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시련 중의 온유함(질문, 대답, 설명) 0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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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8-27 14:40 조회5,151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시련 중의 온유함
(9월 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59분)
연구 범위: 겔 24:15~27, 출 32:1~14, 마 5:43~48, 벧전 2:18~25, 시 62:1~8
기억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모세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나 산상수훈을 연구할 때를 제외하고, 우리가 ‘온유’라는 말을 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온유는 “피해를 볼 때 성내지 않고 인내로써 견디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리 높이 평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종종 ‘겸손’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온유와 마찬가지로, 겸손 또한 거의 모든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기대되는 품성의 특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를 볼 때 성내지 않고 인내로써 견디는 온유는,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특징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온유한 심령은 고통과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의 손에 들린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시련은 심령의 온유함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는 우리의 온유함과 상처를 통해 하나님을 위한 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고난과 온유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의 온유함과 상처를 통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유함이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습 목표
- 깨닫기
온유함이야 말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늘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귀중한 품성의 특징임을 깨닫는다.
- 느끼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든든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에 감사한다.
- 행하기
하나님께서 마침내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에 따라 살아간다.
TMI 위로
2. 에스겔 24:15~27에서 에스겔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그 시련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 아내가 죽는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사영하였다.
3.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가 드린 중보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출 32:1~14)
※ 온유와 백성의 허물을 자기의 허물로 여기며 회개하는 마음이다.
4.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신 예를 통해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마 5:43~48)
※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
5. 베드로가 예수님의 모본을 통해 보여준 온유와 겸손의 원칙은 무엇입니까?(벧전 2:18~25)
※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까지도 위하여 복을 비는 정신을 배우는 것이다.
6. 시편 62:1~8에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 그가 모든 것을 이루시니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결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온유함은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성품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유함을 통해 세상에 하늘 백성들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든 것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우리의 모본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날마다 성실하게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길을 걸어야겠습니다.
8월 28일(일)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즙”
오즈월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즙”(broken bread and poured-out wine)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즙은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떡과 포도즙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이 ‘부서진’ 사람들의 예들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동안 끊임없는 험담과 비판의 말들을 견뎌야 했다.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배신과 투옥을 포함한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했다. 각각의 경우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생애가 그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은혜와 돌보심에 대한 본보기가 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할 수 있으시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분노를 느끼거나 상처를 받기가 쉽다. 하지만 어제 살펴보았듯이, 온유함은 ‘성내지 않고 인내로써’ 이러한 것들을 견디도록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에스겔 24:15~27을 읽어보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에스겔이 이와 같은 시련을 통과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겔24:15~2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19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 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22 너희가 에스겔이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지 아니하며 사람의 음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23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패망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 24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5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이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는 날 26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려 주지 아니하겠느냐 27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답: 에스겔이 여호와 하나님의 하실 일의 표징이 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에스겔은 부서진 떡이 된 것이다.
에스겔 24:24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겔 24:24).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의 생애 속에 상징된 예언의 성취와 그가 마주해야 했던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이 권능의 여호와시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었다. 부서짐의 자리에 서게 되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권능의 주님’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묵상>
아내를 잃고도 슬퍼하지 말아야 했던 에스겔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아래 설명이 그 답니다.
“에스겔이 눈에 기뻐하는 것을 상실한 것은 이곳에서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기별을 생생하게 새겨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에스겔의 경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고통과 재난에서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강력하게 인식시킨다. 때때로 하나님의 사자들은 그리스도인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지 않는 자들보다 더 맹렬하게 공격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원수가 괴롭힐 때 하나님은 살아남는 자들을 정결케 하는 일에 그 무거운 슬픔을 유익한 것으로 전환시키기를 기뻐한다”(재림교회 성경주석, 8권, 259, 260).
<부가설명> 예수님은 사람이 듣고 경험하기에 괴로운 교훈을 분명히 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라고 하셨다. 이런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부모 형제 부부간 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 밖에서 이루어지면 육체를 따라 썩는 도덕적 감성적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영원한 가족이 아니면 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슬픈 가족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 것도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의 길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한 모친 형제 자매는 다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에스겔도 그랬고 호세아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다. 그들은 다 영원한 가족으로 영원한 곳에서 말로 할수 없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고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 땅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넘치는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교훈>
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의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부서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8월 29일(월) 은혜 베푸시기를 중재함
출애굽기 32:1~14을 읽어보라. 여기서 모세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출32:1~1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답: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자기의 죄로 여기고 차라리 그들 대신에 자기를 생명책에서 이름을 도말하라고 간구한다.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사 그들을 진멸하시고 모세로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분의 백성을 위해 은혜 베푸시기를 간청하였고 하나님께서 노여움을 푸셨다.
출애굽기 32:1~14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나타내 보여준다. 첫째, 하나님께서 반역하는 백성을 진멸하시고 모세에게 복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그에게 허락하신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 불순종하는 백성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는지를 보기 원하셨다. 모세는 그 시험을 통과했다. 예수님과 같이 그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반대에 직면하고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우리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는지를 그분과 우리 자신과 온 우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신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진멸하지 말도록 여호와께 요청하면서 어떤 이유를 제시했는가?
