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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불멸의 소망(질문, 대답, 설명) 08/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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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8-05 15:06 조회5,6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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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불멸의 소망

(8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8분)

 

연구 범위: 합 1:1~4, 욥 38~41, 사 41:8~14, 렘 29:1~10, 히 12:1~13

 

기억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교회에서 미소 지으며 행복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는 소망에 대해 말하고 노래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극심한 시련을 마주하게 되면, 소망을 갖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상황이 우리를 압박해 올 때 우리는 모든 것, 특히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그분께서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일들을 하신다고 해서, 그 사실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평안과 확신과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꾸만 하나님을 우리가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실망에 빠질 위험에 다가갈 뿐이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시련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학습 목표

- 깨닫기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하는 것이 고난을 극복하는 비결임을 깨닫는다.

- 느끼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며 소망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 행하기

우리가 가진 소망의 기별을 확실한 믿음의 삶을 통해 세상에 나타내 보이며 살아간다.

 

TMI 위로

2.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 하박국이 마침내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합 3장)

※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배하신다는 확신과 그분이 재림하실 소망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이다. 

3. 욥의 친구들이 던진 “왜?”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욥 38, 39장)

※ 창조와 섭리에 관하여 보여주시고 설명하셨다.

4.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망의 기별은 무엇입니까?(사 41:8~14)

※ 그들을 돌이켜 돌아오게 하실 약속이다.

5. 예레미야 29:1~10에 기록된 유다 백성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되며 마침내는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히 12:5~13)

※ 그들을 사랑하시고 바른 생활을 하며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결론

고난을 마주하게 되면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파묻혀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는 일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일수록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더 굳세게 붙잡아야 합니다.

 

8월 7일(일) 큰 그림

 

우리가 상심해 있을 때에는 우리 눈앞에 닥친 일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내 눈앞에 닥친 일보다 더 큰 그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참조, 계 12:7, 롬 8:22).

 

하박국 1:1~4을 읽어보라. 하박국은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가?

[합1:1~4]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답: 하나님께 패역하는 일이 일어나서 율법이 시행되지 않고 정의를 굽게하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박국아, 정말 안됐구나. 내가 즉시 가서 도와주마.”라고 말

씀하시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정반대다. 그분께서는 하박국에게 갈수록 더 어려운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박국 1:5~11을 읽어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하나님께서는 더 두려운 일들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바벨론이 유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갈 것이었다. 하박국은 12~17절에서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린다.

 

하박국 2:2, 3에 묘사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희망을 주는가? 

[합2:2,3]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답: 반드시 성취도지만 하박국의 기대처럼 속히 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디어도 기다리라 반드시 응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박국 2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히브리서 10:37은 하박국 2:3을 인용하는데, 이는 미래에 있을 메시아에 관한 약속에 적용될 수 있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약속이 확실하였듯이, ‘큰 성 바벨론’(계 18:2)의 멸망도 확실하다.

하박국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악과, 앞으로 닥쳐올 더 두려운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 사이에 갇혀 있었다.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도 같은 처지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큰 악이 둘러 있으나 성경은 더 심각한 일이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박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더 큰 그림을 볼 기회를 얻은 데 있었다. 그로 인해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일을 믿으며 3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묵상>

하박국 3장에 기록된 선지자의 기도를 묵상해 보십시오. 하박국이 그와 같은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해기 때문이다. 3장을 찾아서 직접 읽어보자.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의 예언과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지만 언제 성취될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참가하려는 참람한 생각이다(행1:7). 그러나 반드시 성취된다.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을 때 하와는 성급하게 자기의 첫 아들이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얻었다’라는 뜻의 ‘가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가인’은 여자의 후손으로 온 메시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천 년이 지난 후에 메시아가 오셨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린다. 승천하신지 2,000년이 지났다. 그런데 성경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딤후3:1). 예언대로 우리가 사는 세대는 점점 악해지고 고통이 심해진다. 약속하신 새 하늘 새 땅이 언제 이루어질는지 모른다. 이 말은 예수님 재림이 역사적 시간으로 언제일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만 살고 있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하루만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라고 권고한다. 만일 호흡이 끊어져도 그때부터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으므로 부활하면 하룻밤 잘 잔 기분좋은 아침을 맞을 것이다. ‘주님 하루 만에 오셨군요’ 하고 할렐루야 찬양할 것이다. 고통의 세월을 하루만 견디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교훈>

때때로 우리는 눈앞에 닥친 문제 때문에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8월 8일(월)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

 

오즈월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 당신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묻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 다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신다”(주님은 나의 최고봉, 1963년, 1월 2일). 

 

위에서 오즈월드 체임버스가 한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임을 묘사한 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욥기는 큰 비극을 당한 욥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욥은 자기 목숨과 아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까지 말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욥의 친구들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논쟁 가운데서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신다.

