세아2: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 그의 애인 앞에 그의 수치를 드러내어 애인이 그를 버리도록 할 것이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고난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걷게 하시겠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자 하실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 말해 준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스라엘이 그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길이 날카로운 가시로 인해 막히거나, 담으로 둘러싸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호 2:6) ‘과연 이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들이 채워지지 않고 어려움을 마주할 때(호 2:9, 10), 우리의 아버지께서 모든 상황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언제나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 계신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실 때에도 그분에 대해 오해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알지만, 그분이 하시는 일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잔인하고 무정하며 무관심한 분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의 언약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 항상 일하고 계신다.
<묵상>
호세아 2:14~23을 읽어보라. 이 말씀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호2:14~23]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답: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다함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멋대로 살려고 한다. 유혹하는 죄의 세력은 강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직은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혹하는 세력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접근할 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쉽게 내응하는 반응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럴 때 성령께서 가시로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갈 수 없도록 하신다. 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시련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아브라함의 사랑이 이삭에게 집중되어서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쏠리는 것을 아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시련을 주셔서 그의 사랑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셨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는 신앙생활 환경이 중세 같지는 않다. 나타난 것은 그렇다. 그러자 사탄은 사데교회 현상으로 교회를 교란한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은 교회에 시련을 허락하실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집회 참석하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고 집에서 TV를 켜놓고 온라인 예배를 할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모이기를 귀찮아하는 풍조가 교회에 스믈스믈 기어들어 왔다. 하나님께서 어떻 조치를 하셔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 영적 간음을 범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끝까지 사랑으로 이끄셨다.
7월 26일(화)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 1: 경배
욥기 1:6~2:10을 읽어보라. 욥이 고통을 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놀라운 것은, 천사들이 하나님을 뵈러 올 때,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자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욥 1:7).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욥 1:8). 이 질문 자체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하지만 그 질문을 누가 했는가가 놀랍다. 욥을 시험의 대상으로 지목한 이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어떤 일이 이어질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주목하게 하신다. 지상에 살고 있는 욥은 그에게 닥쳐올 시련이 얼마나 극심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욥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인 것이 분명하지만, 사탄이 욥의 재산과 자녀들 그리고 그의 건강까지 공격하도록 허락하신 분은 분명 하나님이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욥에게 그런 고통을 주도록 허용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이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실 수 있는가? 이것은 특별한 경우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데 있어 오늘날에도 사용하시는 방법인가?
욥기 1:20, 21에서 욥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욥1:20,21]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답: 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했다.
이러한 고통에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다. 억울한 마음으로 노여워하면서, 하나님을 잔혹한 분으로 믿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분으로 믿으며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고, 하나님을 더욱 더 굳세게 붙잡을 수도 있다. 욥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무르며 그분을 경배하면서 그에게 닥친 재난에 대처했다.
우리는 욥기 1:20, 21에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도움 받을 수 있는 경배에 관한 세 가지 측면을 보게 된다. 첫째, 욥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아무것도 주장할 것이 없음을 인정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
둘째, 욥은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것을 주장하고 계심을 인정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셋째, 욥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묵상>
고난을 대하는 욥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삶에서 경험하는 시련들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답: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을 절대로 믿는 삶을 살라는 교훈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버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부가설명> 욥의 믿음은 대단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칭찬할 만하다. 그래서 세상의 통치자는 자기라고 주장하는 사탄에게 욥을 지명하여 공격해보라고 한 것이다. 욥은 잘 견디었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욥의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었다. 앞에 어디서 말했듯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재앙을 당할까 늘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았다(욥3:25). 그의 믿음은 평안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욥에게 이런 시련을 통하여 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셨다. 38장부터 욥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침내 욥에게 하나님의 엄위하심보다는 인자하심을 바라보게 하였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마음 깊이에는 그분을 무서운 분으로 여기는 생각이 잠재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11:22 개역)라고 가르쳐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에 거해야 한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를 바라보고 산 사람이었다. 진정으로 사랑의 하나님인 줄 믿으면 인자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구원을 감사함으로 충성하는 믿음으로 경배하며 즐겁게 신앙생활 하게 될 것이다.
<교훈>
욥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도 욥처럼 고통 중에서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
7월 27일(수) 시련을 통과하는 방법 2: 소망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 9).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도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경험했다. 바울은 환난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렬히 하나님을 찬양했다. 고린도후서 11:23~29에 기록된 그가 경험한 환난의 목록을 읽어보라. 이제 고린도후서 1:3~11을 읽어보라.
고린도후서 1:4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받는 이유를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고후 1:4)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고난당하는 일이 어떻게 남을 섬길 수 있는 조건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이런 가능성에 더 민감해질 수 있는가?
