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완벽한 우주에서의 반역(질문, 대답, 설명) 1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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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09-24 18:17 조회5,444회 댓글0건본문
제1과 완벽한 우주에서의 반역
(10월 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6분)
연구 범위: 요일 4:8, 16, 요일 4:7~16, 겔 28:12~19, 사 14:12~15, 계 12
기억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많은 사상가들은 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이들은 악이 존재할 때만 선이 그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에 악은 항상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이들은 이 세상이 완벽하게 창조되었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악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는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가 단단히 잠겨져 있는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담겨있던 세상의 모든 악이 날아가 버리게 되어 악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한다(그러나 이 신화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악의 기원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우리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대상 29:10, 11) 완전하시다고 말한다(마 5:48).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을 포함하여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도 분명 완벽할 것이다(신 32:4). 그렇다면 악과 죄가 어떻게 완벽한 세상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이 세상에 죄와 악, 그리고 죽음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대답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하와를 속인 뱀에 의해 나타난 악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창 3:1~5)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을 너무 자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악의 근원과 기원을 찾아내기 위해 타락 이전으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완벽했던 세상에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깨닫는다.
- 느끼기
자유 의지가 오용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참된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깊이 묵상해 본다.
- 행하기
지금도 내 삶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악의 대쟁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TMI 위로
2.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줍니까?(요일 4:8, 16)
※ 사랑의 나타남이며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3. 참된 사랑을 계발하는 데 있어 자유 의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요일 4:7~16)
※ 언제나 사랑이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4.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죄의 기원은 무엇입니까?(겔 28:12~19)
※ 덮는 그룹이었던 지혜가 충족한 천사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이 욕심(탐심)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5. 루시퍼가 품은 자만심은 온 우주와 이 세상에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사 14:12~15)
※ 사망과 죄의 세상이 되게했다.
6. 하늘에서 시작된 반역의 정신은 어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까?(계 12)
※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영향을 미쳤다.
결론
우리가 죄의 기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참된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잘못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셨고 루시퍼는 그 자유를 오용하여 이 세상에 죄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선악의 대쟁투는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날마다 옳은 선택을 해야합니다.
9월 25일(일) 창조, 사랑의 표현
오늘날 우리는 천연계 속에서 선과 악의 모습을 동시에 발견한다. 장미 덤불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를 꽃 피우기도 하고 아픈 가시를 내기도 한다. 큰부리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다른 새들의 둥지를 공격하여 새끼들을 잡아먹기도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친절을 베풀던 사람이 순식간에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이 주인에게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27)라고 질문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고(마 13:28) 대답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지만, 원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힘든 죄의 씨앗으로 그 세상을 더럽혀 버렸다.
요한일서 4:8, 16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요일4:8,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답: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 16)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세 가지 기본적인 교훈을 가르쳐 준다. 첫째, 사랑은 본질적으로 감추어질 수 없으며, 표현되어야 한다.(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내적으로 공유되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과 나누는 관계 속에 외적으로 표현된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무조건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여기에는 그분의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 심지어 그분의 심판까지 포함된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시대의 소망, 762). 셋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결코 죄의 창시자가 될 수 없으시다. 그것은 그분의 품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 세상을 창조하셔야만 했는가? 그분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의 자유 의지를 통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랑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한 곳으로서 이 세상을 원하셨다. 그분의 사랑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가!(참조, 막 12:30, 31)
<묵상>
사랑이 동기가 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나누며 살아야 할까요?
답: 전도로 이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부가설명> 사랑은 혼자 있으면 나타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대상이 있을 때 사랑이 나타나고 사랑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적인 홀로 존재하시지 않으신다. 삼위가 계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둘 뿐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셋이서 기울어짐이 없는 완전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셋이 서로간에 100% 완전한 사랑이 실현될 때 비로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삼위일명(三位一名)으로(마28:19) 존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생산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삼위일명 여호와의 사랑이 창조로 생산하는 사랑의 특성을 드러내었다. 창조한 모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이 사랑이 나타나는 창조를 하실 때 계획하고 창조하셨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 이 말씀에서 ‘수효대로’라는 표현은 창조주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얼마나 창조하실는지 계획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신다(시115:3).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으로 ‘굳이 지구를 창조하셔야 했나’ 하고 의문문을 붙이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의 계획은 사랑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당신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은 빠짐없이 다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루시퍼도 그래서 창조하셨다. 그가 반역할 것을 알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시지 않았다.