그런데 갑자기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하나님께서는 욥이 감히 대답할 수 없는 60여 개의 질문들을 쉴 새 없이 던지신다. 성경을 펴고 욥기 38장과 39장에 있는 이 질문들을 살펴보라.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 후에 욥이 대답한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 하겠나이다”(욥 40:4, 5).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이어서 다시 한번 ‘거대한’ 질문들을 던지신다.

 

욥기 42:1~6에 나오는 욥의 마지막 대답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으며, 그것은 욥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욥42:1~6]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답: 욥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욥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도록 하셨다. 욥이 듣기만 한 하나님에 관한 것을 눈으로 보고 깨닫고 회개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이 던진 “왜?”라는 질문에 하나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분께서는 놀라운 창조 사역을 통해 나타난 당신의 위대하심을 그려 보여 주셨다. 그 후로 욥은 다른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매우 놀라운 역설을 나타내 보여준다. 소망과 위로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는 데서 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통해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없을 때 실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와 유한함을 나타내 보여주심으로 인간의 소망이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존재 안에서만 그 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묵상>

욥기 38, 39장을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답: 욥에게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물을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보이셨다. 욥은 마침내 그것을 깨닫고 회개했다.

 

<부가설명> 욥은 자기가 재앙받는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했다. 친구들은 그가 잘못했기에 재앙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욥은 이런 재앙 받을 일을 한 일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자기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잘한 것들을 열거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재앙의 이유를 대라고 대든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38장부터 창조와 섭리에 관한 것만 말하면서 욥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욥이 전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내가 세어본 대로는 80개가 넘었는데 교과 저자는 60여개의 질문을 했다고 적었다. 그가 히브리어로 조사했으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은 다 창조와 그 섭리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존재하고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호흡을 주시고 천연계에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도록 해주셨기에 생존하고 있다.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천연계는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긴다. 왜 그것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것인지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그렇게 있는 것이고 있어야 한다고 무관심하다. 그래서 천연계를 마구 훼손하고도 뻔뻔한 것이다. 욥은 42장에서 깨달았고 그 친구들도 깨달았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도덕적 종교적 선행에 초점을 두면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하시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면 환난과 시험도 견디고 이기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아멘.

 

<교훈>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된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8월 9일(화) 우리 아버지의 임재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13).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으셨다.

유다 백성이 포로로 있을 동안 하나님의 임재는 매우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미래에 그들을 구원해 내실 것에 대한 확신을 주셨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아직 여러 해가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알기 원하셨으며, 그로 인해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깨닫기 원하셨다.

 

이사야 41:8~14을 읽어보라. 미래의 구원을 바라며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가질만한 어떤 이유가 쓰여 있는가? 이 땅에서의 포로 생활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 약속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41:8~14]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답: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이 말씀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13절에 나온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구로부터 수억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보좌에 앉으셔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다. 동시에 그처럼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손을 붙잡아 주실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우리가 분주한 삶에 매여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때, 그분의 목적, 그분의 약속, 그리고 그분의 변화시키는 능력도 우리와 함께한다.

 

<묵상>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참조, 창 1:1, 출 25:8, 슥 1:3, 마 1:23, 계 22:20).

 

답: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육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영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원하신다. 그래서 항상 곁에 계신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아담 후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신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 아담의 후손들은 창조주의 품을 떠나 마귀를 아버지로 영접했다. 여호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기를 갈망하신다. 그래서 아들을 찾으려고 말씀 하나님 창조주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하였다. 그분은 원래 아버지 하나님이셨다(사9:6). 그러나 구주가 되어 사람들에게 주실 때 한 아들로 주셨다. 누가복음에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라고 계시하였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아버지의 아들의 신분을 얻는다(요1:12,13, 요일2:23).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들을 고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족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사탄의 분노와 공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공격을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길이다. 고난의 본질을 이해할 때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고난과 고통을 받지만 사실은 그 길이 생명길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깨닫는 사람은 이 말을 알 것이다.

 

<교훈>

우리가 시련의 도가니에 던져질 때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손을 잡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8월 10일(수)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계획

 

모든 사람은 희망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이들은 친구의 미소에서, 또 어떤 이들은 재정적 안정이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대는 주로 어디에서 희망과 용기를 찾는가?

 

답: 각각 대답해보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분 안에만 희망이 있다. 

 

예레미야는 포로 생활 중에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비록 그들은 절망하고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제시한다.

 

예레미야 29:1~10에는 희망을 위한 어떤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는가?

[렘29:1~10]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답: 그들이 포로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라고 가르치신다. 자세한 답은 저자의 아래 설명에 있다.

 

이 말씀에는 우리가 꼭 기억하면 좋을 세 가지 중요한 희망의 근거들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처한 형편이 우연의 결과이거나 예측하지 못한 불행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가 유다를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하였다(렘 29:4)고 말씀하셨다. 비록 불행이 그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유다를 버리지 않으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곤경 가운데서도 일하실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셋째,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시간에 그들의 포로 생활을 끝내실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신 후에,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애정 어린 돌보심을 아름다운 어조로 말씀하신다(참조, 렘 29:11~14).

