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보이지 않는 자를 봄(질문, 대답, 설명) 0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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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8-12 17:57 조회5,184회 댓글0건본문
제8과 보이지 않는 자를 봄
(8월 2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19분)
연구 범위: 롬 8:28~39, 요 14:1~14, 엡 1:18~23, 사 40:27~31
기억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에 관한 정의는 언제나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는 어떻게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이번 주 기억절이 그 답을 제시한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
우리가 평안할 때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까지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바라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정말 큰 도전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진리로 형성된 믿음, 곧 그리스도와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 아버지의 선하심, 예수님 이름의 권능,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믿음으로 우리는 비로소 시련의 도가니, 그리고 모든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굳게 설 수 있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보이지 않는 자를 믿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눈앞의 시련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 느끼기
기도함으로 삶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살라는 초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행하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허락된 확실한 약속을 붙잡고 살아간다.
TMI 위로
2. 로마서 8:28~39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요 14:13, 14)
※ 에수께서 친히 기도하신다는 것과 같다.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약속이다.
4.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과 희망은 무엇입니까?(엡 1:18~23)
※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부활한다는 사실이다.
5. 베드로전서 5:7이 우리에게 주는 기별은 무엇일까요?
※ 모든 염려를 주님께 완전히 맡기고 감사로 살라는 것이다.
6.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요?(사 40:27~31)
※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어떤 경우라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면 우리를 위해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항상 우리를 돕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갈 때 참된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8월 14일(일) 우리 아버지의 풍성하심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나를 위해 분명히 ( )을 해주실 텐데!”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상황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다른 것을 원하신다는 생각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둘째,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믿는 것과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 있다.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어떤 좋은 것을 보면서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께 화를 내기까지 한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을 발휘할 때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마주하는 그 순간이 바로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 때이다.
로마서 8:28~39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묘사하는 매우 강력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는 어떤 근거들을 찾을 수 있는가?
[롬8:28~3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답: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아들을 주신 분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가장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약속이다.
로마서 8:32에는 우리로 하여금 상황에 압도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중요한 논리적 근거가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고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셨다면, 그분께서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주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하고 인색한 분으로 돌변하실 수 있겠는가?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진리가, 시련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생겨날 수 있는 어떤 의심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역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묵상>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대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천 가지 모양으로 이와 같은 놀라운 자비를 풍성히 내려 주고 계신다는 진리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은 사실이 그대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답: 환난과 핍박을 받아도 이해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나도 주님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모든 것이 가장 선한 결과로 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부가설명> 내가 3기 교과 부가설명에 몇 번 말한 것을 또 말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난관이라면 그것은 가장 선한 결과로 가는 길목에서 경험하는 난관일 뿐이다. 그러나 세속적 목적과 방법을 추구해서 만난 난관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신 난관일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을 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따라가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바른 길을 걷도록 가시와 난관으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이다. 난관을 만날 때 걸어가는 길을 살펴야 한다. 자식이 빗나가면 부모가 걱정하면서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겠으나, 그때는 사탄이 방해한다. 이 죄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르게 걸을 때는 사탄의 공격이, 잘못 걸을 때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재림의 그날까지 난관의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는 사탄의 공격을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 차단하고 복되게 인도하신다.
<교훈>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모든 풍성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그 은혜를 통하여 모든 의심을 날려버릴 수 있다.
8월 15일(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예수님께서는 얼마 있지 않아 제자들을 떠나셔야 했다. 제자들의 든든한 후원과 격려가 되시던 분이 하늘로 떠나시려 할 때, 그들은 혼란과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육신적으로는 더 이상 그분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그들에게 주셨다.
요한복음 14:1~14을 읽어보라. 특히 13, 14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의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핵심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단서는 무엇인가?
