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불멸(不滅)의 소망(所望)-(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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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8-08 13:08 조회2,56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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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불멸(不滅)의 소망(所望)
(8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8분)
<緖言>
인간(人間)은 고난(苦難)을 마주하게 되면 고난(苦難)의 현실(現實)의 벽(壁)에 걸려 실망(失望)하고 좌절(挫折)하며 현실(現實) 너머 하나님의 뜻과 계획(計劃)을 생각(生覺)하지 못하고 이해(理解)하지 못하여 소망(所望)을 약속(約束)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失望)하고 좌절(挫折)하지만, 하나님의 약속(約束)과 소망(所望)을 잃지 않고 확실(確實)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시고 인도(引導)하심에 감사(感謝)드리며 그러한 확실(確實)한 믿음을 통해 세상에 나타내 보이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불멸(不滅)의 소망(所望)을 갖는 것이 신앙(信仰)과 믿음의 비결(秘訣)이다.
(08월 07일 (일) <큰 그림>
(Q)~(합 3장)에 하박국 선지자(先知者)가 예상치 못한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을 겪을 때 하박국이 마침내 감사(感謝)의 기도(祈禱)를 드릴 수 있었던 비결(秘訣)은 무엇입니까?
(A)~○. 하박국은 경건(敬虔)치 않은 자(者)가 당할 멸망(滅亡)과 의인(義人)에게 주어질 승리(勝利)의 보상(報償)에 관한 생생한 묘사(描寫)는 이 하박국서의 맥(脈)을 이룬다. 이렇게 순결(純潔)과 믿음을 강조(强調)하는 일에서 하박국은 이사야와 함께 복음(福音) 선지자(先知者)의 위치(位置)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박국이 하나님의 계획(計劃)은 지혜(智慧)롭고 궁극적(窮極的)으로 성공(成功)하리라는 신념(信念)을 확인(確認)함으로써 하박국은 감사(感謝)의 기도(祈禱)를 드릴 수 있었다. (합 1:1, 재림교주석)
(08월 08일 (月) <우리의 위대(偉大)하신 아버지>
(Q)~(욥기 38~39장)에서 욥의 친구(親舊)들 질문(質問)은 “왜”라는 질문(質問)이었지만, 욥의 친구들이 던진 “왜?”라는 질문(質問)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對答)하셨습니까?
(A)~○. (욥기 38~39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親舊)들이 던진 “왜”라는 질문(質問)에는 하나도 대답(對答)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께서의 창조사역(創造使役)의 놀랍고 위대(偉大)하심의 60여 개의 질문을 던지심을 통하여 더 이상 “왜”라는 질문(質問)들이 한 방에 해결(解決)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능적(本能的)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통해 위안(慰安)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없을 때 실망(失望)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無知)와 유한(有限)함을 나타내 보여주심으로 인간(人間)의 소망(所望)이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존재(存在) 안에서만 그 답(答)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위대(偉大)하심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의문(疑問)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08월 09일 (火) <우리 아버지의 임재(臨在)>
(Q)~(이사야 41:8~14) 미래(未來)의 구원(救援)을 바라며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捕虜) 중에 있는 유다 백성(百姓)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所望)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苦難)의 시련(試鍊)에 봉착(逢着)하게 될 때 종종 하나님은 멀리 계시거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손을 잡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때 하나님의 목적(目的)과 약속(約束)과 그분께서 변화(變化)시키시는 능력(能力)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이는 사단이 좋아하는 것임을 기억(記憶)하라
(08월 10일 (水) <우리를 위(爲)한 아버지의 계획(計劃)>
(Q)~(예레미야 29:1~10)에 기록된 유다 백성들이 희망(希望)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이스라엘 역사(歷史)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敎會)의 구속(救贖)이 우리가 바라는 시대(時代)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일은 충분(充分)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때야말로 가장 적절(適切)한 때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약속(約束)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오랫동안 그들에게 전혀 무관심(無關心)하셨던 것 같지만 그들 가운데 찾아오시며 그들을 위(爲)하사 영광(榮光)을 그들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상황(狀況)에서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記憶)하고 어떠한 고난(苦難)의 용광로(鎔鑛爐)에서라도 언제나 희망(希望)을 포기(抛棄)하지 말고 소망(所望)을 가지고 인내(忍耐)하라.