[고후1:3~11]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답: 자기의 고난의 경험은 그런 상태에 직면한 사람에게 위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상처 입은 자들을 돌보기 원하신다. 이 말은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먼저 그러한 상처를 경험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론이 아닌 우리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원칙이다(참조, 히 4:15).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우리의 동정심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절망 중에 있을 때에라도 아버지께서 여전히 위로와 긍휼로써 개입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으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의지하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고후 1:9)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복음을 증거하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겪을 때라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자기를 구해내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끝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능력의 비결이 고린도후서 1:10, 11에 세 가지로 진술되어 있다. 첫째, 지난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바울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고후 1:10). 둘째, 바울 자신이 하나님께만 온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셋째, 성도의 끊임없는 중보가 있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
<묵상>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지날 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바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답: 고난 중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
<부가설명> 다윗은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찬양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유익을 얻도록 고난을 허락하신다. 이스라엘이 평안한 때에 하나님 섬기기를 배우지 못했을 때 전쟁과 포로라는 고난을 통하여 배우도록 하셨다. 그래도 배우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 축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 그들이 평안한 때에 올바른 신앙을 배워서 실천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고난을 점점 더하신다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도 끝내 배우지 못하면 망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동안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사는 길을 확실히 걷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자주 육신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넘어지는 것은 고난을 동반한다. 무릎을 다치든지 피부가 긁히든지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곧 일어나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올바로 잘 걷도록 다시 마음을 다지고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과 일어나는 방법을 경험으로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7월 28일(목) 극심한 시련
지금까지 우리는 이번 기 교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여러 가지 시련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시련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엄격한 감독관처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시련을 볼 때 그분이 정말 우리를 돌보시는지 모르겠다. 그분은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분처럼 보인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부여하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죄악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에 가면, 보다 더 자세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전 4:5, 13:12). 그러나 상황이 좋게 느껴지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돌보심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
이사야 43:1~7을 읽어보라. 2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물과 불 가운데로 지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극심한 위험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지만 아마도 그들이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야 했던 두려운 순간을 거쳐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신 사건을 암시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순탄한 길로만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편 23편의 목자와 같이 힘든 일이 닥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에 관해 배운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극심한 시련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파괴하기 위함이다. 둘째, 극심한 시련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된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함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언제나 돌보신다. 그분은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이사야 43:1~7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물과 불 가운데로 지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각기 다른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들을 기록해 보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가? 그대는 어떤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싶은가?
[사43:1~7]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답: 물이 침몰하지 못하게 하시고 불이 사르지 못하게 하신다. 그분은 구원자이시다. 그러나 물과 불가운데 지나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신다. 그것은 연단한 후에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묵상>
다음의 성경절들이 하나님의 행동과 품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시 103:13, 14, 마 28:20, 고전 10:13, 벧전 1:7)
[시103:13,14]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답: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셔서 언제나 도우심과 이김의 능력이 되어 곁에 계신다.
<부가설명> 시련과 고난은 연단의 도구이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녀들을 징계하신다. 하물며 영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시겠는가(히12:6~10). 징계에 관하여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환경과 이런 환경에 살아가는 우리의 체질에 관하여 항상 생각해야 바른 이해에 이른다. 우리 환경은 죄와 사망의 환경이고 우리 몸은 죄와 사망의 몸이다(롬6:6, 7:24). 죄와 사망의 세상에 거주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몸은 세상과 친화력이 있게 마련이다. 바울은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아 죄 아래로 끌고 간다고 탄식했다(롬7:23).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고난을 허락하셔서 죄와 사망의 환경에서도 의와 생명의 승리를 얻는 체질이 되도록 단련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라고 말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겪게 하시는 이유다. 순응하고 순금같이 나오도록 굴복하는 믿음으로 살자.
<교훈>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시련이 닥치면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이다.
7월 2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145~155, ‘믿음의 시험’, <교회증언 5권> 315~319, ‘여호와를 찬양하라’를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난의 풀무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순금에서 찌꺼기가 제거되는 것은 풀무의 열기를 통해서이다. 예수께서는 그 시험을 주목하신다. 그분께서는 그것이 당신의 사랑의 광채를 반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품성의 귀금속을 정련하기 위하여 필요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고 엄격한 시험으로써 당신의 종들을 훈련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어떤 사람들을 보시고 이들을 시련에 처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그들의 품성을 시험하며, 그들 자신들은 알지 못했던 결점과 약점들을 드러내는 위치로 그들을 이끄신다. … 그분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시고 당신을 의지하도록 가르치신다. … 이리하여 그분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들의 능력이 그들에게 주어진 그 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들은 교육과 연단과 훈련을 받으며 준비된다”(부조와 선지자, 129, 130).
“만일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가 시련을 견디도록 부름을 받는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쓴 잔을 마시되, 그것을 우리의 입술에 대주는 것은 아버지의 손임을 기억하자. 낮에는 물론이요 흑암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도록 하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을 믿을 수 있지 않은가? … 갈바리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나타낸 사랑을 기억할 때, 고통의 밤에서라도 어찌 우리가 감사의 찬양으로 마음과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교회증언 5권, 31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아브라함이 겪었던 정도는 아닐지라도 힘든 시간을 겪었던 경험을 함께 나눠보라. 그 성공 또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각각 경험을 서로 이야기해서 위로와 용기가 되게 하자.
2.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의 24시간을 살펴보라. 예수님께서는 어떤 극심한 시험에 직면하셨는가? 그분은 어떻게 견디셨는가? 그분의 모본으로부터 우리 삶에 적용할 만한 어떤 원칙을 발견하게 되는가?
※ 자기를 팔 사람을 알고도 용납하셨고 피땀 흘리는 기도의 시간을 보냈고 지독한 고문을 당하셨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여 견시셨다.
3. 우리 자신의 고난의 경험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주제를 가지고 토의해 보라. 이를 실천하는 가운데 마주할 수 있는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서로 토의해보자. 다만 다른 사람의 고난이 반드시 내가 받고 견딘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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