 

<묵상>

“너”라는 말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예레미야 29:11~14을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그대가 겪는 모든 삶의 고난에 적용해 보십시오. 어떤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습니까?

  

답: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인도하시는 손길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셔도 깨닫는 머리가 둔해져서 바르게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 고나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여러번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과 같다. 성경을 연구할 때 자기 시각, 사람의 시각, 신학의 시각으로 연구하면 하나님이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깨닫기 원하는 대로 깨닫지 못한다. 이 사실을 성경이 이미 예언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가르치셨다(창40:8). 하나님의 해석을 담당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0~14). 9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도 못했다는 말씀을 하시고 10절부터 그것을 깨닫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계시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길을 성령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연구하도록 간구해야 한다.

 

<교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어떤 상황에서도 돌보신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8월 11일(목) 우리 아버지의 징계

 

히브리서 12:5~13을 읽어보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이 메시지는 이번 기 교과의 전체 내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히12:5~13]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답: 아버지는 아들을 징계한다. 징계로 아들의 삶의 행실을 바르게 인도하신다. 시련은 아버지의 사랑의 징계이다. 

 

히브리서 12:5~13에서 바울은 징계의 맥락에서 시련을 설명한다. 새국제역(NIV) 성경에는 ‘징계’(discipline)라는 단어가 다양한 형태로 10번 나온다. 그리스 세계에서 이 단어는 ‘교육’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어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한 믿음의 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교육하시는지를 살펴보면 이 단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남녀들에 대해 생생하게 기록했다. 믿음은 그들이 온갖 종류의 시련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이었다. 12장에 들어서면서 바울은 우리를 향해 말한다. 우리 보다 앞서간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난관을 뚫고 견디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 경주에 참여하여 믿음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함으로(히 12:2), 고난의 때 그분이 우리의 모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히 12:3). 

히브리서 12장은 더 깊은 이해를 위한 돋보기와 같다. 이 돋보기가 없다면 우리는 고난의 실체를 희미하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돋보기를 통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고통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시련에 대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묵상>

히브리서 12:1~13을 읽어보십시오. 이제 5~13절에 집중하여 다음의 질문들에 답해 보십시오.

 

1) 징계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들들을 권하여 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2) 징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인내로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3) 징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절).

 

<부가설명> 히브리서는 징계를 친아버지의 교육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것을 이런 징계에 비유했다. 그러나 나는 누누이 말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탄이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난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생명의 고속도로이다. 이길 외에는 길이 없다. 죄의 세상에어 죄와 함께 즐기며 살려면 이 길을 걸을 이유가 없다. 죄와 더불어 세상의 평안과 안녕을 즐기면서 살면 된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먹고 마시자 내일 죽을 것이라고 했다(고전15:32). 먹고 마시고 죄를 즐기면 삶의 고난이 없을 수 있다. 그렇게 할 재물이 없으면 그들도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 길을 가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다. 이 길은 문이 좁고 길은 협착하다(마7:13). 그러나 생명 길은 이길 밖에 없으므로 생명의 고속도로인 것이다. 찬미가 가사대로 ‘큰 물결 일어서 나 쉬지 못하나 이 거센 풍랑 까닭에 더 빨리 갑니다’(찬미가 467장). 아멘.

 

<교훈>

우리 아버지께서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징계를 참고 견디면 우리에게 영원한 유익이 주어질 것이다.

 

8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육> 301~309, ‘더욱 높은 과정’, <치료봉사> 470, 471, ‘시련의 단련’을 읽어보라. 

 

“모든 사람의 경험 가운데는 통렬한 실망과 철저한 낙담의 때 곧 슬픈 운명에 처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에 태어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날들, 고통이 영혼을 괴롭혀 마침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날들이 이르러 온다. 이런 때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의심의 노예가 되고 불신의 속박에 얽매인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때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다면 그 같은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의 발을 영원한 산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신앙과 새 생애가 싹트게 될 것이다”(선지자와 왕,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엘렌 G. 화잇은 “모든 사람”이 “통렬한 실망과 철저한 낙담의 때”를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민감하게 알아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소망을 나눠 줄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예수님처럼 민감하게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표정과 언어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우리가 지나가는 세상의 상태와 영생의 생명의 속성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설명하고 현실적인 도움의 손도 펼 것이다.

 

2. 화요일 교과의 마지막 질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는 것이 그대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 각자 경험을 말해보자. 고난에서 이런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3. 욥기 38~41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그분의 품성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희망과 격려가 되는가? 안식일이 이 내용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다(히1:2,3). 그분의 실상을 바르게 알면 걱정이 도움이 되지 않고 신뢰만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은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을 드러낸 징표이다. 

 

4. 우리를 변화시키는 소망은 하늘로부터 온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소망이 임하도록 기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 소망을 잃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기도록 기도해 보라. 그 사람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 방문과 기도와 실제적이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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