(08월 11일 (木) <우리 아버지의 징계(懲戒)>
(Q)~(히 12:5~13).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징계(懲戒)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징계(懲戒)는 품성(稟性)을 교정(矯正)하고, 형성(形成)하고, 강(强)하게 하고, 온전(穩全)케 하는 훈련(訓鍊)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징계(懲戒)를 참고 견디면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유익(有益)이 주어질 것이다. 징계(懲戒)는 한쪽의 본성적(本性的) 경향(傾向)과 욕망(欲望) 그리고 다른 쪽의 올바른 원칙(原則) 사이에 충돌(衝突)이 일어날 때 필요(必要)하게 된다. 징계(懲戒)의 목적(目的)은 본성적(本性的)인 성향(性向)과 욕망(欲望)을 원칙(原則)들과 조화(調和)시킴으로써 그 갈등(葛藤)을 해결(解決)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징계(懲戒)는 평강(平康)을 가져온다. 징계(懲戒)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그리고 동료(同僚)들과 화평(和平)을 이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發見)한다. 이처럼 우리 아버지께서 징계(懲戒)하시는 이유(理由)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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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付祿)>
제7과 불멸(不滅)의 소망(所望)
<緖言>
인간(人間)은 고난(苦難)을 마주하게 되면 고난(苦難)의 현실(現實)의 벽(壁)에 걸려 실망(失望)하고 좌절(挫折)하며 현실(現實) 너머 하나님의 뜻과 계획(計劃)을 생각(生覺)하지 못하고 이해(理解)하지 못하여 소망(所望)을 약속(約束)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失望)하고 좌절(挫折)하지만, 하나님의 약속(約束)과 소망(所望)을 잃지 않고 확실(確實)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시고 인도(引導)하심에 감사(感謝)드리며 그러한 확실(確實)한 믿음을 통해 세상에 나타내 보이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불멸(不滅)의 소망(所望)을 갖는 것이 신앙(信仰)과 믿음의 비결(秘訣)이다.
(08월 07일 (일) <큰 그림>
(Q)~(합 3장)에 하박국 선지자(先知者)가 예상치 못한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을 겪을 때 하박국이 마침내 감사(感謝)의 기도(祈禱)를 드릴 수 있었던 비결(秘訣)은 무엇입니까?
(A)~○. 하박국은 경건(敬虔)치 않은 자(者)가 당할 멸망(滅亡)과 의인(義人)에게 주어질 승리(勝利)의 보상(報償)에 관한 생생한 묘사(描寫)는 이 하박국서의 맥(脈)을 이룬다. 이렇게 순결(純潔)과 믿음을 강조(强調)하는 일에서 하박국은 이사야와 함께 복음(福音) 선지자(先知者)의 위치(位置)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박국이 하나님의 계획(計劃)은 지혜(智慧)롭고 궁극적(窮極的)으로 성공(成功)하리라는 신념(信念)을 확인(確認)함으로써 하박국은 감사(感謝)의 기도(祈禱)를 드릴 수 있었다. (합 1:1, 재림교주석)
○. 즉 하박국의 교훈(敎訓)은 눈앞에 전개(展開)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미래(未來)에 있을 하나님의 큰 그림을 생각(生覺)하고 믿음의 담대(膽大)함을 소유(所有)하는 신뢰(信賴)의 삶을 살라는 권면(勸勉)과 교훈(敎訓)이다….