<교훈>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온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지만, 원수는 이해하기 힘든 죄의 씨앗을 통해 그 세상을 더럽혀 버렸다.
9월 26일(월) 자유 의지, 사랑의 기초
요한일서 4:7~16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사랑을 계발하는데 있어 자유 의지가 어떤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요일4:7~16]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답: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
조화(造花) 역시 아름다울 수 있지만, 생화(生花)처럼 자라거나 꽃을 피우지는 않는다. 로봇은 말을 한다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생명이나 감정은 없다. 생명과 자유 의지는 사랑을 받고 계발하며 나누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사(루시퍼를 포함해서)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잘못된 길을 따를 가능성을 포함하여 그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당신의 피조물들이 사랑과 지혜 가운데 자랄 수 있는 완벽하고 조화로운 환경으로 창조하셨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7~16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분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해 죽도록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와 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는 호소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에게 요구될 때만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선택의 자유는 하늘에서 일어난 루시퍼의 반역에서 나타나듯이 쉽게 오용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 의지에 대해 이해하게 된 후에도 여전히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만일 루시퍼가 반역할 것을 아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를 창조하셨는가?’ 죄의 시작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루시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지 않은가?
이 질문은 “책임”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포함해 여러 요소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죄의 기원과 본질은 누구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죄를 존재하게 하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분께서는 그저 죄의 존재를 허용하셨을 뿐이며, 십자가에서 그 죄가 가져온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죄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악에 대한 가슴 아픈 묵상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와 악의 존재에 대한 가장 값비싼 값을 지불하셨으며(참조, 마 5:43~48, 롬 5:6~11),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묵상>
죄의 기원과 본질을 우리의 유한한 지식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기원에 대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 죄에 대한 책임이 창조주께는 절대로 없다는 사실이다.
<부가설명> 만일 자유의지, 자유 선택이라는 표현에서 완전한 자유의지 자유선택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한 자유의지 자유 선택은 오직 창조주 여호와께만 있다고 나는 믿는다. 창조주께서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주의 자유의지와 자유 선택으로 창조하셨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선택해 주신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와 생명은 피조물이 선택할 수 없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도 인류의 선택이 아니다. 창조주의 선택이다. 아담의 존재도 창조주의 선택이지 아담의 선택이 아니다. 그런데 아담은 창조주께서 선택해준 존재와 생명을 거절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물론 루시퍼의 유혹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결과는 그렇다. 그런데 아담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한 그의 모든 후손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다 사망으로 출생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사망을 자기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않았다. 자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께서는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셔서 다시 한번 아담의 후손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셨다. 이 선택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믿지 않는 것이다. 구원도 선택은 하나님이 하셨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자유의지, 자유 선택을 강조하면 구원이 마치 인간의 선택에 있는 것으로 알게 될 것이다. 사탄은 자유의지 자유 선택이라는 말로 창조주께서 베푸신 사랑을 인간 영역에 두도록 묘한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이 선택에 긍정적 반응을 하며 감사함으로 생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자기의 자유의지와 자유 선택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훈>
모든 피조물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기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9월 27일(화) 이해할 수 없는 선택
에스겔 28:12~19을 읽어보라. 이 구절을 통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죄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겔28:12~19]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답: 두로 왕으로 표상되 루시퍼의 반역의 시초를 알 수 있다.