답: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14).
둘째, 이 구절은 반대와 불순종이 은혜를 드러내라는 부르심임을 보여준다. 은혜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가장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때야말로 가장 은혜를 베풀고 싶지 않은 때이기도 하다. 모세는 그의 누이 미리암이 그를 비방하여 문둥병에 걸렸을 때, 그녀를 고쳐주시기를 여호와께 간청했다(민 12장). 하나님께서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 모두를 진멸하리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엎드려 그들의 생명을 위해 간구하였다.
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자들의 죽음에 대해 모세에게 불평함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모두 진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시자, 그는 엎드린 채 아론에게 속히 그들을 위해 속죄하라고 하였다(민 16장). 모세는 그의 온유함과 시련 가운데서 보인 자기희생적인 모습으로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은혜를 간구하였다
<묵상>
민수기 12:3을 읽어보십시오. 모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답: 온유함을 배워야 한다. 성령 열매의 성질 중의 하나다.
<부가설명> 사망의 몸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비록 영의 생명을 얻었어도 사망의 몸을 가진 사람들은 지체(肢體) 중에 있는 죄의 법에 무너질 때가 많다. 그때 온유함도 깨어지고 겸손도 무너진다. 흔히 말하는 ‘욱하는 성질’이 튀어나온다. 이런 성질은 시련의 때에 더욱 발동한다. 모세는 그런 시련의 때에 겸손했고 온유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땅을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온유가 열매의 성질이 되어 생활에 나타난다. 그러나 때때로 걸려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야 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는 경험을 지체하지 않고 경험해야 한다(롬8:2). 회개하면 사유하심이 풍성하다. 그리고 다시 성령님 음성에 굴복해야 한다. 즉 말씀대로 굴복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혀를 길들이고 말씀을 따라 손발을 움직여야 한다. 오관을 말씀으로 다스리고 선하신 손의 인도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시련으로 자기를 시험하여 성령께서 고치라고 하는 약점을 발견하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여 응답을 받을 것이다. 모세는 시련으로 자신을 시험하였고 그 시험에 잘 통과하였다. 그래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한 인격임을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다.
<교훈>
우리가 반대와 시련에 부딪힐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기억하고 모세처럼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8월 30일(화) 상처를 주는 사람을 사랑함
한번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주가 묻혀 있는 흙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고, 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래부터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원수’를 쳐다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진주인가? 아니면 진주를 덮고 있는 흙인가?
마태복음 5:43~48을 읽어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천연계에서 어떤 예를 주셨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답: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이나 차별 없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차별 없이 사랑을 베풀어여 한다. 비록 원수라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5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힘든 시련에 빠뜨리는 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설명하기 위해 하늘 아버지를 예로 드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 주신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태도가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다음의 말씀으로 이 구절을 결론 맺으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그 의미는 매우 명백하다. 즉,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당신의 원수들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사랑을 자신들의 원수에게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완전해진다는 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심령의 온유함을 가져야 한다.
<묵상>
마태복음 5:48을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답: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생명을 나누어주라는 뜻이다.
<부가설명>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원수 루시퍼에게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가 거절하고 하늘을 떠났어도 오래 참으심으로 그의 모든 본질이 드러나도록 기다리셔서 우주가 오해하지 않고 사탄 자신도 자기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때까지 온유와 사랑으로 기다리신다. 그러나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죄인은 죄인으로 다스리신다. 죄인은 그 자체가 사망이기 때문에 사망하게 두시는 것이다. 사탄과 그의 추종 천사들도 마침내 스스로 존재를 상실할 것이다. 사람도 같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동안 기다리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열망하신다. 그처럼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온유함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이다.
<교훈>
우리의 심령에 온유함이 없다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온유함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8월 31일(수) 굳게 다문 입
고난 중에 온유를 나타낸 가장 위대한 본보기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베드로전서 2:18~25을 읽어보라. 베드로는 종들에게 놀라운 조언을 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당하고 고통스러운 대우를 받으셨을 때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면서, 그분이 남겨 놓으신 모본의 자취를 그들도 따라야 한다(벧전 2:21)고 권면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설명한 예수님의 모본을 통해 시련 중에 가져야 할 온유와 겸손에 관한 어떤 원칙을 배울 수 있는가?
[벧전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답: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3,24).
상대가 내게 하려는 대로 되갚을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처럼 그를 위하여 기도하며 온유와 인내를 나타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부당한 취급을 받는 당사자가 되면 그것은 더더욱 고통스럽다. 우리는 보통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부당한 일이 발생하면 본능적으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한 ‘의분’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노력하게 된다.
온유하게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렇게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 한 가지 사실은 바로 모든 불의한 상황 속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불의한 상황에서 구출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모본으로 제시하는 베드로의 조언은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불의한 고난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잘못을 바로잡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더 위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야바나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셨을 때, 상황을 바로 잡거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침묵은 그분의 온유하심을 나타내는 웅변이었다.
<묵상>
이사야 53장을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답: 온유와 인내 희생과 사랑의 수고.
