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제련자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질문, 대답, 설명) 07/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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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7-15 15:43 조회6,024회 댓글0건본문
제4과 제련자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7월 2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8분)
연구 범위: 마 5:16, 고전 4:9, 엡 3:10, 욥 23:1~10, 마 25:1~12, 단 12:1~10, 엡 4:11~16
기억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은 어린이들을 인솔하여 인도에 있는 전통 금 제련소를 방문했다. 숯불이 피어오르는 한 가운데 그릇 모양의 기와가 놓여 있었다. 그 기와에는 소금과 타마린드 열매와 벽돌 가루를 혼합해 놓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 혼합물 속에 제련할 금이 있었다. 불길이 그 혼합물을 태우는 동안 금이 정제(精製)되는 것이었다. 금 제련공은 도가니 집게로 금을 꺼내보고 충분히 정제되지 않았으면 새로운 혼합물과 함께 다시 불 속에 집어넣었다. 금을 다시 집어넣을 때마다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지켜보던 아이들이 물었다. “순금이 다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제련공이 대답했다. “금에 내 얼굴이 비치면 다 된 것이란다”(에이미 카마이클, Learning of God, 5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금과 같이 제련하시며,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목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용광로를 통과해야 한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정결케 하는 과정에서 고난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는 대쟁투의 맥락에서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계발하게 하심을 깨닫는다.
- 느끼기
우리의 품성을 정결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우시는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회들을 활용하여 변화된 모습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TMI 위로
2.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쟁투의 궁극적인 목적인 무엇입니까?(롬 8:29)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이르는 것이다.
3. 욥은 그에게 닥쳐온 예상치 못한 시험에 어떻게 대응했습니까?(욥 23:1~10)
※ 순금처럼 나오게 될 것을 믿음으로 인내로 견디었다.
4.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마 25:1~12, 25:31~46)
※ 성령의 역사로 생활 일상이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다.
5. 다니엘 12:1~10에 나타나는 구원 받을 의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연단을 받아 자기를 희게 하며 지혜를 얻고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이끄는 것이다.
6. 바울은 공동체의 역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엡 4:11~16)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 서로 협력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늘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품성을 계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그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시기 위해 때로 시련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연단의 과정을 잘 거치면 지혜 있는 자들로서 때를 분별하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개인뿐만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힘써야 합니다.
7월 17일(일) 그분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지만(창 1:27), 죄로 인해 그 형상이 훼손되고 말았다.
우리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 흔적들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는가?
[롬3:10~19]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답: 위의 성구가 그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것은 로마 1:21~32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타락했다(롬 3:10~19).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의 완벽한 모습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신다. 오늘의 본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이 말씀은, 자신의 삶을 성령님께 바치는 자들에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 8:29)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이 온전케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시대의 소망, 671).
위의 인용구에서 엘렌 G. 화잇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참조, 욥 1, 마 5:16, 고전 4:9, 엡 3:10)
[욥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전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답: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지금 우주적인 드라마의 한 가운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싸움은 여러 모양과 형태로 전개된다. 비록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이 드라마에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으며,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묵상> 고린도전서 4:9을 묵상해 보십시오. 어떤 자세로 우리 앞에 놓인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까요?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우리의 삶 가운데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대쟁투의 현장은 온 우주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 싸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싸울 때 승리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겠습니다.
<부가설명> 저자는 인류는 죄로 인해 타락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교회가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일종의 교리다. 이 표현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성경의 사상을 나타내는 말도 아니다. 이런 개념 때문에 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오해하는 발판을 놓은 것 같다. 죄로 인해 타락한 것이 아니고 죄가 바로 타락 그 자체다. 성경 창세기 2장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 그 실과를 먹는 것이 죄고 그 결과가 사망인 것이 맞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것을 먹는 것과 죽는 것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와 사망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은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17절)이라고 했으며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21절)이라고 하여 죄와 사망을 동격으로 계시하였다. 인간은 죄의 존재가 되었는데 그것은 곧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 결과로 사람의 존재와 삶이 썩어져가는 구습으로 나타난다(엡4:22). 이런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들, 곧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했다는 말은 개인적 예정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예수님의 형상으로 출생한다는 것을 예정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것이고 이것이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다.
<교훈>
인간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대쟁투 가운데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7월 18일(월) 연단하는 불 가운데서의 믿음
전쟁에 참여하긴 했지만, 앞에 있는 군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히 11:27)를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한다.
욥기 23:1~10을 읽어보라. 욥의 투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시에, 그에게 닥쳐온 시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어떻게 대응하는가?
[욥23:1~ 10]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답: 욥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끝까지 잘 지켰다.
욥은 자신에게 닥쳐온 무서운 시련 중에서도 여호와를 신뢰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하나님을 굳게 붙잡을 때 언젠가는 순금같이 나올 것을 알았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욥이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감춰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연단하는 불을 견뎌냈다.