에스겔서의 많은 부분은 마지막 때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개체들(사람이나 동물들 그리고 사물들)과 지역적인 사건들이 우주적 그리고 역사적 실체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에스겔 28:1~10에서 하나님께서는 두로 왕(두로는 고대 페니키아의 부유한 항구 도시였음)에 대하여 일개 “사람”에 불과하지만,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며 신들의 자리에까지 앉은 부유하고 거만한 통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 에스겔 28:12~19에서 이 역사적 실체는 하늘 궁정의 타락한 루시퍼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다 가운데”(겔 28:2, 8) 사는 인간이었던 두로 왕은, 이제 “하나님의 동산 에덴”(겔 28:13)과 “하나님의 성산”(겔 28:14)에 살며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겔 28:14)을 나타낸다.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에스겔 28:15에 등장한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즉, 루시퍼의 완전함에는 악의 가능성, 곧 옳지 않은 일을 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시퍼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 사실이야말로 루시퍼가 도덕적인 존재로서 완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루시퍼는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선택의 자유도 주어졌다. 그러나 루시퍼는 바로 그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자신에게 허락된 완전함을 망가트렸고, 실제보다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여김으로 타락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창조하셨고 존중해 주셨는지에 대해 더 이상 만족하지 않게 된 루시퍼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잃고 자신에게 합당한 것 이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완벽한 세상에 살던 완벽한 천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죄는 신비로운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는 죄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죄가 완벽했던 세상에 등장했다.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엘렌 G. 화잇, The Truth About Angels, 30).
<묵상>
인간의 지혜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죄의 시작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죄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답: 창조주의 마음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도록 참담하셨을 것이다.
<부가설명> 루시퍼의 반역에 관하여 일반 개신 교회에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장로교회에 열심있는 신자였으나 루시퍼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 재림교회로 옮긴 후에 비로소 ‘루스벨’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가 사탄이며 반역한 천사라는 것을 배웠다. 초기 선겨사들이 루시퍼를 루스벨이라고 가르친 것 같다. 아무튼, 루시퍼, 히브리어로는 ‘헬렐’의 반역은 이사야 14:12~14과 에스겔 28:12~19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었고 성경 여러 곳에 단편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계시록 12장에서는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킨 용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였다. 루시퍼가 왜 그런 반역을 일으켰는지 그 원인을 성경은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았다. 에스겔에 기록한 대로 지혜가 충족하고 모든 길에 완전했는데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으며 그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계시하였다. 예레미야에는 여호와 회의가 있다는 것을 계시하였다(렘23:18). 이사야는 루시퍼가 집회의 산에 자기 보좌를 두고 지극히 높으신 분과 동등하겠다고 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집회의 산은 여호와 회의 장소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루시퍼가 그곳에 자기 보좌를 두겠다는 것은 자기도 여호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루시퍼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이 자기가 보기에 말씀 하나님과 똑같다고 여긴 것 같다. 그래서 최소한 그분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 있다. 이 루시퍼 마귀가 시험의 광야에서 40일 굶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에게 절하라고 요구했을 때 하늘에서 반역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온 우주에 드러내었다. 루시퍼는 그 지혜가 충족한 자였기에 이런 생각이 생긴 것 같고 그것을 행동에 옮겨서 마침내 하늘에서 쫓겨났으며 이 세상 사망의 권세를 잡은 죄와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참으로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은 조심해야 할 상태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온 우주에 아름다운 것 외에 다른 아름다움은 다 굴복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모든 것이 완벽했던 세상에서 어떻게 루시퍼의 마음에 죄의 씨앗이 심겨졌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9월 28일(수) 자만심의 대가(代價)
우리는 성경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두드러진 주제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살렘, 시온 산, 예루살렘, 그리고 새 예루살렘 같은 단어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고, 그에 대비되는 다른 하나는 바벨, 바벨론으로 부르는 사탄의 영역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바벨론에서 그들을 불러내셨다.
예를 들어, 아브람(훗날 아브라함으로 개명됨)은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다(창 11:31~12:9). 유대인들은 오랜 포로 생활 끝에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스 2장).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침내 시온 산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 마지막 때의 바벨론으로부터 불러냄을 받는다(계 14:1, 21:1~3, 10).
이사야 14:12~15을 읽어보라. 루시퍼가 하늘에 있을 때 품었던 자만심이 온 우주와 이 세상에 어떤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가?