○. 하박국은 유다의 죄악(罪惡)을 한탄(恨歎)하고 자기 백성이 형벌(刑罰)을 받아야 마땅함을 알지만, 그들이 당할 고통(苦痛)에 대해 염려(念慮)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징벌(懲罰) 도구(道具) 즉 더해 가는 번영(繁榮)으로 축복(祝福)받은 것처럼 보이는 갈대아인들의 운명(運命)에 관해서도 관심(關心)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질문(質問)하는 자기 종의 마음에 응답(應答)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징계(懲戒)하시는 것은 그들의 궁극적(窮極的)인 유익(有益)을 위함이지만, 지상(地上)에서 악(惡)한 자(者)들을 대표(代表)하는 바벨론의 번영(繁榮)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으로 인(因)해 사라질 것을 하박국에게 보여 주신다. (합 1:1, 재림교주석)
(08월 08일 (月) <우리의 위대(偉大)하신 아버지>
(Q)~(욥기 38~39장)에서 욥의 친구(親舊)들 질문(質問)은 “왜”라는 질문(質問)이었지만, 욥의 친구들이 던진 “왜?”라는 질문(質問)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對答)하셨습니까?
(A)~○. (욥기 38~39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親舊)들이 던진 “왜”라는 질문(質問)에는 하나도 대답(對答)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께서의 창조사역(創造使役)의 놀랍고 위대(偉大)하심의 60여 개의 질문을 던지심을 통하여 더 이상 “왜”라는 질문(質問)들이 한 방에 해결(解決)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능적(本能的)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통해 위안(慰安)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없을 때 실망(失望)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無知)와 유한(有限)함을 나타내 보여주심으로 인간(人間)의 소망(所望)이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존재(存在) 안에서만 그 답(答)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위대(偉大)하심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의문(疑問)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 세상(世上)을 지배(支配)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우리 자신(自身)과 우리 자신의 심령(心靈)을 잘 지배(支配)하는 일만은 그의 은혜(恩惠)의 힘 안에서 우리의 본령(本領)으로 삼도록 하자.
○. 욥은 이전에 자기가 하나님에 관(關)하여 알고 있던 지식(知識)은 풍문(風聞)에 근거(根據)한 것이었음을 인정(認定)한다. 이제 그는 체험(體驗)을 통한 지식(知識)을 갖게 되었다. 욥기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교훈(敎訓)은 이 구절(句節) 가운데 있다. 이 진술(陳述) 가운데서 욥은 전승(傳承) 때문에 형성(形成)된 신앙경험(信仰經驗)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개인적(個人的)인 교제(交濟)에 근거(根據)한 신앙경험(信仰經驗)으로 도약(跳躍)함을 나타내 준다. 그의 성장 배경(成長背景)이 된 전승(傳承)에 따르면, 의인(義人)은 고통(苦痛)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당연(當然)하게 여겨졌다. 욥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은 현세(現世)의 모든 재앙(災殃)에서 의인(義人)을 구원(救援)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苦痛)을 당하게 되었을 때 혼란(混亂)에 빠졌는데, 그것은 자기(自己)가 하나님에 대하여 들은 내용(內容)과 모순(矛盾)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혼란(混亂)은 친구들의 태도(態度)로 인하여 더욱 증가(增加)되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무한(無限)한 능력(能力)과 자비(慈悲)를 소유(所有)하고 계시며, 자기가 고통(苦痛)을 당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가 고통(苦痛)을 당하는지 설명(說明)해 주시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는 그 이유(理由)가 무엇이든 불안(不安)해할 필요(必要)가 없다는 것을 확신(確信)하게 된다. (욥 42:1~6, 재림교주석)
○. <욥의 경험(經驗)은 그에게 믿음의 의미(意味)를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을 친(親)히 봄으로써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에 굴복(屈伏)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獻身)은 자기 환경(環境)의 영향(影響)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以上) 하늘의 은총(恩寵)을 받은 증거(證據)로 세속적(世俗的)인 축복(祝福)을 기대(企待)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계(關係)는 이제 이전(以前)보다 더욱 확고(確固)하고 신뢰(信賴)할 만한 기초(基礎) 위에서 이루어진다. 욥이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에 관하여 만들어 놓은 전승(傳承)들 때문에 제한(制限)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는 자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解決策)을 발견(發見)한다. 욥이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나타내는 이러한 폭넓은 이해(理解)는, 성경전체(聖經全體) 특히 요한복음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매우 힘있게 강조(强調)되는 믿음의 경험(經驗)과 유사(類似)하다(요 1:12~17; 롬 8:1~8; 갈 4:3~7).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죗됨>