그대는 불을 무서워하는가? 주어진 환경이 만들어내는 불과 같은 고난을 두려워하는가? 어쩌면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삶에 불어 닥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직업이나 새로운 생활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상상 이상으로 힘겨울 수도 있다. 직장에서 혹은 심지어 가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 육신의 질병이나 재정적인 손실이 밀려올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일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정결케 하심으로 우리의 품성 속에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실 수 있으시다.
순금으로 나오게 되리라는 것은 욥에게 큰 동기가 되었으며, 그 모든 고난을 통과하는 동안 그를 이끌어 주고 그의 눈을 고정하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이 모든 고통과 고난을 정결케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품성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말해 준다. 당시 욥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 있었지만, 그는 이러한 시련이 자신을 연단해 주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묵상>
욥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닥쳐온 예상치 못한 시험을 견디게 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단련을 받은 후에 수금처럼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욥을 의인으로 계시하고 있다. 기록된 대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분이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도덕론적이었다. 즉 사람이 올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옳지 않게 살면 재앙을 내리신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재앙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제단쌓고 의롭게 살겨고 엄청나게 노력하였다. 늘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것이다. 그런데 재앙을 받았다. 그러니까 재앙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재앙을 당했으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라고 탄식하고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욥31;23)라고 했다. 이 말을 보면 그는 재앙을 당할까봐 항상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재앙을 받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그렇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다. 그의 이런 삶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마땅히 복을 주셔야 하는 삶이라고 당당히 생각한 것이다. 욥이 선하게 살았으니 하나님은 자기에게 복을 주실 의무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욥의 죄였다. 욥의 세 친구는 욥보다 더 지독한 도덕론적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친히 욥에게 나타나셔서 욥의 도덕적 삶에 관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창조와 섭리에 관한 진리만 말씀하셨다. 욥이 선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존재하게 하시고 그가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피조물로 그의 주위를 둘러놓으셨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나타내신 것이다. 욥은 시련을 통하여 비로소 이것을 깨닫고 회개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욥이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므로 비로소 바른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교훈>
욥은 자신에게 닥치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연단의 과정으로 깨닫고 순금같이 나오는 날까지 참고 견디며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
7월 19일(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에 열 처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 등 당신의 마지막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신속한 재림을 알리는 징조들과 함께 이 비유들은 오늘날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열 처녀의 비유(마 25:1~12)에 나오는 기름을 성령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엘렌 G. 화잇은 이에 동의할 뿐 아니라, 이 기름은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 얻어 줄 수 없는 품성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열 처녀의 비유를 읽어보라. 기름을 성령의 상징으로 볼 때와 그리스도를 닮은 품성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볼 때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기름이 각기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할 때, 이 비유를 통해 그대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되는가?
성령: 거듭난 생명을 주시는 것.
품성: 성령의 역사로 거듭났을 때 나타는 결과.
마태복음 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읽어보라.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답: 성령으로 새 생명을 받은 새사람이 일상으로 나타난 생활상태를 통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하신다.
왕이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 그들의 행위 혹은 그들의 품성을 기초로 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비록 예수께서는 여기서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계시지 않지만,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품성 계발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그들의 삶과 품성을 통해 그 구원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보게 된다.
<묵상>
품성 변화가 우리의 구원에 있어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지 좀 더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오.
답: 품성은 진정으로 거듭날 때 성령으로 주시는 새 생명의 활동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이 삶의 모습은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보여준다.
“그대들에게는 꼭 수행해야 할 더 큰 일이 있다. 품성을 형성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재능, 모든 신경, 모든 근육,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을 활용하라. 그렇게 할 때에 그대들은 과거에 전혀 본 일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대들을 앞서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02).
<부가설명> 그리스도인 적인 행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생활 태도일 뿐이다.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 2:20에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삶을 살아주시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성경을 가르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현상에 집중한다. 마태 25장 양으로 비유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행한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내하면,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진 것이지, 그렇게 살려고 애쓴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품성이다. 핵심을 내 안에 예수님 생명이 되셔서 나를 살아주시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는 생명이 없는 사람이다. 생명을 사람의 생활 동력이다(요일 5:11,12).
<교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변화된 품성으로 그 구원을 나타내야 한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7월 20일(수) “지혜 있는 자”
어제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있어서 품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살펴보았다. 오늘은 재림의 때에 살아 있을 자들의 품성의 중요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다니엘 12:1~10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어떤 배경에서 주어진 것인가? 지구 역사의 어느 시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그 시기에 살아 있을 하나님의 백성의 품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악인들과 대조하여 볼 때, 의인들에게는 어떤 특성들이 나타나게 될 것인가?(참조, 계 22:11).
