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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십자가 이전의 부활(질문, 대답, 설명) 10/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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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0-21 12:18 조회6,1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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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십자가 이전의 부활
(10월 2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38분)
 
연구 범위: 유 9, 눅 9:28~36, 왕상 17:8~24, 눅 7:11~17, 막 5:35~43, 요 11:1~44
 
기억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에 나타난 부활에 관한 기록들은 주로 개인적인 기대(욥 19:25~27, 히 11:17~19, 시 49:15, 시 71:20)와 미래에 성취될 약속들(단 12:1, 2, 13)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경에는 사람이 실제로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기록이 들어있다.
첫 번째로 부활한 사람은 모세였다(유 9, 눅 9:28~36).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 17:8~24)과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18~37)이 부활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계실 때,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1~17), 야이로의 딸(눅 8:40~56), 그리고 나사로(요 11장)를 부활시키셨다. 모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시 죽게 될 유한한 존재로 살아났다. 이 사건들은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욥 3:11~13, 시 115:17, 시 146:4, 전 9:5, 10). 여기 언급된 사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부활과 관련된 이야기 중 어느 것도 사후 경험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번 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전에 있었던 부활에 관해 더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이미 있었던 부활 사건들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다.
느끼기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며 가장 큰 소망으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
행하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음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간다.
 
TMI 위로
2.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세의 부활의 증거들은 무엇입니까?(유 9, 눅 9:28~36)
※ 유다서 9절의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두고 사탄과 다툰 사건과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의 사건으로 확인할 수 있다.
3.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이 경험했던 부활 사건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왕상 17:8~24, 왕하 4:18~37)
※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마지막 날 다 부활한다는 것을 배운다.
4. 예수님께서 나인 성에 살던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신 사건을 통해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눅 7:11~17)
※ 예수님은 필요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이시다.
5.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막 5:21~43)
※ 죽음은 잠시 깊은 잠을 자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나사로의 병과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까?(요 11:1~44)
※ 나사로를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 일로 예수님은 생명의 시여자이심을 드러내셧 영광을 받으셨다.
 
결론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또한 부활하게 되리라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기억하고 계시며 가장 큰 소망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잠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며 부활의 아침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0월 23일(일) 모세의 부활
 
유다서 9절과 누가복음 9:28~36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에서 모세의 육체의 부활에 관한 어떤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유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눅9:28~36]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답: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두고 사탄과 다투었다. 모세는 예수님의 변화산에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교부들은 모세가 죽었을 때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영으로 되살아난 모세와 땅에 묻힌 육신의 몸으로 죽어 있는 모세, 이렇게 두 명의 모세가 보였다고 주장했다. (참조, Origen, Homilies on Joshua 2.1;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6.15.) 영혼과 몸에 대한 이런 구분은 영혼 불멸에 관한 그리스의 철학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적이지는 않다. 유다서 9절은 모세의 몸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데, 이는 이곳에 등장하는 논쟁이 살아 있는 영혼이 아니라 “모세의 시체”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34:5~7은 모세가 120세에 죽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 감추인 곳에 장사지내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세는 무덤 속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세를 장사한 천사들과 함께 잠자는 성도 모세를 불러내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셨다. 생명의 왕과 빛나는 천사들이 그 무덤에 접근할 때에 사단은 자기의 주권을 빼앗길까봐 염려하였다.…그리스도께서는 사단으로 더불어 언쟁하려고 하지 않으셨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아버지께 의탁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9)고 말씀하셨다.…부활은 영원히 확실하게 되었다. 사탄은 그의 먹이를 빼앗겼고 죽은 의인은 다시 살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478, 479).
모세의 부활에 관한 분명한 증거가 변화산 사건에서 발견된다. 모세는 그곳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선지자 엘리야와 함께 나타났다(왕하 2:1~11).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참조, 눅 9:28~36).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0, 31). 죄와 죽음을 정복하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는 모세의 모습은 여기에 분명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은 모세와 엘리야의 영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 자신이었다.
 
<묵상>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는 않았지만(신 34:1~4), 하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엡 3:20) 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답: 모세는 세상의 가나안 땅에 드러가기를 간절히 구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켜 하늘 가나안에 데리고 가셨다.
 