욥도 회리바람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音聲)을 듣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悔改)하나이다”(욥 42:6)라고 부르짖었다. 또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榮光)을 보고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萬軍)의 여호와여”하고 창화(唱和)하는 소리를 듣고 “화(禍)로 다 나여 망(亡)하게 되었도다”(사 6:3, 5)라고 크게 외쳤다.…
○. 갈바리 십자가(十字架)의 그늘 밑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죄에서 해방(解放)되었다고 하여 자고(自高) 하거나 교만(驕慢)해질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아들의 심장(心臟)이 찢어지게 한 고민(苦悶)의 원인(原因)이 자기들의 죄(罪)였다는 것을 느끼고, 그런 생각이 저들을 스스로 겸비(謙卑)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생애(生涯)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악(罪惡)과 약점(弱點)을 가장 분명(分明)히 깨닫고 저들의 유일(唯一)한 희망(希望)이 십자가(十字架)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復活)하신 구주(救主)의 공로(功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쟁투 471).(욥 42:6, 화잇주석)
(08월 09일 (火) <우리 아버지의 임재(臨在)>
(Q)~(이사야 41:8~14) 미래(未來)의 구원(救援)을 바라며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捕虜) 중에 있는 유다 백성(百姓)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所望)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난(苦難)의 시련(試鍊)에 봉착(逢着)하게 될 때 종종 하나님은 멀리 계시거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손을 잡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때 하나님의 목적(目的)과 약속(約束)과 그분께서 변화(變化)시키시는 능력(能力)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이는 사단이 좋아하는 것임을 기억(記憶)하라
○.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대표자(代表者)가 되고 이스라엘 국가(國家)의 창시자(創始者)가 되도록 그를 우르에서 불러내셨다. (출 12:40, 41; 갈 3:17). 아브라함이 약속(約束)의 땅에 들어간 지 430년 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다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부르셨는데 이번에는 “제사장(祭司長) 나라”와 “거룩한 백성(百姓)”이 되도록 불러내셨다(출 19:5, 6). 이사야는 아마도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捕虜)가 되어 흩어져 있는 각처(各處)에서 모아들이는 일을 특별(特別)히 언급(言及)하고 있다. (참조 사 11:16; 56:8 등).
○. 내가 너를 택(擇)하고.
이스라엘은 그들이 지상(地上)에서 하나님의 대표자(代表者)가 되도록 선택(選擇)된 신분(身分) 때문에 하나님께 속(屬)했다. 그들의 죄악(罪惡) 때문에 북방(北方) 지파(支派)들은 앗수르에 의하여 분산(分散)되고, 남방(南方) 유다는 미구(未久)에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捕虜)로 잡혀갈 신세(身世)가 될 것임에도 불구(不久)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完全)히 내치지 않으셨다. 이런 사상(思想)을 이사야는 거듭거듭 강조(强調)한다. (참조 42:1; 43:1, 10; 44:8, 21; 45:4; 55:3, 4; 65:8, 9, 22). 40:1, 2에 내포된 이스라엘의 낙담(落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참조 왕하 19:30 주석; 사 37:31; 40:1~5, 9~11; 5:1~7).
○. (사 41:10) 두려워 말라.
외부 상황(外部狀況)으로 볼 때 믿는 백성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많은 요인(要因)이 있었다. 북방왕국(北方王國) 이스라엘은 앗수르 군사력(軍事力)에 의해 완전(完全)히 말살(抹殺)되었고 유다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백성들에게 위로(慰勞)와 희망(希望)의 기별(奇別)이 절실히 필요(必要)할 때 이사야는 용기(勇氣)와 격려(激勵)의 말로 그들을 북돋우려 했다(참조 사 40:1, 2; 41:13, 14; 43:5; 44:2).