[사14:12~15]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답: 루시퍼가 스올(음부) 맨 밑에 떨어지게 되었고 우주를 교란하는 반역의 존재가 되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세력을 나타낸다. 그리고 바벨론의 왕은 자만과 교만의 상징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바벨론은 연속적인 제국의 등장을 나타내는 큰 신상에서 금으로 된 머리일 뿐임을 보여주셨다(단 2:37, 38). 하지만 왕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여 자신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상징으로서 신상 전체를 금으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상에 절하게 했다(단 3장). 두로 왕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겔 28:12~19), 바벨론의 왕 또한 루시퍼의 상징이 되었다.
이사야 14:3~11은 바벨론의 거만하고 강압적인 왕의 몰락을 묘사한다. 이어서 이사야 14:12~15은 역사의 한 지점에서 하늘 궁정으로 장소를 옮겨 이와 비슷한 자만심과 교만심이 루시퍼의 타락을 불러온 이유였음을 강조한다.
성경 본문은 루시퍼가 자신의 보좌를 하늘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 보다 높은 곳에 두어 자신을 “지극히 높은 자”(사 14:14)와 같이 만들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타적인 사랑과 협력이 루시퍼의 이기심과 경쟁심에 의해 도전받는 새롭고 적대적인 상황의 시작이었다. 원수는 자기를 높여 하나님께 도전하고 다른 천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악이 존재하게 된 기원이다.
<묵상>
우리의 지위나 업적을 가지고 자만하거나 자랑하기가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항상 우리 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이와 같은 실수를 피하는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지위나 업적이 뛰어날 때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정신이 된다. 제칠일 안식일을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부가설명> 어떤 사람이 말했다. 사람에게 권력을 줘보라. 그러면 그의 사람됨을 확인할 수 있다고. 루시퍼가 덮는 그룹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 있는 피조물이었다. 보좌에는 삼위가 삼각상태로 좌정하고 계신다. 아버지가 계시고 우편에 성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보좌 앞에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다(계4:5). 그런데 루시퍼는 그들 위에 자기 보좌를 높이겠다는 야망을 드러내었다. 그럴 때 그는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가 아름답고 영화로와서 자신의 모습과 권력이 말씀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착각하였다. 그래서 최소한 말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말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루시퍼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기억하여 창조주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경배해야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베푸신 장치가 제칠일안식일이다. 이 날을 기억하지 않고 그 뜻을 바르게 알고 지키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루시퍼의 사상에 빠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장치이다. 이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니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된다고 에스겔 20:20에 계시하였다.
<교훈>
성경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오르고자 했던 루시퍼의 자만심과 교만이 그를 죄의 길로 이끈 근본 원인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9월 29일(목) 불신의 확산
요한계시록 12장을 읽어보라. 하늘에서부터 이 땅에까지 퍼진 반역에 관해 이 본문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답: 계시록 12장을 각자가 읽어보자. 큰 용 사탄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다가 땅으로 쫓겨와서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괴롭히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루시퍼의 타락은 단순히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한 사건이 아니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하늘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쪽에는 루시퍼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천사들이 있었다. 이 본문에서 루시퍼는 “큰 용,” “옛 뱀,” “마귀...사탄,”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불린다(계12:9, 10). 그리스도는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뜻을 가진 “미가엘”(계 12:7)이라고 불린다.
어떤 주석가들은 “천사장 미가엘”(유 9)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그가 그저 천사들 중 하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깎이지 않는 돌(단 2:34, 45), 인자(단 7:13), 군대의 주재와 왕의 왕(단 8:11, 25) 그리고 대군 미가엘(단 12:1)과 같이 다니엘서의 모든 주요 환상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 자신인 것처럼(출 3:1~6, 행 7:30~33), 미가엘은 거룩하신 분 자신임이(그리스도 자신) 분명하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쟁투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그 쟁투는 (1) 루시퍼와 그를 따르는 천사 3분의 1의 반역으로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결정적인 승리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3) 하나님의 마지막 때 남은 자손을 대상으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쟁투의 시작에 관해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설명한다. “자비심이 많은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처음에 불만의 정신에 빠졌을 때, 심지어 그가 충성된 천사들 앞에서 거짓 주장을 하였을 때까지도 그를 그 높은 지위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오랫동안 하늘에 머물러 있게 하셨다. 회개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되풀이해서 말해 주셨다”(각 시대의 대쟁투, 495, 496).