<부가설명> 앞에 어디선가 변화산 이야기를 쓴 기억이 있다. 에덴동산에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침입한 이후에 이 세상의 역사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라고 주장한 뱀의 주장 사이의 투쟁의 역사이다. 사탄은 이 주장으로 단번에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탄과 그 부하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었다는 묘한 논리를 믿게 하려고 죽은 자의 영혼 귀신 노릇도 한다. 무당이나 접신자들에게 나타나는 귀신들은 다 사탄 부하들이 그럴듯하게 연출하는 거짓이다. 죽어서 지옥 체험했다는 간증이나 천국 체험했다는 간증은 다 비성경적인 다른 영들이 연출하는 속임수다. 또 세상에 발붙이고 버젓이 걸어다니면서 재림 예수라고 은근히 주장하는 자들이나, 성령의 역사로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해석한다면서 성경의 전체 계시와 다른 소리하는 것도 모두 다른 영들의 속임수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사상을 나타내는 데 아주 조직적이고 논리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다 찾지 못해서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지만, 성경 66권의 사상은 퍼즐과 같아서 진리의 이론이 드러갈 제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넣어봐서 전제 그림이 올바르게 그려지지 않으면 그 조각은 제자리에 들어간 것이 아니거나 성경 그림에 맞지 않은 다른 그림의 조각이다. 성도들이 재림을 맞을 곳은 공중이다(살전4:16,17).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그 발을 땅에 딛지 않으신다. 공중에서 성도들을 공중으로 끌어올려 거기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함께 하늘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세상 땅에 발을 디디고 걸어다니면서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면 완전히 사기 치는 것이다. 영혼 불멸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가 영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엘리야가 변화한 몸으로 승천하고 변화산에 그 몸으로 왔다면 모세도 부활할 때 변화한 그 몸으로 변화산에 온 것이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대로 진리를 깨닫도록 지식과 마음을 온전히 말씀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1과 목요일 부가설명을 참고하라).
 
<교훈>
우리는 모세의 시체를 두고 벌어진 논쟁과 변화산 사건을 통해 모세의 영혼이 아니라 그의 몸이 분명히 부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월 24일(월) 구약의 두 가지 사례
 
열왕기상 17:8~24과 열왕기하 4:18~37을 읽어 보라. 여기에 등장하는 두 가지 부활 사건 속에서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왕상17:8~24]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8~16절은 성경을 읽어보라)
[왕하4:18~37]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21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 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 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답: 엘리야는 과부가 아들을 낳도록 도우지 않았으나 죽은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는 아들을 낳도록 하나님께 구했고 그 아이가 죽었을 때 살렸다. 엘리야의 경우는 그 생명이 돌아왔다고 기록했고 엘리사의 경우는 일곱전 재채기하고 눈을 떴다고 했다. 차이점과 같은 점을 크게 구별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히 11:35)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에 등장하는 두 가지 부활 사건을 가리킨다.
첫 번째 부활 사건(참조, 왕상 17:8~24)은 아합왕과 그의 이방인 아내 이세벨의 영향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배도에 빠졌던 시대에 일어났다. 극심한 기근이 온 땅을 뒤덮고 있던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르밧이라는 마을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거기서 엘리야는 아들과 함께 보잘 것 없는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 먹고 죽으려 했던 가난한 과부를 만났다. 하지만 그들은 기근이 멈출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던 밀가루와 기름의 기적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어머니는 엘리야에게 간절히 매달렸으며, 엘리야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주님께서 엘리야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의 호흡을 되돌아오게 하여 주셔서, 그 아이가 살아났다”(왕상 17:22, 새번역).
두 번째 부활 사건(참조, 왕하 4:18~37)은 길보아 산 남쪽에 있는 수넴이라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엘리사는 많은 그릇을 기름으로 채우는 기적을 통해 가난한 과부가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왕하 4:1~7). 후에 엘리사는, 수넴에서 결혼은 했으나 아이가 없는 한 귀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선지자는 그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고 그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건강하게 잘 자라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병들어 죽게 되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있는 갈멜산으로 달려가 자기와 함께 죽은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요청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마침내 아이가 살아났다.
이 여인들은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르밧 과부는 이스라엘 땅에 자기 몸을 숨길 곳조차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엘리야를 도와주었다. 수넴 여인과 그녀의 남편은 엘리사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날 때 머물 수 있는 특별한 방을 만들었다. 두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신실한 두 어머니는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간청했고 그 결과 그들의 자녀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묵상>
오늘 살펴본 이야기들은 마지막 때에 있을 부활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답: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이 있다는 확실하게 증명하는 사건이다.
 
<부가설명>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린 것은 엄밀한 의미로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부활은 참으로 부활이다. 모세는 역사적 시간으로는 예수님 부활 전에 부활한 유일한 사건이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재림교회를 이단이라고 할 때 모세의 부활을 말하는 것도 조건으로 말한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는데 어떻게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는 논리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모세가 부활했어도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조건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모세도 부활할 수 없었다. 시간적으로 먼저 부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활할 수 있는 근거나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 부활의 첫열매라는 말의 뜻이다. 골로새서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이 말도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부활의 주장자라는 뜻이다. 16절에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이 만물을 창조하신 만물의 주장자라는 뜻인 것과 같다.
두 여자의 아들들을 다시 살리신 것은 부활시킬 능력과 주장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들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으로 하나님은 영원한 부활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인시키셨다.
 