[딘12:1~10]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답: 1. 예수님 재림이 가까운 시다. 2. 역사의 종말 환난의 때와 관련하여 주신 기별. 3. 연단을 받아 스스로 희게 할 것임. 4. 지혜가 있고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함.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역사의 다른 어느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환난의 때가 있을 것이라는 기별이 다니엘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다니엘 12:3, 10에서 그 시기에 살아 있을 의인과 악인에 관한 묘사를 보게 된다. 의인들은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의 시기(단 12:1) 동안에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였으므로(단 12:10) 3절에서 밝게 빛난다. 그와 대조적으로, 여전히 “악을 행하”(단 12:10)는 악인들의 모습에 주목해 보라. 또한, 악인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지만, 의인들은 “지혜 있는 자”들이므로 깨닫는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수학, 과학, 고등 비평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 마지막 사건들, 즉 환난의 때가 전개될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것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환난이 그들을 갑자기 덮치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환난의 시기를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할 때”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악인들은 더욱 완고하여져서 그들의 반역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악을 행한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묵상>
오늘 함께 살펴본 말씀에서 연단과 정결의 과정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떤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희게 할 것이며 지혜를 얻게 하고 사람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처음이요, 나중이며, 최선으로 삼지 않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때, 사탄이 들어와서, 하나님께 드리면 크게 유익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마음을 사탄을 섬기는 데에 쓰게 한다”(화잇 주석, 단 12:10).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우선으로 삼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을 섬기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연단하심을 통해 지혜 있는 자로 든든히 서야겠습니다.
<부가설명> 성경은 지혜의 근본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명철은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잠9:10). 여호와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그의 후손들은 여호와 없이 출생한다. 아담이 여호와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을 출생하는 것이다(엡2:3).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품에서 자라나면 감각적으로 아빠 엄마를 감지하는 것 같은데, 여호와를 감지하지는 못한다.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 하나님 여호와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람되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을 알도록 나타내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지혜를 얻는다. 그러면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말씀대로 생활하는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어떻게 전할는지 성령께서 말씀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역사의 종말에 ‘지혜 있는 자’로 활동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친히 주도하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
<교훈>
지혜 있는 자들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환난의 시기가 임할 것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시기를 연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7월 21일(목) 품성과 공동체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다. “나는 바위, 나는 섬”. 이 노래 가사처럼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가? 또, “글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4:11~16을 읽어보라. 바울은 여기서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엡4:11~16]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답: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각 그리스도인은 그 몸의 지체들이 되어서 제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게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했다. 예수님은 머리이시고, 그분의 백성은 지체들이다. 에베소서 4:13을 보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자라는 경험을 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물론 혼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모욕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시기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처럼 홀로 서는 일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을 둘러싼 핍박 중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렇지만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경험은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함께 일할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혼자 있거나 낯선 사람과 있을 때 친절하기는 쉽다. 그러나 내가 잘 알거나 싫어하는 사람과 있을 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 말은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도 은혜와 친절을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전에 무엇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각각 맡은 기능을 잘 수행하여 전체가 바르게 기능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묵상>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것과 개인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대쟁투의 맥락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은 무엇인가?(참조, 엡 3:10).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답: 개인이 몸된 교회의 모든 지체가 될 수는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드러내는데 개인에게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인이 모여 형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개인은 하나의 지체일뿐이다. 지체로서 건강하고 지체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은 몸 전체를 건강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한 지체만 건강해서 몸 전체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할 수 없다. 각 사람도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한 지체만 고장이 나고 병이 들어도 병든 몸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가 건강하기 위하여서는 지체된 교인 개인마다 건강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한 뜻, 한 생각, 한 행동이 요구된다. 이것이 유기체의 기능이다. 교인이 각각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건강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것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협력하고 뜻을 합하고 마음을 합하고 행동을 합해서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할 때 교인과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며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드러내는 증인이 될 것이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
7월 2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 10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약속하심’, <실물교훈> 405~421, ‘열 처녀’, <각 시대의 대쟁투> 613~634, ‘환난의 때’를 읽어보라.
“품성 건설은 인류에게 맡겨진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로서, 이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의 중요성이 지금처럼 재고되어야 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처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으며, 또한 청년 남녀들이 오늘날처럼 큰 위기에 직면했던 때도 일찍이 없었다”(교육, 225).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간청했으나 얻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위기의 때에 설 수 있는 품성을 계발하지 못함으로 자신을 준비시키지 못한 자들을 상징한다. 그것은 마치 이웃집에 가서 ‘당신의 품성을 좀 나눠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잃어버린 바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자들의 꺼져가는 등잔을 위해 기름을 나눠줄 수 없었다. 품성은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거나 파는 것이 아니라,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은혜의 시기 동안 의로운 품성을 체득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한 사람의 인간 대리자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힘든 경험을 통과하게 하시거나, 크신 교사로부터 교훈을 배움으로써 계발할 수 있는 품성을 거저 나눠주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시련 가운데서 인내를 나타내고 불가능의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을 행사하게 하신다”(엘렌 G. 화잇, 청년지도자, 1896년 1월 16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품성 계발’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대의 삶과 그대의 교회 공동체 속에서 품성 건설은 어느 정도의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 품성계발은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자아를 말씀에 굴복함으로 가능하다.
2. 목요일 교과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공동체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공부했다. 그대가 속해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 믿음의 공동체로서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 교우 각 사람이 대답할 일이다. 오직 기록된 말씀의 원칙을 시행하려는 같은 마음으로 나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3.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품성 계발’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의와 그분의 완전하신 품성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품성을 계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예수님의 완전한 품성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생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잃지 않도록 주님의 품성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것이 품성계발의 정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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