[요14:1~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답: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셔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은 아버지 뜻에 합당할 때 무엇이든지 응답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예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 말은 예수님 안에 모든 응답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하늘의 모든 권능이 우리를 위해 활동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천사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 보좌로부터 파송된 천사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눈을 뜨면 모든 상황이 바뀌어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상황은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이 폭풍을 잠잠케 하실 때처럼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격려하실 때처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임할 수도 있다. 어떤 극적인 사건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묵상>
요한복음 14:1~14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그대 앞에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약속에서 어떤 소망과 격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재림과 또 기다리는 동안 모든 필요가 넉넉히 공급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재림의 약속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희망이 됩니다. 눈앞에 닥친 시련 앞에서 분명한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믿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가설명>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뜻은 그분이 이미 응답 자체라는 것을 나타내는 약속이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응답을 받은 신앙으로 생활할 때 이 기도의 성취가 생활을 주장할 것이다. 어떤 분은 ‘예수 한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라는 찬미를 짓기도 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부요가 충만하고(골2:2,3).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라고 성경은 계시한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님의 찬미 가사대로 예수님만 계시면 모든 것이 응답된 것이다. 그분 안에는 모든 선한 선물만 충만한 것이 아니다. 이 죄의 세상에서 당할 모든 환난과 핍박과 삶의 난관도 충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의와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세상에 가는 기간에 사탄의 공격과 육체의 욕망이 공격하는 당연한 과정일 뿐이다. 그것이 옛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다. 그곳은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렘2:6). 이 세상 상태를 상징하는 곳이 그 광야였고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었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런 땅이다. 고난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충만하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5:4,5).
<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비록 하나님의 능력이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해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8월 16일(화) 부활의 능력
부활은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여준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그분의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법적 관계를 갖도록 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에 있어서 특별한 측면을 더해준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우편, 곧 능력과 권세의 자리에 앉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부활의 능력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신다.
에베소서 1:18~23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은 부활의 능력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이 구절에서 그대 자신을 위한 어떤 희망과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엡1:18~23]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답: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로 그분을 믿는 자들도 그분 안에서 부활한다는 소망을 확실하게 하였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한다. 첫째, 그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둘째,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엡 1:19) 기도한 것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묘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아버지의 권능의 우편에 앉게 한 것과 같은 능력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부활은 예수님께 단순히 어떤 막연한 능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었으며, 영원한 세월 동안 그분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묵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줄 수 있을까요?
답: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부활한다는 보증이 된다.
“사탄의 앞에서 예수님만을 쳐다보며 ‘나에게는 부활하신 구세주가 계시다.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고난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의 의시며 나의 기쁨의 면류관이시다’라고 말하라”(가려뽑은 기별 1권, 352).
<부가설명> 사탄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영생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쫓겨나서 큰날의 심판 때 그의 존재 자체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것도 알았을 것이다(유6).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 것을 다 알고 지구로 내려온 사탄은 이들을 꾀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하면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켜야만 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일 수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확신으로 여자에게 접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의 도구로 사용하여 말씀을 떠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미 아담 부부는 결코 죽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을까? 아니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을까? 어쩌면 후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 사탄과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사 발꿈치가 상하는 사건으로 죽음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렸다. 사망의 권세에서 행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다시 영원한 새명으로 부활하여 태초에 주신 그 생명을 회복하고 생명이신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영생할 것이다. 부활은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교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 있다.
8월 17일(수)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어 맡김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명판을 걸어두기도 한다. “걱정할 수 있는데 왜 기도하십니까?”(Why pray when you can worry?). 이 문장은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께 근심을 맡겨 버리는 대신에 혼자 염려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삶이 완전히 헝클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매듭을 푸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손쓸 수 없게 될 때까지 어떻게든 그 문제를 붙잡고 있으려 한다. 우리는 왜 주님께로 가지 않고 스스로 절망에 빠지려고 하는가?
베드로전서 5:7을 읽어보라. 베드로는 시편 55:22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어떤 기별이 있는가?(참조 마 6:25~33).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마6:25~3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답: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저리라. 주님이 우리를 돌보신다.
이 구절은 매우 단순하다. 아무런 비밀도 숨겨져 있지 않다. 기록된 그대로다. 염려를 맡겨 버리라는 말은 골치 아픈 염려거리들을 던져 버림으로 더 이상 붙잡고 있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짐을 아무 곳으로나 던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염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염려를 모두 맡긴다”는 일의 문제는 그것이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워 보인다는 데 있다.