<부가설명> 때때로 온유는 침묵을 요구한다. 입을 벌리면 온유하지 못한 언사가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돌출을 억제하는 방법 중에 침묵이 요구된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부당한 대우 앞에서 침묵하셨다. 감성이 끓어올라서가 아니라 침묵이 가장 좋은 태도였기 때문이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감성이 나타나야 하는 상황에서 침묵의 온유를 훈련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때로 침묵하면 상대가 더욱 화를 낼 수도 있다. 무시하느냐고 덤빌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침묵하든지 조용하게 입을 벌리면 과격한 표현이 나올까 하여 침묵한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에 화요일 교과에 [온유함은 ‘피해를 볼 때 성내지 않고 인내로써 견디는 것’이다.]라는 정의는 합당한 정의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성품 변화라는 것은 우리 감성이 거룩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된다. 성령의 열매의 아홉 가지 성질은 다 감성에 해당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오관의 문에 파숫군을 세우고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도록 맡겨서 생활에 온유가 드러나는 하루하루가 되도록 복주시기를 기도하자.
<교훈>
예수님께서는 부당하게 심문받으며 고통당하실 때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심으로 당신의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9월 1일(목) 우리의 반석과 피난처
많은 경우 가장 교만하고 거만하며 강압적인 사람들이야말로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이들이다. 온유와 겸손이 결여된 그들의 거만함과 자만심은 본인 스스로는 자신이 그런 이유로 그렇게 행동하는 줄도 모르는 채 자기 내면의 부족함을 덮어버리는 수단이 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것인데, 특별히 불행과 고난을 당할 때에 안정감과 자존감,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들을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연약함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온유와 겸손은, 영혼이 반석 위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시편 62:1~8을 읽어보라. 이 시편의 배경은 무엇인가?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대는 다윗의 말을 통해 어떤 영적인 원칙을 배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원칙들을 그대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시62:1~8]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답: 다윗이 부당한 시련을 당하는 것이 배경이며,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온유하게 대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을 배워야 하고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할 뿐이다.
“사람들은 까닭 없이 우리의 원수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동기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뿐 아니라 같은 형제들에 의해서도 곡해될 것이다. 주님의 종들은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부당한 일들이 정당화되도록 모든 장애물이 제거될 것이다. … 주님의 종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부정직하다는 어두운 누명을 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로 지목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교인들에 의해 자행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그들은 모욕과 오해에서 항상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광신자로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당신의 섭리의 수레바퀴를 붙들고 계시며, 당신의 사역이 당신의 이름에 영광이 되도록 인도하고 계신다”(엘렌 G. 화잇, The Upward Look, 177).
<묵상>
시편 62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마음에 새겨 보십시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5~8).
<부가설명> 우리는 항상 뇌리에 새겨둘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의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의 생활현장이고 실제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인종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영의 사람들이다(롬8:9). 죄와 육이 활개치는 환경에서 영이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시련 그 차제이다. 다윗이 시편 62편에서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경험에서 속히 건져주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 없다. 건져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죽음의 잠을 재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신다. 재림으로 이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 그때까지 소망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러려면 인내해야 하고 온유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되면 시련을 감사와 소망의 즐거움으로 맞고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말은 쉬운데 실천은 쉽지 않다. 오직 성령께서 그렇게 이끌어주시도록 간구하자.
<교훈>
우리가 어떤 시련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의 위대하신 섭리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9월 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치료봉사> 453, 453, ‘참된 지식을 탐구함’, <시대의 소망> 298~314, ‘산상수훈’, <복음교역자> 630, ‘사역자와 그 자격’을 읽어보라.
“우리가 만날 수밖에 없는 어려움들은 그리스도 안에 숨은 온유함으로 말미암아 많이 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님의 겸비를 가졌다면 날마다 겪는 냉담과 거절과 괴로움을 극복할 것이며 이런 것이 심령에 음울함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결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자제이다. 가혹하거나 잔인한 취급을 받을 때 침착하고 신뢰하는 정신을 보존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완전한 품성을 자기 안에 드러내실 권리를 그분으로부터 빼앗는 것이다. 마음의 겸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를 주는 능력이다. 이것은 하늘 궁정과 연결된 증거이다”(시대의 소망, 30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고통과 괴로움을 딛고 일어나도록 도와주는가? 겸손의 어떤 중요한 특징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는가?
※ 온유하면 분노를 쉬게 할 수 있다(잠15:1 참고).
2. 한국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대를 거치며 달라졌는가? 우리 문화 속에서 겸손과 온유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 있어 겪게 되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 대체적으로 나약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지? 겸손과 온유로 대하면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3. 현존하는 인물 가운데 온유와 겸손의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러한 특성을 어떻게 나타내 보였는가?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각각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해보자.
4. 오늘날 온유하고 겸손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 새상이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5.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교회로서 피난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줄 수 있는가? 그대의 교회는 어떤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는가? 그대의 교회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줄 수 있도록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각자 생각해보자. 교회가 때로는 정신적으로 폭력적일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묵묵히 예수님 정신으로 봉사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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