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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한 알의 밀처럼 죽음(질문, 대답, 설명) 09/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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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9-09 13:40 조회5,3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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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한 알의 밀처럼 죽음

(9월 1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6분)

 

연구 범위: 빌 2:5~9, 롬 12:1, 2, 삼상 2:12~3:18, 삼상 13:1~14, 슥 4:1~14

 

기억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예증이다. 첫째, 밀알이 땅에 떨어진다. 줄기에서 떨어진 밀알은 어느 지점에 어떻게 떨어질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을 감싸고 뒤덮는 땅과 흙에 대해서도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둘째, 그 밀알은 기다린다. 땅에 떨어진 밀알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한 알의 밀일 뿐이기에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셋째, 그 밀알이 죽는다. 밀알이 자신의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이 밀 이삭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즉,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 열매 맺는 식물로 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그처럼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복종의 모본을 남겨 주셨는가? 한 알의 밀에 관한 비유가 그대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때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예수님의 모본을 보여주시며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자아를 내려놓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살아간다.

 

TMI 위로

2.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포기하신 것은 무엇일까요?(빌 2:5~9)

※ 자기를 비우셨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은 무엇입니까?(롬 12:1, 2)

※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자기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삼상 2:12~3:18)

※ 마음과 생각이 전혀 다르다. 자기 욕심이 있는 것과 자기를 비운 것이다.

5. 사울의 어떤 행위가 그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습니까?(삼상 13:1~14)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한 것이다. 

6. 스가랴 4:6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 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깨닫게 한다.

 

결론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셔야 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완벽한 모본이 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뜻과 경험을 의지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9월 11일(일) 섬김을 위한 복종

 

빌립보서 2:5~9을 읽어보라. 이 구절에서 우리를 위한 어떤 중요한 기별을 발견할 수 있는가?

[빌2:5~9]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답: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종처럼 섬기시다가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복종하셨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품어야 한다.

 

오늘날의 문화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하도록 부추긴다. 이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때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영원한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도 있다. 이와 같은 포기의 과정은 힘들고 불편하여 시련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행하셨는지 보라(빌 2:5~8).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시기 위해 취하신 세 단계를 묘사한다. 바울은 먼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자리에 서시기 위해 아버지와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빌 2:6, 7). 

예수님께서는 위대하고 영화로운 모습이 아닌 다른 인간들을 위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빌 2:7).

인간의 몸을 쓴 종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평안하고 장수하는 생애를 살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고상하고 영예롭게 죽지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

 

예수님의 이 모본은 우리 삶의 어떤 분야에 본보기가 되는가? 권리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좋은 일이며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는 논리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빌립보서 2:9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답: 사람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다. 인간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풀의 꽃처럼 시드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묵상>

성령님께 지혜 주시기를 구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해 보십시오. “제 가족과 교회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며 살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에 복종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어떤 권리를 제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제가 어디까지 불편함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요?” 

 

답: 가치관이 성경적으로 확립될 때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하다.

 

섬기는 자리 보다 섬김을 받는 자리를 더 위대하게 여기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사는 데서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가설명>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우는 것은 사람의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깊이 생각하면 사람은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다. 죽으면 끝나는 인생을 위해 죽어가는 모든 시간을 욕심과 그것을 성취하려는 투쟁으로 보낸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불행 자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 또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투쟁하고 쟁취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는(딤전6:8)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소위 문명이 발달한 지역의 사람들이 유독 이런 욕망과 투쟁이 많다. 결국 문명은 투쟁문명, 곧 싸움 문명, 전투 문명이다. 그래서 생활전선이라고 한다. ‘전선(戰線)’은 싸움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전투에는 사망이 있다. 세상 문명은 사망문명이다.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이런 정신에 아주 익숙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죽기까지 복종하려고 오셨다. 그것은 싸움없는 세상 생명문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죽음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즉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도록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  가치관을 배우고 실천해서 세상에서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승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교훈>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종으로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모본이 된다.

 

9월 12일(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자아가 죽어야 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찾는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희생할 텐데.” 그러나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한 후에도, 여전히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혼란의 이유가 로마서 12:1, 2에 나타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설명한 후에 중요한 핵심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면, 먼저 희생해야 한다!” 

로마서 12:1, 2을 읽어보라. 바울은 다음의 일들이 일어나면 우리가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분별”(롬 12:2)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올바로 깨닫는다(롬 12:1) 

2.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롬 12:1).

3.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롬 12:2).

오직 새롭게 된 마음만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다. 그런데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분은 죽으셔야만 했다. 

 

나의 삶에서 완전히 죽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를 성령님께 간구하라. 그대가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답: 각자가 대답해보자. 자아가 주님께 굴복해야 한다.

 

우리 삶에 완전히 죽지 않은 부분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시련을 허락하신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바람을 포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 물론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경험은 주님의 고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만,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알아가기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난을 통해, 우리를 그 사귐 속으로 초청하신다”(Quest for Love, 1996년, 182).