근심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과중한 업무나 예상치 못했던 비난, 내가 사람들에게 필요치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또 건강이나 재정적 염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다는 느낌, 그리고 용서받지 못했다고 믿는 데서 올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문제를 붙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혼 직전에 놓여 있거나, 내가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인 것처럼 느낄 때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관심을 가지시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묵상>
삶의 수많은 문제들을 앞에 두고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능력이 아니다. 정신과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 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염려하여 무엇할 것인가? 기도하여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믿음을 행사라자. 그러면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이 가장 필요할 때 해결하실 것이다.
<부가설명> 염려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정신을 황폐하게 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궁리하는 것과 염려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해결의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할 일이지만 기도로 성령님과 의논하여 찾아볼 것이다. 홍해 앞에 당도한 이스라일에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공포에 질려 원망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분은 그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이시다.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원망과 반역의 연속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가 그들을 더운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게 했을 뿐이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늘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는 나그네들이다.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순종하며 감사와 찬양과 기도로 살아갈 것이다.
<교훈>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는가? 우리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참된 마음의 안식을 맛보아야 한다. 주님은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하실 수 있으시다.
8월 18일(목)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신실히 행함
우리가 어떤 힘든 상황을 지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형편을 잘 알지 못하시고 관심조차 두지 않으신다는 생각은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황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느꼈다. 계속되는 포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이사야 40장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음을 담아 친절하고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포로 된 그들은 ‘여호와여 어디 계시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증거를 볼 수 없나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야 40:27~31을 읽어보라. 이사야는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이 묘사는,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사 40:27)는 그들의 생각에 어떤 답을 주고 있는가?
[사40:27~31]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답: 영원하시고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능력과 힘을 더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앙망할 때 그는 모든 것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자신들의 사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숨겨졌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무리를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더서 전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멸절시키고자 기안된 변경할 수 없는 법령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개입하시는 놀라운 드라마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을 묘사할 뿐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핍박을 당하며, 그들을 죽이라는 법령(계 13:15)이 반포될 때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끔찍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얼마나 쉽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에스더의 이야기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위기에서 다시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묵상>
에스더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해 보십시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어떤 기별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부가설명> 에스더서는 아가와 함께 하나님이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유이한 책이다. 아가서 8장에 ‘여호와의 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맹렬한 불’이라는 말이다. 아가서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노래하는 성경이기에 부부간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만, 에스더서는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말이나 여호와라는 말이 나올 장면인데도 그런 표현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이 과연 정경인가라는 논란이 오래 계속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법의 투쟁을 나타낸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계명과 세상 권세가 만든 법의 대결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유대인은 살아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개입하셨고 그들은 다 살았고 그들을 죽이려했던 세력이 망했다. 마지막 때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볼 때 암담할 때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기도하며 기다리면 때가 될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통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8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선지자와 왕> 598~606, ‘왕후 에스더의 시대에’를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성령님은 실제적이고 참된 인도자가 아니신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추측에 의해 기록된 듯이 하나님 믿기를 주저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교훈해 주시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기꺼이 배우려는 정신과 열망을 가지고 겸손히 나아간다면 왜 그분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에 대해 의심하는가?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그분을 의심함으로써 그분께 욕을 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에는 그분의 뜻을 행함에 있어 인도함을 받고 있으며 축복을 받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그릇 해석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의뢰하며 성령께서 어떻게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이행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닫도록 이끌어 주심을 믿어야 한다”(엘렌 G. 화잇, 발표된 원고, 6권, 225).
“의심과 반대의 세력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중에 믿음은 굳건하게 자란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얻은 체험은 가장 값비싼 진주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다”(교회증언, 3권, 55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믿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 1. 추상적인 사물들은 대부분 그렇다. 사랑, 은혜, 미움 등등. 2. 바이러스, 세균, 우주의 여러 상태, 지나간 역사적 사건 등, 자기 시야에 없는 것이 그렇다. 3. 이런 것들은 전문가의 기록으로 믿는다. 그처럼 성경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방법이 비록 내가 원치 않는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길을 신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 그대로 믿고 인내하며 따라라야 한다.
3. 우리의 관점에서 보기에 끔찍한 결과를 마주한 사람들이나 성도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절한 기도와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번 주 교과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탄의 왕국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문제의 중요한 한 면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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