○.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에 내포된 약속(約束) 곧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이사야 당시(當時)의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必要)했다.
○. (사 41:11) 수치(羞恥)와 욕(慾)을 당할 것이요.
이 약속(約束)은 산헤립의 군대(軍隊)가 섬멸(殲滅)됨으로써 극명(克明)하게 성취(成就)되었다. 하나님의 백성(百姓)과 싸우는 자는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다. 주님의 도움을 받는 가장 연약(軟弱)한 아이라도 흑암(黑暗)의 모든 세력(勢力)의 연합군(聯合軍)보다 강(强)하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對敵)하고자 하는 자(者)마다 최후(最後)에는 멸망(滅亡)할 것이며 온유(溫柔)하고 신실(信實)한 자는 땅을 차지할 것이다(시 37:9~11, 20, 29, 37, 38; 마 5:5). 사해 두루마리 “멸망(滅亡)하다” 대신(代身)에 “고갈(枯渴)되다”로 되어 있다.
(08월 10일 (水) <우리를 위(爲)한 아버지의 계획(計劃)>
(Q)~(예레미야 29:1~10)에 기록된 유다 백성들이 희망(希望)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이스라엘 역사(歷史)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敎會)의 구속(救贖)이 우리가 바라는 시대(時代)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일은 충분(充分)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때야말로 가장 적절(適切)한 때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약속(約束)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오랫동안 그들에게 전혀 무관심(無關心)하셨던 것 같지만 그들 가운데 찾아오시며 그들을 위(爲)하사 영광(榮光)을 그들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상황(狀況)에서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記憶)하고 어떠한 고난(苦難)의 용광로(鎔鑛爐)에서라도 언제나 희망(希望)을 포기(抛棄)하지 말고 소망(所望)을 가지고 인내(忍耐)하라.
○. (예레미야 29:1~10)에는 희망(希望)을 위한 어떤 이유가 제시(提示)되어 있다.
(신명기 4:29) “마음을 다하고 … 찾으면 만나리라”라는 말씀은 사람의 동기(動機)는 순수(純粹)하고 영적(靈的)이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偶像崇拜)의 어리석음을 철저(徹底)히 깨닫고 진심(眞心)으로 회개(悔改)하면서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구(求)하면 언제, 어느 곳에서도 긍휼(矜恤)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懲戒)하시는 목적(目的)이 그들을 멸망(滅亡)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悔改)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 3:17). 마찬가지로 오늘날 죄악(罪惡)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돌이켜 구원(救援)받을 수 있는 것도 그러한 하나님의 인내(忍耐)와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사랑 때문이다. (요 13:1). (신 4:29, 만나주석)
○. 바벨론에 있는 포로(捕虜)들에게 주는 충고(忠告) (예레미야 29:8-14)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포로생활(捕虜生活)을 평온(平穩)하게 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조처(措置)를 하(取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자칭선지자(自稱先知者)들이라고 하는 자(者)들이 거짓된 기초(基礎)위에 세운 건물(建物)에서 그들을 끄집어내신다. (렘 29:8~9절). 그들은 백성들에게 포로생활(捕虜生活)이 속히 끝날 것이니 바벨론에 정착(定着)할 생각은 하지 말고 돌아갈 준비(準備)나 하라고 하였다.
○.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소망(所望)을 걸 만한 확실(確實)한 근거(根據)를 제시(提示)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속히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결국(結局)은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約束)하신다. 그것은 곧 70년이 차고 난 후(後)이다. 이 말씀에 (依據) 따라 볼 때 70년의 포로생활(捕虜生活)이란 마지막 사로잡혀 갈 때부터 계산(計算)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사로잡혀 갈 때부터 계산된 것이 분명(分明)해진다….
○.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고통(苦痛)의 결과(結果)가 어떠할지를 보라고 하신다.