<교훈>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재림의 때 있을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10월 25일(화) 나인성 과부의 아들
 
성경은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이야기한다(행 10:38).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도와주신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로 인해 훗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아무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촌락들도 있었나니 이는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사업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증거가 되었다. 사랑, 자비, 긍휼은 그의 생애의 온갖 행동에 나타났나니 그의 마음은 인류에게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냈다. 그는 사람의 소원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자라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그를 잘 따랐다”(정로의 계단, 11, 12).
 
누가복음 7:11~17을 읽어 보라. 어제 살펴본 이야기들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활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가?
[눅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답: 구약의 두 예는 다 어머니들이 선지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나인성 과부 아들은 엄마의 요청이 없어도 상여를 메고 가는 중에 살려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한번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나인 성의 성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장례 행렬이 성문을 지나고 있었다. 열려 있는 관 속에는 한 과부의 독자가 누워있었다. 깊은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울지 말라.” 그리고서 관 속에 누워있는 아들을 바라보시며 명령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아들은 살아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다(눅 7:13~15). 예수님의 함께하심이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 가운데 정말 특별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르밧 과부(왕상 17:8~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은 각각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인 성의 과부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뢰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염치가 없다고 느낄 때라도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문제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도우셨다.
 
<묵상>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용기와 희망을 줍니까?

답: 우리가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 뜻에 합당할 때에 반드시 도우신다는 희망을 준다.
 
<부가설명> 신약성경에서 죽은 사람 살린 기록은 나인성 과부 아들 살린 것이 처음이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인성 과부 아들을 상여에 싣고 무덤으로 가는 도중에서 살리신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자라도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살려줄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맞는지 물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대답을 보면 복음서에 기록된 세 사건 말고도 살려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눅 7: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누가는 이 사건을 나인성 과부 아들을 살린 사건 후에 기록해서 여기 말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 과부 아들 살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눅7:22)라고 하셨는데, 요한의 제자들이 보고 있을 때도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 구절에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는 말에 ‘죽은 자’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이다. 과부 아들 살린 사실을 안 사람들이 죽은 자를 예수님 말씀 전하는 곳에 데려다 놓고 살려주기를 간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것은 구약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이 있으신 아브라함이 믿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롬4:17) 증명하고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멘.
 
<교훈>
깊은 슬픔에 빠진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언제든지 돕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10월 26일(수) 야이로의 딸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 전에 있었던 다른 부활들은 특정 인종이나 사회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신 34:10~12). 한편, 사르밧 과부는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다(왕상 17:9). 수넴 여인은 그녀가 살던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왕하 4:8). 나인 성의 과부는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아들 하나뿐이었다(눅 7:12). 이와는 반대로 야이로는 가버나움의 회당장이었다(막 5:22). 문화적 배경이나 사회적 계층과 상관없이,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으로 인해 축복을 받았다.
 
마가복음 5:21~24, 35~43을 읽어 보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막5:21~24, 35~43]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답: 죽음은 자는 것인데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부활이 있는 그날까지 자는 것일 뿐이다.
 
야이로의 열두 살 난 딸이 죽음을 눈앞에 둔 채 누워 있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 집에 오셔서 죽어가는 딸 위에 그분의 치유하시는 손을 얹으사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슬픈 소식을 가지고 왔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 5:35).
그러자 예수님께서 슬피 우는 아버지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사실 그 순간 아이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뿐이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9).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왜냐하면, (1) 그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음을 알고 있었고 (2)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잠’으로 상징한 위로가 넘치는 은유는 그리스도가 즐겨 사용하였다. 죽음은 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위대한 생명의 시여자만이 깨울 수 있는 잠이다. 그분만이 무덤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주석, 9권, 610쪽).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놀”랐다(막 5:42). 여태껏 그들에게 죽음은 최종적이며 절대적일 뿐만 아니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두 눈으로 이런 기적을 목격한 것은 정말로 놀랍고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묵상>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가장 필요한 두려운 순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답: 두렵거나 안전하거나 언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부가설명> 부활에 관한 진리를 말하는데 예수께서 살리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기록된 말씀을 믿고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다. 사도행전은 부활증거 행전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열심히 증거하였다. 베드로는 도르가를 죽은 상태에서 살게 하였고 바울은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은 유두고를 살렸다.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 아들과 야이로의 딸과 목요일에 공부할 나사로를 살리신 사실을 복음서에 기록하여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능력이심을 가르쳐줬고 제자들도 예수님 이름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행하도록 하신 것을 사도행전에 기록하였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가 부활하겠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라는 말씀으로 지금도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능력을 행하라는 기별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13).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세를 받은 자이다. 호흡이 끊어져 죽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아담 안에서 죽은 자(고전15:22)들을 살리는 권세는 행할 수 있다. 그것이 전도다.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전하는 것이다. 아멘.
 