 

<묵상>

다시 한 번 로마서 12:1, 2을 읽으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물이 되기 위해 그대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대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자아(自我)다. 주님 안에서 죽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자아를 올바르게 세우라고도 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말씀을 남을 대접하라는 단어에 강조한다. 맞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하 하는 대로’하셨는데, 대접 받고하 히는 존재가 누군가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나’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내’가 없으면 남을 대접하는 ‘나’도 없다. 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잃지 말아야할 제 목숨이 있는데, 그것은 곧 자기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이 크고 둘째 되는 계명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부인해야 할 자기는 아담의 씨로 출생해서 아담 안에서 죽은 옛사람 자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 사람이 창조될 수 없다. 우리가 지켜야할 자아는 새 사람이 된 자아이고 죽어야할 자아는 옛사람이다. 그것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인데, 아담의 씨로 출생한 육체의 생명만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 세상의 욕망이 자아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호흡이 끊어질 때 다 버릴 것을 그렇게 애지중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의식은 어떤가? 이것을 깨닫고 있는가? 물어보자.

 

<교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죽어야 하는데,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할수록 자아를 내려놓는 일이 더 수월해진다.

 

9월 13일(화) 듣고자 하는 마음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삼상 3:10).

 

성령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고도 무시해 버렸던 적이 있는가?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못된 후에야 왜 내가 듣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했던 적이 있는가?

사무엘상에는 여호와의 말씀을 잘 들은 한 소년과, 듣지 않는 두 악한 아들과 늙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악한 길로부터 돌이켜야 했던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무엘상 2:12~3:18에 기록된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가?

 

답: 각각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마음은 이기심과 육욕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로 했다.

 

엘리의 아들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깨달은 후에 그 아들들에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말을 하는 것 이상의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들들은 자신들의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린 사무엘의 모습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가!

설교자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는 하나님의 음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령께서는 그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반응을 기대하며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주의를 빼앗아가는 큰 방해물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 있을 때는, 그와 반대되는 바른 것을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시간 낭비임을 아신다. 이러한 경우에 그분께서는 자주 침묵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충분히 중립적이 되어 그분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순종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신다.”(The Wonderful Spirit-Filled Life, 1992년, 179, 180).

 

<묵상> 

찰스 스탠리가 이야기한 “충분히 중립적이 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대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그대로 하여금 “충분히 중립적이 되어 그분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순종”하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증언의 말씀에도 그런 말씀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수많은 욕구들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데서부터 시작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힘든 일이지만 간절히 구하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우리의 삶을 맡긴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부가설명> “우리 중 아무도 중립적 위치에 설 수는 없다. 우리의 영향은 주님을 위하거나 반대하는 것 중 어느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활동적인 매체가 되거나 아니면 원수의 활동적인 매개체가 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모으거나 흩어 버리는 자가 된다. 진정한 개심은 근본적인 변화이다. 마음의 흐름과 정서의 경향 자체가 바뀌어야 하며 생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되어야 한다”(4T 16.4). 사람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중립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쟁투에서 하나님 편과 그 반대 편에 관해서는 중립적 입장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 편에 있든지, 사탄 편에 있다. 예수님 편에 있지 않는 것은 곧 사탄 편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아담의 씨로 태어날 때부터 사탄 편에 있는 자로 태어난다.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골1;13). 이렇게 옮기지 않으면 그는 사탄에게 속한 자로 있는 것이다. 진정 우리는 누구에게 속한 자인지 수시로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교훈>

성령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사무엘처럼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9월 14일(수) 자신을 의지함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하와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엇이 선하고 바른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지혜가 있다고 믿은 것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대신 우리의 판단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온갖 종류의 문제들을 향한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사울의 이야기는 그가 자기 자신을 의지했으며 그 결과 그의 삶에 비극이 신속하게 찾아왔음을 보여준다. 사무엘은 사울을 하나님의 택하신 왕으로 기름 부었다(삼상 10:1). 그리고 그는 사울에게 특별한 지시를 주었으나(삼상 10:8), 사울은 불순종했다.

 

사무엘상 13:1-14에 기록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어보라. 사울의 어떤 행위가 그를 몰락으로 이끌었는가?

[삼상13:1~14]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2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답: 사울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한 것을 지키지 않고 스스로 제사장의 일을 행했다.

 

사울이 왕이 된 후에 그로 하여금 자기 의존의 길로 빠지게 한 세 단계가 있다. 문제는 이 단계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각 단계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비극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울의 타락이 일어난 순서를 주목해 보라.

1. 사울은 “내가 보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군사들은 흩어지고, 사무엘은 그곳에 없는 것을 보았다(삼상 13:11). 사울은 압박감을 느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기 눈으로 가늠했다.