우리는 그 전쟁이 하늘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격렬하게 지속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탄과 그를 따르는 천사들이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는(계 12:8, 참조, 눅 10:18)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이곳, 지구로 왔다는 것이었다.
<묵상>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이 지금도 지구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전쟁에서 우리가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답: 아직도 진리 교회가 핍박을 받으며 왜곡된 진리가 판을 치고 있고, 처처에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을 받는 것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싸움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부가설명> 내가 장로교인일 때는 미가엘이 천사장으로만 알았다. 그가 예수님이라는 것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생각도 못했다. 지금도 카톨릭과 개신교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심지어 재림교회가 미가엘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이단의 표라고 가르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성경에 대답이 있다. 우리는 성경이 대답하는 것을 찾아서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먼저 계12:1~9의 등장 인물을 살피는 것이다. 거기에는 해를 입은 여자. 붉은 용, 여자가 낳은 아들을 용이 핍박하지만 그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미가엘과 용이 싸운다. 마침내 용 옛뱀 사탄 마귀가 쫓겨난다.
이 구조는 창세기 3장 15의 구조와 같다. 거기도 뱀, 여자, 여자의 후손이 있다. 뱀과 여자의 후손이 싸운다. 여자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서 승리한다. 이 구절의 여자와 계12장의 여자는 동격이다. 창3:15의 여자의 씨(후손)은 계시록 여자가 낳은 아들과 동일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은 하늘에 올라가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이다. 다음 장면이 미가엘과 용의 싸움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여자의 씨와 뱀의 싸움과 같은 사건이다. 그러면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인 것을 부인할 교회는 없다. 그러면 당연히 계시록에 용과 싸우시는 미가엘이 예수님인 것이 확실하다는 증명이 된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으로 미가엘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할 수 있고, 그분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이시며(시24:7~10). 사탄의 머리를 깨부수시는 여자의 씨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성경에 천사장이라고 지칭한 천사는 미가엘뿐이다. 일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곱 천사장이라는 것은 교회가 만든 전설일 뿐이다. 그분은 모든 천사를 총괄하고 지휘하시는 사령관이시다. 그래서 천사장이라고 하였다.
<교훈>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은 이 지구로 내려왔고, 그렇게 시작된 이 땅에서의 선악의 대쟁투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계속되고 있다.
9월 3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3~43, “죄가 용납된 이유”, <각 시대의 대쟁투> 492~504, “죄악의 시작”을 읽어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목격하고 경험했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직접 보고도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사탄과 그를 따른 천사들)에게는 그 어떤 구원의 소망도 허락될 수 없었다. 그들이 이미 경험했던 하나님의 능력 이상으로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새롭고 놀라운 증거들이 없었다. 만일 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서 반역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허락될 수 없었다. 그들의 불평과 질투, 의심과 반역을 압도할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이 허락될 수 없었다. 그들의 죄와 형벌은 그들이 하늘 궁정에서 누렸던 특별한 특권에 비례해야 했다”(엘렌 G. 화잇, Confrontation, 21).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단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를 통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시고 그 두려운 비상 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를 언약하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3:16)었다”(시대의 소망, 2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와 십자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십자가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가 가진 죄의 시작에 대한 이해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적인 죄와 악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주신 존재와 생명을 버려서 사망이 된 것이다. 십자가는 이 사망을 처리한 사건이다. 죄의 시작이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창조주를 배반하면 피조물은 그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창조주의 창조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를 모독하는 것이다. 결과는 존재와 생명을 창조주께 반납하고 존재와 생명을 상실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을 위하여 이 일을 담당하셨다.
2.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3~48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모본을 가정과 교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가?
※ 예수님 안에서 자아를 부인할 때 나타난다.
3.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벧전 5:8) 있다고 경고한다. 에베소서 6:10~20을 읽어보라.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간계”(엡 6:11)를 능히 대적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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