<교훈>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신 후에 야이로의 딸을 깨우셨다.
 
10월 27일(목) 나사로
 
요한복음 11:1~44을 읽어 보라.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과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는가(요 11:4)?
[요11:4,40~4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답: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셨기에 영광을 받으셨고 영광을 드러내셨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의 잠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을 때(요 11:11~13),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했던 말의 의미를 분명히 확인해 주셨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2~14).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째였다. 그의 시체는 썩고 있었다(요 11:17, 39). 시체가 악취를 풍길 정도로 나사로의 죽음은 분명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녀는 최종적인 부활에 관한 그녀의 믿음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3~26).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 마르다는 믿었고 그녀의 오라버니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한다(창 1:20~30, 시 33:6). 나사로의 경우에서처럼 생명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재창조 될 수 있다. 짧게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목격했다. 그 능력은 세상을 존재케 했던 능력이었으며, 마지막 때 부활을 통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낼 바로 그 능력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자신에게 우리와 같은 유한한 존재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있겠는가?
 
<묵상>
요한복음 11:25, 26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앞 절에서 믿는 자들의 죽음에 대해, 다음 절에서는 믿는 자들 가운데 죽지 않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죽음이 무의식 속에서 자는 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이런 사람들을 살려내신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한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주셨으므로 우리는 부활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눈에는 한숨 잘 자는 것으로 보인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 죽은 자를 살린 사실이 엘리야의 사르밧 과부 아들 살린 것, 엘리사의 수넴 여자 아들 살린 것, 또 엘리사의 무덤에 죽은 자를 장사하였는데 그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살아난 사실(왕하13:21)이 있다. 이 외에 진짜 부활한 것은 모세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유다서와 누가복음에 기록된 사건들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생명의 하나님을 계시하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 계신다. 태초에 하나님은 영생하는 생명으로 주신 생령인 사람(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아담이 생명 언약을(호6:7, 요일2:25) 어겼기에 영생의 생명을 잃었고 생령이 육체가 되었다(창6:3, 시78:39). 아담의 씨로 세상에 출생한 아담의 모든 후손은 다 죽는 것이 정해진(히9:27) 육체의 생명으로 출생한다. 이런 사람을 성령은 죄인이라고 한다. 이런 사망에 매인 아담 후손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생명의 씨가 되어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분이 예수님이다(요1:1~4,14).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담의 사망을 폐하셨다(딤후1:10). 그리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드러내셨다(딤후1:10).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이 생명을 얻어서 다시 생령이 된다(롬8:9). 이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받은 육체의 생명 안에 예수님께 받은 영생의 생명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받은 육체의 생명은 한 번 죽게 되어 있으므로 죽음의 잠을 잔다(히9:27).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께 받은 영생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 생명을 부활하게 된다(골3:1~4). 영광이다. 아멘.
 
<교훈>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자신에게 죽음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10월 2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469~480, “모세의 죽음,” <선지자와 왕> 129~142, “단호한 견책의 음성,” 237~243, “평화의 선지자,” <시대의 소망> 318, 319, “백부장,” 342, 343, “믿음으로 만짐,” 524~536, “나사로야 나오라”를 읽어 보라.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요일 5:12)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곳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재림의 때를 내다보신다. 그때 죽은 의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겠고 살아 남은 의인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곧 행하시려는 이적은 모든 죽은 의인의 부활을 대표한 것이다. 그의 말씀과 행하신 일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의 창시자이심을 선언하셨다. 미구에 몸소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는 사망의 열쇠를 잡으시고 무덤의 정복자로 서셔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그의 권리와 능력을 주장하실 분이었다”(시대의 소망, 53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엘리야와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이어가시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극히 소수만 부활했다.(참조, 눅 4:24~27). 과거에 살아났었던 사람들이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죽음이라는 경험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것인가?
※ 죽을 때 상태는 서로 다를지라도 죽음이라는 사실을 동일하다. 그들은 다 한숨 잘 자고 일어날 것이다.
 
2. 수 세기 동안 많은 작가들은 죽음으로 끝맺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글을 썼다. 살아 있는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 죽는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고통은 동물들보다 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전 9:5). 다른 생명체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부활의 약속이 우리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 죽을 줄을 아는 것처럼 부활할 줄도 알기 때문에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의 소망으로 살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된다.
 
3. 만일 영혼은 죽지 않고, 특히 의인들은 사후에 하늘에서 계속해서 산다면, 최후의 부활이 왜 필요하겠는가?

※ 별로 필요없다. 굳이 벗어던진 육체를 입어야 할 불편을 겪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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