(그것은 고무적(鼓舞的)인 결과(結果)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의 고통(苦痛)이 오래 지속(持續)될지라도 언제나 계속(繼續)될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시온에게 은혜(恩惠)를 베풀 때" "곧 그 정(定)한 때" 가 반드시 오리라 하신다..
○.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대(期待)를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이 바라고 원(願)하던,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에 대하여 기대(期待)를 가지라고 하신다.
○. 포로생활(捕虜生活)에서의 귀향(歸鄕)은 그들의 기도(祈禱)와 간구(懇求)에 대한 응답(應答)이 될 것이라 하신다. (렘 29:12~14절).
○.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도(祈禱)하도록 격려(激勵)하신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祈禱)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約束)하신 바 선(善)을 이루고자 하실 때는 그들에게 기도(祈禱)의 영(靈)을 부어 주신다.
○. 그들이 기도(祈禱)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臨)하여 그들을 구원(救援)하실 것이라고 하신다(시 80:2). "내가 너희의 기도(祈禱) 소리를 듣겠고 너희를 만나 주리라." "구(求)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約束)에 의지(意志)하자. "너희가 전심(全心)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씀을 우리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자. 하나님에게 구(求)할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를 찾아야 한다. (렘 29:1~10, 매튜헨리)
○. 포로에서의 귀향(歸鄕)은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約束) 실현이 될 것이다. (렘 29:10절).
○. 포로에서의 귀향(歸鄕)은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目的) 관철(貫徹)이 될 것이다. (렘 29:11절).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를 책임(責任)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確認)하신 후(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向)한 애정(愛情) 어린 돌보심을 아름다운 어조(語調)로 말씀하신다. (참조, 렘 29:11~14).
(08월 11일 (木) <우리 아버지의 징계(懲戒)>
(Q)~(히 12:5~13).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징계(懲戒)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징계(懲戒)는 품성(稟性)을 교정(矯正)하고, 형성(形成)하고, 강(强)하게 하고, 온전(穩全)케 하는 훈련(訓鍊)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징계(懲戒)를 참고 견디면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유익(有益)이 주어질 것이다. 징계(懲戒)는 한쪽의 본성적(本性的) 경향(傾向)과 욕망(欲望) 그리고 다른 쪽의 올바른 원칙(原則) 사이에 충돌(衝突)이 일어날 때 필요(必要)하게 된다. 징계(懲戒)의 목적(目的)은 본성적(本性的)인 성향(性向)과 욕망(欲望)을 원칙(原則)들과 조화(調和)시킴으로써 그 갈등(葛藤)을 해결(解決)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징계(懲戒)는 평강(平康)을 가져온다. 징계(懲戒)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그리고 동료(同僚)들과 화평(和平)을 이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發見)한다. 이처럼 우리 아버지께서 징계(懲戒)하시는 이유(理由)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삶의 징계(懲戒)를 받아들이기를 꺼리면 사람은 자주 정도(定度)를 벗어나게 된다. 성숙(成熟)한 그리스도인은 조화(調和)로운 그리스도인 성품(性稟)을 형성(形成)하는 데 필수적(必須的)인 징계(懲戒)의 경험(經驗)을 망설임이나 후회(後悔) 없이, 용기(勇氣) 있고 담대(膽大)하게 받아들이면서 곧은 길로 전진(前進)할 것이다. 그는 징계(懲戒)를 피하고자 샛길을 찾지 않고, 삶의 대로(大路)를 따라가면서 그것이 주는 기회(機會)를 충분(充分)히 활용(活用)할 것이다.
○. 주께서 징계(懲戒)하신다는 것은 개혁(改革)할 희망(希望)이 있다는 뜻이다(3:20, 21인용) (편지 130, 1902). ”(화이트 주석, 계 3:18-21)
○. <징계(懲戒)는…없으면. >
징계(懲戒)받지 않는 자녀는 일생(一生)의 의무(義務)와 책임(責任)을 지는 데 필요(必要)한 바로 그 준비(準備)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필요(必要)한 징계(懲戒)를 하지 않는 부모(父母)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두려운 셈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懲戒)하는 데 실패(失敗)하거나 교정(矯正)할 만한 가치(價値)가 있는 환경(環境)이나 상황(狀況) 가운데서 우리를 보호(保護)하는 일에 실패(失敗)하는 것은 공평(公平)하거나 온당(穩當)하지 않다.