2. 사울은 ‘보는 것’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 갔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삼상 13:12)이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 그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다.

3. 사울은 ‘말하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옮겨 갔다. 그는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려야겠다고 느꼈다. 사울이 생각한 것이 그의 느낌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일들을 저지르곤 한다. 우리는 인간적 시야에 의지함으로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게 되고, 마침내 인간적인 느낌을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느낌에 따라 행동한다.

 

<묵상>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귓가에 울리고 있었음에도 사울이 너무도 쉽게 자신의 판단을 따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자기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울은 왕이 되었으니 그런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다.

 

<부가설명>인간의 오관은 정확하지 않다. 착시현상도 있고 환청 현상도 있고 감각도 정확하지 않다. 기억력도 그렇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는대로 듣는대로 생각한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울이 그렇게 했다. 그는 정확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그에게 복이 되고 일을 바르게 성취하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의 경향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때때로 시험하신다. 바로 그때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따르는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살동안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행위의 바른 것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엉뚱한 일을 벌릴 때도 그리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이 어떻게 응하겠느냐(마26:54)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다. 그런대도 철저히 기록한 말씀을 의지하여 생활하셨다. 그렇거든 하물며 우리들이랴!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평소에 말씀에 익숙한 삶을 살도록 말씀을 읽고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잠언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라고 지시하였다.

 

<교훈>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대신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고 말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9월 15일(목) 대체물들

 

어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다른 대체물들을 의지하게도 된다. 어떤 이들은 우울감을 느낄 때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간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이들은 배우자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때 친밀감과 재미를 위해 다른 누군가를 찾는다.

우리는 삶에서 겪는 여러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다음에 같은 문제를 마주했을 때 그 문제를 더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도움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우리가 하나님 그분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다른 대체물들에 의지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하나님 대신 의존할 법한 대체물들은 이런 것들이다.

1.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인간의 논리나 과거의 경험을 의지한다.

2. 하나님의 생생하고 거룩한 해결책이 필요한 순간,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문제를 차단해 버린다.

3. 거룩한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한 순간, 우리는 현실로부터 도피함으로 하나님을 피해 버린다.

스가랴는 이런 유혹을 받을 때 정말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준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자 백성들은 곧 성전을 중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이 말씀의 배경을 알기 위해 에스라 4~6장을 읽어보라). 그래서 스가랴는 특별한 기별로 그 사역을 이끌고 있던 스룹바벨을 격려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중건에 대한 반대를 막으시거나, 스룹바벨이 겪고 있던 곤란한 문제들을 완전히 막아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보호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가 일어날 때, 그것을 연단의 기회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의지하도록 가르치신다.

 

<묵상>

스가랴 4장에 나오는 기별을 읽어보십시오. 스가랴 4:6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도우심이 성전 중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답: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가르친다. 

 

<부가설명> 사람은 세상에 사는데 환경이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세상을 어두움의 세상이라고 했다(엡6:12). 어두워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살지 못하기에 딱 알맞은 세상이다. 그래서 세상 삶의 편의를 위해서 기록된 말씀에서 떠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자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기록된 말씀과 다른 삶의 편의를 따르면 그것이 모두 말씀의 대체물, 또는 하나님의 대체물이 될 수 있다. 우상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상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과 컴퓨터 TV 등등이 대체물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음에 있는가 자기를 점검하는 일을 자주 해야 할 것이다. 매일 매 순간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 성경의 경고를 항상 숙고해야 할 것이다.

 

<교훈>

때때로 우리가 극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은 소중한 연단의 기회이므로 다른 대체물을 의지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9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575~580, ‘엘리와 그 아들들’, 616~626, ‘사울의 외람됨’을 읽어보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과 야망에 대하여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다. 마침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산 제물이 되는 대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다. 우리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진정으로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포함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 외에 다른 대체물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삶의 핵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시련을 허락하신다.

“엘리의 태만이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의 순결하지 못한 애정이나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는 의무를 행하기를 즐겨 하지 아니한 결과로 엘리는 비뚤어진 아들들에게서 죄악의 수확을 거두었다. 악을 용인한 부모나 그 악을 행한 자녀들 모두 하나님 앞에 죄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범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어떤 제물이나 헌물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새 자녀 지도법, 27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놀라운 겸비에 관해 이야기해보라. 이 사실로부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이 무슨 뜻인지에 관해 무엇을 배우는가? 우리가 비록 예수님과 똑같이 행동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원칙들이 우리의 삶을 주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복종과 자기 희생의 모습을 닮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명상하고 깨달아서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해야 할 것이다. 할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받아 하도록 이끄실 것이다. 

 

2.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두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떤 조언을 줄 수 있는가? 미래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 성경에 하나님의 지도에 전적으로 복종한 사람들의 결과를 이야기해줄 수 있다.

 

3.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겠는가?

※ 사람들의 한계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종말을 처음부터 아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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