○. 만일(萬一)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肉體的) 존재(存在)를 빚지고 있는 지상(地上) 아버지의 징계(懲戒)를 존중(尊重)한다면, 하물며 생명(生命) 자체(自體)를 우리가 빚지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징계(懲戒)에 더 “복종(服從)하거”나 “공경(恭敬)”해야 하지 않겠는가?
○. 복종(服從)하여. 우리가 주의 징계(懲戒)를 인정(認定)하고, 감사(感謝)하고, 그것을 통하여 유익(有益)을 얻어야 하지 않는가? 자녀(子女)들이 지상(地上) 부모(父母)들의 징계(懲戒)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하늘 부모의 징계(懲戒)를 덜 달게 받아들여서야 하겠는가?
○. 고침을 받게 하라.
징계(懲戒)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더욱 큰 곤경(困境)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현명(賢明)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허용(許容)하지 않고 적당(適當)한 치료제(治療劑)를 쓰고자 할 것이다. 육체적질병(肉體的疾病)들은 적절(適切)한 대처(對處)가 없을 때 호전(好轉)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자주 악화(惡化)되는 경향(傾向)이 있다. 징계(懲戒)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거나 징계(懲戒)로 인해 분개(憤慨)하는 정신(精神)과 마음 상태(狀態)는, 상태(常態)를 진단(診斷)하여 적합(適合)한 치료(治療)를 하고자 하는 지적(知的)인 노력(努力)을 하지 않는다면 악화(惡化)될 것이 분명(分明)하다. (히 12:5~13, 재림교주석)
○. 무릇 징계(懲戒)가 당시(當時)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後)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鍊鍛)한 자(者)에게는 의(義)의 평강(平康)한 열매를 맺나니. 저자(著者)는 ‘프로스 토 파론’(’당시에는’)과 ‘휘스테론’(’후(後)에’)을 대비(對備)시켜서 하나님의 징계(懲戒)가 그 당시(當時)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주지만 궁극적(窮極的)으로 놀라운 의(義)의 평강(平康)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强調)한다. ‘의(義)의 평강(平康)한 열매’는 평강(平康)과 의(義)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意味)한다(Lane). ‘평강(平康)과 의(義)’는 종말론적(終末論的) 구원(救援)의 선물(膳物)로서(Michel) 미래(未來)에 소유(所有)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痕迹)이다(Peterson).
○.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方法)
주께서는 자주 그의 백성들에게 경고(警告)와 책망(責望)의 말씀을 주신다. 그의 타락(墮落)한 백성들을 원수(怨讐)의 뜻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완고(頑固)하게 배도(背道)의 길을 가고 있을지라도 그들을 오래 참으신다. 하지만 수많은 호소가 다 무위(無爲)로 돌아간 후(後)에는 징계(懲戒)의 채찍을 드신다. 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진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여! 하나님과 반대(反對)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께서 그들의 죄 가운데서 일거(一擧)에 잘라 없앨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아직도 손을 내밀고 계신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으로부터 성령(聖靈)을 거두어 가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感謝)하자. (편지 94, 1899). (화이트 주석, 대하 33:9-13)
○. 믿음은 그들이 온갖 종류(種類)의 시련(試鍊)에 직면(直面)했을 때,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이었다. 우리 보다 앞서간 많은 사람이 극심(極甚)한 난관(難關)을 뚫고 견디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 경주(競走)에 참여(參與)하여 믿음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視線)을 예수님께 고정(固定)함으로(히 12:2), 고난(苦難)의 때 그분이 우리의 모본(模本)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히 12:3).
○. 중요(重要)한 것은, 우리의 시선(視線)을 예수님께 고정(固定)함으로(히 12:2), 고난(苦難)의 때 그분이 우리의 모본(模本)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히 1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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